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남정맥(落南正脈) 개요
낙남정맥(落南正脈)은 낙동강(洛東江)의 남쪽 울타리라는 뜻이다.
한반도 최남단의 산줄기로 즉 지리산 영신봉에서 남쪽으로 갈래쳐 나와 옥산,
대곡산, 여항산, 무학산, 천주산, 정병산, 신어산을 거쳐 낙동강하구 매리라는
동네에서 끝나는 도상거리 약 232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이 산줄기는 시종일관 경상남도의 남강 남쪽 바닷가를 달리는 산줄기다.
지리산 천왕봉 북쪽에서 흐르는 경호강을 따라오다 경호강이 산청군 단성면 에서
남강 이라는 이름으로 바꿔달고 김해 북쪽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잠시 낙동강이
되었다가 바다로 흘러들게 된다.
지리산군을 제외하고는 함안 여항산(770m)이 최고봉이 될 정도로 대부분 낮은
산으로 이어지지만 남해바다와 인접한 산줄기인 탓에 시야가 확 트이는 조망이
일품이며 남녘의 산 특유의 멋을 즐길 수 있는 정맥이라 하겠다.
산줄기를 이루는 산들은 지리산 영신봉,지리산 삼신봉,태봉산,실봉산,와룡산,
무선산, 봉대산,양전산,백운산,천황산,대곡산,무량산,백운산,덕산,필두봉, 암산,
깃대봉, 여항산,서북산,봉화산, 광려산, 대산,대곡산, 무학산, 천주산, 정병산,
대암산, 용지봉, 신어산, 동신어산 등이다.
▣ 낙남정맥
낙남정맥은 백두대간의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하여 김해 매리 동신어산으로
이어지는 분수령으로 232km(gps:244km)에 이르는 산줄기를 말한다.
그런데 산자분수령 개념으로 볼 때 분수령(分水嶺)이란 둘 이상의 수계를 가르는
(分水界)산등성이를 말하는 바, 김해 매리에서 정맥이 끝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이론(異論)이 제기되면서 신상경표가 등장한다.
낙남정맥이란 낙동강 남쪽에 있는 정맥으로서 큰 수계로 낙동강과 섬진강 또는
남해바다의 분수령이 되어야 하는데 신어산, 동신어산 등의 산줄기에 떨어진
빗물은 어느 쪽이던 모두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따라서
신상경표에서는 낙남정맥은 창원 대암산에서 용지봉으로 잇지 않고, 상정령,
불모산, 화산, 굴암산, 보배산, 봉화산을 이어 녹산으로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한 낙남정맥은 하동, 진주, 함안, 마산, 창원을 지나
마지막으로 김해의 낙동강 하류인 매리마을에서 그 맥이 다하는 한반도
최남단의 산줄기이다.
산행구간 : 고운동제~무계재~외삼신봉~석문~의신마을갈림길~음양수~창불대~
영신봉~세석대피소~청학동갈림길~거림마을 주차장
산행거리 : 구간거리 약:19.94km,(거림마을 주차장까지 거리 포함)
산행일시 : 2016년 06월10일(금.무박) 알파산악회와 함께
총 소요시간 04:30~14:30 ★10시간 소요 (식사 및 휴식시간 포함 )
날 씨 : 구름속에 약간의 시원한 바람
▼이번 낙남정맥 제1구간은 백두대간 영신봉에서 가지를 쳐, 첫 시작하는
곳이지만, 우리는 제2구간 고운동재에서 제11구간까지 진행 후 땜방 형식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등로가 잘 정비 된 명산도 사람에 치이면 아름답지가 못하고 산행내내 짜증이 난다.
이번 정맥 등로길은 산죽길을 걸어 가는 고생길이지만 좋게 생각하면 약간의 긴장감
과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은 관계로 긴장을 풀면, 다른 길로 들어서기가 쉬우나
그래도 사람으로 짜증없이 호젓함과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행운에 남부능선길
이라 생각을 하며, 이 맛에 1대간 9정맥을 하는것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
봄에는 진달래부터 시작하여 마음껏 꽃구경을 하고, 여름이 되면,자신 지구력에
의지하며, 가을이 오면, 사람 손이 닫지 않는 곳의 이쁜 단풍을 마음껏 구경하면서
산행을 한다.
