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량치차오가 근대 중국에서 불교학의 한 계기였듯 최남선도 근대 한국의 불교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다. 그는 ‘민족불교’로서 ‘한국불교’를 구상했다. 또한 그는 불교에서 한국 민족의 우수성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에게 불교는 단지 조선불교가 아니라 조선 민족 나아가 동방문명의 정수였다. 그가 제시한 통불교론은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이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필자는 이 글에 최남선의 방대한 저작이나 다양한 활동을 스케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불교 관련 활동에 집중해서 그가 어떻게 민족불교를 창안하는지 살피고자 한다. 특히 그가 일찍이 제기한 문명론과 관련 속에서 민족불교 구상을 분석할 것이다.
최남선 자신도 중인 계층으로서 어느 정도의 자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조부는 유대치 같은 중인 출신의 개화파 지식인에 대한 숭모가 대단했고, 그 점을 어린 손자에게 일찍부터 가르쳤다. 이후 최남선이 유대치나 오경석 등 개화 지식인에 특별한 애정을 가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또한 조선시대 양반들의 무능함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기도 했다는 점에서 계층적인 대항 의식이 존재했던 것 같다. 중인 계층은 근대시기 실무 능력과 개방적인 태도로 인하여 비교적 쉽게 변화된 사회에 적응했고, 또한 이후 근대 엘리트로 자리 잡았다. 현재 한국사회를 다양한 분야에서 장악한 가계(家系)도 이 시기 중인 출신 엘리트에서 출발한 경우가 많다. 최남선은 장자가 아니었음에도 총명함으로 인해 부친으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부친은 여러 면에서 그를 지원했다. 기대 또한 컸다. 그는 10대 이전 한글과 한문을 익혔는데, 한문 실력으로 당시 조선에 유통된 《자서조동(自西?東)》 《시사신론(時事新論)》 《태서신사(泰西新史)》 같은 중국어로 소개된 서양 관련 서적을 섭렵할 수 있었다. 그는 1918년 《청년》에 기고한 글 〈십년〉에서 당시를 회상하면서 “비로소 천하의 큼과 인물의 많음과 사변의 복잡함을 알았다”고 적었다. 최남선은 인문지리지의 성격을 지닌 그런 글들을 통해서 ‘청나라와 조선’이라는 틀을 깨고 ‘세계’를 인식할 수 있었다. 1904년 대한제국 황실유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도쿄에서 유학했고 이듬해 귀국했다. 1906년에 재차 일본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 대학 지리역사과에서 공부했다. 최남선에게서 일본 유학 경험은 일종의 문명 충격이었고, 그 기간 이광수나 홍명희, 안창호 등 조선 지식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개인 단위가 아니라 사회나 민족 단위의 사고를 할 수 있게 됐다. 그가 보기에 조선에 필요한 것은 계몽이었다. 1908년 최남선은 일본에서 인쇄 기구를 들여와 경성에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했다.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최남선은 ‘신문명(新文明)’에 대한 희망과 계몽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다. 이듬해인 1909년 최남선은 한국 최초의 근대잡지인 《소년》을 창간했다. 어쩌면 ‘소년’ 조선을 향한 그의 외침이 이 잡지에 담겼는지 모른다. 최남선은 창간호에 자신이 쓴 저 유명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었다. “철썩, 철썩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로 시작하는 이 글은 최초의 신체시로 불린다. 거대한 파도가 무언가를 무너뜨려 버린다. 이 글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법하다. 문명의 일대격변을 요구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 ‘파괴는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며 불교의 유신(維新)을 말한 한용운과 마찬가지로 최남선도 구습이나 구문명에 대한 거대한 저항 같은 게 필요함을 역설했다. 이후 《소년》과 《청춘》 등 잡지를 발간했는데 거의 일인(一人) 출판의 형식이었다. 최남선은 신문관을 기반으로 해서 잡지와 서적을 간행했고, 매체와 출판을 통해서 사회계몽을 기도했다. 아울러 1910년에는 조선광문회를 설립했는데 고문헌을 발굴하고 발간하고 국어사전을 편찬하려는 취지였다. 1918년까지 20여 종의 고전을 발간하고 최초의 국어사전과 현대적 한자사전을 편찬했다. 