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one has a Beatle
어제, 오랜만에 인천 국제공항에 배웅을 나갔다.
자타가 공인하듯이 인천 공항은 세계 최고의 첨단 시설과 시스템을 자랑할 만한데, 드넓고 쾌적하고 편리함으로 은근히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분수 넘치게 입증하는 듯 어깨가 으쓱해지고 언제나 기분 좋은 장소이다.
하지만 코로나 발생 이후 2년이 넘도록 국내외 여행이 극감하고, 특히 해외 여행은 거의 제로 상태로 있다가 이제 겨우 회복되는 상황이라서, 아직도 공항 내부는 아까울 정도로 매우 한산한 편이다.
여행자가 탑승 수속을 진행하는 동안, 나는 따로 한적한 코너를 돌아보고 있는데, 저편에 공항 출입 게이트 쪽에서 갑자기 환호성과 함께 우르르 인파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요란한 중국인 단체 관광단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얀색과 붉은색의 경광등을 교대로 번쩍거리며 경호 차량이 도착하고 이어서 하얀색 두건을 쓴 사람 하나가 무슨 교주처럼 사방으로 경호를 받으며 로비에 입장하더니 특별 객실 방으로 들어간다.
어느 유명한 분이 출국하는 모양인데, 광팬 클럽을 몰고 다닌다는 어떤 정치인은 아닐 터이고 손흥민같은 축구 스타이거나 아니면 야구 선수인가보다 생각하고 덩달아 무리 속에 휩쓸리면서, 가만히 보니 머리 하얀 사람은 나 뿐이고 운집한 팬들은 모두가 20대 초반의 여성들이었다.
대형 카메라를 메거나 하다못해 스마트 폰 카메라를 켜 들고 심지어 이동식 알루미늄 사다리까지 들고 뛰는 여성들, 흥분이 지나쳐 다소 광끼까지 엿보이는 무리들 속에 끼어 있는 내 자신이 다소 민망한 느낌도 들었지만 호기심을 못 이겨, 조금 있으면 특별 객실 문을 나와서 출국장으로 이동할 <흰 두건>을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옆에 서 있는 여성에게 우리가 기다리는 이 아이돌이 과연 누구인가 물었다.
한심한 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더니 “투 머니∼” 라나 머라나 잘 들리지 않는다.
알아 들은 척 하고 일단 “투 머치 머니” 라고 새겨 들었다.
아이돌 세상이니만큼 당연히 돈도 많을 듯 싶었다.
그런데 여기 저기서 한국 말이 아니라 중국 말이 시끌벅적 요란하다.
펄 벅의 <大地>에 나오는 메뚜기 떼처럼 온 세상을 중국 사람들과 중국 말소리가 뒤덮고 있는 거 같다.
인천 공항에서 출국할 아이돌의 여행 스케줄을 어떻게 미리 알고 아침부터 구름처럼 모여, 그 절반 이상이 중국 여성들이라니 요즘 세상은 참 어지럽고 충격적이다.
드디어 검은색 남방 셔츠를 입은 거구의 경호원들이 움직이자 특실 출입구를 통해 하얀 두건이 나비처럼 힘도 없이 걸어 나온다.
왜소해 보이는 그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조차 어려운데, 팬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채 그저 마네킹처럼 앞만 보고 묵묵히 걷는다.
마치 사람들에 지쳐 움츠린 사슴처럼 보인다.
하늘을 찌르는 인기를 누리던 엘비스 프레슬리(1935∼1977)가 실제로는 고독하고 우울한 삶을 살았노라고 고백하던 인터뷰가 떠오른다.
그가 이동하는 동안, 인파와 소음이 뒤를 따랐고 나도 그 속에서 주책없이 스마트 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환호성이 난무하는 그 와중에 이 우상의 정확한 이름을 들었다.
<투모로우> 라는 그룹 가수 중에 한 명이란다.
내가 세상사에 뒤처진 탓인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오래전, 1966년쯤으로 기억된다.
고교 재학시절 매월 구독해 보던 <Reader's Digest>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어느 미국인 주부가 쓴 < Everyone has a Beatle > 이라는 제목의 수필이다.
