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古文)과 금문(今文)
고문이나 금문이라 하면 우리는 흔히 고문은 옛 문자, 금문은 지금의 문자라는 뜻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문과 금문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중국에서는 일상어인 ‘백화(白話)’와 대립하여 문언(文言)으로 쓰인 산체문(散體文)을 ‘고문’이라 병칭하기도 한다. 근대 이전의 한문학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 ‘고문’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첫 번째는 문자인 고대자체(古代字體)로서의 고문이다. 중국 선진(先秦)시대의 과두문(蝌蚪文)이나 전서(篆書)같은 문자를 통칭하는 경우이다. 우리나라에서 허목(許穆)이 편찬한 ‘고문운율(古文韻律)’의 내용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자체(字體)로서의 개념이 고문이 가지고 있던 본래적인 뜻이다.
두 번째는 고대 전적(典籍)이나 학파로서의 고문이다.
고문·금문 논쟁이란 사서삼경의 하나인 서경(書經)의 진위에 관한 논쟁을 말한다. 서경(書經)의 본래 명칭은 서(書)로서 현재 주역(周易)을 의미하는 역(易), 시경(詩經)을 의미하는 시(詩)와 더불어 삼경(三經)이라 불렸다.
삼경을 집대성해 편찬한 이는 공자이다. 삼경은 대학, 논어, 맹자, 중용 등 사서(四書)와 함께 유교의 중요한 경전(經典)을 구성했다. 그런데 이 유교 경전들은 중간에 여러 가지 사건으로 많이 유실되고 실전되어 그 원래의 모습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분서갱유(焚書坑儒)이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그 지도이념을 상앙과 한비자로 이어지는 법가에 기초를 두었다. 진나라의 통일을 주도한 진시황이나 승상 이사는 중국의 사상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제자백가의 학설들을 탄압했다. 또 여기에 자신의 통치를 비판하는 유가의 학자들에 대한 진시황의 증오가 더해져 분서갱유라는 초유의 사상 탄압 정책이 시행되었다. 진시황은 전국적으로 유학을 중심으로 한 제자백가의 서적들을 모두 거두어들여 불태웠으며 의(醫), 약(藥), 복서(卜筮), 농업 관련 이외의 서적을 민간이 소장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것도 모자라 진시황은 그 이듬해 무려 460여 명의 유학자를 붙잡아 들여 땅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고 했다.
이 분서갱유 때 유학에 대한 탄압이 특히 혹심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유가의 경전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와중에 서경도 실전되어 후세에 그 내용이 전해지지 않았다. 한(漢)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유학이 중시되기 시작하면서 유가의 경전들에 대한 복원이 시도되었다. 전한 시대 문제(文帝)는 진(秦)나라 시절에 박사를 지냈던 복승(伏勝)이 상서에 밝다는 소문을 듣고는 근시 조착(晁錯)을 보냈다. 복승은 자신이 암기하고 있던 내용을 토대로 서경을 구술했으며 조착이 이를 한나라 시대의 글씨체인 예서(隸書)로 받아 적었다. 이것이 복생이 전했다는 상서(尙書) 29편이다. 상서라는 것은 한나라 시대에 서경을 소중하게 여겨 높여 부른 명칭이다. 복생의 상서는 당시의 문자체, 즉 금문(今文)으로 적었으므로 금문상서(今文尙書)라 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경 진본이 발견되었다. 전한(前漢) 경제(景帝) 때 경제의 아들인 노공왕(魯恭王)이 곡부(曲阜)에 있는 공자의 옛집을 수리하기 위해 벽을 헐었는데 그 속에서 과두문자(蝌蚪文字)로 쓰인 서경, 예기, 논어, 효경 등의 고대 전적들이 발견되었다.
과두문자란 진나라 시대 이전에 사용되던 고체전자(古體篆字)를 말하는 것으로서 종이와 묵이 발명되기 이전의 고대 중국에서는 죽간(竹簡)을 칼로 파내거나 옻칠을 이용해 글을 썼는데, 끈적끈적한 옻칠을 나무 조각에 쓰다 보니 글자의 모양이 윗대가리는 굵고 꼬리는 가늘게 써져 마치 올챙이(과두)처럼 보였으므로 이런 명칭이 붙었다.
그 당시에는 고체전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공자의 11세 손인 공안국(孔安國)이 복생의 금문상서와 대조해 가며 해석해 주석을 붙였는데 이는 원래 고문(古文)으로 쓰였으므로 고문상서(古文尙書)라 불렀다. 또 공안국이 고문상서뿐만 아니라 함께 발견된 예기, 논어, 효경 등에 대해서도 주해를 붙였으므로 여기에서 소위 고문학(古文學)이 시작되었다.
