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조선시대의 분서갱유(焚書 坑儒 )
Date: 7월 2, 2015
Author: cine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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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배운 세계사… 라고 해야하나요? 분서갱유란 말이 있었습니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에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막기위해 민간에서 볼 수 있는 일부의 책들…의약, 복서(점치는 책)류 등을 제외한 모든 서적을 금서로 지정해서 긁어 모은 다음 다 태워버리고(분서), 정치적 이념으로 삼은 법가(法家)사상에 기반을 둔 강력한 통일정책을 시행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노선에 비판을하는 유학자들을 탄압하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후에 불노불사를 설파하던 신선사상의 방사들에게 속았음을 알고, 대중을 미혹시킨다는 핑계로 본인의 분노를 풀기위해서 수백명의 학자들을 생매장 시켰습니다(갱유)
이처럼 분서갱유란 언론을 차단하고, 정치적 비판집단을 제거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정치적 행위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분서갱유가 있었습니다.
태종
태종 34권, 17년(1417 정유 / 명 영락(永樂) 15년) 12월 15일(병신) 1번째기사
서운관에 간직한 참서를 불사르다
서운관(書雲觀)에 간직하고 있는 참서(讖書) 두 상자를 불살랐다. 풍속이 전조의 습관을 인습하여 음양 구기(陰陽拘忌)를 혹신하여 부모가 죽어도 여러 해를 장사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박은(朴訔)·조말생(趙末生)에게 명하여 서운관에 앉아서 음양서(陰陽書)를 모조리 찾아 내어 요망하고 허탄하여 정상에서 어그러진 것을 골라 불태웠다.
태종 이방원은 음양사상이 자신들의 유교사상과 맞지않다하여 태워버리고 금서로 지정하고서는 백성들 중에 한권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전부 목매달아 죽여버렸습니다. 게다가 서로 신고하면 포상까지 내렸다고 합니다. 이 전통은 성종때까지 계속 되었다고 합니다.
세조
세조 7권, 3년(1457 정축 / 명 천순(天順) 1년) 5월 26일(무자) 3번째기사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드디어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라는 책까지 나옵니다.
이에 대한 일부 학자들의 분석은,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무리하게 왕권을 장악한 세조가 명나라의 직첩을 받기위해 명의 눈치를보면서 중화사상에 조금이라도 위해를 가할 소지가 있는 책을 긁어 모은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정 반대의 설은 세조는 상기 책들을 모으기는 했으나 분서를 하지는 않았다. 세조가 이 책들을 모은 이유는
신비스럽게 쓰여진 상고사자료들을 이용해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왕권찬탈의 명분으로 삼았던 부국강병을 부각시키고,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정당화시키기 어려운 자신의 집권과정을 옹호하기 위함이다…라고 합니다.
예종
예종 7권, 1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9월 18일(무술) 3번째기사
예조에 명하여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수집하게 하다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이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예종은 세조와 달리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하기를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성종
성종 1권, 즉위년(1469 기축 / 명 성화(成化) 5년) 12월 9일(무오) 6번째기사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천문·음양·지리에 관한 책을 수납하는 것에 대한 글을 보내다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리성모(智異聖母)》·《하소량훈(河少良訓)》, 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삼인기(三人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와 무릇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 등 여러 서책(書冊)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도선참기(道銑讖記)》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收納)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여기서 예종과 성종은 일전에 올린 조선왕조 묘호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세조에 이어지는 두명의 왕입니다.
예종은 세조의 둘째아들로서 세조를 이어 왕에 오른 인물인데 집권 14개월만에 20살의 나이로 요절하는 왕입니다.
성종은 세조의 큰아들의 아들로서 세조의 손자가 되겠습니다. 예종이 요절하자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7년간의 수렴청정을 거친 후 20살에 친정을 한 왕이되겠습니다.
이에 예종과 성종은 세조의 유지를 그대로 이어 책을 긁어모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태종 이방원은 분서를 하였고, 세조/예종/성종은 분서를 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이 긁어모은 우리 상고사의 역사서적은 현재 전해지는 것이 한권도 없는 상태입니다.
정말 분서를 해버린 것인지, 일제시대에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도굴꾼들이 팔아먹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요…
갱유는 다양한 형태로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수많은 사화들이 왕의 의지이든 붕당정치로 인한 신하들의 정권다툼인지 명확하지는 않겠지만, 많은 사상가/학자/정치인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요즘 우리나라하고 비교해보면 딱 맞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 지리성모하사량훈(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의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책 7권 39장 B면
【국편영인본】 7책 200면
【분류】 출판-서책(書冊) / 재정-진상(進上) / 역사-편사(編史)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이맥(李陌)
조선시대사인물 조선전기 성균관전적, 사헌부장령, 동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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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정부(井夫)분야조선시대사유형인물시대조선성격문신성별남출생일1455년(세조 1)사망일1528년(중종 23)본관고성(固城)경력성균관전적, 사헌부장령, 동지돈녕부사관련사건중종반정
영역닫기 정의
조선전기 성균관전적, 사헌부장령, 동지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키워드
이강
이원
이지
정보
장숙용
영역닫기개설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정부(井夫). 이강(李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의정 이원(李原)이다. 아버지는 이지(李墀)이며, 어머니는 정보(鄭保)의 딸이다.
영역닫기생애 및 활동사항
1474년(성종 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뒤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곧 성균관전적에 제수되고, 이어서 벼슬이 누천되어 사헌부장령에 이르렀다. 이때에 장숙용(張淑容)이 연산군의 은총을 기화로 호화주택을 짓고 축재에 광분함을 보고, 수차례에 걸쳐 이를 탄핵하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외방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몰려나면서 다시 관계에 진출하여 성균관사예에 제수되고, 이어서 사헌부장령을 겸하고서 관기 확립에 힘썼다. 벼슬이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이르렀는데, 성품이 매우 강직하고 매사에 공정하였다.
영역닫기 참고문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중종실록(中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영역닫기 집필자
집필 (1997년)
최완기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1) -「삼신오제본기」-
박성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교수
이맥이 『태백일사』를 썼다
『태백일사』를 쓴 이는 이맥李陌(1455~1528)이다. 이맥은 연산군 때 사람인데 너무 강직해서 연산군의 미움을 사 충북 괴산으로 유배당했다. 그리고 다시 풀려나 벼슬길에 복귀하였는데 그의 호가 일십당一十堂이요 『단군세기』를 쓴 행촌 이암李콖의 현손(고손자)이었다. 연산군이 몰락하고 난 뒤 중종이 즉위하자 유배지에서 풀려나서 찬수관纂修官으로 재등용되었는데 그때 내각에 있는 비장도서를 읽고 깜짝 놀랐다. 우리 역사의 시작 즉 상고사가 전혀 달랐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단군 이전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던 것이다.
이맥이 내각의 비서를 읽고 『태백일사』를 지은 것은 중종(1506~1544) 초의 일이었다. 세조(1455~1468)가 모든 상고사 기록 즉 『고기』를 거두어들이라는 명(收書令)을 내린 지 불과 50년 뒤의 일이었다. 세조 2년, 왕은 각도 관찰사에게 민간에서 소장하고 있는 모든 상고사 기록을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영을 어기고 책을 숨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으니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비슷한 문화탄압이었다. 이때 압수된 고기의 서목이 실록에 기재되어 있는데 그 중의 일부 서목이 『태백일사』에 수록되어 있다. 때문에 이맥은 목숨을 걸고 『태백일사』를 저술했던 것이다. 잠시 이맥이 『태백일사』를 쓰게 된 동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때는 갑자년(연산군 10년 1506). 내가 괴산에 유배되었을 때 적소謫所에서 근신하고 있으니 너무 무료하여 집에 간직해 두었던 사전史典들과 노고들에게 들은 이야기, 그리고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16년 만인 경진년(중종 15년 1520)에 찬수관纂修官으로 있을 때 내각에 소장된 비밀스런 책들을 읽고 이들을 모두 합해서 책을 엮었는데 이름하여 「태백일사」라 한다. (『태백일사』 발문跋文)
『태백일사』의 <일사逸史>란 말은 "정사正史에서 빠진 태백의 역사"란 뜻이다. 태백이란 태백산 즉 환인 환웅 단군의 역사란 뜻이다. 태백의 역사가 왜 빠졌는가 하면 조선왕조가 이를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조선왕조는 명나라와의 외교적 문제를 고려하여 단군 이전의 역사를 금지했던 것이다. 상고사는 금지된 역사요 국시國是에 위반되는 역사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책의 소장자를 죽이겠다고까지 으름장을 놓았겠는가.
『태백일사』를 소중하게 간직하여 후세에 전한 분이 바로 이맥의 후손인 해학海鶴 이기李沂(1848~1909)였다. 이기 선생은 한말의 애국지사로 이름난 분이었고, 『환단고기』를 통해 우리 나라 상고사를 밝혀 준 숨은 민족사가이기도 한 것이다.
'태백일사'란 어떤 책인가
여기서 잠시 『환단고기』의 구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앞의 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1) 「삼성기」<상, 하>가 수록되어 있고, 다음에 (2) 「단군세기」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 (3) 「북부여기」<상, 하>가 수록되고, 이어 마지막에 (4) 「태백일사」가 수록되어 있다. 『환단고기』의 차례대로 설명한다면 「단군세기」를 먼저 설명하여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단군 이전 시대의 기록을 다 설명하지 못하고 단군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단군 이전 시대에 관한 『태백일사』를 먼저 설명하기로 한다.
일십당 이맥의 『태백일사』 속에는 다음과 같은 네 종류의 사서가 수록되어 있다. 즉 1) 단군 이전 시대, 환국과 신시 시대에 관한 기록, 2) 단군 시대의 기록, 3) 경전류의 기록, 그리고 4) 단군 이후의 시대, 즉 고구려와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
1) 단군 이전에 관한 기록
① 삼신오제본기 제1
② 환국본기 제2
③ 신시본기 제3
2) 단군 시대에 관한 기록
④ 삼한관경본기 제4
-마한세가 상 하
-번한세가 상 하
3) 경 전 류
⑤ 소도경전본훈 제5
-천부경
-삼일신고
4) 단군 이후의 시대에 관한 기록
⑥ 고구려국본기 제6
⑦ 대진국본기 제7
⑧ 고려국본기 제8
우리는 앞서 『삼성기』 상권과 하권을 살펴보았기 때문에 여기서도 계속해서 단군 이전 시대에 관한 기록을 살펴볼 것이다. 즉 『태백일사』 서두에 나오는 「삼신오제본기」를 먼저 살펴볼 것이다. 「삼신오제본기」는 환국시대와 신시시대에 관한 기록이다.
정치하는 자들이여 백성의 어버이가 되라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도 앞서 나온 「삼성기」<상, 하>와 같이 태시기太始記로부터 시작된다. 태시기는 창세기를 말한다. 북애노인의 『규원사화』에 조판기肇判記와 태시기太始記가 있듯이 「삼신오제본기」에도 태시기가 있어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규원사화』의 조판기에는 "태고에 음양이 갈라지지 아니하고 혼돈한 채 오래 닫혀 있었다. 상계에 문득 하나의 대주신大主神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환인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삼신오제본기」에서는 『표훈천사表訓天詞』를 인용하면서 태초에 천제가 계셨다고 말하고 있다.
태시太始에 하늘과 땅, 그리고 사방에 암흑이 깔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더니 시간이 흘러 옛것이 가고 지금이 오더니 마침내 '오직 한 빛이 밝았다(只一光明矣). 상계上界에 또 삼신三神이 계셨으니 이가 곧 상제上帝이시니라. 그 주체는 일신一神이니 각각 신이 따로 있음이 아니나 작용할 때에는 삼신이다.
그런데 천제는 바로 삼신을 말한다고 한다. 삼신이란 천일, 지일, 태일을 말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이지 셋이 아니라고 한다.
무릇 삼신은 천일天一(하느님)이라 하고 지일地一(땅의 신)이라 하고 태일太一(사람의 신)이라 한다. 천일은 조화造化를 주관하고 지일은 교화敎化를 주관하고 태일은 치화治化를 주관하였다
삼신 중 천일은 조화(창조), 지일은 교화(교육), 태일은 치화(통치)를 주관한다고 하였는데, 『고려팔관기高麗八關記』에 따르면 천일은 곧 환인이요 지일은 환웅이요 태일은 단군이라는 것이다.
『고려팔관기』에 삼신설三神說이 있다. 가로대 "상계의 주신을 천일天一이라 하여 조화造化를 주관하고 하계의 주신을 지일地一이라 하여 교화敎化를 주관한다. 중계의 주신은 태일太一이라 하는데 치화治化를 주관한다"고 하였다. 또 "환인씨는 어버이의 도를 써서 천하에 쏟으며 신시씨는 스승의 도를 사용하여 천하를 인솔한다. 왕검씨는 왕의 도로써 천하를 다스리니 천하가 이에 따른다"고 하였다
삼신은 환인 환웅 단군인데, 환인은 이 세상 만물을 창조(조화)하셨고 환웅은 환인이 이미 만든 것을 교화 즉 가르쳤고(교화) 단군은 환웅이 가르친 바대로 다스렸다(치화)는 것이다. 그런데 백성을 다스리는데 있어 삼신은 각기 다른 방법을 썼다. 즉 환인은 백성을 가장 정에 넘친 어버이(親)처럼 다스렸고, 환웅은 스승(師)처럼 다스렸으며 단군은 임금(君)처럼 다스렸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백성을 다스리되 어버이처럼 다스리라는 것이다.
태초에 나반과 아만이 만났다
그러면 삼신이 내린 곳이 어디냐. 바로 태백산인데 이 태백산은 지금의 개마고원이었다는 것이다. 개마고원은 평안도와 함경도 경계에 있는 고원으로서 한국의 지붕으로 알려져 왔다. 백두산의 어원도 개마고원의 개마蓋馬에서 나온 이름이라 한다.
삼신산을 천하의 뿌리산根山이라 한다. 산 이름을 삼신이라 한 까닭은 대저 삼신이 이곳에 내려와 노닐었기 때문이다. 혹은 삼三은 신新이요 신新은 백白이라, 신神은 고高가 되고 고는 머리頭가 된다. 때문에 백두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혹은 개마蓋馬는 해마리奚摩離에서 바뀐 이름이라 하면서 해奚는 희다는 뜻이요, 마리摩離는 머리라는 뜻이니 백두산의 이름이 이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삼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교화하고 치화하였다고 하였으나 삼신 이전에 인류의 시조가 따로 있었다. 바로 나반과 아만이라는 분이었다. 나반과 아만은 우리말의 아버지와 어머니란 뜻인데 이 두 분이 서로 아이사타阿耳斯? 에서 만나 처음 혼약을 맺고 후손을 나았으니 이것이 인류의 시작이자 동시에 우리 민족(구환족九桓族 64민民)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인류의 조상은 나반那般이라 한다. 처음 아만阿曼과 서로 만난 곳을 아이사타라 한다. 일명 사타려아斯?麗阿라고도 한다. 어느 날 신의 계시를 받아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정안수를 떠놓고 하늘에 알린 후 돌아가며 술을 마셨다. 구환의 64민은 모두 그 후예이다. 그러나 그 뒤 구환족은 각각 흩어져서 일산일수一山一水에 나라를 만들어 서로 경계를 쳐서 살게 되니 서로 창세의 줄기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나반과 아만이 서로 만난 곳은 천해(천지)가 있는 곳이었다고 하며 서로 만난 날은 7월 7일이었다. 하백은 나반의 후손이었다.
하백河伯은 천하天河의 사람으로 나반의 후손이다. 7월 7일은 바로 나반이 강을 건너는 날이다. 이날 용왕에 명하여 하백을 부르나니 용궁에 들어가 이로 하여금 사해四海의 여러 신들을 주관케 하셨다. 천하를 일명 천해天海라고도 한다. 지금의 북해北海가 그곳이다.
그럼으로 북해(바이칼호)가 우리 민족의 원주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북극에서 천도天道 즉 홍익인간의 가르침이 처음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천하의 주注에 가로대 "천도는 북극에서 일어났다. 고로 천일天一의 물을 낸다. 이를 북수北水라 한다"고 했다. 대저 북극은 수정자水精子가 기거하는 곳이다.
이같이 나반과 아만이 태초에 혼인하여 그 후손시대가 오래 계속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 바로 환인이었다. 이 분이 나반의 뜻에 따라 선정을 베푸니 그를 또한 아버지(안파견 또는 커발한)라 불렀다고 한다.
장구한 세월이 흐른 뒤 환인桓因이란 분이 나타나 나라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임금으로 추대되었으니 이를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하고 커발한居發桓이라고도 하였다. 대저 안파견이라 함은 하늘을 계승하여 아버지가 되었다는 뜻이고, 커발한이라 함은 천지인天地人을 하나로 정한다는 뜻의 이름이다. 이로부터 환인의 형제 아홉 명이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셨으니 이를 9환64민九桓六十四民이라 한다.
이야기가 약간 복잡해지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태초에 나반과 아만이 계셨고 이어 오랜 후세에 환인이 나타나고 환웅 단군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소격서(昭格署)는 도교의 영향을 받아 하늘과 별에 제사를 지내던 조선의 관청이다.
고려 시대에 소격서와 유사한 도교 관련 관청은 복원궁, 신격전, 정사색, 소전색, 태청관, 태일전, 구요당 청계배성소 등 여러 곳이 있었는데 태조 원년(1392년)에 모두 합하여 소격전(昭格殿)이라 하였으며 세조 12년(1467년)에 소격서로 이름을 고쳤다. 중종 13년(1518년)에 조광조를 필두로 한 사림파의 강한 요구로 혁파되었다가 기묘사화로 사림이 실각하자 이듬해인 1520년에 다시 세워졌다. 그 뒤 임진왜란 와중에 제사가 폐해졌고 다시 세워지지 않고 완전히 사라졌다.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법정동인 소격동의 어원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대통령 직속 종교 자문 위원회에 해당하기도 한다.
