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연환십절(連環十絶)
어둠속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사람은 키가 헌칠한 청삼문사였다.
청삼문사는 은령주의 냉혹한 눈빛을 보고도 뒷짐을 진 채 오히려 여유 있는 웃음을 띠고 있었다.
"하하... 정말 놀라운 무공이오. 잘 견식했소이다."
은령주의 눈에서 화광(火光)이 화르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불문곡직하고 청삼문사를 향해서 몸을 날렸다.
꽈르르릉!
그의 쌍수가 휘둘러지며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혈광이 폭사해 나왔다.
혈광은 반경 십여 장을 온톤 시뻘건 핏빛으로 물들인 채 순식간에 청삼문사의 전신을 뒤덮어 버렸다.
헌데도 청삼문사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뒷집을 진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막 회의인들을 쓰러뜨리고 고개를 돌리던 위지천승이 이 광경을 보고 대경실색하여 부르짖었다.
"피하시오! 그것은 악마(惡魔)의 장공(掌功)인 혈옥마인이오!"
허나, 그 순간 혈광은 청삼문사의 몸을 그대로 강타하고 말았다.
콰쾅!
벼락이 치는 듯한 폭음과 함께 한 사람이 오장여 밖으로 훨훨 날아갔다.
위지천승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아... 누군지 모르지만 아깝군.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주고 자신이 대신 죽다니...)
그러다가 갑자기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 저럴 수가..."
놀랍게도 오장 밖으로 나가떨어진 채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인영은 다름 아닌 은령주가 아닌가?
위지천승은 물론이고 종후와 양홍, 심지어 한쪽에 서 있던 동령주까지 입을 딱 벌리고 멍하니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청삼문사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다시 누구의 입에서인지 모르게 짤막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청삼문사는 처음의 자세 그대로 담담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었다.
뒷집을 진 자세 그대로였고 입가에 떠오른 미소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은령주는 바닥에서 힙겹게 일어나며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 이럴 수가..."
넋두리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입가에 검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청삼문사는 그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혈마가 다시 나타난다면 모르지만 팔성(八成) 정도의 혈옥마인으로는 나를 어쩌지 못할 거요."
그 말에 은령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팔성의 혈옥마인이라면 능히 금석(金石)을 두부처럼 으스러뜨릴 수 있는 경지였다.
그야말로 당금무림에서 팔성의 혈옥마인을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겨우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이 준수한 청삼문사는 맨몸으로 그것을 받아냈던 것이다.
그뿐인가? 오히려 공격한 자신이 심각한 내상까지 입었지 않은가?
그의 몸이 철(鐵)로 이루어지지 않은 다음에야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놀라기는 위지천승도 마찬가지였다.
팔성의 혈옥마인이라면 그 자신도 감히 자신 있게 받아낸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것을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간단하게 격퇴했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허나 그들 중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동령주였다.
그는 청삼문사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부터 몸을 굳힌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의 눈은 청삼문사의 절세적인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 이 사람은...)
그는 몸을 가늘게 떨며 멍하니 서 있었다.
대체 그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놀라는 것일까?
청삼문사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가서 혈마에게 전하시오. 해는 이미 서산(西山)으로 기울고 갈 길은 머니 이제 그만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은령주의 몸이 분노로 격하게 떨렸다.
그는 두 눈을 악독하게 빛낸 채 청삼문사를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몇 가지 재주가 있다고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군.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지만 앞으로 네놈은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그는 한쪽에 서 있는 동령주에게 눈짓을 했다.
"가자!"
이어 그의 몸은 비조처럼 허공을 날아 밤의 어둠속으로 사라져 갔다.
동령주는 기광을 번뜩이며 잠시 청삼문사를 바라보다가 자신도 그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휘익!
곧 두 사람의 신형은 밤의 장막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청삼문사는 뒷집을 풀지 않은 채 잠시 두 사람이 사라져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로 다가왔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하오. 귀하가 아니었으면 오늘 우리는 큰 낭패를 당할 뻔 했소."
위지천승이 종후와 양홍을 데리고 그에게 다가와서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청삼문사는 담담하게 포권했다.
"별 말씀을... 괜히 섣불리 나서서 귀하들의 영명(英名)을 욕되게 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는구려."
