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특전 U보트 ]
이 영화는 <사선에서>·<아웃브레이크>·<에어 포스 원>·<트로이> 등 할리우드의 여러 흥행작들을 내놓은 볼프강 페터센 감독이 미국에 건너오기 전인 1981년, 독일 본토에서 연출한 작품이다. 반전 메시지와 휴머니즘을 짙게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전에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대부분의 2차 대전 영화와는 달리 독일군의 시각으로 만들었지만 경이로운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독일 영화로는 드물게 1982년 아카데미 최우수감독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페터젠 감독은 처음 미국에서 시사회를 열 때 영화 첫 장면에서 '4만 명의 독일 U보트 승조원 중 3만 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자막이 뜨자 미국 관객들이 환호성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뜨악했다고 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관객석이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고 영화가 끝나고 페터젠이 무대에 오르자 기립 박수가 한동안 이어졌다.
(오른쪽 위의 사진, 유보트 내부, 흰모자는 함장)
2차 대전의 적이었던 독일이 만든 독일 군에 관한 영화이니 편견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미국 관객의 처음과 마지막의 반응이 달라진 것은 이 영화가 제시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와 반전의 메시지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오른편 사진, 함장)
영화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잠수함인 U보트에 승선했던 43명 승조원들의 출항과 임무, 귀향의 악전고투 과정을 그린다. 격렬한 전투나 영웅담보다는 좁아터진 잠수함 안에서 지내야하는 승조원들의 눅눅한 일상을 주로 보여준다. 그런데도 3시간 반(감독판)이나 되는 상영시간이 훌쩍 지나갈 정도이니 페터젠 감독이 할리우드에 스카우트된 이유를 알 만하다. 할리우드 <람보>식의 과장 없이 전쟁의 의미를 진지하게 묻고 있는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요즘의 그 흔한 CG 하나 쓰지 않고도 당시의 투박한 특수효과 기술만 가지고 사실감 이 넘치는 수작을 만들었다.
(오른쪽 사진, 기관장)
본격적인 잠수함 영화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분야에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잠수함 영화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 "푱! 푱!(영어로는 Ping! Ping!)" 하는 소나(청음기) 소리의 원조가 바로 이 작품이다. 사실 현대 잠수함의 소나 소리는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들리지 않는데도 이 효과음은 이대로 굳어져 버렸다. 원래 5시간 53분짜리 6부작 TV 미니시리즈로 제작되어 방영되었는데 호평이 이어지자 2시간 30분짜리로 편집하여 세상에 공개했다.
요즘에는 일부 편집된 장면을 되살린 3시간 30분짜리 감독판이 나와 있다. 당시 독일에서 제작된 영화들 중 가장 많은 제작비 1,850만 불이 들어갔다. 개봉 이후 본전은 훌쩍 뽑고도 남았다. 원작자인 로타-귄터 부흐하임이 실제로 이 영화의 배경이 된 U-96(함장: 하인리히 레만 빌렌브로크, U보트 에이스 중 한사람)을 타고 종군한 경험을 1973년도에 발표했다. 베스트셀러가 된 그 책을 영화로 옮겼다. 영화에서 나오는 정훈장교 베르너 소위가 바로 로타-귄터 부흐하임이다.U보트를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묘사한 뛰어난 사실감은 자타가 인정할 정도였다. 나사, 볼트 등 부품 하나하나와 휘어지고 비틀어진 녹이 슨 파이프 배관에 이르기까지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히 엿보인다.
폐쇄된 공간인 함내에서의 시간이 흐를수록 승조원들의 안색은 점점 새하얗게 변해가고 수염이 얼굴을 덮어 가는 배우들의 모습을 보면 벨프강 감독의 사실적인 표현에 대한 집념을 짐작케 한다. 1년 가까운 영화 촬영은 독일인들답게 각본에 쓰여진 순서대로 철저하게 진행되었다. 앵글 때문에 어쩔 수 없아 잠수함 세트의 벽 일부를 치우고 촬영한 장면이 있지만 현장감 있는 촬영을 위해 촬영감독은 스테디캠을 개조하여 카메라를 직접 몸에 달고 부상방지용 보호 장구를 착용하고 통로를 뛰어 다니면서 촬영했다고 한다.
(오른쪽 사진, 함장과 장교들)
실제 함장이었던 빌렌브로크가 영화의 감수자로서 직접 참여했다. 그러나 정작 빌렌브로크는 영화가 만들어진 다음에 "우리 U보트 승조원들은 영화에서처럼 패배주의에 찌들어 있지 않았다."며 격렬히 항의하면서 이 문제로 원작자와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당시 생존 U보트 에이스들 중의 일부는 빌렌브로크의 견해에 동조하기도 했고, 또 다른 U보트 에이스는 전적으로 원작자의 견해에 동조한다는 견해를 밝히는 등 U보트 에이스들끼리도 옥신각신 하기도 했다.
