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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1부 리그에서의 맹활약 덕분에 켐페스는 곧바로 아르헨티나 국가 대표 선수로 선발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는 국가 대표 선수로서 통산 43경기에 출전하여 20골을 기록하였다. 그는 선수 은퇴식에서 가진 기자 회견에서 "우리나라에서 뛰어난 기량을 가진 선수들이 계속 배출되고 있어 기쁠 따름이다. 나는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를 수놓은 수많은 선수들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하다." 라고 말하면서 스타 선수임에도 겸손함을 잃지 않았다.
켐페스는 1972년 4월 19일, 18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 선수로 칸에서 펼쳐진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국가대항전에 나서 1골을 기록하며 팀의 3 대 1승리에 일조했다. 이듬해 1973년, 켐페스는 19세의 나이로 성인 대표팀에 소집되어 1974 FIFA월드컵 남미 예선에 출전하게 된다. 당시의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두고 언론은 "유령팀"이라 명명했는데, 이는 고지대에 위치한 라파즈(볼리비아)에서 열린 경기에 적응할 시간적 여유가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진 선수들로 대표팀을 꾸렸기 때문이다. 오마르 시보리 감독이 지휘했던 아르헨티나는 오스카 포르나리의 결승골로 볼리비아와의 원정 경기에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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켐페스는 월드컵에 세 차례 참가(1974 독일, 1978 아르헨티나, 1982 스페인), 통산 18경기에 출전하였다. 1974년 독일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에 패하며 조 예선 탈락이라는 쓰라린 성적을 거두었고 켐페스 또한 무득점에 그치고 말았다.
3년후, 켐페스는 아르헨티나 축구 역사상 최고 이적료를 기록하며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발렌시아로 이적하였다. 발렌시아로 이적하기 이전의 두 시즌 동안 켐페스는 아르헨티나 리그 로사리오 센트랄의 공격수로서 100골을 기록하는 발군의 활약을 펼쳐 보였다.
그는 스페인 프로 리그에서도 출중한 성적을 만들어 나갔다. 스페인컵 우승 2회, 유러피언컵위너스컵 우승 2회, 유러피언 수퍼컵 우승 1회를 달성하였고, 프리메라리가 1976/77 시즌 24골, 1977/78 시즌 28골을 기록하며 두 시즌 연속 득점왕에 등극하였다.
1970년대 후반, 아르헨티나가 군사 독재 정권의 치하에 신음할 당시, 켐페스는 1978 FIFA 월드컵을 준비하는 세자르 루이르 모네티 감독의 아르헨티나 대표팀에 소집된 2명의 해외파 선수중의 한 명이었다. 모네티 감독은 "켐페스는 힘과 기술을 겸비하였다. 그는 상대 수비수들을 끌어들여 공간을 만들고 강력한 슈팅 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센터 포워드로도 활용될 수 있다. 그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선수이다." 라며 켐페스를 대표 선수로 선발한 이유를 밝혔다.