위지천승은 한눈에 그가 마음에 들었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소? 오히려 귀하 때문에 그럭저럭 이름을 보존하게 되었는데... 대명을 알 수 있겠소?"
"대명이랄 것 까지야 없고 나는 좌혼지라 하오."
"좌혼지?"
위지천승은 금시초문인 듯 약간 고개를 갸우뚱했다.
은령주의 혈옥마인을 막아낸 솜씨로 보아 절정의 고수가 분명한데 자신으로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좌혼지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강호에 출도한지가 얼마 되지 않으니 위지형이 모르는 것도 당연할 것이오."
위지천승은 웃으면서 친근감 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하... 그렇다면 다행이오만 난 또 내 견식이 이렇게 형편없나 하고 자책할 뻔 했소."
그때, 종후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저나 나는 강북녹림맹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지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들의 일개 영주에게 우리 세 사람이 쩔쩔 맬 줄이야..."
양홍도 심각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현현교를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어 별로 믿지 않았는데 이제 생각을 좀 달리 해야겠군요. 그런데 형님!"
그는 위지처승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혈옥마인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렇게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아직까지 무림에 그토록 패도적(覇道的)인 장공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위지천승의 낯빛이 무거워졌다.
"음...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종후와 양홍은 모두 그의 말에 귀를 곤두세웠다.
위지천승은 잠시 침음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혈옥마인이란 무림사상(武林史上) 가장 무서운 장력이다. 일명 악마의 장공이라고 하지. 육십년 전 혈마는 혈옥마인으로 무림의 절정고수 이십여 명을 한꺼번에 몰살한 적이 있지. 그 후로 그 악마의 장공은 모든 무림인들의 뇌리에 지울 수 없는 공포로 남게 되었다. 헌데 이번에 다시 나타날 줄은 몰랐군."
혈마!
이 이름은 당금 강호에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너무도 오래전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허나, 육십년 전만 해도 그 이름은 죽음과 공포의 대명사(大名詞)처럼 여겨졌었다.
그는 가공할 혈옥마인으로 출도한지 삼년도 되지 않아 무려 천 이백여 명의 고수를 살해하여 살명(殺名)을 떨쳤다.
그가 한번 혈옥마인을 펼치기만 하면 반경 오십 장 이내가 완전히 핏빛으로 물들고 누구도 살아남을 수가 없다고 한다.
당시, 그의 악행을 보다 못한 무림인들이 태산(泰山)에서 그를 합공했지만 오히려 몰살당하고 말았다.
헌데, 그 뒤로 어찌된 일인지 혈마의 모습은 무림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에 따라 혈옥마인도 두 번 다시 무림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혈마는 백년 내 무림에서 가장 무서운 열 두 명의 마인(魔人) 중 하나로 꼽힌다. 그가 만약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악마(惡魔)가 되어 있을 것이다."
위지천승의 음성은 그의 얼굴만큼이나 암울한 것이었다.
양홍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단순히 혈옥마인이 다시 나타났다고 해서 혈마가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위지천승은 고개를 저었다.
"글렇지 않다. 혈옥마인은 아직 혈마 외에는 아무도 익힌 사람이 없다. 또 혈마는 신비스럽게 사라지기 전까지는 결코 제자를 둔적이 없으므로 그가 살아있지 않았다면 혈옥마인이 다시 나타날 리가 없다. 그런 마공은 절대로 비급이나 구절로만 익힐 수는 없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가 육십년 전의 인물이라면 지금 거의 백 세가 넘었을 텐데 그렇게 오랫동안 살 수가 있겠습니까?"
양홍은 여전히 못미더운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좌혼지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마공이 극치에 이르게 되면 입마(入魔)를 넘어서 신마경(神魔境)에 이르게 됩니다. 신마경에 이르면 수명(壽命)같은 건 더 이상 제약을 받지 않게 되지요."
양홍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영생(永生)을 한단 말이오?"
좌혼지는 가볍게 웃었다.
"인간인 이상 그럴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이백살까지는 충분히 살 수 있을 거요."
양홍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있다가 위지천승을 바라보았다.
"인간이 이백 살까지 사는 일이 가능할까요?"
