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부산 맛 기행을 가다.
이흥근
아침 4시 40분에 집에서 출발하여 5시 30분에 강서구에서 초등학교 친구 부부 12명을 만나서 울산으로 떠났다. 설 명절 직후인데도 이른 아침이라 차량 흐름이 원활하다.
울산 ‘반구대 계곡의 암각화는 거북 모양의 절벽인 반구대를 중심으로 대곡리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 그리고 두 암각화를 아우르는 약 3㎞ 구간의 계곡 일대를 말한다. 수 천 년 동안 인간의 생활상과 관념을 창의적으로 반영한 탁월한 유산으로 인정받아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2021년에는 세계 유산 우선 등제 목록에 이름을 선정되었으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도약하고 있다.
대곡리 암각화는 너비 약 8미터, 높이 약 4미터 규모의 중심 암면과 10여 곳의 주변 암년에 약 300여 점의 다양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림이 새겨진 판판한 암면의 위쪽은 2~4.5미터 정도 처마처럼 튀어나와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암각화를 보호하고 있다. 이곳에는 거북. 고래와 같은 바다 동물과 호랑이 사슴과 같은 육지 동물 등 약 20 여종의 동물들이 새겨져 있다. 또한 사람들이 배를 타고 고래를 잡거나 활을 이용해 동물을 사냥하는 모습 등 선사 시대의 생활 모습을 담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약 7,000년 전인 신석기시대부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천전리 암각화는 너비 약 9.5㎞, 높이 약 2.7미터 규모의 중심 암면과 3곳의 주변 암면에 선사시대 암각화와 신라시대 세선화, 명문 등에 새겨져 있다.
중심 암면의 위쪽은 약 17도 가량 앞으로 기울어져 있다. 비바람으로부터 암각화를보호하는 구조를 이룬다. 중심 암면의 상단에는 돌을 이용해 새긴 선사 시대의 그림들이 빼곡이 새겨져 있는데, 왼쪽에는 사슴, 물고기 등의 동물 문양이 있고 가운데에는 동심원, 나선형, 마름모 등 기하학적인 그림들이 있다. 암면의 아래쪽에는 날카로운 금속도구로 새긴 행렬 모습과 돛을 단 배, 말과 용 등 세산화가 세겨져 있는데 명문과 함께 신라 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울산 인근 지역의 구석기 유적은 대부분 후기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밀양 고레리 유적, 해운대 좌동 유적등이 있다. 울산에는 신화리, 입압리, 무거동, 옥현유적 3곳이 확인되었다.
석기 제작 과정에서 생산된 몸돌과 격지 조각이 유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유적을 통해 약 4만 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울산 지역에서는 인류가 사냥과 채집활동을 하며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 빚살무뉘토기 문화는 해안가에 대부분의 유적이 분포하고, 어로구나 수렵구와 같은 생업 도구가 많이 발견되어 바다를 터전으로 생업 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울산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동해안과 남해안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유적이 동남 해안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한 이유도 연중 안정된 식량을 획득할 수 있 는 유리한 생태환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울산 사연리, 세죽, 황성 등, 우봉리 유적 등이 있다.
청동기시대로 울산은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기 좋은 곳으로 생업에 접합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신암리 한 곳이었다. 청동기시대 후기에는 집자리 유적이 많이 발견되는데 ‘울산식 집자리’라고 불리는 특이한 형태의 집자리가 있다. 이는 평면이 정사갹형 또는 직사갹형이며 4개 또는 8개 정도의 구멍이 대칭적으로 배열되어 있고 배수구가 길게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랜만에 다양한 유물들을 보니 학생 시절이 생각났다. 만원경으로 보며 조상들의 지혜를 생각해본다.
반구대 계곡의 암각화는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소중한 우리 유산이다. 바위 그림은 안료를 이용해 그린 암채화이며 도구를 이용해 새긴 암각화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다. 바위나 동굴 벽에 표현된 그림이라 생각하면 된다.
달 토끼를 쫓아가는 거북들은 대곡리 암각화의 세 마리 거북을 의미한다. 홀로 열심히 달리기도 하며 어떤 때는 여유롭게 쉬어가기도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옛날 명사수로 유명한 영웅 에는 하늘로부터 불사의 약을 받아 왔는데, 아내인 항아가 이를 훔쳐 먹고 달로 달아났다고 한다. 달 토끼가 찧는 것이 불사의 약이라는 전설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달 속의 토끼는 고구려 고분 벽화와 고려시대의 거울, 조선의 민화에도 계속해서 그려졌다.