아르헨티나는 조 예선에서 헝가리와 프랑스를 격파, 비록 조 예선 최종 경기에서 이탈리아에게 패했지만 2라운드에 진출하였다. 켐페스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조 예선 경기에서 단 한 골도 기록하지 못한 것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이 대회에서 우승을 이끈 모네티 감독은 "나는 켐페스에게 콧수염을 자르라고 충고했다."며 조급함에 들떠 있었던 켐페스의 당시 모습을 회상하였다. "조별 예선에서 무득점에 그친 켐페스가 그 대회에서 6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하고 대회 MVP로 선정되었다. 그것은 마술과도 같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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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는 폴란드(켐페스 2골), 브라질, 페루(켐페스 2골)를 제치고 결승에 진출, 네덜란드와 월드컵 우승을 두고 격돌하게 되었다. 1978년 6월 25일은 아르헨티나 국민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아르헨티나가 네덜란드를 3-1로 누르고 최초로 월드컵 우승을 쟁취한 날이기 때문이다. 켐페스는 전반 38분에 첫 골을 기록하고 연장 15분에 특유의 개인기와 강력한 다리힘을 이용하여 추가 득점을 성공시키며 아르헨티나의 우승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오랫동안 암울한 정치 상황에서 고통 받고 있던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월드컵 우승은 희망을 되살려 주었다. 오스발도 피아자가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한 관계로 내가 월드컵 엔트리에 포함되었다. 나는 등번호 10번을 부여 받았고 디에고 마라도나는 당시에는 경기에 출전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 나는 행운아라 할 수 있다. 물론 마라도나는 이후 아르헨티나가 낳은 세계적인 축구 영웅이 되었다. 나는 길레르모 스타빌레에 이어 월드컵에서 두 번째로 많은 골을 넣은 선수가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1978년 우승의 주역들을 다시 주축으로 하여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참가, 강력한 우승후보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영광의 역사는 되풀이 되지 않았다. 켐페스가 골을 기록하기도 전에 아르헨티나는 탈락하고 만 것이다. 이듬해 켐페스는 자신의 등번호 10번을 떠오르는 신동, 디에고 마라도나에게 넘겨주었다. 마라도나는 자서전에서 켐페스를 "이르헨티나 축구를 세계 정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영웅"이라 평가하였다.
국가 대표로서 43경기에서 20골을 기록한 그는 화려한 기록 뿐만 아니라 페어 플레이 정신을 간직했던 진정한 축구인으로서 또한 존경 받고 있다. 그는 국가대표 경기에서 단 한 차례도 경고나 퇴장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의 클럽 경력도 화려하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인스티투토 데 코르도바(73/74), 로사리오 센트랄(74/76), 리베르 플라테(81/82)에서 활약했고 스페인에서는 발렌시아(76/81, 82/84)와 헤르쿨레스 데 알리상테(84/86)에서 스타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오스트리아의 퍼스트 비엔나(86/87)와 상 폴테른(87/90)을 거쳐 크렘저(90/92)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선수 생활을 마감한 이후 약 3년여 동안 휴식기를 가진 켐페스는 이 기간 중에 아르헨티나의 멘도자 주 정부로부터 공로상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이후 발렌시아에서 우루과이 출신의 헥토르 누네즈 감독을 보좌하는 어시스턴트 코치직을 수행하였다. 1995년 그는 다시 칠레 프로 리그에서 선수로 복귀하였고 다음 해인 96년에는 인도네시아 리그 챔피언인 펠리타 하이야트에서 41살의 나이에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1999년 볼리비아 클럽인 더 스트롱기스트에서 감독으로서 첫번째 우승을 맛보았으며 다음해에 다른 볼리비아 클럽인 인디펜디엔테 페트로렐로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선수로서 전적
소속팀:
1971-1973: 인스티투토 데 코르도바 (아르헨티나)
1974-1976: 로사리오 센트랄 (아르헨티나)
1976-1981: 발렌시아 (스페인)
1981-1982: 리베르 플라테 (아르헨티나)
1982-1984: 발렌시아 (스페인)
1984-1986: 헤르쿨레스 데 알리상테 (스페인)
1986-1987: 퍼스트 비엔나 (오스트리아)
1987-1990: 상 폴테른 (오스트리아)
1990-1992: 크렘저 (오스트리아)
1995: 페르난데즈 비알 (칠레)
1996: 펠리타 하이야트 (인도네시아)
소속팀 우승 경력:
1978 스페인컵
1979 스페인컵
1979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80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80 유러피언 수퍼컵
1981 아르헨티나 챔피언십
국제 경기 출전 경력:
통산 43 경기 (20 골)
월드컵 3회, 18경기 출전
1978 FIFA 월드컵™ 우승, 득점왕, 대회 MVP
감독 경력
1993: 발렌시아 (헥토르 누네즈 감독의 어시스턴트 코치)
1996: 펠리타 하이야트 (인도네시아)
1996: 루쉬냐 (알바니아)
1997-1998: 미네로스 데 과야나 (베네수엘라)
1999: 더 스트롱기스트 (볼리비아)
2000-2001: 인디펜디엔테 페트로렐로 (볼리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