참고 자료
이능화 편술·이종은 역주, 《조선도교사》(보성문화사, 재판 2000)
중종 13년(1518년)에 조광조를 필두로 한 사림파의 강한 요구로 혁파되었다가 기묘사화로 사림이 실각하자 이듬해인 1520년에 다시 세워졌다. 그 뒤 임진왜란 와중에 제사가 폐해졌고 다시 세워지지 않고 완전히 사라졌다.
기억하세요
• 1. 세종의 학맥에는 행촌 이암 고성이씨의 자주적 역사첛학이 있고
이암의 손자 이맥의 태백일사와 훈민정음의 키워드 비교 붂석을 통
해 훈민정음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세종의 뜻이 노출되었고
• 2. 훈민정음의 모음, 자음 제자원리에는 홖단사서의 삼싞오제 즉 태
일칠성 사상이 스며들어 있으며 합자원리에도 첚부경 인갂 존중사
상이 노골적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 3. 클래식 음악처럼 좋은 소리는 위로이자 치유, 그리고 공동체의 생
명 공감 능력의 증폭기(앰프)인데 백성을 생명과 성공의 길로 인도
(훈민)하는 소리는 도대체 무엇일까에 대해 일본의 최고의 고승 쿠
카이 스님의 답은 생명의 종자소리 “훔”이고 현대의학 디팍 초프라
의 임상실험에서 훔 sound의 효과 입증 (심장 앆정, 암세포 억제)
• * 북극성(태을성)을 의식하며 음양균형 생명 종자 소리를 반복하는
홍산문화 이래 우리 젂통 수행법의 가치 재발견 필요
일본인 이마니시류(금서룡)의 21년도 책 단군고에서도 이런 책들이 있엇다는 것을 스스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본으로 가져갔으리라는 추정은 가능합니다.
금서룡今西龍조차 자신의 저서著書인 <朝鮮古史の硏究>의 <단군고檀君考>에서
<이조李朝 태종太宗 왕조실록王朝實錄 12년 條에 열기列記된 신비집 神秘集*고조선비사 古朝鮮秘詞*대변설 大辯說*조대기 朝代記*주남일사기 周南逸士記*지공기 誌公記*표훈천사 表訓天詞*삼성밀기 三聖密記*안함로 원동중 삼성기 安含老 元董仲 三聖記*도증기 道證記*지이성모 智異聖母*하사량훈 河沙良訓*문태산 왕거인 설업 등 삼인기록 文泰山 王居仁 薛業 등 三人記錄*수찬기소 일백여권 修撰企所 一百餘卷*동천록 動天錄*마슬록 磨虱錄*통천록 通天錄*호중록 壺中錄*지화록 地華錄*도선한도참기 道詵漢都讖記 등의 서적들이 왕씨 고려시대王氏高麗時代에 서운관書雲觀을 중심으로 하여 많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서적들이 고려시대로부터 이조李朝 初까지 구전되어 내려오는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연유하여 도가(道家-선가仙家)에 의하여 저술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스스로 피력하고 있다
이규경 <지리산변증설(智異山辨證說)>
엉겅퀴
http://www.jiri99.com/8213062014.09.11 22:16:41 1889
【해설】
이 글은 조선말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3)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실려 있는 '지리산에 관한 종합보고서' 격의 글이다. 오주(五洲)는 그의 호이고 연문(衍文)은 군더더기 글로 사족(蛇足) 같은 것이며, 장전(長箋)은 긴 글을 적은 쪽지, 산고(散稿)는 산만한 원고라는 뜻이니 전체적으로 자신의 저서를 겸손하게 일컫는 말이다.
그는 역사·경학·천문·지리·불교·도교·서학·풍수·예제·재이(災異)·문학·음악·병법·풍습·서화·광물·초목·어충(魚蟲)·의학·농업·화폐 등에 관한 내용을 망라하였고, 60권 60책에 1,400여 항목의 방대한 내용을 ‘○○○변증설’이라는 이름을 붙여 정리하였다. 변증설이라 함은 고금의 설을 비교 검토하여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덧붙인 고증학적 방법을 말한다.
이 책은 조선시대 백과사전류의 책으로 《지봉유설》《성호사설(星湖僿說)》《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등의 맥을 잇는 책이다. 당시에는 본서 뿐만 아니라 윤정기(尹廷琦)의 《동환록(東寰錄)》,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 조재삼(趙在三)의 《송남잡지(松南雜識)》, 최한기(崔漢綺)의 《명남루총서(明南樓叢書)》 등 백과사전류의 책이 대량으로 저술되어 백과사전적 학풍이 큰 흐름을 이루었다.
이규경이 《장전산고》에서 가장 많이 인용한 저서는 그의 조부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였다.
청장관전서에 얽힌 이야기 하나. 정조 때 규장각의 4검서(檢書)로 유명했던 이덕무가 죽자, 평소 그의 재주를 아끼고 그의 글을 사랑하고 그의 불우함을 애석히 여기던 정조 임금이 신하들에게 명하여 이덕무의 유고를 선집(選集)케 하고 내탕금(內帑金)을 지원하여 간행하게 하였으니, 《아정유고(雅亭遺稿)》(*청장관전서에 포함) 8권이 그것이었다. 임금의 특별한 지우(知遇)였다.
현재 《장전산고》는 한국고전번역원(구.민족문화추진회)에서 人事‧經史 부문, 즉 전체의 약1/4 가량이 번역되어 나와 있으며, 『지리산변증설』은 아직 번역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가객님의 명을 받고 시작하였으며, 원문은 고전번역원의 교감본(校勘本)을 이용했는데 저자가 인용한 원전(原典)에 대하여 더 세밀히 대조확인해야 할 필요성은 느꼈으나 능력 밖이라 일일이 그렇게 하지는 못하였다. 원전 중 이미 번역된 글은(택리지 등) 번역본을 참조하였다.
참고로 『청학동변증설』은 최석기 교수의 《지리산유람록1》에 번역 수록되어 있다.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읽어두기】
○ 독립된 서명(書名)은 《…》로 표시하였고, 책 속의 글 제목은 『…』로 표시하였으며,
○ 다른 서적에서 인용한 글은 「…」로 구분하였고, 인용문 속의 재인용문은 “…” ‘…’로 묶었다.
○ 원주(原註)는 작은 글씨로 청색 […] 속에 넣었고, 역주(譯註) 역시 작은 글씨로 흑색(…) 속에 넣었으며, 내용이 긴 것은 각주(脚註)로 처리하였다.
지리산변증설(智異山辨證說)
천하에는 세 개의 대간룡(大幹龍 *풍수에서는 산줄기를 龍이라 한다. 대간룡은 그중에서도 가장 큰 산줄기)이 있는데 모두 곤륜에서 시작된다. 세 줄기로 나누어져 중국으로 들어가며, 북쪽 줄기는 하해(河海 *곤륜산에 있다는 깃털도 가라앉는다는 호수)에서 나와 기‧연(冀燕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지역)지방의 산이 되었고, 그러고도 남은 기운은 백두산이 되었으며, 백두산은 흘러 조선의 뭇산이 되었다.
백두산은 곧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하는 불함산이니 일국의 지붕이 된다. 몽라골현[북도의 길주목에 있다]에서 서남쪽으로 구불구불 이어져와 장령[갑산부에 있다]이 되고 또 흘러 두리산이 되고 함흥의 백덕산이 되고 영흥의 검산이 되고 분수령이 되고 철령이 되었다.1) 또 흘러 대관령이 되고 태백산 소백산이 되고 죽령이 되고 조령이 되고, 두 영(嶺)의 남쪽으로 이화현이 되고 속리산이 되고 분수현이 되고 지리산이 되었다. 지리산은 곧 방장산으로, 웅장하여 수백리에 걸쳐 있고, 백두의 맥이 흘러와 여기에서 멈췄기 때문에 일명 두류산(頭流山)이라 하며, 옛날 신라와 백제의 경계였다.
《습유기(拾遺記)》「부상(扶桑)은 오만리, 거기에 방당산(磅磄山)이 있고 산위에는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둘레가 백 아름이나 되며, 만년에 한번 열매를 맺는다. 울수(鬱水)는 방당산 동쪽에 있고, 푸른 연뿌리가 나는데 길이가 천길이나 된다.」
지봉 이수광이 말하기를, “내 생각에는 방당과 방장은 음이 비슷하므로 세속에서 지리산을 방장산이라 한다.”고 하였다.
두보의 시에 ‘방장은 삼한의 밖에 있다’고 하였다. 또 말하는 사람들은 삼신산은 모두 우리 동방에 있다고 하면서, 방장은 지리, 영주는 한라, 봉래는 금강이라고 한다. 신라 고려에서 전해지는 말이 이와 같으니 혹 닮았다고 할 수 있을까?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에서 말하였다. 「금대암은 고찰이다. 들보 위 반자(盤子)속의 그을음이 끼고 어두컴컴한 곳에 소룡을 그린 금니화가 있었다. 비늘과 지느러미 발톱과 뿔이 꿈틀대며 움직여 은은히 일어나려고 하는 것이 아로새긴 듯하여 결단코 동방의 평범한 솜씨가 아니었다. 벽에는 기문이 있었는데 매우 질박하였고,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지리산은 일명 봉익산(鳳翼山)이라 하는데 그 형상을 취한 것이고, 일명 두류산이라 하는데 백두산에서 흘러와 갈라졌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신라 승려 의상은 《청구비기(靑丘祕記)》에서, “지리산은 일만 문수가 속세에 머무는 곳이며 그 아래 세상은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질박하다.”고 하였다.
《지지(地誌)》에 “지리산은 태을(太乙 *신선의 우두머리)이 사는 곳이며 신선의 무리가 모이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고려 쌍명재 이인로는 《파한집(破閑集)》에서, “두류(頭留)는 북녘의 백두산에서 일어나 시작되어, 꽃 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이 이어져 대방군[대방은 호남의 남원부이며 지리산에서 동쪽으로 60리이다]에 이르러 수천 리를 내려온 것이 서리어 맺히었다. 산 주위에는 10여 고을이 있는데, 한 달은 걸려야 그 끝까지 다 돌아볼 수 있다.” 하였다.
점필재 김종직 공은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에서 “악양현의 북쪽을 청학사 골이라 하고, 그 동쪽을 쌍계사골이라 한다.” 하였다.
《지지(地誌)》 「두류 동부(頭流洞府 *동부洞府는 신선이 사는 별천지. 洞天, 別府 다 비슷한 말. 통상 골짜기 속이 넓은 곳을 동부라 하기도 한다.)는 서로 연결되어 깊고 넓으며 토질은 땅이 두텁고 비옥하여 산 전체가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는 백 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많고, 왕왕 사람이 이를 수 없는 곳이 있어 세금을 내지 않기도 한다.
땅이 남해에 가까워 기후가 온난하니 산중에 대나무가 많고 또 감나무 밤나무가 많아 저절로 열렸다가 저절로 떨어진다. 높은 봉우리 위에 기장과 조를 뿌려도 씨앗이 잘 자라지 않는 경우가 없으며, 촌민과 승려가 섞여 살고, 농사는 애쓰지 않아도 두루 풍족하다.
산의 남쪽에는 화개동 악양동이 있고, 모두 사람이 살며 산수가 매우 아름답다. 옛부터 전해오기를 만수동 청학동이 있다고 하였는데, 만수동(萬壽洞)은 곧 지금의 구품대(九品臺)이고 청학동은 바로 지금의 매계(梅溪)이다.
서쪽에는 화엄사 연곡사가 있고, 남쪽에는 신응사 쌍계사가 있다. 산 북쪽은 함양군 땅이며 영원사 군자사 유점촌(鍮店村)[남사고는 복지福地라 하였다]이 있고, 또 벽소운(碧霄雲) 추성동이 있는데 모두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지리 북쪽의 계곡물이 합쳐 임천이 되고 용유담이 되어 함양군의 남쪽 엄천에 이르는데 시내를 따라 아래위로 물과 돌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었다. 산의 서남쪽 섬진강 상류에 버금간다.」 (*어떤 지지(地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위 내용은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나온다.)
대체로 중봉으로 오르면 역시 흙으로 덮인 봉우리이다. 함양군에서 엄천을 거쳐 오르는 사람들은 북쪽의 제2봉을 中이라 한다. 마천에서 오르는 사람들은 시루봉(甑峯)을 제1봉이라 하고 여기를 제2봉이라 하기 때문에 역시 中이라 칭한다.
시루봉을 지나면 저여원(沮여原)에 닿는데 저여원은 산등성이에 있고, 평탄하고 넓어 오륙 里 가량 되며 수풀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흘러 농사지어 먹고 살만하다고 한다.
운봉현에서 25리 되는 동점촌(銅店村)에서 오르면 반야봉이다. 거기서 보는 최고 꼭대기는 천왕봉으로 평지로 치면 70리쯤 된다. 보(步)로 셈하면 25,200보, 척(尺)으로 재면 151,200척이 된다. 하늘 위에는 맑고 서늘한 기운이 가득하여 꼭대기에 오르면 한여름에 갖옷을 껴입어도 오히려 춥고 세찬 바람이 살을 에는 듯하다. 또 정상에는 열 사람이 앉을 정도의 공간 밖에 없다.
이 산에서 가장 이름난 곳은 청학동이다. 고려의 쌍명재가 처음 언급한 이래 천하에 회자된 것은 청(淸)나라 강희연간에 편찬하여 들여온 《연감유함(淵鑑類函)》때문이다. 상세한 것은 『청학동변증설』을 보라.
악양동은 산수가 매우 아름답다. 고려 때 한유한이 이자겸의 전횡이 심한 것을 보고는 장차 화가 일어날 것을 알고 벼슬을 버리고 가솔을 이끌고 지리산에 숨었다. 조정에서 그를 찾아 관직을 배수하여 불렀으나 유한은 도망가 숨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어디서 생을 마쳤는지 모른다. 혹은 신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단학수장(丹學修藏)》 「신라 최승우, 김가기, 승려 자혜 등 3인이 당(唐)에 들어가 종남산의 도사 신원지를 따라 노닐다가 신선 종리장군을 만나 내단(內丹)을 이루어 갈무리하는 비결을 얻어 돌아와서는 그 구결을 최고운과 이청(李淸)에게 전수하였다. 이청은 두류산으로 들어가 수련하여 신선이 되어 등천하면서 그 구결을 제자 명법에게 전하였고, 명법은 해화(解化 *형체를 버리고 신선이 되는 것)하면서 구결을 상락군 권청에게 전하였다. 권청은 거짓 미친 체하며 승려가 되어 수련하여 득도하고는 지리산에 숨었으니 고운과 더불어 이 산에 있지만 숨거나 나타나는 것을 자유자재로 한다.」
상세한 것은 《전도록(傳道錄)》에 보인다.[《전도록》에 “승려 자혜와 최승우가 唐에 들어가 도사 신원지에게서 道의 요체를 받아 돌아와 최고운과 이청에게 구결을 전수하였고, 이청은 두류산에 들어가 수련하였고 득도하여 신선이 되었다. 그 도를 승려 명법에게 전하였고 명법은 32년 만에 신선이 되어 상락군 권청에게 도를 전수하였다. 권청은 거짓 미친 체하며 승려가 되었고 득도하여 두류산에 숨었다. 元나라의 지배시에 설현이 원나라에서 동으로 와 반야봉에서 상락을 뵙고 그 정법을 얻었다.”고 하였다.]
「남추가 수련법을 배워 과거급제 후 기묘사화를 당해 곡성에 유배를 가서 지냈다. 일찍이 편지를 써서 하인을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여보냈다. 하인은 채색 단장한 누각에 두 사람이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한 사람은 고운, 한 사람은 자혜였다. 하인은 하루를 머물고는 답서를 받아 돌아왔는데 처음 2월에 산에 들어갈 때는 초목이 움트기 전이었는데 나와 보니 어느덧 9월초였다.」 《해동이적(海東異蹟)》에 상세히 나온다.
지리산 중봉의 성모묘(聖母廟)는(*중봉의 성모묘라 한 것은 착오로 보인다.) 삼칸 판자집이다. 그안에 있는 성모 석상의 목에는 이지러진 자국이 있는데, 우리 태조대왕께서 인월에서 크게 승리하던 해(1380년, 고려 우왕 6년)에 왜구들이 이 봉우리에 올라 석상을 찍고 갔기에 후인이 붙여 이어 놓았다.
또 석가의 모친 마야부인이라고 하는데, 일찍이 고려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보인다. ‘성모가 선사(詵師)에게 명하였다’하고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지리산의 천왕(天王)이니, 바로 고려 태조의 모친[妣]인 위숙왕후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는 곧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에 관한 이야기를 익히 듣고서 자기 임금의 계통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선도성모란 삼국사에 「성모 사당이 경주 서악의 선도산에 있다. 성모는 한(漢) 선제(宣帝)의 딸로 이름은 사소(娑蘇)이다. 일찌기 신선의 술법을 터득하여 해동으로 와 머물며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고 마침내 神이 되었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의 시조 혁거세는 성모가 낳았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찬양하기를, 선도성모가 어진 이를 낳아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있다.」고 하였다.
미수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말하였다. 「시중(侍中) 김부식이 일찌기 宋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우신관(佑神館)에 들렀는데 한 건물(堂)에 산선(山仙)을 모셔 놓은 것을 보았다. 관반(館伴 *사신을 접대하는 벼슬) 왕보가 말하기를 “이는 귀국의 신인데 그대들은 압니까?” 하고 곧 이어 말하였다. “옛날 어떤 황실의 딸이 지아비 없이 애를 배어 사람들의 의심하는 바가 되자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에 이르러 아들을 낳아 해동의 첫왕이 되었으며, 후에 왕은 천선(天仙)이 되고 황제의 딸은 지선(地仙)이 되어 오랫동안 선도산(仙桃山)에 있었는데, 이것이 그 상(像)입니다.”」
쌍계사 시냇가의 석벽에는 고운의 큰 글자가 많이 새겨져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운이 득도하여 지금도 가야산과 지리산 사이를 오간다고 한다. 선조 신묘년간(1591)에 절의 중이 바위틈에서 종이 한 조각을 얻었는데 절구(絶句) 한 수가 적혀 있었다.