겨울이 되면,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지겹도록 걸을 수가 있는 자연의 풍경을
마음속에 담고, 행복감을 느끼며, 물론 아주 추울 수도 있으나, 그 눈속의 황홀함은
정말 멋지다.
영신봉~삼신봉(1289m)에 이르는 처음의 약 8km구간은 지리산 남부능선과 겹친다.
정맥길이 아니면 잘 걸어 갈 수가 없는 이념과 갈등에 시대적 변화의 애환과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는 그 아픈 현장 주변의 남부능선길을 잘 마무리 하였다.
▼1차 코스 : 고운동재~영신봉~거림마을 주차장
▼고운동재 도착
고운동재는 하동군 청암면에서 산천군 사천면 고운동마을 있는 고개다.
고운(孤雲)은 외롭게 떠도는 구름이라는 최치원 선생님의 호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들머리는 철문 펜스를 지나자마자 약 10m 지점에서 좌측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경주 최씨의 시조인 최치원은 그의 마지막은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사람들 사이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 갔다는 전설만 전해지고 있다.
또 고운은 지리산과도 인연이 깊어 지리산의 산신령이 되었다고도 전해지는데,
지리산 곳곳에는 고운에 관한 전설과 지명들이 많이 남아있다.
옥천대, 문창대, 세이암, 환학대 등 고운과 관련된 지명과, 고운의 친필이라고 알려진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쌍계석문, 광제암문 등의 글씨 등이 그 흔적들이 있다.
그 중 지명(地名)으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그의 호를 딴 '고운동(孤雲洞)'이 이곳이다.
▼들머리에서 5분여 생리적 현상인 개인적 볼일을 보고, 후미에서 나 홀로 이어간다.
들머리 들어가면 곧바로 10m 산죽 터널숲 지나서 완만하게 등로따라 첫봉우리 올라선다.
▼안부 묘지터 통과
2번째 약간의 산죽군락지 터널을 통과하면 완만한 등로길이 나오고 안부에서 내려서면
우측편으로 묘지가 보이고, 묘지에서 산죽군락지 급경사지을 올라서면 991봉에 도착한다.
사람 키 높이의 산죽이 빽빽하게 차 있는 가운데 등로를 고개을 숙여서 진행한다.
산죽가지가 얼굴을 할퀴고 그래도 우리는 이 길을 지나야 한다.
▼묵계재(해발815m)도착
묵계치는 경남 하동군 묵계리와 산천군 시천면 내대리를 잇는 고개이다.
산아래 1047 지방도와 삼신봉터널이 지나고 있는 지점이다.
헬기장인 묵계치는 온통 산죽으로 뒤덮혀 사거리 갈림길로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
묵계치을 직진으로 진행하면 급경사지가 나오고 올라서면 암봉에 도착한다.
▼묵계재에서 급경사 산죽군락지을 올라가고...
▼암봉으로 올라가는 중에 조망처에서..
▼암봉 도착
공포에 산죽군락지는 암봉 아래에서 끝나고 그 이후에는 약간의 산죽지대가 이어진다.
무명 봉우리 올라 잠시 휴식을 하고 좌측으로 내려가 다시 암릉지대를 이어간다.
등로길 옆으로 조망처에서 주변을 조망하며 천천히 오름길을 올라간다.
▼안부에 도착하여 다시금 오름길을 올라가고..
▼능선에 올라서면 갈림길에서 마루금은 우측으로 이어간다.
잠시 후 암릉지대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이어가고..
▼좌측 암봉을 우회하여 이어가고..
▼암릉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외삼신봉 방향으로 이어가면 암릉지대 도착한다.
출입을 통제한다고 로프도 제거하는 바람에 경준대장님이 설치한 로프를 의지하며
직벽 암릉지대를 실타래같은 밧줄을 부여잡고 힘겹게 올라간다.
