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
나는 14년차 달림이다(2010년 1월 가입). 오랫동안 마라톤을 취미로 해오고 있지만, 그동안 사실은 일요일 LSD만 했다(일요정모). 그래서 한 달 마일리지가 100km 정도였다. 지금까지 평일에 달렸던 적은 거의 없다(10번 정도 있었을까?). 그러나 지난 6월부터 평일에도 달리기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평일에는 이틀 정도 인터벌(10km)과 템포런(10km) 훈련을 하고, 일요일에는 LSD를 했다(일요일에 1시간 정도 일찍 나와서 5km나 10km를 뛰기도 했고, 어느 일요일에는 43km를 달린 적도 있었다). 그렇게 달리니 한 달에 200km를 간신히 넘었다(최고 235km). 마일리지가 2배가 넘은 것이다. 그리고 6월부터 다이어트를 해서 4-5kg을 감량했다(현재 63kg).
지난 10월 9일에 참가한 국제평화마라톤대회에서 3:26:14를 기록했다. 역시 100km보다는 200km가 도움이 되는 거 같다. 사실 평일에 달리기를 하지 못하는(안 하는) 이유(핑계)는 많다. 물론 게으름도 한몫을 한다. 달리기보다 더 즐거운(효용 있는) 일들은 많다. 저녁밥 먹고 소파에 누워 스포츠 경기 보기(요즘에는 프로야구와 여자배구, 그리고 싱어게인3), 카페에서 책읽기, 저녁에 술 약속, 유튜브 시청하기, 회사에서 종종 야근하기(이건 가장 싫고 의무적인 일) 등등등... 아침에는 40-50분 정도 화장실에서 보낸다. 변기에 앉아 변(便)을 보면서 신문을 보고(이 아날로그 갬성, 어쩔!!!), 이빨 닦고 면도하고 샤워하고.... 역시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장경인대증후군
11월 5일 JTBC서울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 햇수로 5년 만에 참가하는 메이저대회 마라톤 풀코스다(JTBC서울마라톤대회가 작년에 코스를 변경했으니 이 대회 코스는 처음이다). 우리나라 메이저대회는 3월에 동아마라톤, 10월에 춘천마라톤, 11월에 JTBC마라톤(구 중앙마라톤)이다.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3대 메이저대회에서 좋은 기록을 내기를 원하고 그 기록을 소중히 생각한다.
지난 국제평화마라톤대회 이후 장경인대에 통증이 생겨 고민이 많았다. 유튜브에서 장경인대 통증을 완화하는 스트레칭을 검색해서 여러저러 시도를 했다(장경인대는 스트레칭을 해줄 수 없기 때문에 엉덩이 근육인 중둔근과 대둔근, 대퇴근막장근을 스트레칭해주어야 한다고 한다[타초경사(打草驚蛇)라는 말이 떠올랐다]). 폼롤러를 구입해 스트레칭을 하기도 했고, 대회 당일에 처음으로 장경인대와 무릎 쪽에 테이핑을 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JTBC서울마라톤대회에서 장경인대 통증이 재발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대회 하루 전까지도 어떻게 달릴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3시간 29분 페이스로 안정적으로(보수적으로) 달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페이스메이커
대회 당일에 비가 왔다. 우중주가 예상되는, 쉽지 않은 대회가 되겠구나! 먼저 러닝화에 물이 들어가면 무겁고, 주로도 미끄럽고, 몸도 처진다. 다행히 출발할 때는 비가 멈추었고, 하프(?)가 지나서 다시 비가 왔다. 그래도 우중주는 우중주였다. 330 페이스메이커 뒤에 바짝 붙어 출발했다(단미 선배님 동행).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을 출발해 마포구청역, 망원역, 망원동 기업은행 사거리, 합정역을 지나 양화대로를 향해 달렸다(회사가 합정역 2번 출구 근처임). 그리고 여의도까지 초반 5km를 달리는 동안 페이스메이커가 이상했다. 평균 4:45 페이스로 달리는 게 아닌가! 이건 3시간 20분 페이스인데.... 마포대교 지나서도 평균 4:45 페이스로 달리는 거다. 이건 뭐지? 10km를 달리는 동안 페이스메이커 근처에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330 페이스메이커가 두 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은 사라졌다. 나는 페이스메이커를 버리기로 했다.
#음모론
15km는 광화문 사거리다. 이때부터는 동아마라톤 코스와 거의 비슷하다. 그때까지 4:45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몸이 잘 나가는 건지 오버 페이스를 하는 건지 몰랐다. 20km까지는 웬걸 4:30 페이스로 달렸다. 오버 페이스가 아니었다. 하프(신답지하차도)가 지나 기록을 보니 1시간 40분 정도였다. 3시간 20분 페이스였다. 한편에서는 30km 이후 장경인대 통증이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4:40-4:45 페이스로 몸을 눌렀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장경인대 통증은 약간은 있었지만, 달리기에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30km가 지나자 페이스를 올렸다. 비가 왔지만 도리어 시원했다. 그때 숨통이 트이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고, 이제 호수공원 두 바퀴면 피니시 라인을 통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30km를 왔을 때 이상했다. 그동안에는 이렇게 많이 왔네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많이 지쳤다는 얘기), 그날은 왜 이렇게 30km가 짧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회 주최측에서 5-10km를 줄여서 마라토너들에게 깜짝 선물을 하려고 한 게 아닌가 하는 음모론이 생각났다.