이 같은 문제는 1980년대 중반까지도 독일이 완전한 반성을 이루지 못한 채 히틀러와 나치에게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면서 모든 것은 나치의 잘못이라는 식으로 어정쩡하게 넘어간 시대적 배경에서 비롯된다. 생존자들 중 특히 전쟁영웅들 사이에서 그런 경향이 심했다. 더구나 전쟁 당시 전원 지원자만으로 구성된 잠수함 승조원들의 경우 징집병들로 구성된 육군과는 달리 국가의식이 유별났다는 점도 일부 에이스들의 항의를 불러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영화의 최고의 명장면이자 이 영화가 반전 영화임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은 마지막 부분일 것이다. 구축함과 항공기의 공격, 심지어 해저에서 생매장 당할 위기에서도 살아남은 U보트의 승조원들이 천신만고 끝에 기지에 도착했지만 벙커 안으로 진입하기 직전 연합군 폭격기의 공습에 직면한다. 베르너 소위를 제외한 승조원들이 모두가 전사하면서 U보트도 함께 침몰한다. 죽어 가면서 이를 지켜보는 함장의 허망한 눈빛이 애처롭기가 그지없다.
패전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독일을 상징하는 명장면이다. 영화는 군데군데 반전메시지를 담고 있으나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시종일관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 갈뿐이다. 페터센 감독은 이 영화로 실력을 인정받아 할리우드로 건너오게 된다. 이후 여러 다양한 블럭버스터물을 내놓으며 미국에 진출한 가장 성공한 독일 감독으로 명성을 날렸다. 2022년 8월 12일 췌장암으로 눈을 감았다.
간략한 줄거리
본격적으로 2차 세계대전이 전개되는 1941년, 젊은 신참 병사들이 승선한 잠수함 U-96은 대서양으로 출항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잠수함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오는 답답함과 우울함이 이들을 엄습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수송선단을 호위하는 영국 구축함과 맞닥뜨리게 된다. 치열한 추적을 따돌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은 비로소 전쟁의 진실에 직면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힌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무렵 그들에게 또 하나의 지시가 떨어진다. 그들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은 영국군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라는 것이다. 자살 명령이나 다름없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적지 한 가운데를 뚫고 지나간다. 공중에서 폭탄 세례를 맞으면서 U-96은 크게 파손되고 망가지면서 심해 깊은 곳으로 처박힌다.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살아서 기지로 귀항한 U보트는 연합군 폭격기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고 정훈장교 베르너를 뺀 나머지 함장과 모든 승조원들은 전사한다.
[ 독일 잠수함 함대 사령관, 카를 되니츠 제독 ]
훗날 윈스턴 처칠로 하여금 "2차 대전 중 나를 가장 두렵게 한 것은 U보트였다."라고 할만큼 그를 떨게 한 독일 잠수함 U-보트 함대를 지휘한 인물은 카를 되니츠였다. 전사(戰史)는 그를 잠수함의 파괴력과 전술적 중요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사진, 되니츠)
되니츠는 히틀러 집권 후 잠수함대를 재건하는 임무를 맡으며 잠수함대 사령관이 됐다. 이 때 되니츠는 히틀러에게 "우리가 300척의 U보트만 있으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호언장담 했다. 이는 100척은 작전에 투입하고 100척은 유지 보수를 하면서 대기하고 나머지 100척은 훈련을 받는다는 맹랑한 생각이었다. 이 말은 씨도 안 먹혔다. 히틀러의 관심은 여전히 육군과 공군에 머물러 있었고 해군은 제3제국에서 서자 취급을 받고 있었다.
먼저 U보트의 가격이 만만치도 않았다. 한 척당 약 300만 달러의 U보트 가격은 중형 전차 60대에 맞먹는 금액이었다. 300척의 가격이면 전차 1만8천대를 만들 수 있었다. 육군 출신인 히틀러에게 얼토당토않은 제언이었다. 게다가 개전 초기에는 히틀러가 영국에 대한 유화정책을 펼치고 있어서 훗날 벌어지는 대서양 전투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에 따라 해군에 투자하는 비용 자체가 육군과 공군에 비교하면 현저하게 적었고 늘릴 생각도 없었다.
되니츠는 제1차 세계대전 때 U보트 함장으로 실전을 경험한 베테랑이었다. 1차 대전 당시에도 상대적으로 생산비가 낮으면서 은밀성이 높은 잠수함이 해군의 주력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전쟁이 터지자 수적으로 부족한 잠수함 수를 만회하고자 가급적 많은 수를 동시에 투입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U보트 한 척이 연합국 선단을 발견하면 인근의 다른 U보트를 불러 모아 떼로 공격하는 ‘이리떼 전술‘을 개발했다. 대전 초기 이 전술에 연합군은 혼쭐이 났다.(사진, 되니츠와 히틀러)
그러나 연합국은 독일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하고 B-24 같은 장거리 초계기와 광대역 레이더 등 대응 무기를 개발하는 등 독일군의 이리떼 전술에 필사적으로 대항하면서 견뎌나갔다. 연합군의 U보트 척결 작전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1942년 말에 이르자 그렇게도 설치던 U보트의 운명은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버렸다.