▼외삼신봉(1,288.4m) 도착
지리산 주능선을 지척에서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정상 봉우리라고 하는데..
3대가 발복(發福)을 해야 볼 수있다는 지리산의 일출은 흔히들 천왕봉이지만,
낙남정맥 종주길이 아니면 올 수가 없는 남부능선 능선봉에서 볼 수있다는 건
우리들에게 행운이라 말하고 싶었는데.. 역시 내가 너무 욕심을 많았나 보다.
구름으로 조망이 되지 않아 정상에서 정상주 한잔하며 아쉬움 마음으로 후미를
기다리며 주변을 감상한다.
내 마음을 알고 산신령님께서 약간에 지리산 주능선을 보여준다.
오늘 산행중에 여기서 보는 것이 마지막 풍경이라 생각도 못했는데...
어리석은 사람이 지혜로워진다는 지리산을 어머니의 품속에 산이라고도 한다.
▼외삼신봉에서 바라본 지나온 마루금의 모습이 조금 보여주고 있고...
진행방향 마루금 방향의 삼신봉이 빨리 오라 손짖을 하고 있다.
마루금 좌측으로 내삼신봉이 조망이 되고, 그 뒤로는 반야봉에서 천왕봉까지
어이지는 지리산 주능선이 장쾌하게 펼쳐지고 있는데.. 마음으로만 느낀다.
외삼신봉에서 25분 정도 머물다 맨 후미에서 나 홀로 마루금을 이어간다.
▼외삼신봉에서 조망을 마치고 우측편 암릉지를 내려서면 급경사지가 나오고
우측편 내림길로 진행하니 등로길이 좋아지면서 정맥 시그널이 눈에 들어온다.
완만한 등로길이 이어지다가 산죽군락지 급경사지가 나오면서 출입금지 입간판이
설치되어 있는곳을 빠져 나오고, 이곳이 바로 갓걸이재 청학동으로 갈림길이다.
▼청학동(갓걸이재) 사거리 갈림길 도착
이정표 : 청학동마을 2km, 삼신봉 0.4km, 세석대피소 8km
고운동재에서 외삼신봉의 산죽군락지는 산죽이 사람 키높이 보다 크고 울창하여
얼마나 힘든 사투를 하고 비탐방 통제구역을 벗어난다.
아래쪽 청학동(靑鶴洞)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 있는 마을로써 도인촌
(道人村) 또는 청학동이라 불리고 있으며, 조선시대 수많은 나그네들이 찾아 입산
은거하였던 살기 좋은 곳으로 청학동은 시선이 학을 타고 노닐던 지상선경이라
하여 중국의 무릉도원과 같이 천하명소로 일컷는다.
이 곳은 예로부터 천석(泉石)이 아름답고 청학이 서식하는 승경(勝景)의 하나로
꼽혀 왔으며, 주민 전체가 갱정유도(更定儒道)를 신봉한다.
갱정유토는 단군계신흥종교로 일명 일심교(一心敎)라고도 하는데, 신도는 한복에
푸른 조끼를 입고, 미성년 남녀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길게 땋아 늘어뜨리며,
성인 남자는 상투를 틀고 큰 갓을 쓰고 도포(道袍)를 입는다.
자녀들은 학교에 보내지 않고 서당에 보낸다.
주민들은 농업 외 약초. 산나물 채취와 양봉. 가축 사육 등으로 생계를 꾸려 나간다.
가옥은 모두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초가 형태를 띠고 있으며, 놀이문화는 우리나라
전래의 민속놀이가 모두 행해지고 있지만, 근래에 와서는 현대적인 편의시설, 예컨대
TV. 라디오. 전화. 세탁기 등을 갖추고 문화생활을 영위함으로써 신구 문화의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다. [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등)
▼돌계단 통과하고..
청학동 갈림길을 통과하면 등로길은 탐방로라 돌 계단을 완만하게
올라서면 삼신봉 이정표 앞에 도착한다.
