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동기회- (2)
2015년 5월8일~5월10일 베를린(2박3일)
1971년도 서독광부로 독일 땅에 와서 캄프린트포트로(Kamp-Lintfort)라는 아주 작은 도시에 있는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광산에 배치된 동료들 중 독일에 남아 계속 살고 있는 친구들만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만든 게 ‘71동기회’다.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아 회장이 적극적이면 동기 모임이 활발하고, 회장이
성의 없이 소극적이면 동기회도 시들시들해지기 마련이다.
신성식 회장은 부지런하기가 독일 최고라 우리 71동기회 모임은 대단히 즐겁고 엄청나게 활발하다. 신성식
회장은 전에도 회장으로 수고를 했었는데, 그 뒤 동기회가 식어져 신성식 씨에게 다시 한번 맡아달라고
사정해 두 번째로 고생하고 있는 중이다. 동기회가 다시 부활을 한 것이다. 너무 고마워 이번 임기가 끝나면 동기들이 돈을 모아 서울에 아파트라도 한 채 사주어야 할 입장 인데
쉽게 모아지지 않아 걱정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가친척도, 살면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도, 친구들도, 세월이
흐르면 기억에서 잊어지며 서서히 멀어져 간다. 부모형제도 따지고 보면 같이 산 세월이 그렇게 길지 않다. 그런데 우리 동기들은 같은 하늘 아래에서 44년을
함께 살았으니 이보다 더한 인연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그래서 동기들은 반가운 사람들이고
소중한 사람들이다.
사업상, 거래상, 살면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 순간이 지나가면 쉬 잊어버린다. 우리
동기들은 초등학교 동창만큼이나 정이 두텁다. 아니다. 초등학교
친구들은 반갑기는 하지만 너무 오랜 세월 떨어져 살다 보니 간혹 만나더라도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 인사말
몇 마디 끝나면 이야기가 끊어져 서먹서먹할 때를 경험했을 것이다.
동기들은 가장 순수하게 아주 순진무구한 심성을 가감 없이 보이며 격의 없이
살아왔고 계산 없이 어우러졌다. 선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단순명료한 인간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살아온 친구들이다. 거기에는 도토리 키 재기도 없었고 치장을 위한 겉치레도 허식도 없었다. 즐겁다고 함께 웃었고, 슬프다고 같이 울었으며, 힘들다고 맥주 한잔 마시며 노래하면서 살아온 친구들이다. 동기생들이
독일에 많이 남아있으면 남아있는 만큼 행복은 정비례로 불어난다.
우리가 도착한 독일의 조그마한 도시 ‘캄프린트포르트’(Kamp-Lintfort)에는 우리 보다 1년 먼저인 1970년6월2일에
처음으로 왔다는 한국인(선진) 68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68명 중에는, 고 이석인씨를 비롯해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홍정희(Leverkusen), 오영훈(Geldern), 안중식(Geldern), 홍종각(Hamburg),
김경용(Berlin)씨 등이
그들이다.
당시 독일인들 사이에는 동양에서 불쌍한 젊은이들이 이 먼 외국까지 광산근로자로
온다는 이야기가 퍼졌고, 그들은 그 불쌍한 젊은이들을 위해서 옷가지를 모았다고 한다. 웬걸 오는 사람들은 쭉쭉 잘 빠진 하이칼라 젊은이들로 넥타이를 메고 마치 여행객처럼 산뜻한 옷차림에
밝은 웃음을 웃는 멋쟁이 신사들이 아닌가. 멀리 동양에서 왔다는 젊은이들에게서 광부라는 흔적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황한 독일인들은 준비한 옷가지를 뒤로 감추었다는 뒷이야기가
풍문으로 떠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독일광부로 오는데 자그마치 경쟁률이 보통 40대1에서 적게는 30대1까지 치열했으니 과거급제만큼이나 운이 좋아야 서독파견광부 대열에 낄 수 있었다.