박은식, 김교헌, 주시경, 김두봉, 장지연, 현채 등이 참여했다. 계몽을 위한 계몽은 없다. 근대화를 위한 근대화도 없다. 그것은 분명 조선인의 계몽이고 조선의 근대화였다. 이러하기에 그는 조선의 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자연스레 고전 연구에 힘을 쏟았다. 당시 조선광문회를 함께 했던 학자들의 영향도 컸다. 단군을 교조로 모시는 대종교 관련 인사들이 즐비했다. 그가 이후 조선 민족의 기원을 찾으려 애썼던 것도, 단군 연구에 힘썼던 것도 당시 시작된 조선 연구와 관련된다. 이런 경향은 근대 일본이나 중국에서 계몽된 지식인들이 국학 운동을 주도한 것과도 유사하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 시기 일찌감치 국학운동이 있었고, 중국에서는 1900년대 초 《국수학보(國粹學報)》가 창간되어 전통 속에서 민족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다. 전통시대의 설화나 전설을 다루지만 그것의 쓰임은 결코 전통의 복원이 아니라 근대시기 시도된 민족국가 건설에 있었다. 적어도 민족국가라는 이름은 근대의 것이었고, 근대인에게 유통된 관념이기 때문이다. 최남선이 요시다에게 받은 영향 가운데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점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요시다가 엄격한 역사학 혹은 지리학 훈련을 받지 않고서 최고 수준의 학자 반열에 올랐다는 점이다. 요시다는 1909년 학력이 없었음에도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탁월한 연구 성과를 박사학위 논문 정도로 인정해주는 분위기 속에서 그것이 가능했다. 최남선의 생애를 보더라도 그가 정규 교육과정에 참여한 기간은 길지 않다. 그도 독학으로 다양한 분야를 개척했고 주목할 만한 성과를 냈다. 두 번째는 요시다가 일본의 온갖 ‘지명’을 통해서 일본역사를 재구성한 점은 최남선이 이후 지명이나 산명 혹은 고어의 발음 등을 통해서 고대 신화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동아시아의 대표주자가 되었고, 러일전쟁의 승리로 유럽 세계에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외침에서도 알 수 있듯 후진적인 아시아 제국(諸國)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럽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픈 심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유럽에 대항한 동양 일본의 우수성을 다방면에서 확인시키고자 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1942) 등 일본 학자들은 근대 유럽에서 많이 시도한 인류학, 인종학, 언어학 등을 동원하여 고대 일본 문명이 유럽 문명과 대항 가능한 문명이었음을 밝히고자 했다. 이때 출현한 동양학은 “일본이 아시아의 최선진국으로 유럽과 대등한 나라이며, 지리학적 동양 속의 중국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문화적 구조로도 우수하다는 점을 확립하려 했다.” 그는 동양에 새로운 문화권이 존재했고, 그것은 중국과 다른 언어와 역사를 가짐을 주장하려 했다.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을 고대 일본 민족과 연결시키고자 했다. 그는 비교언어학으로 이들 민족 간의 유사성을 확인하고 동일한 계통의 민족임을 주장했다. 이른바 ‘우랄알타이 동(同) 계통론’이었다. 그는 훗날 최남선도 언급한 백두산의 옛 이름 ‘불함(不咸)’이 천을 의미하는 몽골어 텡그리와 관련됨을 지적하기도 했다. 최남선은 1916년 완성한 〈계고차존(稽古箚存)〉에서 한국 고대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미 드러냈다. 또한 이 글에서 단군에서 민족의 시원을 찾으려 했다. 그는 1919년 3·1 운동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있는 동안 ‘밝’이란 조선 중심의 문화 계통 원리를 모색했다. 그리고 1922년 〈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를 《동명》에 연재했다. 여기서 그는 민족의 기원을 탐색하는 데서 민족사를 서술하겠다는 의도를 보인다. 그는 먼저 “조선 역사의 실제적 문제는 조선 민족의 연원이 무엇임으로부터 비롯한다”고 언급한다. 또한 그는 조선의 종족이 어떠한지, 어디서 출현했는지, 어떤 변동을 거쳤는지, 어떻게 현재의 국토를 갖게 됐는지, 민족성은 어떠한지 등의 주제를 살펴야 조선 민족의 연원을 밝힐 수 있음을 지적한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을 발표하기 전에 〈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에서 이미 자신의 ‘불함문화론’을 제기한다. 그는 인류 역사에는 3대 문명 계통이 있고, 그것은 각각 인도유럽 계통과 중국 계통 그리고 ‘불함(不咸) 계통’이라고 말한다. 