“東國花開洞(동국화개동) 동국의 화개동은
壺中別有天(호중별유천) 호리병 속의 별천지로구나.
仙人推玉枕(선인추옥침) 선인이 옥베개를 밀치고 일어나니
身世倏千年(신세숙천년) 몸은 세상에 있건만 잠깐만에 천년이 지났네.”
글자와 획이 새로 쓴 것 같았고, 그 글씨도 세상에 전하는 고운의 필적과 동일하였다.
화담 서경덕 선생이 두류산 꼭대기에 올랐을 때 날개옷을 입은 신선을 본 적이 있었는데, 오산 차천로의 《설림(說林)》과 청학동변증설에 보이므로 지금 다시 군더더기말을 덧붙이지 않으니 《오주연문장전》을 살펴보라.
이러한 것들은 두류산 신선들의 자취이며 또 이서(異書 *진기한 책)들도 있으니 또한 이 산의 일사(逸史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될 만하다.
우리 태조대왕께서 잠룡(*즉위하기 전) 시절에 어떤 스님이 문앞에 와서 책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지리산의 바위 속에서 얻었다고 하였다. 거기에는 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태조는 을해년(乙亥)에 나셨다.](*木子乘猪下는 돼지해에 태어난 李씨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다시 삼한의 지경을 바로잡을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사람을 시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가버려 찾지 못하였다. 야사(野史)에 상세히 나온다.
이 외에도 도사와 승려들이 저술하여 서로 전하는 것들이 삼한시대에서 오늘날까지 몇 종이나 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 다만, 거두어 가버려 볼 수 있는 것은 《지리성모(智異聖母)》[서명(書名)이다]이다.
세조(3년) 정축년(1457)에 팔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祕詞)》부터 《대변설(大辯說)》과 《智異聖母》《지도설(至道說)》《한도참기(漢都讖記)》등 19종의 서적들은 사사로이 간직하기에 마땅치 않으니 만약 간직한 자가 있으면 진상하게 하라.”2)고 한즉 이때의 《지리성모》가 바로 이책 이름이다.
지리산 은자들의 방서(方書 *신선술에 관한 책) 속에는 조삼법(造蔘法 *수삼을 백삼이나 홍삼으로 만드는 방법)도 있는데 이러한 것들 또한 기서로서 비밀히 전하는 것이다.
석정곤(石井崑) 수곡대승(水谷大勝) 동점촌(銅店村) 남두류동(南頭流洞)은 모두 이 산의 동천 복지(洞天福地)로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겨놓은 곳이다. 『청학동변증설』에 상세히 있으므로 더 이상 첨언하지 않는다.
산의 재앙과 이변 역시 기록할 만한 것들이 있는데, 갑술년(1814)의 장맛비로 지리산이 붕괴되고 수목이 뿌리채 뽑히고 호랑이와 표범이 떠내려가 죽었다.[때는 순조임금 14년이었다.] 여름의 이런 홍수는 옛날에도 없었다고 영남사람들은 말하며, 초목과 벌레 새에게도 괴이한 일이 미쳤으니 또한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신라 흥덕왕 3년 무신년(828)에 김대렴을 唐에 보내 차(茶)의 씨앗을 얻어와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었는데 지금까지 그 종자가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당총(唐蔥 *당나라 파)이 있는데 줄기는 나무인데 뿌리는 파다. 전하는 말에 唐에 파종한 것을 얻어 심었기에 이름을 당총이라 한다 했다.
대나무 열매를 복(竹+復)이라 하는데 우리 태종임금 때 관동 강릉부의 대령산에 대나무 열매가 있었는데 그 모습은 밀 같고 찰지기는 율무 같으며 맛은 수수 같아 마을사람들이 따서 술을 만들어 먹는다고 하였다.
지리산의 대나무도 또한 열매를 많이 맺는데 열매를 맺으면 죽고 혹은 말하기를 대가 만약 열매를 맺으면 그해에는 흉년이 든다고 한다. 오직 지리산의 대나무는 해마다 열매를 맺는데, 일찍 채취하는 것은 담황색으로 끈적이며 늦게 채취하는 것은 심황색으로 떫다. 맛이 밀(小麥)과 비슷하여 산승(山僧)들이 식량으로 삼는다.
《계성부(稽聖賦)》를 살펴보니 대나무에 열매가 열리면 뿌리가 마르고 파초에 꽃이 피면 밑동이 마르므로 그리되면 반드시 죽는다고 하였다. 이제 지리산의 대나무가 열매를 맺었는데도 죽지 않는 것으로 보건대 이것은 잘못된 말이며, 또 대나무에 열매가 생기면 흉년이 든다는 말 역시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다.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 「지리산의 소나무 그림자가 그늘진 연못이나 시냇물에 비쳐 고기로 변하는데, 아롱진 무늬가 중의 가사(袈裟) 같아 이름을 가사어(袈裟魚)라 한다. 점필재의 시에
“達空寺下水梭花(달공사하수사화) 달공사 아래에 있는 수사화는
紫鬣斑鱗味更嘉(자렵반린미경가) 붉은 지느러미에 얼룩 비늘, 맛 또한 좋아라.”
라고 하였는데, 달공사는 운봉현에 있으며, 절에서는 고기(魚)를 수사화(水梭花 *물속에 있는 베짜는 북처럼 생긴 꽃)라 부른다.」 또 이수광의《지봉유설》에도 보인다.
또 지리에는 청옥채(靑玉菜)‧자옥채(紫玉菜)가 나는데 줄기는 가는 젓가락 같고 흰꽃이 피면 산승들이 말려서 쌓아놓고 삶아서 국을 끓이기도 하고 데쳐 먹기도 하는데 맛이 매우 맑고 담백하며, 이름 또한 아주 고아하다.
야사에, 광해군 12년 경신년(1620) 12월, 흑조(黑鳥)가 일본에서 허공 가득히 바다를 건너 지리산 속에 모여서는 몇 날을 서로 싸워 죽은 시체가 쌓였으며 냄새가 산 밖에까지 진동하였고 나머지 새들은 북쪽으로 날아갔다고 하였다.
이 글(지리산변증설)과 청학동변증설은 서로 참조하는 문장이 많은즉 지리산과 청학동은 같은 산이기 때문이니 보는 사람들은 중복되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지 마시라.
점필재의 『유두류산록』도 참고할 것이 많으니 간략히 기술한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함양군수가 되어 임진년(1472) 중추(仲秋 *음력8월)에 뇌계 유호인, 매계 조위와 함께 두류산을 유람하고 유산록을 남겼으니 지금 그 줄거리만 적는다.
「무인일(8월14일). 엄천을 지나 화암에서 쉬었다. 지장사에 이르러 말을 버리고 지팡이를 짚고 1리쯤 가니 바위가 있는데 환희대라 하였으며, 그 아래는 천 길이나 되었고, 금대암‧홍련암‧백련암 등의 여러 사찰들이 내려다보였다.
선열암에 들렀다가 고열암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의론대가 서쪽에 있는데 석굴이 있고 노숙(老宿 *덕이 높은 승려) 우타가 거기에 거처하였다. 일찍이 선열암‧신열암‧고열암 세 암자의 스님들과 더불어 대승‧소승과 돈오(頓悟)에 대해 논하였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의론대라 부른 것이다.
나는 첫 산행으로 극도로 피로하여 푹 잤다. 기묘일 날이 밝아 한 언덕을 지나는데 이것이 구롱(隴 *고개, 언덕 또는 등성이) 가운데 첫 번째였다. 연달아 세 번째 네 번째 언덕을 지나니 한 동부(洞府)가 있었는데,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였다. 여기서 20리를 가면 의탄촌에 도달한다.
구롱을 지나면 산등성이 길로 가는데 몇 里를 못 가서 등성이를 돌면 남쪽은 곧 진주 땅이다. 청이당에 이르렀다. 당집은 판자로 지은 집이었다. 여기서부터 영랑재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매달린 듯 극히 위험하였다. 날이 이미 정오를 지나서야 비로소 영랑재에 올랐고, 거기서 천왕봉을 우르러보았다. 영랑은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로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수에서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소년대는 봉우리 곁에 있는데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다. 산의 동쪽 서쪽 계곡에는 잡목은 없고 모두가 삼나무․전나무․소나무․녹나무였는데 말라 죽어서 뼈만 남아 서 있는 것이 3분의 1은 되었다. 산등성이에 있는 나무들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려 가지와 줄기가 모두 왼쪽으로 쏠려 휘어지고 굽어 머리카락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해유령을 지날 때 길 옆에 선암이 있었다. 중봉에 올랐는데 중봉은 흙을 이고 선 단정 진중한 모습이었다.
성모묘에 이르렀다. 3칸 판자집이었다. 성모석상이라고 하는 것의 목에는 금이 가 있었다. 태조께서 인월에서 크게 승리하던 해에 왜구들이 이 봉우리에 올라 칼로 찍고 갔으므로 뒷사람이 붙여 이어 놓았다. 또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이승휴의《제왕운기》를 읽어보니, ‘성모가 선사에게 명하였다’고 하고는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지리산의 천왕은 바로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는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에 관한 이야기를 익히 듣고서 자기 임금의 계통을 신성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승휴는 그 말을 믿고 《제왕운기》에 기록한 것이다.
날이 또 어두워지자 음랭한 바람이 마구 불어오고 안개가 모여들어 의관이 모두 축축해졌다. 사당 안에서 서로를 베개삼아 누웠는데 한기가 뼈에 스며 다시 두꺼운 솜옷을 껴입었다.
경진일, 종자(從者)들을 향적사에 먼저 보내 음식을 준비하게 하였다. 몹시 미끄러운 돌길로 몇 里쯤 내려가니 쇠난간길(鐵鎖路)이 있었는데 매우 위험하였다. 바위구멍을 통과해 나와 향적사로 들어갔는데, 향적사에는 중이 없어진 지가 벌써 2년이나 되었다. 문 앞의 반석으로 나아가 바라보니, 살천이 구불구불 길게 이어져 있고, 여러 산과 바다의 섬들은 혹은 완전히 드러나기도 하고 혹은 반쯤 드러나기도 하였다.
신사일, 새벽에 해가 떠오르니 노을빛 채색이 영롱하게 빛났다. 마침내 새벽밥을 재촉하여 먹고 지름길로 석문을 거쳐 성모묘에 들어갔다. 이 때 날이 막 개서 사방은 구름 한 점 없었다.
이 산은 북쪽에서 달려와 남원에 이르러 높이 일어나 반야봉이 되었고, 동쪽으로 거의 이백 리를 굽이쳐 이 봉우리에 이르러 다시 우뚝 솟구쳤다가 북쪽으로 서리어 끝난다.
꼬리를 끌 듯 둘러선 성첩은 함양성이고 흰 무지개가 가로지른 듯한 것은 진주의 강물이며 푸른 소라처럼 촘촘이 서 있는 것은 거제 남해의 여러 섬이다. 그러나 산음 단계 운봉 구례 하동은 겹겹의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북쪽에 있는 가까운 산으로는 안음의 황석 함양의 취암(鷲巖)이 있고, 멀리 있는 것으로는 함음(*거창 가조)의 덕유 공주의 계룡 금산의 주우(走牛) 지례의 수도 성주의 가야가 있다. 동북쪽의 가까운 산으로는 산음의 황산(皇山) 삼가의 감악산이 있고, 먼 것으로는 대구의 팔공 안동의 청량이 있다.
동쪽에 있는 가까운 산으로는 의령의 자굴(闍崛) 진주의 집현이 있고, 멀리 있는 것으로는 현풍의 비슬(毗瑟) 청도의 운문 양산의 원적이 있다. 동남쪽의 가까운 산으로는 사천의 와룡이 있고, 남쪽의 가까운 산으로는 하동의 병요(甁要) 광양의 백운이 있고, 서남쪽의 먼 먼 산으로는 흥양(*고흥)의 팔전(八顚)이 있다.
서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은 운봉의 황산(荒山), 멀리 있는 것은 광주의 무등 부안의 변산 나주의 금성 고산(*완주)의 위봉(威鳳) 전주의 모악 영암의 월출이 있고, 서북쪽에 멀리 있는 산은 장수의 성수(聖壽)이다.
이 산들 중 어떤 것은 나지막한 언덕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음식 그릇을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지만, 오직 동쪽의 팔공과 서쪽의 무등만은 여러 산에 비해 활등처럼 하늘 높이 솟았다.
계립령(鷄立嶺) 이북은 아득한 푸른 기운이 허공에 가득하고, 대마도 이남에는 신기루가 하늘에 닿아 있어, 시력이 미치지 못하여 더 이상은 또렷이 볼 수가 없다.
정오가 되어 석문을 지나 내려와 중산(中山)에 올랐더니 이 또한 흙으로 덮인 봉우리였다. 이 고장 사람들이 엄천을 거쳐 오르는 자들은 북쪽에 있는 제이봉을 中이라 하고, 마천에서 오르는 자들은 증봉(甑峯 *시루봉, 지금의 촛대봉을 말하는 듯)을 제일봉이라 하고 이 봉우리를 제이봉이라 하기 때문에 또한 이것을 中이라 일컫는다.
시루봉을 지나 저여원(沮洳原)에 도착했다. 이 평원은 산등성이에 있는데 평탄하고 넓은 것이 5∼6리 가량 되고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흐르므로 농사지어 먹고 살 만하다. 저물녘에 창불대에 올라가 보니, 그 아래에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었다. 두원곶‧여수곶, 섬진강의 끝이 내려다보였다.
악양현의 북쪽이 청학사가 있는 동네이고 그 동쪽이 쌍계사가 있는 동네이다. 최고운이 일찍이 이 곳에서 노닐었다.
영신사에서 잤다. 절의 북쪽에는 가섭(迦葉)의 석상이 있는데, 세조 임금 때에 매양 중사(中使 *내관)를 보내 향화를 행하였다. 그 석가섭의 목에도 흠집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가 찍은 것이라고 한다. 가섭전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라는 것이다. 법당에는 몽산화상(蒙山和尙)의 그림 족자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贊)에,
頭陀第一(두타제일) 불도를 닦는 것이 제일이니
是爲抖擻(시위두수) 이는 번뇌를 떨치기 위한 것
外已遠塵(외이원진) 밖으론 이미 속세를 멀리하였고
內已離垢(내이리구) 안으론 이미 마음의 때를 벗었네
得道居先(득도거선) 먼저 도를 깨치고
入滅於後(입멸어후) 나중에 적멸에 들었으니
雪衣鷄山(설의계산) 설의와 계산은
千秋不朽(천추불후) 천년이 지나도 썩지 않으리라.
하였고, 그 곁에는 소전체(小篆體)의 청지(淸之)라는 인장이 찍혀 있었으니, 바로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삼절(三絶/詩書畵)이었다.
곧장 지름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동쪽으로 우르러보니 천왕봉이 바로 지척에 있는 것 같았다. 가파른 곳을 다 내려와 지팡이를 끌면서 걸었다. 골짜기 어귀에는 야묘(野廟)가 있었는데, 마침내 옷을 갈아입고 말에 올라 실택리에 당도하였다. 등구재를 넘어 지름길로 군의 관아로 돌아왔다.」
청나라 성조(*강희제 1661-1722 재위) 때 편찬한 《연감유함》에 “조선의 지리산 속에 청학동이 있고, 그곳은 텅 비어 넓고 사방이 모두 기름진 땅으로 곡식을 심기에 알맞으며, 오직 청학만이 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실려 있다. (*이 내용은 이인로의 『청학동기』에 나온다.)
엄천사는 나의 할아버지의 《한죽당섭필》에 나온다. 「계묘년(1783) 6월[삼가 살펴보니 정조임금 8년이었다] 내가 두류산을 유람할 때, 엄천사에 들러 고적이 있는지 물었더니 절의 승려가 책 하나를 바쳤는데, 거기에는 인목대비가 죽은 아우의 명복을 비는 발원문이 실려 있었다. 또 계묘년 6월23일 아들 광류와 함께 두류산을 유람하면서 군자사에서 묵었다. 절의 사적을 적은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천령의 남쪽 오십리 쯤에 지리산이 있는데 동쪽 기슭 아래의 큰 시냇가에 군자사가 있다. 진(陳)의 대건 11년 무술년(578) 신라 진평왕이 잠저(潛邸 *즉위 전)시절에 왕위를 피하여 여기에 머무를 때 태자를 낳았고 서라벌로 돌아가서는 마침내 머물렀던 집을 절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이름을 군자사라 하였다.’
또 진주 단속사에는 신행선사비가 있는데 중 영업이 글씨를 썼으며, 쌍계사에는 진감국사비가 있는데 최치원이 글을 짓고 썼다.」
신라 의상대사는 《청구비결》에서, 「두류산은 은거하기 위한 사람들이 많이 귀착하는 곳이며, 뛰어나게 훌륭한 인사들이 대대로 많이 배출된다. 계원3)(雞園 *사찰)에서 도를 이야기하며 원숭이 사는 (궁벽한)곳에서 법을 닦는 인사들 또한 이곳에 모여드니, 이런 일이 매우 성하다.」하였다.
정조임금 때 신홍주와 백동수에게 명하여 지리산의 도적을 토벌하게 했을 때4), 백公이 석벽 위에 탁자(坼字 *한자의 글자를 나누거나 합쳐서 점을 치는 것. 파자(破字)와 같은 말)가 적힌 종이 하나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 종이의 탁자는 다음과 같았다.
八一自有尾 小一几 口弓虎 禾千十木 囗王丁口 目几禾多
또 그 아래에는 시 2구절이 적혀 있었다.