우린 1971년 9월27일 Kamp-Lintfort(캄프린트포트) 도착해서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광산’에 배치되었고
기숙사는 Donbosco Heim(돈보스크하임)이였다. 그 뒤 11월1일
추가로 3개월 늦은 후진(?)들이 도착했다. 9월, 10월, 11월
이렇게 달로 계산하면 3개월이나 늦게 온 후진들이 되는 셈이다. 물론 웃자고 하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항상 자기
편리한대로 계산하는 습성이 있다. 자기 앞에 큰 감 놓는 거와 같다.
어쨌던 우린 실없는 우스갯소리와 이런저런 장난을 치면서 속절없이 물 설고
낯 설은 독일생활을 시작했다. 9월과 11월에 온
친구들이 모여서 만든 친목회가 71동기회다. 며칠
늦게 11월에 도착한 친구들도 독일 오기 전 강원도 도계에서 광부교육을 받을 때 이미 사귀어
서로 잘 아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시 1년 후인, 1972년 11월에 ‘슈멜찡
기숙사’(Schmelzing Heim)에 도착한 친구들이 자기들 스스로를 ‘1진’이라고 이름을 만들어 붙이고, 김석배(Duesseldorf), 안치호(Koeln), 장봉원, 전찬광(Kleve), 박광남 목사, 이우걸(Bochum)씨 등이 온다. 그 뒤 계속해서 2진, 3진, 4진, 5진으로 이어진다.
우리 71동기회 친구들은
그렇게 44년 전 20kg가방 하나 덜렁
메고 혈혈단신 낯선 독일 땅에 왔다. 사실 그 당시 우린 독일이 어 디에 붙어있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으며, 독일에만 가면 떼돈을 번다고 해서 무작정 떠나온 길이었다. 언어도
통하지 않았었고 풍습도 음식도 맞지 않는 이 땅에 와서 우리들은 힘겹게 하루하루를 적응해 나갔다.
6진 중에는 고 황영화(하이델베르크 황태자 사장), 김여관(Koeln), 이기남(한국), 김명수(Frankfurt), 윤기대(Bad Nauheim), 정연비(Kamp-Linfort), 이수근(Essen)씨가 있고, 7진에는 성승규(Bochum), 박두성(Frankfurt), 최창학, 박래웅, 김일호(한국)씨
그리고 8진에는 원종목(Kamp-Linfort), 윤연호(Fridichsdorf 세탁소 운영), 김재실(Ratingen), 이원호(Hannover 한인회장) 등이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독일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음식이었다. 얼큰한 찌게나 김치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린
돈보스코 하임장(기숙사장) ‘엑글린(Eglinski)’씨 에게 부엌시설을 해달라고 졸랐다. 뭔가
얼큰한 것을 끓여먹고 김치도 좀 먹어야 살지 이렇게는 살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하임장은 우리들의
청을 듣고 지하실에 부엌시설을 해주었다. 우리는 싼 재료들을 사다가 맛 있는 음식을 해먹기
시작했다.
당시는 시장에서 배추도 마늘도 수박도 찾아 볼 수 없는 시절이었다. 70년대 말이 되니까 시장에 조금씩 마늘과 배추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아무거나 파란 이파리가 달린 채소를 사다가 소금으로 간을 해서 고춧가루 뿌려 김치를 만들어 먹었다. 살
것 같았다. 우린 싼 족발요리를 즐겨 사먹었고 한 푼이라도 아껴 고국에 송금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돼지 족발이나 소꼬리는 당시에 독일사람들이 즐겨 먹지 않는 것들이라서 아주 헐값으로 구입할 수가 있었다.
우린 그걸로 몸보신 하는데 주력했다. 지하실 부엌에는 몇 사람씩 어울려서 식사를 해먹었고
외출 후 들어오면 시장기를 채우는데는 아무런 문제거 없었다. 아무 솥이나 열어서 먹었고, 점잔하게 입만 닦고 나오면 만사 OK였다. 후에 진짜 주인이 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만, 결국은 자기도
다른 사람 솥을 찾아서 있는 음식 먹어치우면 피장파장이 된다. 그런 일들이 우리들에겐 다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장난끼가 섞인 즐거운 독일생활의 한 부분이 되어갔다.
재독한인총연합회 자문위원 황만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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