이는 그가 제시한 일종의 문명론이다. 최남선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런 문명론을 다룬 것은 〈불함문화론〉이다. 최남선은 이 글을 1925년 탈고해서 1927년 경성에서 간행된 일본어 잡지인 《조선급조선민족(朝鮮及朝鮮民族)》 제1집에 발표했다. 여기서 최남선은 단군을 조선 고대사와 극동 문화의 옛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열쇠이자 핵심이라고 천명한다. 단군이 태백산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결국 조선과 조선 민족이 출현했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최남선은 태백산의 ‘백’같이 한국의 수많은 산이나 지명에 등장하는 ‘백’은 실은 단순한 광명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하늘, 즉 천신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는 ‘백’은 ‘(밝)’에 대응하는 글자로 보았다. ‘(밝)’뿐만 아니라 그것의 활동형인 ‘(밝은)’도 마찬가지로 본다. 그는 ‘(밝은)’을 ‘불함(P?rk?n)’으로 표현했다. 한자 표현인 불함(不咸)은 중국 고대 문헌인 《산해경》에 이미 등장한다. ‘밝음’으로 대표되는 태양신이나 천신 사상에 기반한 문명권이 존재함을 그는 끈기 있게 밝히고자 한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가정으로 이 일대(一大) 문화 계통에 불함문화의 이름을 붙여서 종종의 고찰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 문화의 중심임과 동시에 거의 전부를 이루는 것이 , 이요 불함은 그 가장 오랜 자형임에서 취한 것이다. 이 문화의 전 내용을 이루는 종교가 조선에서 , , 불(Pur)의 이름으로 호칭되었음이 명백하므로, 이것은 이 문화권의 명칭으로 오히려 본래적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최남선이 단군설화의 주 무대인 태백산에서 ‘’을 상상했다면 한국의 대표적인 명산 금강산에서 텡그리(Tengri)를 상상했다. 그는 금강산의 금강은 번역어에서 왔다기보다는 원래 이름의 하나인 대갈, 또는 대가리(Taig?r(i))에서 유도됐다고 본다. 금강은 ‘머리’를 의미하는 ‘대가리’에서 나왔고, 이때 머리는 다른 모든 산에 대해 우두머리임을 의미하다고 본다. 바로 ‘신산(神山)’인 것이다. 최남선은 ‘대가리’라는 이 소리에 집중하여 몽골이나 일본 등 다른 지역의 유사한 발음을 추적한다. 그가 말한 ‘불함 계통’의 문명권에서 이 유사 발음의 쓰임새를 추적한 것이다. 최남선은 민족이나 문화의 고대적 실체를 분명하게 인정하다. 물론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것이 일부 변형하지만 그 핵심적인 내용은 변함없이 지속된다고 생각했다. 실체론적인 문화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지금까지 전승된 조선의 고대사란 것은 요컨대 이와 같은 종교적 신화, 신화적 성전이 역사의 형식으로 전해진 것으로서, 부족과 시대에 따라 그 명구의 자면이 어떻게 변화할지라도, 그 본체는 어느 한 근본 화형(話型)에 요약될 성질의 것이다.” 그의 말대로 문명이나 문화 또는 전통 속에서 ‘본체’를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추출할 수만 있다면 고대와 현재를 관통하는 문화 실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최남선의 이런 찬양은 꼭 학문적인 입장에서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불교를 접했고, 말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까지 자신을 불교도로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불교 인연을 소개하는 글 〈묘음관세음〉에서 조부가 개화파 지식인 유대치를 흠모하였고, 유대치가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이유로 불교에 대해 매우 호의적으로 이야기했음을 언급한다. 이 때문에 자신도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좋게 생각하게 됐다고 술회한다. 이후 최남선은 10대 후반 《금강경》을 읽는 등 스스로 불교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고대문명사를 연구한 최남선에게 불교는 학문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중요한 주제였다. 그는 일본에서 근대적 불교학을 경험하고 불교의 가치에 대하여 자각했다. 이상의 항목으로 알 수 있듯 〈조선불교의 대관〉은 불교의 세계적 가치와 조선적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 또한 자신이 전개하고 있던 문명론 속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위상을 어렴풋하게나마 그리고 있다. 