“바다 밖 끝에는 무석국(海外限無石) / 유사(流沙)는 영주에 고하고(流沙詔嬰洲) / 꽃이 그르지 사람은 그르지 않고(花誤人不誤) / 바람은 놀라도 뜻은 놀랍지 않네.(風驚意不驚)”5)
또 그 밑에는 ‘팔십 단(單)의 백춘(白春)의 가르침을 보이려고 기년(寄年) 기월 기일에 새로 새긴 것을 들고와 바치고는 그 집에 그 道를 남긴다.’고 씌어 있었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순조임금 경진년(1820) 겨울, 백公의 서자 심진4)이 그것을 소매 속에 넣어와 보여주었지만 괴이하여 감추어 놓았다. 그 다음해 청의 도광제(道光帝)가 즉위하여 연호를 도광(道光)이라 하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탁자가 풀이가 되었다.
八一自有尾(*八一自에 꼬리가 있는 것)를 합치면 ‘道’자가 되고, 小一几를 합치면 ‘光’자가 되며, 口弓虎를 합친 글자는 ‘號’자이고, 禾千은 ‘秊’(*年과 동일), 十木은 ‘末’, 囗王은 ‘國’, 丁口는 ‘可’, 目几은 ‘見’, 禾多은 ‘移’가 된다. (*이으면 道光號年末 國可見移가 된다. 즉 도광년호의 말에 나라의 대통이 옮겨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는 뜻이다.)
기이하게도 도광이란 연호가 있을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아래의(末 國 可 見 移) 의미는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기유년(1849)이 되어 헌종 임금이 후사(後嗣)없이 승하하고 今上(지금의 임금 *철종)께서 계통을 이었다. 이때는 청 황제 연호인 도광의 말년이라는 말과 맞아 떨어지며, 천명이 지금의 임금(當宁)에게 옮겨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경술년(1850) 정월에 청 황제가 붕어했으니 바로 도광의 말년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두류의 은자들은 앞일을 아는 재주가 있어서 파자(破字)를 미리 만들어 참설(讖說)6)로써 보여주는 것이니 참으로 이것은 괴이한 일이다. 고로 변증의 마지막에 붙여둔다.
고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시가 있다.
送智異山智居寺住持覺冏上人(송지리산지거사주지각경상인) / 지리산 지거사 주지 각경상인을 보내며
南遊何處聽溪聲(남유하처청계성) 남쪽에서 노니는데 어디선가 시냇물소리 들리고
智異山高萬丈靑(지리산고만장청) 지리산은 높아 만 길이나 푸르네.
春院日長無個事(춘원일장무개사) 봄날 절에 해는 길고 일은 없어
沙彌來學妙蓮經(사미래학묘연경) 사미가 와서 묘연경을 배우네.
<끝>
【註】
1) 참고로, 정감록에 들어 있는 삼한산림비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삼한의 산맥은 몽라골현에서 시작되어 용처럼 날고 봉황처럼 춤추며 구불구불 에워 돌아 남쪽으로 내려와 장령산이 되고 두흑산이 되고 백두산이 되고 검산이 되어 동옥저에서 멈추었다.[三韓山脈 初自蒙羅骨峴 龍飛鳳舞 逶迤而南 爲長嶺山 爲豆黑山 爲白頭山 爲劍山 止於東沃沮]」
2) 이때 금서로 지정된 서적은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 지공기(誌公記), 표훈의 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안함 노원 동중의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道證記), 지리성모(智異聖母), 하사량훈(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이 기록하고 수찬(修撰)한 1백여 권(卷), 동천록(動天錄), 마슬록(磨蝨錄), 통천록(通天錄), 호중록(壺中錄), 지화록(地華錄), 도선의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이었으며, 이후 2차례 더 금지된다.
3) 원문은 鷄國으로 되어 있으나 뜻이 통하지 않아 『삼한산림비기』에 따라 鷄園으로 고쳐 해석하였다. 鷄園이란 부처님 당시의 고대 인도의 절 이름이었다 하며, 뒤에는 그냥 사찰의 뜻으로 쓰인다.
4) 조선왕조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아래에 나오는 백동수의 아들 심진(心鎭)은 서자가 아니라 적자였고, 백동수 생전에 요절하였다. 아마 재혼하여 낳은 아들 성진(性鎭)의 착오가 아닌가 싶다.
5) 이 시는 조선왕조실록 정조11년(1787) 6월14일의 기사, 김동익 등의 반역사건 공초에도 나오는데 좀 다르다. 당시 이런 참언(讖言)이 나돌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석벽 위에 이인(異人)이 쓴 시가 있어서 ‘꽃이 그르치지 어찌 사람을 그르칠 것인가? 바람이 놀라지만 뜻은 놀라지 않네, 단지 바다에 돌이 없음이 한스럽지만 유사(流沙)가 북앵(北鸚)에 조(詔)하네.[花誤人何誤 風驚意不驚 只恨海無石 流沙詔北鸚]’이라 하였는데, 대개 3월에 거사한다는 것을 가리키며 비록 잘못되더라도 마침내는 반드시 그르치지 않을 것이니 소란스런 말이 헛되이 경동시키더라도 모름지기 놀라지 말라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6) 참설(讖說) 도참(圖讖) 참위설(讖緯說) 등의 용어는 거의 동일하게 구분없이 사용되었다. 참설은 앞날에 대한 주술적 미신적 예언이다. 도참의 도(圖)는 앞으로 일어날 일의 상징‧표시‧징후‧암시‧조짐 등을 의미하며, 참(讖)은 국가나 사람의 길흉‧화복‧성패 등을 예언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나라에선 금하였다.
원래 기원은 고대 중국의 참위설(讖緯說)이었다. 참위설은 음양오행설에 바탕을 두고 일식‧월식‧지진 등의 천지이변이나 은어(隱語)‧부호(符號) 등에 의하여 인간사회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설이다. 참(讖)은 예언이며, 위(緯)는 경전을 견강부회하여 해석한 위서(緯書 / 經 vs 緯)를 말한다. 한(漢)의 대유학자 동중서가 주장한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 *사람이 하는 바에 따라 하늘이 복이나 재앙을 내린다는 설)도 참위설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민중의 불만과 새 세상에 대한 기대가 반영된 도참설은 -특히 중국에서- 구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는 야심가에게 민중을 선동하기 위한 더없이 좋은 사상이었고, 권력의 정당성을 퍼뜨리기에도 아주 적합한 수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을 잡은 뒤에는 그것을 금지시켰던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풍수 자체가 곧 도참은 아니다. 풍수를 그렇게 이용할 때 도참이 되는 것이지.. 어쨌든 동일어는 아니다.)
【본문에서 인용한 서적들】
《산해경(山海經)》 중국 최고(最古)의 지리서(地理書)이자 신화적 상상력의 보고. 전국시대 후기의 저작으로 보임. 산의 계보와 강 이름, 거기서 나는 약초와 보석 광물은 물론, 거기에 사는 기이한 짐승과 새들을 망라하여 기록하였다.
《습유기(拾遺記)》 중국의 전설을 모은 지괴서(志怪書). 10C경.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제32책. 저자가 1783년(정조 7) 경상도 함양군 사근역 찰방으로 있을 때, 영남지방의 명승·고적과 고금인물·풍속 등에 관하여 기술한 것이다
《청구비결(靑丘祕訣)》 그 내용으로 보건대 정감록에 수록된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를 말하는 것 같다. 내용은 우리 나라 산천의 생김새와 산맥의 분포, 도읍지 등을 설명하였다. 저자를 도선 의상 등으로 거론하고 있으나 알 수 없다.
《지지(地誌)》지리서를 통털어 지지(地誌)라 하는데 어떤 지리서인지는 알 수 없다.
《파한집(破閑集)》 고려시대 이인로(李仁老 1152-1220)가 지은 시화(詩話)·일화(逸話)·기사(奇事)집. 이 속에 청학동기가 실려 있다. 이인로의 자는 미수(眉叟). 호는 쌍명재(雙明齋)
《연감유함(淵鑑類函)》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 1661-1722 재위)의 칙명에 따라 편찬된 유서(類書). 1710년에 완성. 모두 450권. 유서(類書)라 함은 일종의 백과사전을 말한다.
《단학수장(丹學修藏)》 어떤 책인지 알 수 없다. 도가(道家) 계통의 단학(丹學) 관련 책임을 짐작할 뿐..
《전도록(傳道錄)》은 곧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을 말한다. 1610년 한무외(韓無畏 1517-1610)가 찬술한 도가서(道家書). 우리나라의 도가 단학(丹學), 즉 내단수련(內丹修鍊)의 요체와 도가의 계보를 밝힌 책
《해동이적(海東異蹟)》 1666년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이 펴냄. 신선과 단학에 관한 설화를 수집하여 32명의 전기를 수록함
《제왕운기(帝王韻紀)》 이승휴(李承休 1224-1300)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시로 쓴 장편 역사시(歷史詩). 고려의 자주성을 강조. 단군신화 수록.
《설림(說林)》은 《오산설림( 五山說林)》을 말한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1556∼1610) 지음. 조선 초부터 선조 때까지의 조선조 명인들의 일화·사적·시화 등을 비롯하여 중국 시문(詩文)에 대한 평어(評語)를 수록하였다.
《지봉유설(芝峯類說)》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이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 총 3,435조목을 천문‧지리‧인사‧경서 등의 25부문 182항목으로 나누어 싣고 있다. 공리공론만을 일삼던 당시의 학계에 매몰되지 않고 고증적이고 실용적인 학문태도를 중시하였다.
《계성부(稽聖賦)》 중국 남북조 시대의 문인 안지추(531~591)가 지었다는 글. 그의 저서로는《안씨가훈(顔氏家訓)》이 유명하다.
智異山辨證說
[원문 : 한국고전번역원]
天下有三大幹龍。皆始於崑崙。分派三條。以入中國。北條出河海爲冀、燕之山。餘氣爲白頭山。流爲朝鮮諸山。而白頭。卽《山海經》所謂不咸山。作一國華蓋。自蒙羅骨峴。【在北道吉州牧】逶迤西南爲長嶺。【在甲山府】流而爲頭里山。爲咸興白德山。爲永興劍山。爲分水嶺。爲鐵嶺。流爲大關嶺。爲太白山、小白山。爲竹嶺。爲鳥嶺。二嶺之南。爲伊火峴。爲俗離山。爲水分峴。爲智異山。卽方丈山也。雄盤數百里。白頭之脈。流而止於此。故一名頭流山。古羅、濟分界之地也。《拾遺記》편001。扶桑五萬里。有磅磄山。上有桃樹百圍。萬歲一實。鬱水在磅磄山東。生碧藕長千尋편002。芝峯李睟光曰。余意磅磄與方丈音近。俗謂智異山爲方丈山云。杜甫詩。方丈三韓外。且說者以爲三神山皆在我東。而方丈爲智異。瀛洲爲漢挐。蓬萊爲金剛。自羅麗傳道如是。則或可髣髴者耶。《寒竹堂涉筆》曰。金臺庵。古刹也。梁棟承塵上金畫小龍。煙煤黯昏之中。鱗鬐爪角。蠕蠕欲動。隱起如刻鏤。決非東方凡手。壁有記文甚拙。有曰智異山。一名鳳翼山。取其象也。一名頭流山。從白頭山而爲流派故云。新羅釋義相《靑丘祕記》。頭流山。一萬文殊住世。其下歲豐民愿。《地誌》。以知異爲太乙所居。群仙所會。高麗雙明齋李仁老《破閑集》。頭留。始自北朝白頭而起。花峯萼谷。綿綿聯至帶方郡。【帶方。湖南南原府。智異東距六十里。】蟠結數千里。環山而居者十餘州。歷旬月可窮其際畔。佔畢齋金公宗直《遊頭流山錄》。岳陽縣之北曰靑鶴寺洞。其東曰雙溪寺洞편003。《地誌》。頭流洞府。盤互深鉅。土性肉厚膏沃。一山皆宜人居。內多百里長谷。往往有人所不到處。不應官稅。地近南海。氣候溫暖。山中多竹。又多柿栗。自開自落。撒黍粟於高峯之上。無不茁茂。村居與僧居相雜。農功不勞而周足。而山之陽。有花開洞、岳陽洞。皆人居。而山水甚佳。舊傳有萬壽洞、靑鶴洞。萬壽洞。卽今九品臺。靑鶴洞。卽今梅溪。西有華嚴寺、燕谷寺。南有神凝寺、雙溪寺。山北咸陽郡地。有靈源洞、君子寺、鍮店村。【南師古爲福地】又有碧霄雲、楸城洞。俱勝地。智異以北。澗水合爲臨川。爲龍遊潭。到郡南嚴川。沿溪上下。泉石竝絶。竝西南局於蟾津上流。大抵登中峯。亦土峯也。郡人由嚴川而上者。以北第二峯爲中。自馬川而上者。以甑峯爲第一。此爲第二。故亦稱中焉。歷甑峯抵沮洳原。原在山之脊。而夷曠可五六里。林藪蕃茂。水泉縈廻。可耕而食云。自雲峯縣。距二十五里銅店村而上。則爲般若峯也。其最上巓爲天王峯。距平地可七十里。計以步。則爲二萬五千二百步。度以尺。則爲十五萬一千二百尺。扶輿磅礴。上于雲霄。故躋其絶頂者。雖盛夏襲裘。猶寒。罡風刮面。而頂上不過可坐十人之地也。一山之最有名者。靑鶴洞是已。麗朝雙明齋創言。而仍膾灸天下者。淸康熙收入所纂《淵鑑類函》故也。詳見《靑鶴洞辨證說》。岳陽洞편004。山水甚佳。高麗時韓惟漢。見李資謙橫甚。知禍將作。棄官挈家。隱智異山。朝廷物色之。拜官召之。惟漢仍逃隱不見於世。莫知所終。或以爲仙云。《丹學修藏》。新羅崔承祐、金可紀、僧慈惠三人入唐。從終南天師申元之遊。遇仙鍾離將軍。得內丹返還之訣。東還。以口訣授崔孤雲及李淸。淸入頭流山。修煉仙去。以訣授弟子明法。解化。以訣傳上洛君權淸。淸佯狂爲僧。修煉得道。隱於頭流山。與孤雲俱在此山。隱現無方。詳見《傳道錄》中。【《傳道錄》曰。僧慈惠與崔承祐入唐편005。受道要於申天師元之。東歸。以口訣授崔孤雲、李淸。淸入頭流山修煉。得道昇去。傳其道於僧明法。三十二解去。明法授上洛君權淸。淸편006佯狂爲僧。得道隱於頭流山。與孤雲隱現無方。逮元時。有偰賢自元來東。見上洛於般若峯。得其正法云。】南趎學修煉法登第。當己卯士禍。謫谷城仍居焉。嘗裁書送奴入智異山靑鶴洞。見綵閣中有二人對棋。一則孤雲。一則慈惠。奴留一日。受答書而還。始以二月入山。草木未生。及出乃九月初也。詳《海東異蹟》。智異山中峯聖母廟。三間版屋。所謂聖母石像。項有缺痕。我太祖捷引月之歲。倭賊入此峯。斫之而去。後人和黏屬之。乃釋迦之母摩耶夫人也。嘗見麗朝李承休《帝王韻紀》。聖母命詵師注云。今智異山天王。乃指麗太祖之妣威肅王后也。麗人習聞仙桃聖母之說。欲神其系。創爲是說。仙桃聖母。三國史。聖母祠在慶州西岳仙桃山편007。聖母。漢宣帝女。名娑蘇。早得神仙之術。來止海東。久而不返。遂爲神。世傳羅祖赫居世。乃聖母之所誕也。故中國人讚。有仙桃聖母娠賢肇邦之語。李眉叟仁老《集》云。侍中金富軾嘗朝宋。詣佑神館。見一堂設山仙像。館伴王黼曰。此貴國之神。君等知之乎。遂言曰。古有帝室之女。不夫而孕。爲人所疑。乃泛海扺辰韓。生子爲海東始王。後爲天仙帝女爲地仙。長在仙桃山。此其像也。雙溪寺沿溪石壁편008。多刻孤雲大字。世傳孤雲得道。至今往來於伽倻、智異兩山間。宣廟辛卯年間。寺僧得一紙於巖石편009間。有絶句一首曰。東國花開洞。壺中別有天。仙人推玉枕。身世倏千年。字畫如新。其字法與世傳孤雲筆同焉。徐花潭先生敬德。登頭流山巓。見羽衣仙事。見車五山《說林》及《靑鶴洞辨證說》。今不復贅。考《五洲衍文長箋》。此是頭流山仙蹟也。又有異書。亦可作此山之逸史也。我太祖在潛龍時。有僧踵門獻書云。得於智異山巖石之中。有木子乘猪下。【太祖乙亥歲誕降】復正三韓境之句。使人迎之則已去。尋之不得見。詳野史。此外黃冠緇髡之著述。互相傳授者。自三韓之世以至今日。更不知有幾許種。則但收已見者。《智異聖母》。【書名】世祖丁丑。諭八道觀察使曰。自古朝鮮祕詞大辯說及《智異聖母》、《至道說》、《漢都讖記》等書十九種。不宜藏於私處。如有藏者。許令進上云云。則《智異聖母》。又是書名也。智異山隱者方書中。有造蔘法。亦是奇書而祕傳者。石井崑、水谷大勝、銅店村、南頭流洞。竝玆山之洞天福地。天慳地祕處也。詳見《靑鶴洞辨證說》。今不贅。山之災異。亦有可記者。歲甲戌霖雨。智異山崩頹。樹木盡拔。虎豹漂死。【時。純廟十四年。】