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남한)에는 국망봉(國望峯)이 셋 있다.
그 가운데 제일 높은 것이 소백산의 한 봉우리인 국망봉이고(해발 1,421m),
그다음이 포천의 국망봉(1,168m)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동에 비교적 낮은 국망봉이 있다(해발 481m).
한편 비슷한 이름으로 충주에 국망산(國望山. 해발 770m)이 있고,
북한에도 자강도와 양강도의 경계에 국망봉이 있다.
북한에 있는 국망봉은 모르겠으나, 남한에 있는 국망봉들과 국망산은
말 그대로 ‘나라(=도읍)를 바라보는 산’이다. 따라서 모두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론 ‘전설 따라 삼천리’이다. .
우선 제일 남쪽에 있는 안동의 국망봉을 보자.
이 산은 퇴계 이황(李滉)이 올라가 도읍인 한양을 한눈에 바라보고
축지법으로 왕래하면서 국사(國事)를 의논한 산이라고 한다.
이황이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을 때, 간신배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한 명종 임금을 국망봉에서 바라보고는
축지법을 써 한양으로 달려가 임금을 구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이황의 조부인 이계양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이 산에 단을 쌓고 매년 10월 24일에 북쪽을 바라보고 절하기를
30년 동안 했으며, 돌아가신 단종을 애도한 곳이라고도 하다.
다음으로 소백산의 국망봉을 보자.
신라의 마지막 왕인 56대 경순왕의 왕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신라를 회복하려다
실패하고 망국의 한을 달래며 금강산으로 향했다.
그는 가는 길에 이 산에 올라 멀리 옛 도읍 경주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요컨대 이 산은 망(亡)해 버린 나라(國)의 도읍을 망(望)한 봉우리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포천의 국망봉은 어떤가.
이 산에는 궁예(弓裔)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후삼국시대 태봉을 세운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한 뒤 날로 폭정이
심해지자 아내 강씨가 선정을 베풀 것을 간언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오히려 강씨를 이 산 근처의 강씨봉마을로 귀양 보냈고,
그녀가 이 산에 올라 늘 철원을 바라보았다고 하여 국망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나 강씨를 찾아갔으나 강씨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이에 궁예는 지난 일을 후회하며
이 산에 올라가 철원을 바라보았다고 하여 국망봉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한편 충주의 국망산(國望山)은 위 산들에 비하여 역사가 비교적 짧은 편이다.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을 때
명성황후가 금방산(禽傍山) 기슭의 가신리로 피난하였는데,
그곳에 머무는 동안 이 산에 올라가 한양 쪽을 바라보며 좋은 소식이
오기만 학수고대했다. 그 이후 금방산을 국망산(國望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