그는 한국불교가 단순히 중국 전래품이 아님을 강조한다. 한국의 불교 전래가 시기적으로도 중국 못지않게 오래됐고, 중국 루트가 아닌 서방(인도, 서역)에서 직접 전래한 루트가 존재했음을 강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이나 ‘불함 계통’이라는 문명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말하는 점은 고대 한국은 중국과는 다른 민족 기원과 문화 기원을 가지며, 또한 일본은 한국을 통해서 이 불함 계통의 문화를 전해 받았다는 사실이다. 다분히 민족주의적 발상이 엿보인다. 이런 사고 때문에 그가 구상하는 불교도 다분히 민족불교의 색조를 띠고 있다. 최남선은 10대 시절 유학 기간에 이미 이런 사고가 싹텄다고 자술한다. 1917년 권상로는 《조선불교약사》를 편찬하면서 서문에 “불교가 있는 인도나 중국, 일본은 모두 불교사가 있는데 오직 조선만 없다. 내가 이를 안타까워했다.”고 말한다. 그는 민족 단위의 불교사 서술의 부재를 안타까워했다. 역사서술로서 불교사 서술은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근대 기획과 무관하지 않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이런 경황은 존재했다. 근대한국의 불교사 서술의 대표격인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 간행에 즈음하여 쓴 글인 〈《조선불교통사》에 취하여〉에서 왜 《조선불교통사》라는 엄청난 양의 불교사 서술을 시도했는지 밝힌다. “조선불교가 천5백 년 이래로 계통적 역사가 전혀 없었음은 저들이 자신의 계보를 몰라서 상놈이 되는 것과 같아서 한심하지 않은가.” 상놈이 아닌데도 상놈이 되는 한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불교사 서술’을 시도했다는 이야기인 셈이다. 이능화는 조선인 혹은 조선불교도에게 조선불교의 순수한 혈통과 그것의 우수함을 외치고 있다. 이는 최남선이 조선과 조선 민족의 정지위를 재정립하고자 한 것과 유사하다. 최남선은 〈조선불교의 대관〉을 끝맺으며 자신이 일본 등 근대학술에 힘입어 이런 글을 굳이 쓴 이유에 대해서 “조선불교가 이렇듯 세계에 망각되고 무시됨을 확인케 하려 함이오. 그리하여 조선불교의 영광이 여지없이 매몰되고 조선불교도의 치욕이 갈수록 증가함을 절감케 하려 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왜 한국불교가 망각되고 무시됐을까? 최남선은 우리가 역사에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이능화의 말과 통한다. 그래서 이런 무지를 깨치고 조선불교의 영광을 밝혀줄 사람을 기대한다. 실제 회의 내용과 무관하게 최남선의 〈조선불교〉는 이후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됐고, 영향도 컸다. 최남선은 〈조선불교〉를 “지금부터 반세기쯤 전에 서양의 한 저술가가 조선의 역사와 민속을 소개하면서 ‘은자의 나라(Hermit Nation)’로 묘사한 일이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는 아마도 윌리엄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 1843~1928)가 쓴 ‘Corea, the hermit nation’(1894)을 말하는 듯하다. 그리피스는 일본에 오래 체류했고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는 미국 학자이다. 그는 주로 일본에서 일본 학자들을 통해서 한국에 대한 정보를 획득했다. 그리피스의 저 책은 부정확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서구 세계에 초창기 한국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최남선은 〈조선불교〉를 통해서 ‘하와이’라는 공간에서 한국불교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요구한 격이다. 최남선의 〈조선불교〉는 한국불교를 중국불교의 아류 정도로 취급하는 다카하시 토루(高橋亨, 1877~1966) 같은 일본인 학자에 대한 대항이기도 하고, 한국불교에 대해 무지한 서양세계에 대한 대항이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에서 자생한 불교 전통보다 중국에서 전래한 불교 전통을 더 우월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존재했다. 불교에서 유통된 ‘사대주의’라고 할 법하다. 이런 점에 주목하면 한국불교는 중국불교를 닮고자 하는 주변부 불교일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대한제국의 성립으로 조선(한국)이 정치적으로 중국에서 독립했듯 종교나 사상 면에서 독립을 시도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새로운 동경 대상으로 일본이 출현한 상황에서 발생한 일이기는 하다. 다음은 정황진이 1919년 발표한 글이다. 