夏大水。嶺南人以爲振古所無。至於草木蟲鳥有異。亦不可無傳。新羅興德王三年戊申。遣大廉如唐。得茶子來。王命植于智異山。未知至今遺種也否。又有唐蔥。幹木根蔥。傳言得種於唐播種。故名唐蔥。竹實曰(竹+復)。我東太宗朝。關東江陵府大嶺山。竹實狀如小麥。黏如薏苡。味如蜀黍。村人摘取爲酒食云。智異山竹亦多結實。結實則死。或言竹若結實則年荒。而惟智異之竹。年年結實。早採者。色淡黃性粘。晩採者。色深黃性澁。味似小麥。山僧以爲糧。按《稽聖賦》。竹布實而根枯。蕉舒花而株枯。言其必死者。以智異竹實不死見之。乃是謬說也。且竹生米於歉荒之說。亦非實蹟也。《寒竹堂涉筆》。智異山松影蔭潭溪水。化爲魚。斑斕如袈裟。名爲袈裟魚。佔畢齋詩。達空寺下水梭花。紫鬣斑鱗味更嘉。按達空寺在雲峯縣。佛氏以魚爲水梭花。又見李睟光《芝峯類說》。又曰。知異産靑玉菜、紫玉菜。乃莖如細箸。開白花。山僧乾儲。烹而爲羹爲茹。味甚淸淡。名亦奇雅。野史。光海君十二年庚申十月。黑鳥自日本滿空過海上。而集智異山中。相戰屢日。死者多積。臭聞山外。餘鳥向北飛去。此山辨說。與《靑鶴洞辨證》。文多參互。卽智異靑鶴爲一山故也。覽者勿怪其重複焉。佔畢齋《遊頭留山錄》。多有可考。故略記之。佔畢齋金先生宗直편010。爲咸陽郡守。壬辰仲秋。同兪㵢溪好仁、曺梅溪偉。遊頭流山。有遊錄。今略記之。戊寅歷嚴川憩花巖。至地藏寺舍馬。策杖一里許。有巖曰歡喜臺。其下千仞。俯見金臺、紅蓮、白蓮諸刹。訪先涅庵。抵古涅庵。日已曛。議論臺在其西。有石窟。老宿優陀居之。嘗與三涅僧。論大小乘頓悟。仍以爲號。余試險極勞。熟睡。己卯黎明。行度一岡。此九隴之第一也。連度三四。得一洞府。寬閑奧邃。行二十里。達于義呑村。度九隴。由山脊行。不數里。循脊南。乃晉州之地。抵淸伊堂。以板爲屋。自此至永郞岾。道極懸危。日已過午。始登岾。到此仰視天王峯。永郞新羅花郞之魁。領三千徒。遨遊山水。嘗登此峯。故以名。少年臺。在峯側。蒼壁萬尋。山之東西谿谷無雜樹。皆杉檜松柟。枯死骨立者。三之一。其在岡脊者。困於風霧。枝幹皆左靡拳曲。雲髮飄颺。歷蟹踰嶺。旁有船巖。登中峯。戴土而端重。詣聖母廟。三間板屋。所謂聖母石像。項有缺畫。太祖捷引月之歲。倭登此峯。斫之而去。後人和黏屬之。釋迦之母摩耶夫人也。嘗讀李承休《帝王韻紀》。聖母命詵師註云。今智異天王。乃指高麗太祖之妣威肅王后也。高麗人習聞仙桃聖母之說。欲神其君之系。創爲是談。承休信之。筆之《韻紀》。日且昏。陰風橫吹。嵐霧坌入。衣冠皆潤。枕藉祠內。寒氣徹骨。更襲重綿。庚辰。先遣從者於香積寺具食。石矼滑甚。下數里許。有鐵鎖路甚危。穿石穴而出。投香積。無僧已二載。出門前편011盤石。望薩川蜿蜒。而諸山及海島。或全露或半露。辛巳。曉日出。霞彩映發。遂促晨餔。徑往石門。入聖母廟。時因新霽。四無纖雲。是山自北而馳。至南原。首起爲般若峯。東迤幾二百里。至此峯。更峻拔。北蟠而窮焉。雉堞若曳者。咸陽之城。白虹橫貫者。晉州之水。靑螺矗立편012者。南海巨濟之群島。若山陰、丹谿、雲峯、求禮、河東。皆隱於襞積之中。山之在北而近。曰安陰黃石。曰咸陽鷲巖。遠。曰咸陰德裕。曰公州雞龍。曰錦山走牛。曰知禮修道。曰星州伽倻。東北而近。曰山陰皇山。曰三嘉紺嶽。遠。曰大丘八公。曰安東淸涼。在東而近。曰宜寧闍崛。曰晉州集賢。遠。曰玄風毗瑟。曰淸道雲門。曰梁山圓寂。東南而近。曰泗川臥龍。在南而近。曰河東甁要。曰光陽白雲。西南而遠。曰興陽八顚。在西而近。曰雲峯荒山。遠。曰光州無等。曰扶安邊山。曰羅州錦城。曰高山威鳳。曰全州毋岳。曰靈巖月出。西北而遠。曰長水聖壽。或若培塿。或若飣餖。而惟東之八公。西之無等。在諸山稍爲穹窿也。雞立嶺以北。縹氣漫空。對馬島以南。蜃氣接天。眼界已窮。不復了了。亭午穿石門而下。登中山。亦土峯也。郡人由嚴川而上者。以北第二峯爲中。自馬川而上者。甑峯爲第一。此謂第二。故亦稱中焉。歷甑峯抵沮洳原。在山之脊。而夷曠可五六里。林藪蕃茂。水泉縈廻。可耕而食。暮登唱佛臺。其下無底。其上無草木。俯望荳原串、麗水串、蟾津之委。岳陽縣之北。曰靑鶴寺洞。其東。曰雙溪寺洞。崔孤雲嘗遊于此。宿于靈神寺。寺北有石迦葉。世祖時。每遣中使行香。其項有缺。亦爲倭所斫。迦葉殿之北峯。有二巖突立。所謂坐高臺也。法堂有蒙山畫幀。其上有贊云。頭陀第一。是爲抖擻。外已遠塵。內已離垢。得道居先。入滅於後。雪衣雞山。千秋不朽。榜印淸之小篆。乃匪懈堂之三絶也。由直指而下。面東仰視。天王峯若咫尺矣。旣下峻趾。曳杖而行。谷口有野廟。遂更衣乘馬。抵實宅里。踰登龜岾。徑還郡齋。淸聖朝《淵鑑類函》。載朝鮮智異山中有靑鶴洞。其境虛曠。四隅皆良田沃壤。宜播植。惟靑鶴棲其中。故以爲名。嚴川寺。我王考《寒竹堂涉筆》。癸卯六月편013。【謹按正廟八年】 余遊頭流山。歷入嚴川寺。問古蹟。寺僧獻一冊。載仁穆大妃爲亡弟追福願文。又曰。癸卯六月二十三日。與子光霤游頭流山。宿于君子寺。有揭板曰。天嶺之南。五十許里。有智異山。東麓下편014大溪邊。有君子寺。陳大建十一年戊戌。新羅眞平王潛邸。避位居此。因生太子而還國。遂捨家爲寺。以是名焉。又曰。晉州斷俗寺。有神行禪師碑。釋靈業書。雙溪寺편015有眞鑑國師碑。崔致遠撰書。新羅義相大師《靑丘祕訣》。頭流之山。隱居者多歸之。卓犖奇偉之士。世世多産。談道雞國演法猴地之士。亦萃于玆。甚盛。正廟朝。命申鴻周、白東脩。搜捕智異賊徒時。白公於石壁上。有坼字一紙粘焉。其紙坼字曰。八一自有尾。小一几口弓虎。禾千十木。囗王丁口。目几禾多。其下又書二句詩曰。海外限無石。流沙詔嬰洲。花誤人不誤。風驚意不驚。其下又有示八十單白春敎于寄年寄月寄日揭來進呈翻本留其家其道。未知何謂。歲純廟庚辰冬。白公庶子心鎭袖來示之。故怪而藏之。其翌淸道光帝卽位。改元曰道光。始解坼字。八一自有尾。合書則道字也。小一几。合書則光字也。口弓虎。合書則號字也。禾千。合書則秊字也。十木。合書則末字也。囗王。合書則國字也。丁口。合書則可字也。目几。合書則見字也。禾多。合書則移字也。奇其豫知有道光年號。然其下義。未知爲何意也。及當己酉。憲廟昇遐無嗣。今上承統。則適當淸帝道光年號末也。天命意移於當宁矣。歲庚戌元月淸帝崩。則非道光末耶。大抵頭流隱居者。有前知術。預作坼字讖說以示。寔是怪且異也。故付辨證之末。高麗鄭圃隱先生夢周《送智異山智居寺住持覺冏上人》。南遊何處聽溪聲。智異山高萬丈靑。春院日長無個事。沙彌來學妙蓮經。
【원문註】 (*원문에 딸린, 고전번역원에서 붙인 註)
[편-001]《拾遺記》 : 『拾遺記』부터 『或可髣髴者耶』까지는 李睟光 撰 《芝峯類說 卷2·山》에 보인다.
[편-002]尋 : 《芝峯類說》에는 『常』으로 되어 있다.
[편-003]岳陽縣之北曰靑鶴寺洞其東曰雙溪寺洞 : 아래의 『農功不勞而周足』과 『而山之陽』 사이에 있었는데, 《靑鶴洞辨證說》에 근거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편-004]岳陽洞 : 『岳陽洞』부터 『或以爲仙云』까지는 李重煥 撰 《擇里志·山水》에 보인다.
[편-005]僧慈惠與崔承祐入唐 : 『僧慈惠與崔承祐入唐』부터 『得其正法』까지는 韓無畏 撰 《海東傳道錄》에 보인다.
[편-006]淸 : 《海東傳道錄》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편-007]聖母祠在慶州西岳仙桃山 : 『聖母祠在慶州西岳仙桃山』부터 『此其像也』까지는 洪萬宗 撰 《海東異蹟·赫居世》에 보인다.[편-008]雙溪寺沿溪石壁 : 『雙溪寺沿溪石壁』부터 『其字法與世傳孤雲筆同焉』까지는 《擇里志·山水》에 보인다.
[편-009]石 : 《擇里志》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편-010]佔畢齋金先生宗直 : 『佔畢齋金先生宗直』부터『徑還郡齋』까지는 李德懋 撰 《靑莊館全書 卷69·佔畢齋遊頭流山》에 보인다.
[편-011]前 : 《靑莊館全書》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편-012]立 : 《靑莊館全書》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편-013]癸卯六月 : 『癸卯六月』부터 『崔致遠撰竝書』까지는 《靑莊館全書 卷69·寒竹堂涉筆下》에 실려 있는 여러 글에 보이는데, 嚴川寺에 관해선 《嚴川古蹟》에, 君子寺에 관해선 《君子寺》에, 斷俗寺와 雙溪寺에 관해선 《羅麗石刻》에 각각 보인다.
[편-014]下 : 《靑莊館全書》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편-015]寺 : 《靑莊館全書》에 근거하여 보충하였다.
화담 서경덕 선생이 두류산 꼭대기에 올랐을 때 날개옷을 입은 신선을 본 적이 있었는데, 오산 차천로의 《설림(說林)》과 청학동변증설에 보이므로 지금 다시 군더더기말을 덧붙이지 않으니 《오주연문장전》을 살펴보라.
이러한 것들은 두류산 신선들의 자취이며 또 이서(異書 *진기한 책)들도 있으니 또한 이 산의 일사(逸史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될 만하다.
우리 태조대왕께서 잠룡(*즉위하기 전) 시절에 어떤 스님이 문앞에 와서 책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지리산의 바위 속에서 얻었다고 하였다. 거기에는 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태조는 을해년(乙亥)에 나셨다.](*木子乘猪下는 돼지해에 태어난 李씨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다시 삼한의 지경을 바로잡을 것이라는 말이 있었다. 사람을 시켜 맞이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가버려 찾지 못하였다. 야사(野史)에 상세히 나온다.
이 외에도 도사와 승려들이 저술하여 서로 전하는 것들이 삼한시대에서 오늘날까지 몇 종이나 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 다만, 거두어 가버려 볼 수 있는 것은 《지리성모(智異聖母)》[서명(書名)이다]이다.
세조(3년) 정축년(1457)에 팔도의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사(古朝鮮祕詞)》부터 《대변설(大辯說)》과 《智異聖母》《지도설(至道說)》《한도참기(漢都讖記)》등 19종의 서적들은 사사로이 간직하기에 마땅치 않으니 만약 간직한 자가 있으면 진상하게 하라.”2)고 한즉 이때의 《지리성모》가 바로 이책 이름이다.
지리산 은자들의 방서(方書 *신선술에 관한 책) 속에는 조삼법(造蔘法 *수삼을 백삼이나 홍삼으로 만드는 방법)도 있는데 이러한 것들 또한 기서로서 비밀히 전하는 것이다.
석정곤(石井崑) 수곡대승(水谷大勝) 동점촌(銅店村) 남두류동(南頭流洞)은 모두 이 산의 동천 복지(洞天福地)로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겨놓은 곳이다. 『청학동변증설』에 상세히 있으므로 더 이상 첨언하지 않는다.
청학동변증설
이런 글도 있었군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 편] 혹자는 말하기를 西述聖母(서술성모)가 혁거세왕을 낳았기 때문에 中華人(중화인)들이 선도산성모를 찬양했다. 는 기록이 있고 성모(聖母)가 선도산(仙桃山)에 계시다가 동국(東國:신라)으로 가서 신라의 시조 혁거세 성인(聖人)을 낳았기 때문에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를 찬양했다. 는 기록이 엄존하고 있습니다. 또한 상서스러운 게룡(鷄龍)이 나타나서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것도 西述聖母(서술성모)님께서 인간 세상에서 몸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겠는가? 또 [환단고기의 고구려 본기 제 6] 사로(斯盧)의 시조 혁거세왕은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의 아들이다.라고 명확히 기록돼 있습니다.
선도성모(仙桃聖母) 수희불사(隨喜佛事)[삼국유사 제5권 감통 제 7]
본문:[仙桃山神母 本中國帝室之女,名娑蘇] : 선도산 신모(神母)는 본래 중국땅(북부여 해모수 황제)의 궁전에 계셨던 여인(하백의 딸 유화)이며 또한 이름은 사소(娑蘇)이다. 일찍이 신선 술법을 깨우쳐 해동(海東:신라)에 들어와 오래 머물며 돌아가지 않았다. 그 성모(聖母)가 시초로 진한(辰韓:신라)에 도착하여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의 시조 임금이 되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본문에서] 史臣(사신) 김부식은 정화년(政和年)에 사신으로 송(宋)나라에 들어갔는데 대궐의 우신관(佑神館)에 一堂(한당)을 설치하고 여선상(女仙像)을 모셔 놓은 곳을 보았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輔)가 말하기를 이 상은 귀국의 신(神)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
이윽고 왕보(王輔)가 말하기를 고대 중국제실지녀(中國帝室之女(중국 북부여 황제의 궁전에 계셨던 여인)이 바다 건너 진한(辰韓진한:신라)에서 아들(혁거세)을 낳아 해동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늘 선도산(仙桃山)에 계셨는데 그분의 상(像)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의 시조편]에서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아 북 부여를 떠나 동부여(가섭원)를 개국하게 된다.
[상기의 본문을 고찰]해 보면 북부여 황제 해모수의 부인은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은 유화(柳花), 또한 사소(娑蘇)이며, 이 여인을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 혹은 동신성모(東神聖母)라 칭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과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의 아버지는 해모수이며, 어머니는 다 같이 하백의 딸이며, 이름은 [유화=사소]입니다. 곧 박혁거세와 고주몽은 형제로 명확히 입증되었습니다.그리고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는 하백(河伯)의 딸이며,곧 여와 하느님의 외 증손녀로 입증돼 있습니다.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 사소(娑蘇)
비서(秘書)의『地異聖母河沙良訓(지리성모하사량훈)』은 바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의 어머니 이신 사소(娑蘇)에 대한 기록으로 명확히 입증했습니다. 通天錄(통천록) 본문에 말세 때를 맞이하여 여와(女媧)하느님의 자녀(子女)들을 만나서 신천지(新天地)세상이 이루어진다는 요지입니다.그리고 通天錄(통천록) 본문 중 진공가향(眞空家鄕)은 극락세계의 별칭이고,무생노모(無生老姥)는 두모천존(斗姥天尊), 여와(女媧)옥황상제의 칭호입니다.
하느님의 역사(役事) 통천록(通天錄)
通天錄(통천록) 序文(서문)
虔心神誌賜訓章(건심신지사훈장) 文留疆土傳十方(문유강토전시방) 仁人君子悟的透(인인군자오적투) 安國齊家可治邦(안국제가가치방)하였느니라 :
敬虔(경건)한 마음으로 史官神誌(사관신지) 降靈訓(강령훈)으로 이 文章(문장)을 겨레에게 賜(사)하노라 華麗江山(화려강산) 이 疆土(강토)에 이 글월을 保存(보존)하여 十方世界(시방세계) 온 누리에 通天錄(통천록)을 傳(전)하도록 할지로다. 禮儀東方(예의동방) 사람은 사람마다 君子(군자)로서 大悟大覺(대오대각) 할 것이며 透徹明理(투철명리)하고 나서 우리나라 安定(안정)하고, 집집마다 整齊(정제)하여 나아가서 天下萬邦(천하만방)을 다스림이 있으리라
任辰五月六日上(임진오월육일상) 午巳時香山壇(오사시향산단) : 神州日月重沐新(신주일월중목신):法傳眞求育化人(법전진구육화인):鳳棲鷄方入明聖(봉서계방입명성) :
歲次壬辰(세차임진) 五月六日(오월육일) 上午巳時(상오사시) 香山壇(향산단)에 降臨(강림)하여 感靈(감령)으로 賜訓留文(사훈유문) 하는 바라 東勝神州(동승신주) 이땅 위에 聖日聖月(성일성월) 照臨(조림)하니 三桓神聖(삼환신성) 重出世(중출세)로 沐浴刷新(목욕쇄신) 보리로다.
