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1099) - 석탄일과 겹친 스승의 날
어제(5월 15일)는 석가탄신일이자 스승의 날, 두 날을 한꺼번에 맞는 감회가 별다르다. 때에 맞춰 접한 불교와 스승에 얽힌 사연이 흥미롭다. 그 내용 두 가지,
1. 스승께 예를 갖추고 선 곱향나무
스승과 제자의 예를 증거하며 서 있는 나무가 있다. 전남 순천 조계산 송광사에 딸린 천자암 경내에 서 있는 한 쌍의 근사한 이 나무는 ‘순천 송광사 천자암 쌍향수(곱향나무)’라는 다소 긴 이름으로 국가자연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70㎝의 간격을 두고 닮은꼴로 자라난 한 쌍의 곱향나무는 얼핏 한 그루로 보인다. 나무 높이 12m의 크기도 생김새도 꼭 닮아 쌍둥이 향나무라는 뜻에서 오랫동안 쌍향수라고 불러왔다. 이 쌍향수에는 생김새에 맞춤한 전설이 전해온다. 800년 전쯤, 중국 금(金)나라 태자였던 담당 스님이 금나라를 찾았던 지눌 스님과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고 고려에 들어왔을 때, 두 스님은 용맹 정진할 기도처를 찾던 중 이 자리를 암자 터로 정하고,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나란히 꽂았다. 그 두 개의 지팡이가 곱향나무로 크게 자라면서 한 그루는 기품을 지키며 우뚝 섰고, 다른 한 그루는 가벼이 고개를 숙여 스승께 예를 갖추는 듯한 모습으로 자랐다. 스승 지눌께 제자 담당이 예를 갖추고 서 있다는 이야기다. 사실 바람 따라 햇살 따라 나뭇가지를 기울였을 뿐인데, 나무의 모습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예를 먼저 떠올린 옛사람들의 생각이 고마울 따름이다. 세상의 모든 자연물에서 삶의 지혜를 얻으려 애쓰며 살아온 배움의 태도를 스승의 날 즈음에 되새겨본다.(경향신문 2024. 5. 13 고규홍의 칼럼, ‘스승께 예를 갖추고 선 곱향나무’에서)
순천 송광사 천자암의 쌍향수(곱향나무)
2. 스님과 스승의 관계
불교의 세계관은 차별과 차등이 없는 무차무등(無差無等)의 세상으로 압축된다. 불교에서는 누구든 인간의 욕망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달은 자, 곧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진리를 깨달은 자를 뜻하는 부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Buddha)에서 온 말이다. 붓다를 음차한 한자가 불타(佛陀)이고, 중국식 발음은 푸퉈에 가깝다. 그것이 우리나라로 건너오면서 부텨가 됐고 세월 속에서 구개음화 현상 등을 겪으며 변한 말이 부처다. - 불도를 닦고 실천하며 포교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은 중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중이 비하하는 말로 많이 사용돼 승려나 스님이 널리 쓰인다. 스님의 어원에 대해서는 스승님에서 승이 탈락했다는 설, 중을 뜻하는 한자 승(僧)에 높임을 뜻하는 님이 붙은 승님이 변한 것이라는 설, 스승을 뜻하는 한자 사(師)의 중국 발음 스에 님이 붙은 것이라는 설 등 다양한 의견이 있다.’(경향신문 2024. 5. 12 엄민용 기자의 ‘우리말 산책’에서)
스승의 날에 즈음하여 한 월간잡지 5월호에서 특집으로 엮은 ‘나의 선생님’을 감명 깊게 읽었다. 저명한 교수, 시인, 언론인 등 십수 명이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스승들을 추억하는 내용, 팍팍한 세상에 가슴을 따스하게 하는 사제간의 사연들이 뭉클한 감동을 안겨준다. 나도 25년의 교수생활로 스승의 한 자리를 차지한 셈, 정년에 즈음하여 펴낸 책(여행에서 배우는 삶과 문화)의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학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먼저 태어나서 경험한 삶과 얻은 지식을 고스란히 전해주고자하는 마음이다 부모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고 정성을 다하여 양육하는 그 마음을 모든 선생은 지니고 있으며 또 행하고자 함을 알아주면 좋으리라. 한두 사람이라도 이를 마음속에 담아둔다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 지난 5월 초 오랜 제자들과 광주 인근의 사찰을 찾아 담소할 때 그들과 얽힌 사연을 담은 글, ‘제자들과 함께 한 빗속의 드라이브’를 건네주며 옛 정을 되새겼다. 그 내용을 덧붙인다.