당시 불교계의 여러 사람이 민족불교를 요구했지만 민족불교의 특수성으로서 뭔가를 제시한 사람은 드물다. 우리가 최남선의 〈조선불교〉에 주목하는 이유도 실은 이 때문이다. 최남선은 한국불교의 독창성은 이론과 실천이 원만히 조합된 것에서 찾는다. 이 때문에 “인도 및 서역의 서론적 불교, 지나의 각론적 불교에 대하여 조선은 최후 결론적 불교를 건립하였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결론적’이라 함은 일종의 완성태를 가리킨다. 완벽한 상태라는 이야기다. 최남선의 이런 논의는 이후 불교계에서 어느 정도 유통된 듯하다. 〈조선불교〉가 발표되고 몇 달 후 김경주는 〈현하세계의 불교대세와 불타일생의 연대고찰〉(《불교》 77)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 불교는 문화가 교차하는 지역에 처함이 서역과 동일하여 원효대사 등의 출현으로 각 종파를 통일하는 불교[統一的佛敎], 즉 결론적 불교로 완성되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말대로 하면 서역불교도 통일적 불교이고, 결론적 불교여야 한다. 하지만 최남선은 서역불교는 서론적 불교로 취급했다. 여기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지만, 김경주는 최남선과 마찬가지로 통일적 불교와 결론적 불교를 함께 거론하고 둘을 동일시했다. 최남선은 ‘결론적 불교’라는 표현 외에 한국불교의 독창성으로 ‘통불교’란 개념을 제시했다. 그는 〈조선불교〉 제4장 ‘원효, 통불교의 건설자’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최남선이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내세운 ‘통불교’ 개념은 해방 이후 다양하게 변주되어 여러 학자의 ‘한국불교사 기술(記述)’ 속에 침투했다. 회통불교나 총화불교 같은 표현도 통불교 담론의 연장선 위에 있다. 하지만 통불교 담론은 순수하게 최남선의 민족주의 열정에서 연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통불교’ 개념은 일본 메이지불교가 생산한 다양한 담론 지형 속에서 출현했다. 일본에선 ‘불교통일론’이나 ‘통불교론’은 최남선이 〈조선불교〉를 쓰기 수십 년 전부터 통용됐다. 통불교론 담론과 구체적 관련 있는 메이지불교의 인물은 무라카미 센쇼(村上專精, 1851~1928), 타카다 도겐(高田道見, 1858~1923), 이노우에 세이코(井上政共) 등이다. 근대 한국에 가장 많이 소개된 인물은 무라카미인데, 그는 1901년 《불교통일론(佛?統一論)》 제1편 〈대강론〉을 출간했다. 1912년 권상로는 이 책 일부를 소개했다. 무라카미의 불교 통일론은 최남선뿐만 아니라 총화불교를 말한 조명기도 중요하게 거론한다. 1917년 무라카미는 식민지 조선을 방문하기도 한다. 타카다는 《통불교일석화(通佛?一席話)》(1902)와 《통불교안심(通佛敎安心)》(1904)을 간행했다. 조은수는 제임스 키틀러(James Ketelaar)의 연구에 힘이어 최남선의 통불교 개념이 타카다의 논의와 가장 유사하다고 파악했다. 이노우에는 《통불교》(1905)와 《통불교강연록》(1911)을 간행해서 ‘통불교’ 개념을 대중에게 알리려 노력했다. 박한영은 1916년 《조선불교월보》에 이노우에의 《통불교》 내용을 소개하기도 한다. 필자는 위에서 소개한 세 사람 가운데 무라카미가 최남선의 통불교론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본고에서 이 점에 대해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한국 근대불교 전체에서 무라카미의 ‘불교통일론’ 영향은 최남선이 아니더라도 확인할 수 있다. 최남선은 통불교론을 민족불교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이론 기제로 동원했지만, 일제가 총동원체제를 발동했을 때, 그것은 국민 동원의 구호와 유사하게 사용됐다. 해방 후 독재정권 시절에는 민족단결이나 총화단결이라는 기치 아래 통불교 담론은 단결의 구호로 재생되기도 했다. 조은수의 표현대로 최남선이 시작한 통불교 담론은 ‘민족주의와 식민주의 사이’ 어디쯤 위치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런 과거가 있기에 우리는 통불교 담론을 시대 맥락이나 정치색을 빼고 순수하게 학술적인 시선으로 다룰 수가 없다. 당연히 그래서도 안 된다. 불교학계에서는 주로 〈조선불교의 대관〉이나 〈조선불교〉를 중심으로 최남선의 불교를 분석했다. 특히 ‘통불교 담론’에 매몰되어 그의 불교를 본 점도 있다. 하지만 〈조선불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최남선이 말하는 불교는 방대하다. 근대시기 그가 상상한 세계나 상상한 불교는 우리가 실감하는 세계나 불교보다 월등히 크다. 그가 상상한 공간과 그가 풀어낸 공간은 지금 우리로선 신천지라고 할 수 있다. 불교학의 경계를 넘어 포괄적인 시야로 최남선의 문명론과 불교를 연구한다면 여태껏 알지 못한 한국의 근대와 불교를 만날지도 모른다. ■
김영진 |
출처: 임기영 원문보기 글쓴이: dlpul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