금문상서가 진짜냐 고문상서가 진짜냐 하는 금고문논쟁(今古文論爭)이 시작된 것은 전한 말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유흠(劉歆)이 고문상서를 진본으로 인정해 학관(學官)에 고문상서를 전문으로 하는 박사(博士)를 설치하고자 시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당시까지 주류였던 금문파의 학관 박사들이 이를 저지하고자 함에 따라 유흠과 이들과의 사이에 큰 논쟁이 일어났다.
세 번째는 문체개념으로서의 고문이다. 중국 당나라 이전에는 문체적인 뜻으로 고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당나라 때에 와서 당시 유행하던 조작적이고 수식이 많은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와 다른 산문 체제를 독립적으로 유지한 문체가 출현하였다.
사륙변려체란 문장이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로 이루어져 수사적(修辭的)으로 미감(美感)을 주는 문체다. 후한(後漢) 중말기(中末期)에 시작되어 위(魏)·진(晋)·남북조(南北朝)를 거쳐 당(唐)나라 중기까지 유행한 문체로, 변려문이라는 명칭은 당송(唐宋) 8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의 변사려륙금심수구(騈四儷六錦心繡口)라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한유 유종원 등은 지나친 수사와 기교, 형식적인 것만을 추구한 변려문(騈驪文)을 반대하고 내용이 충실하고 순박한 한나라 이전의 문체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옛사람의 진부한 말이나 상투적인 표현을 반대하여 단순히 양한(兩漢)을 모방하자는 것이 아니고 창의적이며 평이한 문장의 구사를 주장하였다. 이것을 일러 고문 운동이라 한다.
고문 운동가들이 실천한 고문은 우수한 고대의 문학 전통과 정신을 성공적으로 계승하면서 전혀 새로운 문학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이것은 당나라의 고문 운동가들이 가졌던 문학에 대한 새로운 자각에 이은 참신한 문학관의 형성에서 비롯되었다.
정조 때 당시에 유행하던 한문 문체를 개혁하여 순정문학(醇正文學)으로 환원시키려던 정책인 문체반정도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문체순정(文體醇正), 문체파동(文體波動)이라고도 한다. 특히 1788년 서학에 대한 문제가 본격화되는 정국 상황 아래에서 이를 능동적으로 헤쳐나가기 위해 정조에 의해 마련된 일련의 문체 정책이다.
정조 당시는 패관잡기나 명말청초(明末淸初) 중국 문인들의 문집에 영향을 받아 개성주의에 입각한 참신한 문체가 크게 유행하였다. 이에 대해 정조는 서양학, 패관잡기, 명말청초의 문집을 사(邪)로 규정하고, 이를 배격함으로써 순정한 고문의 문풍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패관소설(稗官小說)의 영향으로 순정성을 잃고 잡문체로 전락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순수한 고문(古文)으로 돌아갈 걸 지시한 사건이다. ‘반정(反正)’은 ‘바른 곳으로 되돌린다’는 뜻으로, 정조는 서학 금단책의 일환으로 문체반정을 주도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불순한 문체는 박지원(朴趾源)과 그의 저작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근원이 있다고 하여 박지원으로 하여금 순정한 고문을 지어 바칠 것을 명하고 반성문을 쓰게 하였다. 박지원이 쓰는 문체가 유교적 질서를 흐트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문체를 바로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담은 허생전이나 호질(虎叱) 같은 그런 글은 쓰지 말라는 것이다. 정조는 1791년에 서학(西學 천주교) 문제에 대한 대처방안으로 “서양학을 금하려면 먼저 패관잡기부터 금해야 하고, 패관잡기를 금하려면 먼저 명말청초 문집부터 금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1792년에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박종악(朴宗岳)에게 패관잡기 등의 서적을 사오지 말라고 명하였다. 또한 주자(朱子)의 어류(語類)를 뽑은 ‘주자선통(朱子選統)’을 비롯하여, 당송팔대가의 대표적 고문을 뽑은 ‘팔자백선(八子百選)’ 등을 출간하여 고문의 모범을 제시하였다.
문체에 대한 이러한 관권의 개입은 결과적으로 자못 활발하게 움직였던 18세기 문예 운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평가된다.
첫댓글 정조 임금께서도 고문을 유지하려고 하셨군요. 이제까지 알았던 정조 임금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라 놀랍습니다. 하지만 백성들 편에서는 나름대로 자유로운 문예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과거로 되돌아가자는 시도는 항상 주저앉게 되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