정말로 그날 나는 30km를 통과하자 20km나 하프 정도 왔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급수대에서는 물과 이온음료를 꼬박꼬박 마시고(이번엔 다행히 우유팩(?)이 없었지만, 이온음료를 물로 착각해서 머리에 쏟아부어 눈이 따가웠다), 바나나는 2개, 파워젤도 6개 정도 먹었다(이번에 처음으로 아미노바이탈 5000 퍼펙트 에너지젤[파워젤]을 먹어봤다. 맛있었다. 개이득!!!). 특히 망고 후배가 준 파워젤 2개를 먹고 힘이 났다(망고 고마워^^). 초코파이는 먹지 않았다. 이빨에 끼일까봐^^.
30km부터 40km까지, 그 마지막 10km는 평균 4:35 페이스였다. 최고 페이스는 4:25와 4:27 페이스였다(평일 인터벌 훈련과 템포런 훈련이 도움이 된 것 같다. 10월에 인터벌은 400m를 95초까지, 템포런은 1000m를 4:00분까지 끌어올렸다). 고백하자면, 이번에도 지난 국제평화마라톤대회 때처럼 도저히 참을 수 있어 노상방뇨를 했다. 그 시간이 40-50초 가량 까먹어 5:13(37km)이 가장 늦었다. 그리고 정말로 마지막 2km, 각각 4:44 페이스와 4:29 페이스였다.
잠실종합운동장 앞(2호선 종합운동장역 8번 출구)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지만,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나는 가민 시계를 꾹 눌렀다. 대회 종료!!!(최종 풀코스 기록은 3:18:50다). 어쩌면 비와 바람이 내 등 뒤를 밀어줘서 어렵지 않게 피니시 라인을 통과하지 않았을까 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가 10km 지점에서 페이스메이커를 버렸다고 했는데, 내 기억으로는 30km 이후 330 페이스메이커와 320 페이스메이커를 모두 추월했다.
#꿀물과 응원
첫 응원자는 역시나 터보 선배다. 공덕동 오거리를 지나자 어디선가 ‘박상문’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터보 선배다. 고마웠다. 그다음에는 행달아 선배님이 보였다. 한국지방재정공제회(공덕동) 앞에서 행달아 선배님이 손을 흔들고 응원하며 사진을 찍어주셨다. 그리고 17-18km(?)가 지났을까? 평생사랑 선배님이 아주 잠깐 스치듯 보여서 나도 모르게 ‘선배님’ 하고 소리치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주로에서 응원해준 토끼띠 선배님들(블루버드 선배님, 모던하임 선배님 등), 수서 아이씨에서 유턴한 후 꿀물을 건네주신 선배님(정신이 없어 누가 건네준 것인지 잘 모르겠다ㅠㅠ) 고맙습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많고 큰 꿀물을 받기는 처음입니다(500밀리 생수병).
이번 대회를 준비하신 운영진 선후배님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주로에서 사진을 찍어주신 레이크 선배님, 열씨미 선배님, 문현희 선배님 등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더불어 주로 자봉을 해주신 초록 선배님, 돌도사 선배님, 니케 선배, 희나리 선배님, 다크호스 선배님 등도 고맙습니다. 이번에도 동영상을 찍어주신 늘봄 선배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캠프에서 먹거리를 챙겨주신 아우라지 선배님과 캔디 선배님과 해피트리 선배님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중에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딸(초등6)이 문자로 ‘아빠, 파이팅’이라고 보내왔다. 오전 9시쯤에 문자를 보냈으니 내가 그 소리를 듣고 최선을 다해 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마라톤
“나는 어렵사리 결승선을 통과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물 흐르듯 통과한 것도 아니다. 이 마라톤의 의미는 스피드나 고통에 있지 않았고, 내 몸과 도시의 교감에 있었다. 개인 최고 기록 같은 전리품은 필요 없었다. 나는 달리기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길 수 있었다. 오랫동안 이른 아침에 달리기를 하고 온갖 종류의 대회에 참가하면서 나에게 달리기는 존재의 한 방식이 되었다. 보이지 않는 상대를 대상으로 나 자신을 시험하는 방식도 아니고, 나와 비슷한 수준의 마라토너들과의 경쟁도 아니다. 극복할 것은 나의 의구심뿐이었고, 나는 달리기를 통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세상과 충분히 교감하게 되었다.……달리는 일은 여전히 나에게 놀라움을 준다.……나는 계속 달리고 싶다.”
- 카트리나 멘지스 파이크(Catriona Menzies-Pike), 정미화 옮김, 『그녀가 달리는 완벽한 방법』(북라이프, 2017년), 323-324쪽.
- 5년 만에 메이저대회 풀코스 완주 기록증을 받았다.
- 풀코스 4:41 페이스였다.
- 배번과 완주 메달.
- 내가 한 달에 200km를 넘게 뛰었다고? 실화냐?
이제야 유니스 선배님의 댓글을 봤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대회 당일에도
뛰면서 힘들다기보다는 나는 지금 달리고 있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물론 고통이 있었지만,
그걸 커버할 수 있었던 무언가가 저를 지배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더 좋은 기록보다는 달리는 나에 집중했던 과정이
그런 결과가 나왔던 것 같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PB나 더 좋은 기록은
의미가 없습니다.
달리는 나와 거리와 시간만 있을 뿐입니다^^.
토끼팀에 다시 합류한 유니스 선배님,
즐겁고 행복하게 달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