▼쌍계사(삼신봉)갈림길의 모습
삼신봉 갈림길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내삼신봉을 걸처 쌍계사로 내려서는
갈림길에 "삼신봉1288m"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삼신봉정상은 이곳에서 우측편 암능지 위에 자리잡고 우리에게 손짖을 한다.
삼신봉 이정표(해발1228m / 청학동2.4km / 쌍계사9.0km / 세석대피소7.6km)
▼삼신봉(三神峯). 1,284m) 도착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청암면, 산청군 시천면에 걸쳐있는 봉우리로, 청학동
에서 볼 때 서쪽의 내삼신봉(1,354m)과 중앙의 삼신봉, 동쪽의 외삼신봉(1,288m)
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지리산 주능선의 전망대 역할을 하여 악양으로 흘러내린 성제봉(형제봉)능선과
멀리 탁 트인 남해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지리산 자락에 흩어진 수십 봉우리 중에 하나로 영신봉에서 낙남정맥을 따라
남쪽으로 뻗어내린 남부능선상에 있는 봉우리로, 삼신의 의미는 환인, 환웅, 환검의
세 삼신인 三聖 아기를 점지한다는 세 신령(三神靈) 즉 삼신 할머니를 지칭하고 있어
신화적인 의미와 생명을 점지 하는 주술적 의미가 강한 편이다.
삼신봉 정상에서 보면 지리산 천왕봉과 노고단의 100리 주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쌍계사와 세석을 잇는 등산로의 중간 기착지이다.
정상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삼신봉정상에서 보는 지리산 주능선 노고단, 반야봉에서 천왕봉, 써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보여주지 않아 마음속으로만 느낀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로 불려왔던 곳으로 지리산에
신(神)을 상징하는 봉우리가 셋 중에서 남북으로 삼각을 이루고 있는 봉우리로
내삼신봉, 외삼신봉 그리고 세석고원 서쪽의 영신봉이 삼신산이라 부르고 있는데
우리가 낙남정맥이라 종주가 아니면 오르지 않는 능선길들이다.
▼삼신봉 정상에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 "삼신봉에서 바라본 지리산 종주능선"
안내판의 내용...
지리산 국립공원에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는 종주능선(25.5km)은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의 3대주봉을 연결하는 지리산의 대표적인 종주
탐방로입니다.
지리산 종주능선에서는 삼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일출, 반야낙조,
노고운해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볼 수 있으며 희귀한 야생 동,식물을 만날 수 있다.
▼삼신봉에서 안내판 뒤쪽으로 정맥길이 이어지며 정상을 내려간다.
삼신봉 암릉 아래에 설치되어 있는 추모비의 모습...
▼삼신봉 암릉 아래에서 다시 보는 삼신봉 암봉...
▼등로길 좌측편에 설치되어 있는 입산시간지정제 안내 플래카드의 모습
▼이정표 6.2km 세석대피소 방향으로...
▼세석대피소 5.5km 이정표 지점 지나고..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한벗샘삼거리((박단샘, 수곡샘, 해발1,195m) 도착
이정표 : 청학동 5.2km, 세석대피소 4.8km
이곳은 지난날 거림마을과 대성마을 사람들이 서로 넘나들던 생활로였다.
원래는 박단샘, 수곡샘으로 불렸으나 마산의 한벗산악회에서 샘을 정비하고 붙인
이름이 지리산 관리공단에서 인정하여 표지판에 한벗샘이라 표기하였다고 한다.
한벗샘 샘터까지는 약140m 우측으로 내려서면 되는데 출입금지란 푯말이 설치되어 있다.
한벗샘에서 물을 공급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갈수기에는 물이 고갈된다고 한다.
통제구간을 따라 내려서면 한벗샘에서 발원한 물이 자빠진골을 따라 거림으로 이어진다.
자빠진골은 능선에 삐뚜름하게 붙어 자빠진듯 생긴 모양을 보고 자빠진골이라 하였다.
▼1237봉(헬기장)도착
한벗샘에서 완만하게 진행하면 넓은공터인 헬기장에 도착한다.
이정표 : 청학동5.6 쌍계사12.1 / 세석대피소4.4km
▼암봉을 우회하고..세석대피소 3.9km 지점을 지난다.