중학생 딸아이가 비틀즈의 광 팬인데, 정도가 너무 지나쳐 모녀간 갈등이 도를 넘어서 속을 끓이다가 결국 자신의 소녀 시절을 뒤돌아 보며 어느 세대이든 누구에게나 우상은 있기 마련임을 뒤늦게 깨닫고 모녀가 어렵사리 화해했다는 내용이다.
아무리 모녀간이라도 이처럼 <내로남불>은 참으로 극복하기 어렵다.
비틀즈를 왜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나는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 후 1969년, 대학 신입생 때였나 보다.
역시 영국 가수 <클리프 리차드> 내한 공연이 유서깊은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있었다.
원래 그 강당은 이화의 딸들이 예배드리는 채플이라 찬송가 멜로디가 벽돌마다 배어있는 경건한 성역이다.
그 날 공연장은 광란의 도가니로 변하여 괴성과 비명 끝에 심지어 기절도 하고 손수건 양말들이 날아다녔다는 보도를 나중에 보았다.
손수건은 알겠는데 양말은 왜 던질까.
또 그 후, 1980년 6월 어느 일요일, <레이프 가렛>이라는 미국 가수의 내한공연이 숭의여고 강당에서 있었다.
나이 어린 꽃미남 가수라서 그랬는지 중고생 또래의 여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 문제는 가수가 공연을 마치고 떠날 때 열광하는 학생들이 교문 입구를 에워싸는 바람에 자동차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경찰과 경호원들의 강압적 비상수단으로 겨우 길을 열어 도망치듯 내빼는 장면을 본 것은, 마침 그날 내가 일요일 일직 근무하느라 청사 마당을 순찰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처가 종합청사로 이사 가기 전, 옛 남산 KBS 건물(숭의여고 바로 옆)에 단독청사로 머물던 터라 철제 정문과 울타리 앞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자초지종 목도했는데, 아이돌 가수가 신변위협을 가까스로 벗어나 홀연히 떠나버리자 망연자실한 여학생들이 철제 울타리를 부여잡고 방성통곡하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감성이 둔한 탓인지 이 정도의 아이돌 현상을 겪어본 일은 없다.
아이돌 현상의 본질은 무엇일까.
삶이란 누구에게나 고독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알기에, 한낱 허상임을 알면서도 인간은 끝없이 무지개 속에 바벨 탑을 짓는 꿈을 꾼다.
그러나 종교도 정치도 학문도 예술도 우리를 허망으로부터 쉽게 구원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체념하면서 구세주 대신 "초인"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고독과 허탈감을 다소나마 해소해주고 불가능한 꿈을 잠시라도 대리 만족시켜 주는 존재가 우상이거나 초인일 테고, 꿈을 집단으로 공유하며 우상과 더불어 마취되는 환각의 시간만큼은 고독도 체념도 울분도 사라질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석양 무렵이 되면, 집 근처에 있는 종합운동장에 가서 맨손체조도 하고 평행봉 철봉도 하고 드라이버 골프채로 스윙 연습도 하곤 한다.
가끔 나가는 골프 모임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다.
종합운동장 내에 있는 잠실야구장에서 프로야구 나이터 경기가 있는 날에는 함성과 응원 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거칠은 북소리 음악소리 그리고 호전적인 함성이 어우러지면, 그 집단 에너지와 열기의 방출이란 요즘 말로 장난이 아니다.
창과 칼로 싸우던 구세기의 전쟁 영화에서나 들어봄 직한 엄청난 굉음이다.
인간의 몸과 본성의 저 깊은 곳에 고여 있는 울분과 꿈을 우려내고 토해내는 포효라고나 할까. 그 울부짖음은 과연 어디에 누구를 향한 것일까,
2천년 전 로마 시내 한 복판 <콜로세움>에 울려 퍼지던 함성과 어떻게 다를까 상상하며 나도 평행봉에 양팔을 걸고 공중을 향해 솟구쳐 본다.
< 2022.7.7. 박성훈 >
<서울대총동창신문, 23.11월호, 제 5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