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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章 禪선
간화선과 법맥 문제
우리는 앞에서 생명 존재의 실상을 한꺼번에 드러내려고 하는 화두의 총체성과, 불가사의한 힘으로 직관의 깨달음을 얻게 하는 화두의 효능을 살펴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는 이런 물음이 떠오른다. 간화선看話禪은 중국 선종의 일파에서 주창한다. 조동종에서는 직접적으로 화두를 이용해서 참선하지 않는다. 물론 간화선 이전의 명상 방법에는 화두가 없었다. 그렇다면 화두를 들지 않는 묵조선이나, 간화선 이전의 모든 선사들의 화두가 없던 참선은 모두 헛 것이란 말인가. 간화선 이전의 명상 수행법을 부정하면, 선에서 중시하는 법맥을 설명하기가 곤란해진다. 후대의 간화선이 깨달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면, 간화선이 생겨나기 이전의 수행으로는 궁극의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 아니냐는 말이 되고, 마침내는 과거 조사들의 깨달음을 의심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간화선 입장에서 부처님이나 가섭 존자가 화두를 들고 공부했느냐고 따지거나 깨달음의 경지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선종은 화두를 중요시하면서도 아울러 간화선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면상 수행한 부처님과 조사들의 혜명慧命이 대대로 계승되어 왔다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달마대사가 참선법을 가지고 인도로부터 중국으로 온 것을 대단히 큰 일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헤 볼 수 있다. 하나는 간화선에서 다른 참선법과의 공통점을 찾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다른 참선법에서 간화선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방향은 하나로 만나게 된다. 공통점을 찾게되면 자연히 왜 화두가 필요한가 하는 것과, 모든 관법에 공통적인 것이 화두에도 담겨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간화선과 다른 참선법의 공통점을 생각해 보자. 이를 다루기 위해서는 화두가 꼭 의문형으로 취급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대부분의 화두는 과거 조사 스님들이 우주 존재의 실상을 여실히 드러내기 위해서 문답형 또는 어떤 해프닝형으로 설한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라는 의문형으로 취급할 뿐이다. 가르침이 제대로 파악된다면 화두가 반드시 의문형이 될 필요는 없다. 그대로 존재의 실상을 전하는 무한의 상징적 또는 포괄적 가르침일 뿐이다. 구태여 의문형을 찾기로 한다면, 간화선 이외의 참선법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먼저 위빠사나 身受心法신수심법의 관법을 보자. 몸, 느낌, 마음, 마음의 대상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관찰하는 명상법이다. 여실지견如實之見이 얻어지기 이전까지는 끊임없이 저 네 가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관찰해야 한다. 조동종의 묵조선默照禪도 표면적으로는 화두가 없지만 내용적으로는 "현성공안現成公案"이라는 명칭의 화두가 있다. "현상 세계에 있는 모든 사물 그대로가 불가사의불가사의한 공안 또는 화두"라고 할 때, "불가사의"라는 말 자체가 의문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간화선에 있어서도, 넓은 의미로 보면 화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만사가 그대로 의문 거리가 된다. 의문성은 접어 두고 총체성이라는 측면에서 화두와 다른 관법과의 공통점을 보자. 우리는 앞에서 이미 이 문제를 다룬 바가 있다. 위빠사나 관법이 천태종의 지관법을 거쳐 선종의 화두로 이른 데는, 우주 전체의 실상을 한꺼번에 통찰코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말이다. 화두에서의 간단한 한마디로 우주 전체의 실상을 표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화선이 다른 관법과 같단 말인가. 아니다. 분명히 다르다. 또 간화선의 효능은 아주 좋다. 단지 다른 종류의 참선법의 효능도 인정되어야만, 별도로 화두라는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공부했던 부처님과 조사들의 깨달음도 높이 받아 들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할 뿐이다.
2017년 10월 9일 慧命 합장
[지명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불교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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