大乘大法(대승대법) 傳受(전수)하니 天道眞理(천도진리) 求得(구득)하여 白衣民族(백의민족) 仁人君子(인인군자) 三千萬民(삼천만민) 育化(육화)하여 鳳鳴朝陽(봉명조양) 옛말대로 鷄方位(계방위)에 棲息(서식)하니 白陽運(백양운)을 掌握(장악)하신 大明聖人(대명성인) 납시리라
駕到金歸振王門(가도금귀진왕문) : 玉兎金烏定震脫(옥토금오정진탈) :
德昭基當鬼神欽(덕소기당귀신흠) : 潮坎虛火來河性(조감허화내하성):
西方金運(서방금운) 이어받아 聖祖帝駕(성조제가:여와(女媧) 옥황상제 ) 到臨(도림)하니 三桓時第(삼환시제) 古風(고풍)대로 四王門(사왕문) 이 振作(진작)이라 밝은 저달 玉兎仙(옥토선)도 더운 저해 金烏佛(금오불)로 大東震國(대동진국) 이 나라에 解脫(해탈)하고 坐定(좌정)하네
人間八德(인간팔덕) 昭昭(소소)하여 나라기틀 脘然(완연)하니 山川草木(산천초목) 鬼神(귀신)들도 欽仰(흠앙)하여 마지않네 北方坎水(북방감수) 海潮(해조)같고 南方離火(남방이화) 虛誕(허탄)하니 大河洪水(대하홍수:노아의 대홍수 때와 같은) 性格(성격)으로 내렸음이 있으리라
連道根緣獨超群(연도근연독초군) :聖駕離山享山運(성가이산향산운)
:線穿經緯若疏綸(선천경위약소륜) :
眞天道(진천도)에 連結(연결)하고 上古佛緣(상고불연) 根源(근원)하니 自修自性(자수자성) 獨立(독립)하여 諸邦群(제방군)을 超越(초월)하리라. 聖(성)스러운 우리組駕(조가) 白天運(백천운)이 九離西山(구리서산) 天地相應(천지상응) 精氣(정기)모아 崑崙山運(곤륜산운) 享受(향수)하여 北極經度(북극경도) 日月緯度(일월위도) 經緯兩線(경위양선) 貫穿(관천)하고 倫理道德(윤리도덕) 註釋(주석)하니 眞儒綱常(진유강상) 復興(부흥)일세
珠璣滿斗壬盤龍(주기만두임반용) : 飛鷄鳴谷甦夢津(비계명곡소몽진) :吾神人諭通天錄(오신인유통천록) :秉勅御謂厥聖訓(병칙어위궐성훈) :
紫金之觀(자금지관) 珠璣珍寶(주기진보) 紫微斗(자미두)에 滿載(만재)하니 北方壬癸(북방임계) 水運(수운)이어 大同世界(대동세계) 龍盤(용반)이라 金鷄三唱(금계삼창) 때가 와서 玄牝谷神(현빈곡신:여와 하느님) 鳴動(명동)하니 꿈 결속에 잠자던 [대한민국] 衆生(중생)들이 잠을깨어 蘇生(소생)한다. 이에 내가 神人(신인)으로 合發(합발)하여 到檀(도단:단군시대 일어났던 대홍수와 같은 때가 이르러), 萬古不易(만고불역) 通天錄(통천록)을 諭示(유시)하여 줌이니라 上天玉帝(상천의 여와(女媧) 옥황상제) 勅命(칙명)으로 이와 같이 일러주니 前古未聞(전고미문) 이 聖訓(성훈)을 간직하고 遵守(준수)하라--以上(이상)은 通天錄(통천록) 序文(서문)입니다.
通天錄(통천록) 本文(본문)
東夷九紫宮(동이구자궁) :神誌載壬辰(신지재임진) :興衰天之運(흥쇠천지운) : 九變震壇云(구변진단운) :云(운)하니라開國半萬載(개국반만재) :三聖御檀林(삼성어단림) :花開三千載(화개삼천재) : 箕子始彛倫(기자시이륜) :
禮儀東方(예의동방)의 나라는 白衣大弓(백의대궁) 三八木(삼팔목)이 春生之理(춘생지리)로 이루어진 九紫宮(구자궁:하느님이 게시는 곳)은 紫金之觀(자금지관) 天宮(천궁)이라 瑞氣(서기)어린 이 땅위에 神誌(신지)나는 降臨(강림)하여 通天錄(통천록)을 실어주니 때는 壬辰(임진) 午月(오월)이라
[국가는] 때를 따라 興亡盛衰(흥망성쇠) 變化無窮(변화무궁) 하므로서 無常(무상)함이 짝이 없는 氣象天(기상천)의 道(도)인지라 靑陽(청양),紅陽(홍양) 뒤를 이어 白陽天世(백양천세) 이르듯이 河圖(하도),洛書(낙서) 뒤를 이어 九變震壇(구변진단)도 流水(유수)같은 歲月(세월)이라 흘러 흘러 또 흘러서 그 옛날에 古朝鮮(고조선)을 開國(개국)한지 半萬年前(반만년전) 桓因(환인),桓雄(환웅) 桓儉(환검),三桓(삼환)은 神聖(신성)했던 神市時代(신시시대) 三聖一體(삼성일체)하신 聖祖(성조) 檀木下(단목하)에 나리시다.
三葉靑陽(삼엽청양) 지나가고, 五葉紅陽(오엽홍양) 때를 만나 洛書運(낙서운)의 꽃이 핀지 於焉間(어언간)에 三千載(삼천재:석가모니 불(佛:부처님)의 구제 때)라 周武王(주무왕)때 箕子(기자)가 遼東(요동) 땅에서 [조선왕]으로 封(봉)해 있을때 그동안은 箕子(기자)가 다스린 朝鮮(조선)은 倫理道德(윤리도덕)이 매우 興(흥)하였나니라.
白頭天一水(백두천일수) :地六成爲坤(지육성위곤) :水晶天一化(수정천일화) :震魯設杏林(진로설행림) :垂敎蹟百世(수교적백세) : 傳世七十孫(전세칩십손) : 億刦千生在(억겁천생재) :俎豆祝芳芬(조두축방분) :慶弔看晋象(경조간진상) : 看望(간망)하라 羲皇獨天賓(희황독천빈) :震宮排卦象(진궁배괘상) :
崑崙山(곤륜산)의 一支脈(일지맥)이 海東朝鮮(해동조선)으로 건너와서 이루어진 白頭山(백두산)의 天池(천지)에서 天一生水(천일생수) 對(대)를 지어 地六成之(지육성지) 花開結實(화개결실)하는 理致(이치)로 地爲坤(지위곤)의 地上天國(지상천국) 白陽大運(백양대운) 이어받아 結晶(결정)하여 나타나는 水之晶(수지정)은 水晶(수정)으로 天一水(천일수)의 和合(화합)이라 一之水運(일지수운) 그 아닌가 震地配對(진지배대) 魯地(노지)로서 奎星所照(규성소조) 必文興(필문흥)을 이어받은 孔子化身(공자화신) 杏林說壇(행림설단) 하리로다.
杏林(행림)은 곧 眞儒(진유)이라 新倫理(신윤리)를 垂敎(수교)하니 復興(부흥)하여 내려감이 百世(백세)인즉 三千歲(삼천세)라 子子孫孫(자자손손) 世世代代(세세대대) 順理繼承(순리계승) 傳之(전지)하니 七十大(칠십대)인 七十孫(칠십손)을 傳世(전세)함이 定命(정명:하느님의 천명으로 정해진 일)이라.
百千億劫(백천억겁) 닦았으니 正法留世(정법유세) 六萬載(육만재)요 한平生(평생) 六十年(육십년)을 千生載(천생재)도 六萬歲(육만세)라 百千萬億(백천만억) 衆生(중생)들이 俎豆祭器(조두제기) 갖춰놓고 釋奠祭(석전제)로 祝(축)하리니 遺臭遺芳(유취유방) 芬芬(분분)토라
人間世上(인간세상)의 慶事(경사),喪事(상사)는 때를 따라 일어나니 卦象變化(괘상변화) 進化(진화)함을 精神(정신)차려 太古天皇(태고천황) 伏羲(복희) 성인(聖人)은 先天八卦(선천팔괘) 그렸으니 홀로 天命(천명) 이어받아 寅賓(인빈)으로 出世(출세)하여 三震宮(삼진궁)의 變遷(변천)함을 暗暗裡(암암리)에 看破(간파)하고 白陽天盤(백양천반) 九宮八卦(구궁팔괘) 다시마련하여 인간 세상에 알리려 함이로다.
충청도에서 忠靈祭(충령제)를 모실 날이 있으리라,
玄關爲杏林(현관위행림),忠淸忠靈祭(충청충령제) :中心建國?중심건국훈) :白衣宇宙一(백의우주일) : 神壇無二民(신단무이민) :耶蘇稱西聖(야소칭서성) :尊稱(존칭)하고 釋迦印度尊(석가인도존) :印度(인도)에서 尊稱(존칭)이니封疆稽方國(봉강 계방국) :禮儀遨邦隣(예의오방린), 孔昭率皇甫(공소솔황보), 伯夷曾聘仁(백이증빙인)
宇宙(우주)에서 玄關(현관)이요 世界(세계)에서 玄關(현관)되는 三千里(삼천리)의 華麗江山(화려강산) 杏林(행림)되어 나타난다. 忠孝淸士(충효청사) 忠靈(충령)들이 祭祀(제사)받고 나오리니 忠淸道(충청도)서 忠靈祭(충령제)를 모실 날이 있으리라, 九宮圖(구궁도)의 中心(중심)이 되는 一六八白(일육팔백) 運度(운도)따라 白衣東方(백의동방) 建國功臣(건국공신) 그 功蹟(공적)을 敍勳(서훈)하네 [현충사가 건립된 것은 이미 하느님의 뜻으로 예정된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白陽天盤(백양천반) 白衣民族(백의민족) 白陽應運(백양응운) 이루나니 宇宙第一(우주제일) 되고 보면 그 竟地(경지)가 無比(무비)로다. 東勝神君(동승신군:태호복희 성인(聖人이) 세워주신 배달나라 震檀國(진단국)은 本來(본래)부터 한겨레니 두 百姓(백성)이 아니로다.
東方(동방)에서 出生(출생)하고, 西方(서방)에서 敎(교)를 이룬 그리스도 예수님은 西聖(서성)이라, 南方火德(남방화덕) 佛敎(불교)이룬 釋迦牟尼(석가모니) 如來佛(여래불)은 天上天下(천상천하) 唯我獨尊(유아독존) 上天(상천)에서 按排(안배)하여, 過去仙佛(과거선불) 封土(봉토)하고 方位(방위)따라 그 나라에 머므르게 함이러니 禮儀東方(예의동방) 吾國(오국:대한민국)으로 禮(예)를 갖춰 찾아오시니라,
이웃나라 이분네들 반갑게도 맞아들여 魯國孔子(노국공자) 五十二世(오십이세) 其孫孔昭(기손공소) 檜原君(회원군)은 皇甫氏(황보씨)를 거느리고 恭愍王時(공민왕시) 來朝(내조)하고, 孤竹君(고죽군)의 遺子孫(유자손)인 友愛(우애)깊은 伯夷叔濟(백이숙제) 또한 일찍 招聘(초빙)되어 仁人國(인인국)에 오게되다.
지구의 子午線(자오선)이 寅申線(인신선)으로 바뀐다.
道法生仁義(도법생인의) : 信果結韓民(신관결한민) : 三聖復御世(삼성부어세) : 道德敎域民(도덕교역민) :天地始同盟(천지시동맹) :牛馬祭神君(우마제신군) :烏ꟙ奠歐亞(오토전구아) : 收圓子午針(수원자오침) :焚檀神人接(분단신인접) :降諭顯神人(강유현신인) :寅賓方出日(인빈방출일) : 啓明始黎民(계명시여민) :人智(인지)또한 啓明(계명)이라草昧由天造(초매유천조) :浮雲奚拂份(부운해불빈) :
天道地道(천도지도), 人道大道(인도대도), 玄玄妙妙(현현묘묘) 그 道法(도법)은 五常(오상) 仁義禮智信(인의예지신)을 낳게 하여 주었으니 中央土運(중앙토운) 중 信(신)의 果(과)는 八白艮山(팔백간산) 運(운)을 따라 大韓民族(대한민족) 사는 땅에 結實(결실)하게 되었노라
三皇後身(삼황후신)이 三佛(삼불) 三神(삼신)이니 天皇神祖(천황신조:여와(女媧)하느님과) 一體(일체)로다. 三敎(삼교:불교,도교,유교)에서 설법하신,五行(오행) 三聖(삼성:석가,노자,공자)이 다시 出世(출세) 하시니라
天有五行(천유오행) 地有五方(지유오방) 人有五常(인유오상) 道(도)와 德(덕)을 우리나라 百姓(백성)들에게 가르침을 베푸러서 天理地理(천리지리) 人性理(인성리)로 天人合一(천인합일) 되고 보니 東西南北(동서남북) 滿天下(만천하)가 道德(도덕)으로 盟銴(맹세)하고, 黃牛祖師(황우조사) 耕經緯(경경위) 白馬師尊(백마사존) 震龍台(진용태)로 黃牛白馬(황우백마) 出世(출세)하여 檀君聖祖(단군성조) 祭(제)지내다.
天光日月(천광일월) 陰陽之象(음양지상) 金烏玉ꟙ(금오옥토) 別有種(별유종)을 西歐(서구)에는 奠居烏(전거오)요 東亞(동아)에는 奠居兎(전거토)라 六萬年前(육만년전) 開天時(개천시)요 午終此會(오종차회) 天收時(천수시)라 子午針(자오침)을 收圓(수원)하고 寅申線(인신선)으로 교환하여 설치한다.
註:일년의 춘하추동(春夏秋冬) 4계절은 시종(始終)이 있습니다. 우측도에서와 같이 남방 화국(火局)의 사오미(巳午未) 중에 오(午)는 여름계절의 종(終)이고, 곧 금국(金局) 신유술(申酉戌)로 지구의 기틀이 바뀌어 진다는 뜻입니다.그리고 千年은 소변(小變)이고 3천년은 우주적 대변역(大變易)기에 해당합니다.
[대한민국은 전국] 坊坊谷谷(방방곡곡)에 道壇(도단)을 차려서 焚檀(분단:제단에 분향(焚香)함으로서 여러신들이 感天(감천)하시니 神人合一(신인합일) 辦事(판사)하고, 白陽金線(백양금선) 接(접)하니라.[지구에 살고 있는] 火宅衆生(화택중생)들의 可憐(가련)함을 차마 볼 수 없는지라 天時(천시)에 따라 諭示(유시)하니 神人合發(신인합발) 顯化(현화)로다.
寅方東元(인방동원) 首出仁冠(수출인관) 寅賓出頭(인빈출두) 먼저하고 다음차례 方出日(방출일)로 日光活佛(일광활불) 出世(출세)로다. 鷄鳴山川(계명산천) 밝아옴에 啓蒙(계몽)하고 明理(명리)하여, 黎民普渡(여민보도) 始作(시작)하니라 天開於子(천개어자) 地闢於丑(지벽어축) 天地創造(천지창조:여와 하느님의 천지창조) 初創期(초창기)를 草昧(초매)라고 부르나니 天造草時(천조초시) 利建倍(이건배)라 千仙萬佛(천선만불) 내려와서 새 世上(세상)을 마련할 새 어찌 浮雲(부운) 份份(빈빈)함을 拂拭(불식)함이 없을손가
朗月濟東海(랑월제동해) : 心照龍林(신심조용림) :佳年奉佳月(가년봉가월) :龍德渡龍材(용덕도용재) :古蹟千載遺(고적천재유) :明聖證今臨(명성증금림) :長城秦防胡(장성진방호) : 詩書坑儒焚(시서갱유분) :殘蹟察古史(잔적찰고사) :萎靡傳古今(위미전고금) :唐宋緇流輩(당송치류배) :異端註述頻(이단주술빈) :羅唐攻句麗(라당공구려) :兵燹火庫焚(병선화고분) : 三聖神誌缺(삼성신지결) :
千江有水(천강유수) 千江月(천강월)로 明朗(명랑)하다 저 달이여 東海(동해)바다 비춰주며 苦海衆生(고해중생) 濟渡(제도)할새 神 東勝神州(동승신주) 萬古聖人(만고성인:태호복희) 神檀國祖(신단국조) 帝心(제심:여와 옥황상제 마음) 또한 龍華林(용화림)을 譜照(보조)하여 一光東照(일광동조) 하시나니 때도 있고 곳도 있어 그때 그곳 그 사람을 天下人(천하인)이 받드는 때 佳年佳月(가년가월) 그 아닌가 註:우리 대한민족이 전통적으로 24절기때 지내온 축일(祝日)인 영절(令節)은 가절(佳節),가신(佳辰),명일(名日)이라 하였으며 절사(節祀)를 봉제사(奉祭祀)하였다.
