(1) 난후문고수록지(亂後文稿收錄誌)
昔歐陽子言人有三不朽曰修之身也曰施之事也曰見之於言也盖修於身爲道德施於事爲功業見於言爲文章則三者之中文章特其末也然非有文章則何以知其有是德有是業可傳於後而爲不朽也耶是集中前後作者無非有德有業之人而其著於文者又若是其炳炳國朝人才之盛莫於是爲最於今可見我太祖太宗培養作成之至而英文二廟得人之多也惟我七代祖直提學諱德之仕太宗世宗朝嘗以南原府使歸臥靈巖之別墅文廟初年徵拜藝文未二歲又告老而退終身不起其於玆三者之目固非如藐孤之所可贊揚而當時先輩推重若是則其修於身其施於事其見於言者豈虛也哉惜乎家藏元本皆其一時親筆集字片畵尤非後世之所可幾及而壬辰之亂墜失無餘南歸舊業其得於鄕中子孫所錄者百纔一二頗有訛誤顚錯無復見昔日之眞蹟也丁酉之急事出蒼黃又不免以是集稿與提學公眞像埋置於羅州細花里墓山矣寇退踰年而始發之則幸其完存信乎其不朽矣不肖無狀旣不能保有先世業之緖餘其得於他述作而見於言者庶幾以時撰次作爲一家之書以壽於榟而猶是不振寢以衰朽又安知來者之不如今也是用大懼手書一本藏之枕篋以竢吾宗黨之或成吾志噫吾世遠矣吾門衰矣吾其已矣而無望也荀吾之群從弟侄若吾之若子若孫母失此本刻之於板以圖永久而不朽則前母墜也後無廢也豈非我家國之幸也
歟時天啓元年辛酉六月望日
後孫珽敬誌
옛날에 구양수(1)가 말하기를(2) “옛날 성현의 이름이 영원히 잊혀 지지 않고 불후하게 전해지고 있는 까닭은, 몸을 수양하여 덕을 쌓고, 중요한 일에 종사하여 업적을 쌓고, 그러한 업적을 말로 표현하여 글로 적어 남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몸을 수양하면 도와 덕이 일어나고, 중요한 일에 종사하면 업적이 싸이고, 그러한 사실을 기록으로 표현한 것이 문장으로 남게 된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문장을 맨 마지막으로 거론하고 있지만 만약에 문장으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어찌 덕망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또 업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서 후세에 전해 질 수 있겠으며, 후세 사람들이 성현으로서 영원히 기억하는 불후한 이름으로 남을 수 있겠는가?
만약 당시의 글을 모아 문집으로 만들어 보존하여 전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도와 덕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거나, 실제는 아무런 업적도 없는 사람인데도 후세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지어내어 화려하게 꾸며서 기록한 것과 실제로 그러한 업적을 이룬 사람을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를 빛낸 인재가 그 어느 때에 비길 수 없을 정도로 왕성했던 시기를 돌이켜보면, 우리 태조와 태종께서 인재를 많이 길러내었기 때문에 세종과 문종 때 인재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의 7대조 직제학 휘 덕지는 태종, 세종 때 벼슬에 나가셔서 남원 부사가 되신 다음 영암에 있는 별서로 낙향하여 사시다가, 문종 초년에 다시 예문관 벼슬에 나가셨지만, 두 해를 채우지 못하시고 또다시 나이가 많다고 알리고 물러나 종신토록 벼슬에 나가지 않으셨다.
앞서 말한 세 가지 항목에 관하여 내가 나서서 아득한 옛날 일을 가지고 조상을 찬양하고 어쩌고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당시 선배들이 그와 같이 높게 평가한 것을 보면 공께서 몸을 수양하여 덕망을 갖추신 일이나, 중요한 일에 종사하여 업적을 남기신 일이나, 그 일에 관하여 문장으로 기록되어 전해오는 것들이 어찌 모두 거짓일수 있겠는가?
안타까운 일이로다! 가문에 전해오던 원본은 모두 당시에 친필로 적고 그린 것으로 글자 한 자, 그림 한 폭도 매우 뛰어나 후세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것들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잃어버려 남은 것이 없게 되어버렸는데, 영암에 있는 옛집에 남아 있는 일부와 시골에서 살고 있는 자손 중에 일부 보관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것을 모두 다 합쳐도 100분의 1~2 정도에 불과하고, 그것조차도 잘못 전해지고 내용이 바뀌어서 옛날의 참된 흔적을 복원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정유재란의 급변을 맞이하여 창황 중에 또다시 피해를 입었으나 그 때까지 모은 문헌과 연촌공 초상화는 나주 세화리 묘산에 묻어 두었다가 일본군이 물러간 뒤 몇 년 후에 다시 파내어 보니 다행히도 완전하게 보존되어 훼손되지 않고 불후하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불초한 후손들이 아무런 공적도 없어서 온전하게 보존하지 못한 조상님이 유산의 나머지를 긁어모으고, 다른 사람들의 글에서 관련이 있는 문헌이 발견되면 그 때를 확인하고 가려 뽑아 순서를 매겨 편집하여 우리 가문의 책으로 만들기 위하여, 죽어서 관 속에 들어갈 때까지 최선을 다해 보았으나 오히려 성과는 부진하였고, 결국 늙고 병들어 자리에 눕고 말았지만, 또 다시 이일을 해야만 하는 지래자(3)에게 있어서는 적어도 지금과 같은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두려움을 간직한 채 붓으로 적어서 만든 책 한 권을 머리맡에 있는 문갑 속에 넣어두고 우리 종중에서 나의 뜻을 이어서 이 일을 이루어 낼만 한 사람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노라!
아! 우리의 세대는 이미 멀어져가고 있으며 또한 우리 문중도 점차 쇠약해져 가고 있고, 나도 이미 늙어서 힘이 다하여 더 이상은 희망이 없다.
우리 집안의 여러 조카들과 아우들, 그리고 자손들이 이 책을 목판에 새겨서 인쇄 출판하여 영구히 불후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면(4) 원본의 내용이 상하지도 않을 것이며 없어지는 일도 없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우리 집안만의 중요한 일이겠는가?
국가에 있어서도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1621년(광해 13) 6월 보름날
후손 정(5)이 공경하여 적음.
* 각주 --------------------------------
(1) 구양수(歐陽修, 1007~1072) : 자 영숙(永叔), 호 취옹(醉翁), 시호 문공(文公). 송나라(宋) 문장가.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
(2) 구양수의 <송서무당남귀서(送徐無黨南歸序)>를 인용한 것이다.
(3) 지래자(知來者) : 과거의 일을 가르쳐 주면 미래에 다가 올 일을 아는 사람.
(4) 문헌을 인쇄하여 부수를 많이 늘여 놓으면 전쟁이나 천재지변을 당한다하더라도 그 내용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전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5) 정(珽, 1568~?) : 기정공(棄井公). 중랑장공파, 영암종회, 의령공(지성)파 12세. 생원공(生員公) 휘 응봉(應鳳)의 아들(몽응공 휘 응룡(應龍)의 조카)로 정유재란 때 불타고 흩어져버린 문헌을 모으고 정리하여 <참의공유사>와 <연촌유사>를 만들었고 영암읍에 존양사(녹동서원의 전신)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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