‘제자들과 함께 한 빗속의 드라이브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보낸 세월이 25년, 수많은 제자들이 거쳐 갔다. 지금은 연락이 없더라도 사회각계각층에서 제 몫을 잘 감당할 터. 청출어람(靑出於藍), 선생보다 나은 제자들이 곳곳에서 열심히 살고 있으리라.
오랜 세월을 변함없이 따르는 제자들이 있어서 행복하다. 촉촉이 비가 오는 날, 처음 만난 지 30년 된 제자들과 1박2일의 정겨운 시간을 보냈다. 사연은 이렇다. 10년 전에 제자들과 고향을 찾았다. 어릴 적 노닐던 바닷가를 거닐다 옛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고향마을에서 가까운 선운사에 들렀다. 대웅전을 둘러보고 2km쯤 위쪽에 있는 암자로 올라가는 제자들의 발걸음이 무거워보였다. 그 자리에서 제안하였다. '10년 후에 더 건강한 모습으로 이 길을 다시 걷자'
10년이 지난 한 달 전, 녹음 짙은 6월에 선운사 경내에서 1박하기로 결정하였다. 광주에서 고향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레, 기왕이면 바닷가를 거쳐 가기로 하여 영광 쪽으로 차를 몰았다. 노령산맥의 밀재를 넘어서면 불갑사 가는 길이 나온다. 우중에 찾는 이 없는 산사에서 약수 한 잔 마시고 나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불갑사에서 빠져나와 백수해안도로로 향하였다. 영광이 내세우는 아름다운 길, 파도가 잔잔한 바다를 끼고 산자락을 굽이굽이 돌아 전망대 앞에 차를 세우니 거센 바람에 모자가 날아간다.
이어서 점심시간, 영광굴비로 유명한 옛 포구 법성포에 맛있는 복어집이 있다는 제자의 추천으로 찾은 복탕이 담백하고 깔끔하다. 모처럼 기회를 잡아 밥값을 치르니 기분이 좋구나. 고향마을 거쳐 선운사에 들어서니 네 시가 가깝다. 비가 계속 내려 산사에 들어가기를 포기하고 숙소에서 쉬다가 인근의 음식점에서 갈치조림으로 저녁을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니 비가 멈췄다. 제자들을 깨워 암자로 향했다. 전날 내린 비의 양이 많았을까, 산기슭에 맑은 물이 콸콸 소리를 내며 넘쳐흐르고 울창한 삼림에 녹음이 싱그럽다.
당초 계획은 둘째 날에 군산의 선유도를 탐사하는 것이었는데 계속 비가 내려 이를 취소하고 광주로 향하였다. 10년 전에도 들렀던 첨단지구의 공원을 돌아보고 영화를 관람하였다. 제자들과 극장에 함께 가기는 처음, '위대한 갯츠비'라는 영화를 보고 나오니 오후 두 시가 지났다. 첨단지구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들고 집에 돌아오니 오후 네 시, 비는 아직도 가늘게 내린다. 나보다 젊은 편이라 감수성이 더 높은가, 그때는 길가의 노란 꽃길이 아름다웠다고 술회하는 등 10년 전의 옛 일들을 소상히 기억하는 제자들과 함께 한 빗길 드라이브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추억이 되리라. 이틀간 빗길 운전을 기쁨으로 한 제자는 너무나 아름다운 드라이브였다고 감탄하고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다른 제자는 친지들이 찾는 전화에 소녀처럼 들떠서 '교수님과 10년 전 약속으로 선운사에 왔노라'는 목소리에 힘이 붙는다. 돌아오는 길, 정겨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떠난 옛 사랑이 못 살면 가슴이 아프고 잘 살면 배가 아픈데 같이 살자면 머리가 아프단다. 자네들이 못살면 가슴이 아플 텐 데 잘 살고 있어도 배가 아프지 않다. 제자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선생들의 일반적 속성, 부디 오래도록 건강하게 잘 살아라.’
오랜 교분의 제자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