龍(용)의 나라 靑龍國(청용국)은 우리나라 別稱(별칭)이요 龍顔帝心(용안제심) 龍德(용덕)으로 龍材(용재)들을 건지리라 三桓神聖(삼환신성) 옛날부터 내려오는 古蹟(고적)들은 가진 風霜(풍상) 다 격고도 累千年間(누천년간) 遺存(유존)하니 東明聖王(동명성왕) 日月合照(일월합조) 이름하여 明聖(명성)이라 白陽今世(백양금세) 臨御(임어)함을 證明(증명)할수 있으리라
六國統一(육국통일) 秦始王(진시왕) 萬里長城(만리장성) 築城(축성)하고, 北方胡族(북방호족) 막기 爲(위)해 가진 勞役(노역) 다 했건만 不過三世(불과삼세) 亡(망)했으니 그죄(其罪)의 과보(果報)가 非他(비타)로다, 詩文經書(시문경서) 儒生(유생)까지 坑焚(갱분)함에 있었노라
遼東半島(요동반도) 北滿洲(북만주)땅 阿斯達(아사달)의 九月山等(구월산등) 남은 古蹟(고적) 依支(의지)하고 옛날 歷史(역사) 考察(고찰)하여, 枯散(고산)하고 萎靡(위미)해진 自古至今(자고지금) 傳(전)해오는 모든 歷史(역사) 다시 찾아 祖光發揚(조광발양) 힘써보세
所謂唐宋(소위당송) 八大家(팔대가) 自國權威(자국권위) 내세우고 남의나라 망쳐놓은 我田引水(아전인수) 緇流輩(치류배)라 性命學說(성명학설) 까지라도 異端之設(이단지설) 頻繁(빈번)하며 註釋(주석)하고, 著述(저술)함이 또한 그러 하나니라
신라시대 金春秋(김춘추)는 唐(당)의 文物(문물) 끌어들여 羅唐軍(라당군)이 합세하고, 高句麗(고구려)를 攻略(공략)할새 兵燹(병선)으로 말미암아 옛날부터 내려오든 百濟國(백제국)과 고구려의 文庫書籍(문고서적) 다 불태우니 三桓神聖(삼환신성) 古朝鮮(고조선)의 神市以來(신시이래)로 모든 史記(사기)가 삽 時間(시간)에 사라짐에 千秋萬代(천추만대) 恨(한)이로다.
서방의 科學(과학)시대는 지나가고 동양의 道學(도학)이 부흥한다
天機密史淪(천기밀사륜) : 神人重更筆(신인중갱필) : 史補半萬春(사보반만춘) :文經稽百世(문경계백세) :偉大出明人(위대출명인) :先述震宮卦(선술진궁괘) : 後註經履云(후주경이운) :太極天開子(태극천개자) : 戊年逢土人(무년봉토인) :寅會三才備(인회삼재비) :
國史(국사)만이 아니로다 天機(천기)로서 密傳(밀전)해온 眞道眞法(진도진법) 그 正史(정사)도 哀惜(애석)하게 湮滅(인멸)이라, 이를 이어 찾으리오 白陽天時(백양천시) 回運(회원)함에 神人(신인)으로 到壇(도단)하여 다시 붓을 들었노라,
半萬年間(반만년간) 잃어버린 그 歷史(역사)를 다시 찾아 옳은 正史(정사) 補充(보충)하고, 國民道德(국민도덕) 昻揚(앙양)하며, 白衣民族(백의민족) 團合(단합)하여 民族正氣(민족정기) 바로잡고, 古來經文(고래경문) 다시 여러 百世遺傳(백세유전) 圖謀(도모)하라. 前無後無(전무후무)한 偉大(위대)하신 大聖人(대성인)이 出世(출세)로다 우리나라 運氣(운기)로서 一光東照(일광동조) 明人(명인)이라
演擒設跛(연금설파) 先後天卦(선후천괘) 河圖洛書(하도낙서) 九變震檀(구변진단) 두루 살펴 先述(선술)하되, 震宮卦象(진궁괘상) 그것이라 뒤에 다시 모든 經(경)들 硏修(연수)하고, 參照(참조)하며, 註釋(주석)하고, 解意(해의)하여 일깨름이 있었으니 眞空無極(진공무극) 生太極(생태극)은 理有氣(이유기)로 氣則天(기즉천)을 天開於子(천개어자) 하는 것이 太極天(태극천)인 그것이다.
白陽始祖(백양시조) 戊己開端(무기개단) 때가 오면 알것이나 子(자)가 붙은 戊年(무년)그해 中央土人(중앙토인) 만났노라 天開於子(천개어자) 地闢於丑(지벽어축) 人生於寅(인생어인) 그 寅會(인회)에 天地人(천지인)의 그 三才(삼재)가 具備(구비)함은 當然(당연)하다
三宮震變屯(삼궁진변둔) : 先降離中火(선강이중화) :坎水向南浸(감수향남침) :金聲動玉虎(금성동옥호) :乾坤復位循(건곤복위순) :卯酉日昇落(묘유일승락) :太極聯星呑(태극연성탄) :四夷平五土(사이평오토) :是爲丹田根(시위단전근) : 九月乾三山(구월건삼산) :
乾爲天後(건위천후) 坤爲地(곤위지)요 坤爲地後(곤위지후) 水雷屯(수뢰둔)은 三才三宮(삼재삼궁) 그것이니 震(진)의 變化(변화) 일어나되 먼저 震(진)이 東南(동남)으로 移動(이동)하여 감으로서 東南風(동남풍)이 일어났네 離中火(이중화)가 先降(선강)하고 뒤따르는 風雲造化(풍운조화) 全世界(전 세계)에 번져나니 어찌 坐視(좌시) 할 것인가 坎水(감수)또한 南浸(남침)이다.
白虎金(백호금)의 소리 나니 西方陣營(서방진영) 動搖(동요)로다. 타리박의 玉虎(옥호)에다 比喩(비유)하여 生覺(생각)하면 强者(강자)있고 昇者(승자)있어 乾坤順位(건곤순위) 飜覆(번복)하니 西方(서방)의 科學(과학)은 한때 가고 東洋(동양)의 道學(도학)이 復興(부흥)할 것일새
日出於卯(일출어묘:묘에서 해가 뜨고 ) 沒於酉(몰어유= 酉에 해가 지)는 日之昇降(일지승강)의 理致(이치)인즉 大東亞戰(대동아전)때 日本(일본)이 降伏(항복)할 때는 乙酉年(을유년:朱雀鳥의 울음소리)에 물러간 것은 當然(당연)하다. 우리나라가 1945년 8.15 解放(해방)되어 太極旗(태극기)는 세웠건만 聯合國(연합국)의 占領(점령)으로 三八線(삼팔선)이 생겼노라
蒙古族(몽고족)은 元(원)나라를 滿洲族(만주족)은 淸(청)나라를 四夷(사이)로서 平五土(평오토)이니 東夷(동이)인들 못할소냐 平土(평토)에는 精進(정진)이오 精進(정진)이 곧 煉精(연정)인즉 積精累氣(적정누기) 神自有(신자유)니 是爲丹田(시위단전) 之根源(지근원)을 地異山(지이산)은 九紫儒祖(구자유조) 金剛山(금강산)은 月之仙母(월지선모) 漢拏山(한라산)은 乾出佛父(건출불부) 九月乾(구월건)의 三山是(삼산시)라
神君羽化臨(신군우화림) : 秉母坤山降(병모곤산강) :秉父乾山遁병부건산둔) :神州無異象(신주무이상) :三神九變陳(삼신구변진) :彭虞奠國土(팽우전국토) : 許由扉三門(허유비삼문) :規矩方圓至(규구방원지) :河洛卦象根(하락괘상근) : 萬象不踰卦(만상불유괘) :
檀君聖祖(단군성조) 東勝神君(동승신군) 天眞之元(천진지원) 古佛(고불)로서 羽化(우화)하여 臨(임)하시니 彌勒祖師(미륵조사) 出世(출세)로다. 母(모)의 理致(이치) 잡고나선 太上老君(태상노군:老子) 孤雲仙師(고운선사) 坤運山(곤운산)에 나리시니 觀音師母(관음사모) 出世(출세)로다. 父(부)의 理致(이치) 잡고나서 馬鳴尊者(마명존자), 元曉大師(원효대사), 乾運山(건운산)에 숨었으니 活佛師尊(활불사존) 出世(출세)로다.
우리나라 神州(신주)땅은 華麗江山(화려강산) 三千里(삼천리)라 틀림없는 卦象(괘상)으로 三佛出世(삼불출세) 分明(분명)하다. 三神帝釋(삼신제석) 三三(삼삼)은 九(구) 九變煉丹(구변연단) 變遷(변천)하니 神化(신화),仙化(선화), 佛化(불화)로서 收圓三佛(수원삼불) 出世(출세)로다.
戊辰紀元(무진기원)은 古朝鮮(고조선) 建國時(건국시) 聖祖月下(성조월하) 元輔彭虞(원보팽우) 나라 땅을 開拓(개척)하여, 百姓(백성)들을 살게 하되 세집 以上(이상) 살아야만 許可(허가)함이 되었으며, 彭虞(팽우), 高矢(고시), 神誌(신지) 셋은 三門扉臣(삼문비신) 이라하다.
家事(가사)나 國事(국사)를 莫論(막론)하고, 規矩法度(규구법도) 모든 것이 天圓地方(천원지방) 自然理(자연리)를 效法(효법)함이 이러하니, 河圖地盤(하도지반) 變易(변역)이나 洛書人盤(낙서인반) 交易(교역)이나 모든 卦象(괘상) 根源(근원)되는 九變天盤(구변천반) 不易(불역)이라,天理(천리),地理(지리), 人性理(인성리), 事理物理(사리물리) 할 것 없이 萬象(만상)은 이 四象八卦(사상팔괘)법을 벗어날 수 없나니라
知機日月呑(지기일월탄) : 鷄飛猿促影(계비원촉영) :鷄龍離火屯(계룡이화둔) :帝鑾築已蹈(제란축이도) :育化陰陽賓(육화음양빈) :金剛坎泉湧(금강감천용) : 龍波飜兎林(용파번토림) :一道收萬世(일도수만세) :明星臨雨辰(명성림우진) :
白陽天時(백양천시) 有機(유기)하니 그 기미를 미리 알아 日月之精(일월지정)을 마시면서 修道精進(수도정진) 할지로다 잣나비의 그림자를 닭이 날아 催促(최촉)하니 申年(신년)가고 酉年(유년)되면 아는 道理(도리) 있으리라. 닭계(鷄계:酉)는 西方(서방)이고, 靑龍(청용)은 東方(동방)의 東龍(동룡)과 西虎(서호)가 造機(조기)하니 四九庚金(사구경금)은 離火(이화)로서 丕塞(비색)함이 되나니라. 天皇神祖(천황신조) 玉帝化身(옥제화신:여와 옥황상제가 화신하시어) 타실 輦駕(연가) 그 帝鑾(제란)은 이미 築城(축성) 한방이니 蹈蹈(도도)하게 降臨(강림)하여 乾道坤道(건도건도),陰陽賓(음양빈)는 仙佛聖眞(선불성진) 化身(화신)으로 育化(육화)하여 주시리니 처음 보는 慶事(경사)로다.
金剛山(금강산)은 金生水(금생수)로 一坎水泉(일감수천) 솟아나서, 自然(자연)으로 흘러내려 오는 것이 理致(이치)이니 龍王神(용왕신)의 海波(해파)와도 一脈相通(일맥상통) 함이로다. 水生木運(수생목운) 當然(당연)하니 兎林(토림)한번 飜磨(번마)하리 道(도)의 根本(근본) 하나이라, 萬敎根本(만교근본) 一道(일도)이나 一道(일도)로서 收圓(수원)하여 萬番(만번)토록 傳(전)해주 길 그 聖人(성인)은 누구신가 日月合照(일월합조) 明星(명성)으로 震(진)의 나라 이 땅 위에 [하느님이] 臨(임)하심을 알아두라
여와(女媧) 옥황상제님이 세상에 강림하시어 가야금 타는 소리에 도통(道通)하고, 천지(天地)밖은 형상(形象)이 없어지니 산과 바다에 있던 마귀들은 머뭇거리며 주저주저 한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의] 금수강산(錦繡江山)이 금 가로수(金街路樹)로 장식하니 금빛 찬란한 세상이로다. 서기(西氣)가 동방의 대한민국에 금운(金運:4,9庚辛)이 돌아온 것이다.
태고(太古) 이후로 처음 있는 선경(仙境)은 전세에도 없었고 후세에도 없을 신선국(神仙國)을 대한민국 중원국(中原國)은 자연히 세계인들의 이목(耳目)이 대한민국에 집중되고,수 천리나 멀고 먼 하늘나라에서 식량과 금은보화들이 저절로 내려온다. 성경의 예언 말씀대로 멀지 않는 장래에 동방의 조선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道章無尙黑(도장무상흑) ; 憲兵卽天倫(헌병즉천륜) :今洩動天錄(금설동천록) :有神無文禮(유신무문례) :世俗成野人(세속성야인) :有文無神化(유문무신화) : 民無所畏欽(민무소외흠) :文神今俱法(문신금구법) : 德彰溢四隣(덕창일사린) :窘家管千富(군가관천부) :治民澈帝心(치민철제심) :
祖師(조사)께서 내려주신 道(도)의 文章(문장) 經文等(경문등)은 紙筆墨(지필묵)에 依(의)함 없이 無字眞經(무자진경) 그대로다. 眞天道(진천도)는 天法(천법)이며 人力(인력)으로 않되나니 人倫(인륜)보다 天倫(천륜)으로 神兵用事(신병용사)하리 로다. 無極天(무극천)의 理致(이치)로서 通天錄(통천록)은 이만하고 이제 다시 動天錄(동천록)을 洩漏(설루)하여 주겠노라
만약에 神(신:하느님)의 存在(존재)함을 是認(시인)하고, 닦더라도 文(문)이 없고 禮(예)가 없이 無識(무식)하게 가르치면 그 世上(세상)의 모든 風俗(풍속)을 가히 짐작 할 것이다. 野蠻的(야만적)인 無識軍(무식군)을 免(면)할 道理(도리)가 없나니라 다시 글을 崇尙(숭상)하여 가르침을 다하여도 中心(중심)되는 唯一神(유일신:여와 하느님)을 否認(부인)하게 된다 면은 그 나라의 百姓(백성)들은 두려움과 恭敬(공경)함이 없는바가 될 터인 즉 이도 또한 不可(불가)하니라
이제 우리 나라에서 白陽運(백양운)을 이어 받아 글도 있고 神(신:하느님)도 있어 모든 法(법)을 具備(구비)하였으니 固有(고유)한 古風道德(고풍도덕) 다시 밝혀 나타나며, 四方(사방)의 이웃 나라까지 넘쳐가게 될 것이다. [대한민족이] 오랫동안 苦生(고생)하고 窘塞(군색)하던 살림살이 一朝一夕(일조일석) 하루아침에 千金萬金(천금만금) 富者(부자)됨이 있으리라 이런 慶事(경사) 모든 것이 百姓(백성)들을 다스림에 仁慈(인자)하신 帝心(제심:여와 옥황상제님 마음)으로 反映(반영)하고 있음을 대한민국 국민은 다 알았을 것이다.
眞人非露相(진인비로상) : 露相非眞人(로상비진인) :筆刪千古恨(필산천고한) :輯集流經綸(집집유경륜) :國公省意理(국공성의리) : 文敎此度村(문교차도촌) :萎靡由何振(위미유하진) :破迷惺神人(파미성신인) ; 至理圓頓化(지리원돈화) : 萬敎融一展(만교융일전) :
眞道眞法(진도진법) 通達(통달)한자 眞人(진인)이라 부른다면 相(상)을 나타내지 않는 者(자)는 法(법)이거늘 이에 反(반)해 相(상)을 나타내는 者(자)는 我相(아상)을 곧 나타냄이 되고 보니 이를 어찌 眞人(진인)이 아니라 하겠는가?
金富軾(김부식)과 一然(일연)등이 우리나라 歷史(역사)에다 붓을 대어 깍았음은 千古恨(천고한)이 되는지라 다시 正史(정사) 찾아 내여 蒐集(수집)하고 編纂(편찬)하되 새 經綸(경륜)을 明白(명백)하게 註釋(주석)하여 流傳(유전)하라 天造草昧(천조초매:여와(女媧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白陽初期(백양초기) 國家公卿(국가공경) 되는 분들 特別留意(특별유의) 해야 함은 모든 理致(이치) 省察(성찰)하여 治國治世(치국치세) 敎民(교민)하는 文敎政策(문교정책) 에는 必(필)히 이 法道(법도) 參酌(참작)하여 錯誤(착오)가 없어야 할 것이며, 頹廢一路(퇴폐일로) 시들어진 倫理道德(윤리도덕) 振興策(진흥책)은 硏究(연구)하되 어찌하면 [대한민족] 일어나게 할 것인가
세조는 왜 수서령을 내렸는가?
날짜 : 2013.02.13 - 11:33 hit :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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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왜 수서령을 내렸는가?
출처 : 고기와 고대사 블로그 http://blog.daum.net/hsg8689/632의 내용중 한자를 한글로 조금 고쳐서 다시 올렸습니다.
조선시대에 수서령收書令이 왜 일어났는지 알기 위하여 수서령 문구를 살펴본다.
세조 7권 3년 5월 26일 (무자)
/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 등의 문서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諭八道觀察使曰 古朝鮮秘詞, 大辯說, 朝代記, 周南逸士記, 誌公記, 表訓三聖密記, 安含老元董仲三聖記, 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文泰山王居仁薛業等三人記錄 修撰企所 一百餘卷 動天錄, 磨蝨錄, 通天錄, 壺中錄, 地華錄, 道詵 漢都讖記 等文書 不宜藏於私處 如有藏者 許令進上 以自願書冊回賜 其廣諭公私及寺社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 비사,·대변설,·조대기,·주남일사기,·지공기,·표훈삼성밀기,·안함노.원동중 삼성기,·도증기, 지리성모, 하사량훈, 문태산.왕거인.설업 등 삼인 기록 수찬기소의 1백여권과 동천록,·마슬록,·통천록,·호중록,·지화록,·도선 한도참기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처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하는 서책을 가지고 회사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에 널리 효유하라.”하였다.
예종 7권 1년 9월 18일 (무술)
/ 예조에 명하여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수집하게 하다
○傳于禮曹曰 周南逸士記, 志公記, 表訓天詞, 三聖密記, 道證記, 智異聖母河沙良訓, 文泰玉居仁薛業三人記 一百餘卷, 壺中錄, 地華錄, 明鏡數, 及凡干天文地理陰陽諸書家藏者, 京中限十月晦日, 呈承政院, 外方近道十一月晦日, 遠道十二月晦日, 納所居邑. 納者超二階, 自願受賞者及公私賤口, 賞綿布五十匹, 隱匿不納者, 許人陳告, 告者依上項論賞, 匿者處斬. 其速諭中外 예조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지공기·표훈천사·삼성밀기·도증기·지이성모하사량훈, 문태·옥거인·설업 세 사람의 기록 1백여 권과 호중록·지화록·명경수 및 모든 천문·지리·음양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서울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에 바치고, 외방에서는 가까운 도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천구에게는 면포 50필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하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에 속히 유시하라.”하였다.