위지천승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공력이 어느 한계를 넘어선 고수가 반노환동(返老還童)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일이니 이백 살까지 살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혈마는 지금 강북녹림맹에 있겠군요."
"음..."
위지천승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런 일은 생각하기도 싫지만 그럴 확률이 농후하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강북녹림맹을 더욱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더구나 그들이 이번 품검대회에서 암중으로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서는군."
한동안 주위에 침묵이 감돌았다.
네 사람은 각기 다른 생각에 잠겨 묵묵히 서 있었다.
문득, 좌혼지가 그들을 향해 포권을 했다.
"별 일이 없다면 소생은 이만 가보겠소이다."
위지천승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그를 돌아보았다.
"어찌 이대로 헤어지려 하시오?"
"하하...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겠지요. 그럼..."
중인들 앞에서 웃고 있던 그의 모습이 갑자기 뿌예졌다.
순간,
스으으...
어느새 그의 신형이 까마득히 멀리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눈 깜박할 사이에 그의 모습은 완전히 중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중인들은 이 경악할 신법에 입을 딱 벌렸다.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인간의 몸이 이토록 빠를 수가 있다고는 절대로 믿지 못했을 것이다.
한동안 멍하니 좌혼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던 양홍이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가공스럽구나. 무림에 언제 저런 고수가 나타났을까?"
종후가 위지천승을 바라보았다.
"형님, 저 자의 정체가 대체 뭘까요?"
위지천승은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그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고 있다가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알 수 없지. 하지만 회주(會主)만한 고수가 또 있다니 강호는 역시 넓구나..."
그의 마지막 말은 너무 나직해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형운비는 아침부터 기분이 나빴다.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 자신의 몸이 어제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을 발견한 것이다.
최소한 형운비는 자신의 키가 한 자쯤 커지거나 배가 쑥 들어갔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허나 키도 커지지 않았고 배도 툭 튀어나온 그대로였다.
전신이 조금 가뿐해진 것 외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는 것이다.
좌혼지는 그의 검은 얼굴에 실망스런 표정이 가득 떠오르는 것을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녀석,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
형운비는 시무룩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 몸 말이에요."
좌혼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네 몸이 어쨌는데?"
"에이.. 사부님께선 몸을 고치면 키도 다른 아이들처럼 커지고 몸도 날씬해질 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나는군."
형운비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그런데 보세요. 조금도 키가 크거나 몸이 날씬해지지 않았잖아요."
좌혼지는 그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형운비는 그의 천연스러운 대답에 골이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씀이 어딨어요? 분명 사부님께서는 제 몸이 달라질 거라고 그러셨잖아요."
좌혼지는 빙그레 웃었다.
"분명히 그랬지."
형운비는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다시 무어라고 말하려 했다.
그때, 좌혼지가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운비."
형운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예?"
"네 몸은 반드시 그렇게 된다. 하지만 몇 년에 걸쳐 자란 몸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지. 이런 일은 시간이 필요한 거란다."
형운비는 풀이 죽어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좌혼지는 두 눈을 부드럽게 반짝인 채 그의 어깨위로 손을 올려놓았다.
"어떤 일이든지 쉽고 편하게 얻어지는 것은 없다. 네가 꾸준히 내공을 쌓는다면 네 몸은 머지않아 정상인들처럼 될 것이다."
형운비는 시무룩한 얼굴로 서 있다가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쯤 그렇게 될까요?"
"늦어도 이년 안에 이루어질 것이다."
형운비는 실망스런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나 오래요?"
"하하... 하지만 네 노력여하에 따라 그 기간을 단축시킬 수가 있지. 부지런히 노력한다면 일 년 내에도 가능하지."
그제야 형운비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좌혼지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잠들지 않으면 밤이 길고, 피곤하면 길이 멀고, 어리석으면 생사가 긴 법이다. 네가 너무 조급해하지만 않는다면 일 년이란 그리 긴 기간이 아니지."
형운비는 그의 말뜻을 가만히 음미하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참을 수 있어요. 벌써 십 오년이나 참았는걸요. 몇 년이 걸리든 제 몸이 정상으로만 된다면 전 상관없어요."
"그래.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편할 거다."
좌혼지는 그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대신에 내가 한 가지 무공(武功)을 가르쳐주마."