조선 말기 유명화인 석지 채용신 1850~19410 이 그린<화조 용모도>이다.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 아래에 한 쌍의 토끼를 그려 넣었는데, 이는 부부간에 화목하고 많은 자녀를 낳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조선 말 유행한 판소리<수궁가> 에는 토기를 용궁으로 데려가려는 별주부의 모습이 나온다. 험한 대하를 건너는 거북과 토끼는 번뇌를 끊고 깨달음의 세계로 향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유로 통도사. 남장사 등 사찰의 벽화로도 그려졌었다.
올해가 토기 해라 더욱 관심이 가고 정이간다.
해동용궁사
이흥근
해동용궁사는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과 함께 한국 3대 관음성지의 하나다. 고려 우왕 때 나옹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나옹선사는 이곳을 보고 “뒤는 산이요 앞은 푸른 바다이니 아침에 불공을 드리면 저녁에 복을 받는 신령스러운 곳”이라고 하며 토굴을 지어 수행정진 했다고 한다,
현재의 해동용궁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 되었던 것을 1930년대에 보문사라는 이름으로 중창하였고, 1920년 초에 해동용궁사로 개칭하며 관음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해수관 대불은 해수는 바닷물이라는 뜻이요 관음이란 관세음보살님의 약칭으로 바다에 계시는 아주 큰 관세음보살님이란 뜻이다. 친구 부부는 막내동생이 농협조합장에 출마하여 초를 사서 친구 아내와 같이 당선을 빌었다. 나도 아내와 같이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빌었다.
해동용궁사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나타나는 시랑대 이곳은 미랑 스님과 동해 용궁의 용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는 전설이 있어 원양대로 불리다가, 영조 때 이조 참의였던 권적(1675~17550 )이 기장군 현감으로 좌천되자 시랑대라 이름을 바꾸었다. 시랑대는 바위 가운데가 넓고 평평한 형태로 되어있다. 뒤쪽으로는 기암괴석이 첩첩이 둘러싸고 있다. 파도가 들이칠 때마다 바위와 맞닿아 부서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 아름답다, 바다 근처에 2개 돌기둥은 기우제 및 풍어제를 지내던 흔적으로, 가뭄이 들었을 때 용왕에게 기우제를 지내던 장소라 전해진다.
그림 같은 해안 절경 오시리아 해안산책로는 오시리아 관광단지 일대에 자리한 산책길로써, 부산 갈맷길 구간을 경유해 기장 앞바다의 아름다운 정취를 만날 수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해안 절경과 함께 사계절 다양한 꽃과 갈대숲, 소나무 군락지들이 나타나 걷는 이들에게 바닷길의 묘미를 전한다,
오시라이는 오랑대와 시랑대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으로 ‘부산으로 오시라’는 뜻을 담아 최근 부산의 인기있는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기암절벽과 파도가 절경을 이룬 오랑대는<삼국유사>의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가 깃든 곳이자, 기장으로 유배온 친구를 만나러 온 다섯 명의 선비들이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즐겼다는 설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장소다. 해안길을 따라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의 풍광 그 안에 자리한 기기묘묘한 바위들의 조화가 한 폭의 그림 같아 이곳을 걷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탄성을 울리며 걷고 있다. 봄에는 유채꽃이 만발해 사진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포스 스팟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용왕단은 지역주민들이 바다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곳이자 특이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이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아내와 같이 친구 부부와 올해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며 대웅전에서 삼배 절을 하며 빌었다. 바다보이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니 얼었던 몸이 녹고 내장이 뜨거워 진다. 지난일을 이야기 하며 환담을 나누었다.
돌에 새겨진 법구경 글귀가 울림으로 다가온다. ‘내가 이 세상에 올 때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죽어서는 어느 곳으로 가는고! 재산도 벼슬도 모두 놓아두고 오직 지은 업을 따라 갈 뿐이네’
옆쪽에 돌에 새겨진 나옹선사의 어록을 마음속으로 음미 해본다.“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고 하네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휴식을 취하고 된장 해물찌게와 소주와 함께 먹었다. 벽에는 임영웅 가수의 사진이 벽 전체 도배를 했다. 주인이 임영웅 가수의 열렬한 펜인가 보다. 열정이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