성종 1권 즉위년 12월 9일 (무오)
/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천문·음양·지리에 관한 책을 수납하는 것에 대한 글을 보내다
○下書諸道觀察使曰 前者, 周南逸士記, 志公記, 表訓天詞, 三聖密記, 道證記, 智異聖母, 河少良訓, 文泰王居仁薛業三人記一百餘卷, 壺中錄, 地華錄, 明鏡數 及凡干天文.地理.陰陽諸書 無遺搜覓上送事 曾已下諭. 上項 明鏡數 以上九冊, 太一金鏡式道詵讖記, 依前諭上送, 餘書勿更收納, 其已收者還給.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교서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천사, 삼성밀기, 도증기, 지리성모, 하소량훈, 문태.왕거인.설업 삼인기 1백여 권과, 호중록, 지화록, 명경수와 무릇 천문·지리·음양 등 여러 서책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했으니, 상항 명경수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 도선참기는 전일의 하유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하였다.
世祖 때 내려진 수서령收書令 문구에는 [팔도 관찰사에게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등의 古記를 사처에서 간직하지 말 것을 명하다] 라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世祖 때 收書令을 내린 것은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 등의 古記와 천문·지리·음양 등 서책들을 私處에서 간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그 뒤부터는 高朝鮮秘詞 등의 古記는 빠지고 천문·음양·지리에 관한 책을 私處에서 간직하지 못하게 거두어 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收書令을 처음 내린 시기는 세조 3년 5월 26일이고, 文臣에게 명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라는 어명을 내린 때는 세조 4년 9월 12일이므로, 東國通鑑을 편찬하라는 어명을 내리기 1년 전에 東國通鑑을 만들기 위한 자료수집 목적으로 收書令을 내렸다는 주장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世祖가 古朝鮮秘詞 등의 古記와 圖讖, 天文.地理.陰陽 등 서책을 민간에서 걷우어 들이라고 어명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圖讖, 天文.地理.陰陽 등 서책에 대하여 살펴본다.
圖讖, 天文.地理.陰陽 등 괴이한 서책은 이미 太宗 때 書雲館에 있는 것을 꺼내어 불살라 버린 적이 있다. (..... 생략......) 서운관書雲館에 있던 圖讖, 天文.地理.陰陽 등 괴이한 서책은 이미 太宗 때 꺼내어 불살라 버렸지만 민간에 남아 있는 것은 世祖 때 收書令을 내려 거둘어 들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古朝鮮秘詞 등의 古記는 왜 민간에 두지 못하게 거두어 들이라고 하였을까?
圖讖, 天文.地理.陰陽 등 괴이한 내용이 들어 있는 서책 외에 收書令에 들어 있는 서책은 檀君朝鮮의 歷年 및 領域과 관계 있는 古記이다.
A.D 1392년 이성계가 나라를 세운 후 韓尙質을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국호를 朝鮮으로 윤허받고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윤허해 주고 몇년이 지난 1396년(태조 5년) 6월 賀正使 柳珣이 가지고 간 表箋의 언사가 모욕적이고 오만하다는 이유로 이 글을 쓴 책임자를 잡아들이라고 하자 대장군 郭海隆을 보내어 잘못을 빌게 하고 表文撰者인 鄭擢은 풍질로 가지 못하고 金若恒만 압송했다. 그러자 명나라는 6월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撰表人 鄭道傳‧鄭擢을 압송하려 했으나, 鄭道傳은 병을 이유로 보내지 않아 7월에 명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는 權近‧鄭擢‧盧仁度만 압송해 갔다. 압송당한 金若恒, 鄭擢, 盧仁度는 이듬해 명나라에서 처형되었다.
그런데 명 태조는 압송당한 권근權近을 처형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해 9월 15일 명 태조가 내어준 시제詩題에 따라 24수의 시를 지었는데, 그 중에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라는 제목의 詩가 들어 있다. 이 24수 詩와 명 태조가 지은 3수의 시를 주석한 것이 세조 7년(A.D 1462년)에 권근權擥이 편찬한 응제시주應題時註이다. 명 태조는 권근이 지은 "始古開闢東夷主"를 보고는 "권근의 말이 옳다" 하고 만족해 하며 "그 내용을 史籍에 올려 후세에도 참고하도록 하라"고 하고 권근을 살려주었다. 아래는 응제시주 실려 있는 "始古開闢東夷主"이다.
「옛날에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고 인하여 그를 단군이라 불렀다. 이 때가 당요 원년 무진년이다. 고기에 말하기를 상제 환인에게 서자가 있었는데, 환웅이라 하였다. 인간세상을 탐내어 인간이 되어 천부인 3개를 받아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니 이 분이 환웅천왕이다. 환(桓)은 혹은 단(檀)이라고도 한다. 산은 지금의 평안도 희천군 묘향산이다.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명, 병, 형벌, 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게 하여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이때 환웅이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는 이것을 먹되 햇빛을 100일 동안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이 되리라" 하였다. 호랑이와 곰은 그것을 먹고 금기하였는데,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했지만 곰은 금기를 잘 지켜 21일만에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혼인할 상대가 없어 매양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이에 환웅은 잠깐 사람으로 변신하니 웅녀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단군이다. 단군은 당요와 같은 날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불렀다., 처음 도읍지는 평양이었고 뒤의 도읍지는 백악산이었다. 비서갑 하백의 딸에게 장가 들어 부루를 낳았는데 이분이 동부여왕이다. 하 나라 우왕 때에 이르러 제후들이 도산에 모일 때, 단군은 태자 부루를 보내었다. 단군은 하 나라 우 임금을 거쳐 상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이다. 사당이 지금도 있다. 나라를 누리기 1048년 이었다. 그 뒤 164년 후에 기자(箕子)가 와서 봉 받았다. 始古開闢東夷主自註 昔神人降檀木下 國人立以爲王 因號檀君 時唐堯元年戊辰也 增註 古記云 上帝桓因 有庶子曰雄 意欲下 化人間 受天三印 率徒三千 降於太白山神檀樹下 是爲桓雄天王也 桓或云檀 山卽今平安道熙川郡妙香山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雄願化爲人 雄遺靈艾一炷 二十校 曰食之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食之 虎不能忌 而熊忌三七日得女 身無與爲婚 故每於檀樹下呪願有孕 雄乃假化而爲人 孕生子曰檀君 與唐堯同日 以立國號朝鮮 初都平壤後都白岳 聚非西岬河伯之女 生子曰夫婁 是爲東夫餘王 至禹 會諸侯塗山 檀君遣子夫婁 朝焉檀君歷虞夏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 化爲神 今黃海道文化縣九月山也 廟至今存焉 亨年千四十八年 厥後一百六十四年 己卯箕子來封」
권근權近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은 건국된지 천여년 만에 멸망하였고,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朝鮮 侯로 명받고 조선을 다스렸으며, 조선의 영역은 요동遼東이 들어가지 않고 한반도 내라는 시를 지어바치고야 살아남았다. 당시 表箋文 사건이 터진 배경은 鄭道傳의 요동정벌 주장 때문인데, 조선은 기자箕子가 와서 다스린 나라이고, 조선의 영역은 한반도 내라고 하니 명 태조는 기분이 좋아서 살려주었던 것이다.
그 뒤 태종 때는 서운관에 있는 서책 중 명나라의 비위를 거슬릴 우려가 있는 고기古記와 아울러 민간을 혹세무민하는 서책들도 불살라 버렸다. 그 연장 선상에서 세조 때는 민간에 있는 고기古記와 圖讖, 天文.地理.陰陽 서책까지 거두어 들이라는 수서령을 내렸던 것이다.
세조 때 收書令에 나오는 "古朝鮮秘詞, 大辯說, 朝代記, 安含老元董仲三聖記" 등 古記는 고려초,중기에 지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고조선비사는 고조선비기라고도 부르는데, 조대기朝代記와 함께 환인,환웅,단군에 관한 내용을 적은 서책이다. 현재 원문은 실전되고 없고 그 편린이 1898년에 지었다는 태백일사에 극히 일부가 보인다. 그리고 대변설大辯說은 대변경大辯經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환인,환웅,단군 시대의 사상, 제도, 풍속과 단군조선 말기를 대부여大夫餘로 불렀다는 내용 등이 들어 있다. 또 삼성기는 환인,환웅,단군왕검에 관한 설화를 적은 것이다.
혹자는 三聖記를 해주海州에 수양산성을 쌓은 3 승려에 관한 전기라고 주장하나, 그런 서책이라면 고기 수집과 圖讖, 天文.地理.陰陽 등 서책을 수거하는 수서령收書令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 三聖密記는 환인,환웅,단군시대의 해와 달 숭배사상, 하늘에 제사지내는 제례, 토속신앙, 천단 설치 등 장제에 관한 내용 등이 들어 있어 三聖記, 朝代記, 古朝鮮秘記 등 古記가 禁書에서 풀릴 때도 圖讖, 天文.地理.陰陽 서적류 등으로 분류되어 禁書 목록에서 풀리지 않았다.
위 三聖記, 朝代記, 古朝鮮秘記, 大辯說 등 古記는 箕子朝鮮의 존재를 인정치 안고 檀君朝鮮에서 北夫餘(고구려)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혹자는 동국통감을 짓기 위한 자료수집 목적으로 고기 수서령古記 收書令을 내렸다고 주장하나, 이러한 서책들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檀君, 箕子, 三韓, 三國, 高麗로 정통성이 승계된 것으로 보는 東國通鑑을 짓는데 아무 도움이 안된다. 즉 收書令을 내린 것이 東國通鑑을 짓기 위한 자료수집 목적이라면 이런 古記를 수거할 필요가 없다.
東國通鑑에 관한 네이버 백과사전 내용을 인용한다.
[56권 28책으로 이루어진 활자본이다. 1485년(성종 16)에 徐居正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하였다. 이 책의 편찬은 원래 世祖 때부터 시작되었다. 世祖는 우리나라의 기존 사서(史書)가 탈락이 많아 자세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국사의 체계가 서있지 못하고, 編年體 通史가 없기 때문에 상고 이래의 통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목적으로 중국의 資治通鑑에 준하는 사서를 만들고자 하였다. 따라서 1458년(世祖 4)에 世祖의 명으로 편찬사업이 시작되었으나 1467년(世祖 13) 5월 李施愛의 난으로 일시 중지되었다가, 이듬해 9월 세조의 죽음으로 완전히 중지되었다. 그후 성종대에 들어와 1483년(성종 14) 10월 서거정의 발의로 다시 시작되어 1484년에 일단 완성되었으나, 찬자들의 史論이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일단 완성된 《동국통감》에 찬자들의 사론을 붙여 그 이듬해인 1485년 56권으로 다시 신편하였다. 당시 修史官은 서거정 등 10명이다. 새로 완성된 《동국통감》은 편년체 사서로 단군조선으로부터 삼한까지는 책머리에 外紀로 다루었고, 삼국의 건국부터 신라 문무왕 9년(669)까지를 삼국기, 669년에서 고려 태조 18년(935)까지를 신라기, 935년부터 고려말까지를 고려기로 구분하여 서술했다. 삼국 이전을 외기로 처리한 것은 자료 부족으로 인하여 체계적인 서술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며, 신라기를 독립시킨 것은 신라통일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삼국 중 어느 한 나라, 즉 신라를 정통으로 내세우지는 않았고 대등하게 서술하였다. 연대 표기에 있어서도 《동국사략》의 서술인 踰年稱元法과는 달리 삼국 당시의 제도대로 즉위년칭원법을 썼다. 삼국의 연기는 연호로써 표기하지 않았고 중국과 삼국의 연기를 아울러 썼다. 또한 범례는 《자치통감》에 따르고, 필삭(筆削)의 정신은 《자치통감강목》을 따라서 두 사서의 체제를 절충하였다. 이 책에는 모두 382편의 사론이 실려 있다. 그중 178편은 기존 사서에서 뽑은 것이고 나머지는 찬자 자신들이 써놓은 것이다. 찬자들이 쓴 204편의 사론 중 절반이 넘는 118편이 崔溥가 쓴 것이다. 사론의 대부분은 사실에 대한 포폄(褒貶)과 관련된 것인데, 중국에 대한 사대명분을 중요시하는 입장이었다. 다음으로 綱常倫理를 존중하는 사론이 많아 이를 잘 지킨 사람은 사람을 칭송하였으며, 군신·부자·남녀의 위계질서를 정립하고 현실적으로 성종과 사림(士林)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功利를 배격하고 節義를 숭상하는 사론이 많아 종래의 인물에 대해 志節과 업적을 구별하여 평가했으며 문무를 차별하고 이단을 배격하는 입장이 나타나 있다. 이 책은 정치적 차원에서 아직 정통론을 도입하지 않고 있지만 문화적 측면에서 기자조선-마한-신라로 이어지는 문화의 흐름을 주류로 정립하려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종 자신이 적극적으로 편찬에 개입하고 신진사림이 참여함으로써 성종과 사림의 역사의식이 크게 반영되었다. 사림의 성리학적 명분주의는 성종의 왕권 안정에 유리하게 작용하였으며, 강상의 명분을 강조함으로써 세조와 그 勳臣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았다. 조선 전기 대표적 官撰史書의 하나로 꼽히며,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世祖가 東國通鑑을 편찬하라고 내린 어명을 인용한다.
세조 14권, 4년(1458 무인 / 명 천순(天順) 2년) 9월 12일(병신) 4번째기사
문신에게 명하여 《동국통감》을 편찬하게 하다.
임금이 文臣에게 명하여 동국통감을 편찬하게 하였다. 임금이 우리 나라의 書記가 탈락되어 완전하지 못하므로, 삼국사와 고려사를 합하여 편년체로 쓰고자 하여, 여러 서적을 널리 취하여 해마다 그 아래에 모아 써 넣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3번이나 收書令을 내린 것은 당시 시대상황으로는 민간이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되는 서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東國通鑑에 적혀 있는 몇 줄 안되는 檀君朝鮮 부분을 적으려고 東國通鑑을 짓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三聖記, 朝代記, 古朝鮮秘記, 大辯說 등 古記 收書令을 내린 것이 아니다.
대변설(大辯設)
대변경(大辯經)
에 대해서 검색하며 얻은 의미 있는 결과에 대해서 보셨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9:55] 환단고기 태백일사 산신오제본기부터 고주몽성제까지(북부여기) 검색어ㄹㄹ 치니 몇개 되지는 않지만 (선초기에 금서였으니) 매우 소중한 내용들 그러니까 빼면 안 되는 알자배기만 골라서 태백일사에 수록 되어 있다고 보여집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9:55] 태백일사가 아주 소중한 책이라는 느낌이 다가왔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9:56] 진즉 읽어보았어야하는 챋인에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9:56] 환단원류사 1권 씅 대 참고로 대충 읽어 본게 전부였는 지라 다시 정독하고 싶었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9:56] 그리고 또 잠을 잤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9:57]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한 일이 일어낫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9:57] 그게 오늘입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9:57] 새벽잠을 설치다가 잠깐 잠이 들엇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9:58] 평소에는 송대관의 네박자 라는 음악이 머리 속에서 계속 뱅밴 돌더니만 오늘은 그런 현상이 정혀 안생기고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9:59] 주초위왕 이라는 네글자가 굼속에서 나타나더니 눈을 뜨고 새벽 내내 네박자는 전혀 온대 간데 없고 주초위왕만 더올랏습니다.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10:00] '주초위왕(走肖爲王)'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10:01] 주초위왕은 조선 중종 때 개혁을 주도한 조광조를 제거하려는 세력들이 궁궐의 뽕나무 잎에 꿀로 쓴 글자로, "'조'의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된다"는 뜻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10:01] 走肖는 조광조 성의 파자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10:02] 도대체 조광조와 중종사이에 무슨 일이있었던 것을 가요,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10:03] 그게 왜 갑자기 머리 속에 떠올랐을 까요.
[bc8937 환단원류사 박민우] [오후 10:06] 주초위왕은 정사가 아닌 야사에 전하는 내용으로 조광조의 거침없는 개혁이 끝내는 왕까지 갈아치울 것이라는 의심을 받게 되고 급기야 중종은 조광조를 이용해서 왕권을 강화한 뒤 이용가치를 버리고 왕이 신하를 배신 하는 그러니까 쓸 가치가없으니까 숙청하게 된 사건입니다.
■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5월 21일
• 좌승지(左承旨) 이원(李原)을 보내어 금성 양초(金星禳醮)를 싞도(新都)의 소격젂(昭格殿)에
서 행하였다.
• ■ 세종실록 4권, 세종 1년 6월 8일
• 이조 판서 맹사성에게 명하여 소격젂(昭格殿)에 비를 빌고, 검교 핚성부 윢(檢校漢城府尹)
최덕의(崔德義)로 석척 기우(蜥蜴祈雨)를 경복궁 경회루 못가에서 지내게 하고, 우의정 이
원으로 원구(圓丘) 에서 비를 빌게 하였다.
• ■ 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 4월 29일
• 성산 부원굮(星山府院君) 이직(李稷)을 종묘(宗廟)에 보내어 기도드리고, 좌의정 이원(李原)
을 소격젂(昭格殿)에 보내어 기도드리게 하였다.
• ■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7월 15일
• 좌의정 이원이 아뢰기를, 제사하는 도(道)는 정결하게 하고 정성을 다하면 복을 받게 되고,
그렇지 아니하면 싞이 흠향하지 않을 뿐 아니라, 화(禍)가 또핚 따르는 것입니다. 어찌 외방
에다가 사당을 설치하여 제사하게 핛 것입니까. 하물며 별에게 제하는 장소로서 소격젂이
있지 않습니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