형운비는 두 눈을 반짝이며 반색을 했다.
"본문의 무공이에요?"
좌혼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본문의 무공은 지금 네 수준으로는 아직 배울 수가 없다."
"그럼 그건 언제쯤 배우게 되나요?"
"네가 가르쳐준 내공심법을 오성(五成)이상 터득한다면 배울 수 있지."
형운비는 급히 물었다.
"그러면 오늘 가르쳐 주신다는 무공이 어떤 건가요?"
"그건 연환십절(連環十絶)이라는 것이다. 강호에서 볼 수 있는 초식(招式) 중에서 특별히 너에게 필요한 것들만 골라서 내가 개조를 한 것이다."
형운비의 눈이 커졌다.
"사부님께서 창안하신 것이군요."
좌혼지는 피식 웃었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강호의 무사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무공들이지. 아마 그중 몇 가지는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형운비는 조금 실망스러웠으나 좌혼지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지라 불평을 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런 것들이라면 제가 익혀도 별로 쓸모가 없겠군요?"
"그건 네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렸지."
좌혼지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매달렸다.
"초식이란 것은 하나의 형식(型式)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익힌 사람의 마음이지. 아무리 놀라운 무공을 알고 있더라도 제대로 펼칠 수 없는 자보다는 변변치 못한 무공이나마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낸 자가 더 고수라고 할 수 있지."
형운비는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낸 채 그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좌혼지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신비한 힘을 담고 있었다.
"절정의 고수가 된다는 것과 절정의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일이다. 그것을 혼동하면 커다란 실수를 범하게 되지. 설사 연환십절이 가장 하류(下流)의 무공이라 하더라도 네가 이것을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아무리 무서운 무공을 익힌 고수라 할지라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에 형운비는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열 개의 초식으로 절정고수들을 꺾을 수도 있다는 것이 잘 실감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허나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비범한 것과 통한다는 만고(萬古)의 진리(眞理)는 불변한 것이다.
연환십절은 강호에 몸담고 있는 무림인들이라면 누구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평범한 초식들이었다. 너무 평범해서 차라리 아무도 익히려 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개중에는 시시한 육합검법(六合劍法) 중의 한 초식인 개창망월(開窓望月)도 있고, 풍소낙엽(風掃落葉)이나 팔방풍우(八方風雨)같은 그야말로 바닥을 기는 초식도 있었다.
횡단운산(橫斷雲山)과 뇌파거암(雷破巨岩)같은 초식들은 견문이 얕은 형운비로서도 눈동냥을 하여 잘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허나, 좌혼지는 진지한 안색으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연환십절의 제 일절(一絶)은 개창망월이다. 이것은 두 손을 내밀어 상대의 상단(上段)을 공격하는 초식이지. 이 초식을 시전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속도와 자세다."
좌혼지는 몸소 개창망월의 초식을 펼쳐보였다.
"속도는 초식을 전개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정확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중심(中心)이 흔들리지 않아야만 빠르고 정확한 출수를 할 수가 있지."
그가 무공을 가르치는 방법은 여타 사람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우선 각 초식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했다.
그 초식의 내력에서부터 어느 때 사용해야 하는지, 또 상극(相剋)이 되는 무공에 대해서도 설명을 아끼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몸소 그 자세를 실현해 보였다.
그는 아주 느릿하게 시전했기 때문에 기초가 거의 없는 형운비로서도 쉽게 따라 할 수 있었다. 허나, 동작 하나하나를 아주 정확하게 잡아야 하고, 변화와 변화를 연결하는 것을 까다롭게 요구했기 때문에 배우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좌혼지는 형운비의 자세가 조금이라도 틀리거나 정확하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시켰다.
그래서 완벽하게 될 때야만이 비로소 다음 동작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하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는 기초가 없는 사람은 절정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게다가 연환십절의 열 가지 초식은 무공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들을 담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 초식들은 무공의 기초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토록 평범해 보였던 것이다.
좌혼지는 그것에 더하여 사이사이에 몇 가지의 변화를 집어넣었다.
때문에 단순해 보였던 초식들이 조금씩 달리 변형되었던 것이다.
그 묘용(妙用)이 어떨지는 오직 좌혼지 자신만이 알고 있을 뿐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