1945년 4월 히틀러는 자살하기 직전 유언으로 자신의 직위인 총통직을 둘로 나누어 대통령과 총리로 분리시킨 후 되니츠를 차기 대통령 겸 국방군 총사령관으로 지명했다. 총리로는 심복인 괴벨스를 지명했으나 괴벨스는 히틀러를 뒤따라 자살하는 바람에 사실상 되니츠가 나치 정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되니츠는 독일이 항복한 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형기를 모두 채우고 1956년 석방되었다. 재판 당시 “나보고 그 임무를 다시 수행하라면 다시 할 것이다.”라고 발언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 발언은 군인으로서의 신념으로 보는 긍정적인 시각과 전범 사실을 반성하지 않았다는 부정적인 시각이 동시에 공존했다.(사진, U보트)
되니츠는 감옥에서 출소한지 2년 후 1958년 『10년 20일』이라는 회고록을 집필했다. 제목인 ‘10년 20일’이란 히틀러 밑에서의 10년, 그리고 히틀러 사후 대통령으로서 보낸 20일을 말한다. 석방 이후 서독 해군 장교들 사이에서 원로 대선배에 가까운 예우를 받으며 조용히 지내다 90세의 나이로 198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되니츠는 특별한 인연이 없는 히틀러가 본인을 후계자로 지목된 것에 대해 매우 의아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프로이센 출신의 귀족들이 우굴거리는 육군은 예전부터 하사 출신 히틀러를 우습게 아는 분위기여서 서로가 껄끄러운 관계였다. 더욱이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패전과 본인의 암살사건(1944.7.20.) 이후 독일 국방군 수뇌부에 대해서 극도의 불신을 갖게 되면서 육군에서 후계자를 지명한다는 것은 애시 당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스탈린그라드 전투
2차 세계대전 때 1942년 7월부터 6개월 동안 소련의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이 사투를 벌여 약 2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독일군이 참패했다.
공군은 히틀러의 알랑쇠로 유명한 괴링이 공군원수이자 제국원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거들먹거려 왔다. 나치 제2인자의 직함을 갖고 있던 그는 허풍을 떨면서 계속 삽질을 하는 바람에 총통의 눈 밖에 난지 오래되었다. 삽질 중에서 특히 영국본토항공전에서 영국 공군에 죽을 쑤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막판에 큰소리 뻥뻥 치던 공군의 보급이 지리멸렬했었던 점이 두드러졌다. 또한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하던 히틀러 직속 똘만이자 친위대장인 힘러는 전쟁 막판에 히틀러 몰래 연합군에 손을 내미는 등의 배신행위로 히틀러에게 단단히 찍혀버린 후였다.
가장 심복이던 선전상 궤벨스는 이미 가족들과 지하 벙커에서 히틀러를 따라 자살한 후였다. 반면에 해군은 육군·공군·친위대에 비해 정치적인 힘이 미약했고 해군 수뇌부 사이에서도 군이 정치에 크게 개입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전쟁 말기에 히틀러가 군 세력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조직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되니츠가 후계자로 지목된 것이다.(사진, 앞줄 왼편 괴링과 뒷줄 가운데 되니츠)
* 이리떼 전술
이리떼 전술이란 지상에 있는 지휘소가 미리 잠수함들을 연합군 호송선단이 지나갈 것으로 대충 예상되는 수역(水域)에 분산해서 배치한다. 이후 이들 잠수함 중 한척이 호송선단을 발견하고 무선으로 지휘소에 알린다. 그러면 지휘소는 해당수역에 갈 수 있는 모든 잠수함들에게 알려 호송선단을 떼로 몰려들게 해서 공격하는 방식이다. 이리떼 전술이 극성을 떨자 영국은 극심한 물자 부족으로 전쟁수행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당시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던지 처칠이 “전쟁 기간 중 가장 두려운 적은 U보트였다.”라고 회고했던 시점이 바로 이 때였다.
이 전술 때문에 연합군은 1941년과 1942년에 U보트의 공격으로 700척이 넘는 선박을 잃었다. 대서양 보급선이 위기에 봉착하면서 영국은 이제 굶어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코너에 몰린 영국과 미국은 수백 척의 구축함과 장거리 정찰기, 레이더와 음파탐지기(sonar), 대량의 폭뢰를 총동원하여 U보트에 결사적으로 맞섰다. 연합군의 대잠수함 기술이 나날이 발전할수록 U보트의 피해도 심각해졌다. 되니츠 사령관은 히틀러에게 신형 잠수함의 증산을 요구했지만 잠수함의 증산 속도는 한없이 더디기만 했다. 만약 되니츠의 요구대로 신형 U보트 증산이 전쟁 중반에만 이루어졌더라면 전쟁 양상은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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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차 대전사중 공포의 유보트의 무시무시한 위력과 승조원의 고통을 상세히 알게되어
고맙습니다
나폴레옹도 겨울혹한기어 수만대군을잃고 패전했는데
히틀러가 독소불가침조약을
깨고 덤비다 엄동설한에 오줌누다
곧휴도 어는 ,지옥서 참패
에휴 불쌍한군인들만 불귀의객을
만들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