▼우측 암릉봉을 우회하고.. 능선고개를 넘어 내려간다.
▼세석대피소 3.3km 지점을 지나고..
▼암봉과 바위에 사이좋게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소나무도 보이고..
▼지리산 남부능선의 명물로 자리잡고 있는 석문(石門)을 지난다.
자연적으로 생긴 석문으로 삼신봉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관문(關門)이다.
▼능선이정표 세석대피소 2.7km지점에서 가로질러 이어가고..
▼의신마을/대성골 갈림길(해발1377m)
대성골의 빨치산을 토벌하기위해 비행기로 휘발류 수천 드럼통을 낙하하고
이어 소이탄으로 불바다가 된 겨울 숲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5일간 불바다였던 대성골과 바위벽 아래에서 생쌀을 씹으며 4박5일간 사투 끝에
기적적으로 생존한 마지막 여자 빨치산 정순덕 여인과 당시 참상을 대변하는 곳이다.
정순덕씨는 여자 빨치산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남편을 찾아 빨치산이 된
여인으로 엄청난 화력공세를 폈음에도 불구하고 망실공비(亡失共匪)정수덕씨는
산비탈을 넘어가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최후의 빨치산으로 남게 된 계기가 된곳이
거림골이라고 한다.
1963년 11월 체포된 후 대구, 공주, 대전교도소에서 모두 23년간 복역을 하였다 한다.
1985년 8월 비전향 장기수 공동체인 서울 봉천동 낙성대 "만남의 집"에 정착 하였고
1999년 3월 뇌출혈로 쓰러진 후 인청 나사렛 한방병원에서 투병생활 하다 2000년9월
북송을 요구 했으나 제외되었고 2004년 4월1일 사망하는 비운에 여인이라고 한다.
죽음의골 요점만..(자료 : 이기영 시인 실록연작시 지리산)
1952년 1월17일 지리산 온 골짜기를 가득 메워버릴 것처럼 함박눈이 내렸다 .
날이 저물면서 빗점골, 거림골 빨치산이 대성골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눈 덮힌 대성골 전체가 빨치산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1만명의 대병력이 대성골에 빽빽이 들어찬 것이. 빗점골 의신부락 뒤쪽에서
토벌대들이 언제 야포를 끌어다 놓았는지 금세 대성골로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고
스무발 이상이 동시에 작렬했다.
귀청이 찢어질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달아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생자는 산더미처럼 불어났고 토벌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휜히 내려다보며 토끼몰이를 하듯 포위망을 좁히며 포격을 퍼부어 대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동작이 빠른 지휘관이나 전사들은 토벌대와 정면으로 부딪치며 포위망을 둘고
나갔지만 대다수 독 안에 든 쥐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어 자빠졌다.
하루종일 퍼부어 대던 포격도 총격도 해가 지면서 추춤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쪽 하늘에서부터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위에 덜어지는 시커먼 물체는 휘바유가 가득 차 있는 드럼통이었다.
비행기 편대는 네 번 아니 다섯 번 쯤인가 대성골 골자기에 마개가 빠져 있는
드럼통을 삐라처럼 뿌리고 다녔다.
그러나 마지막 편대에서는 주먹만한 것을 골짜기 곳곳에 날려보냈다.
바로 소이탄이었다.
그 순간부터 하얀 눈으로 덮혀 있던 대성골은 시뻘건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쫓겨 지친 대원, 속속 박다내골(일면 의신골, 하동군 화개면)로 모여들었다.
포위 나흘째 올가미는 바작바작 좁혀왔다.
박다내골 마지막은 비장해 딴 도리가 없다고 판단한 팔로군 출신 인민군 장교
5연대장 김모는 조국과 인민이 주는 마지막 훈장이라며 동료 여섯을 그들
소원대로 차례로 쏘고 남은 한방으로 자기의 심장을 쐈다.
1952년 1월18일의 일이다 죽은 자 가운데는 노영호 사령관을 따라 짧은 생애나마
노사령관을 그렇게도 사모해마지 않던 빨치 허귀연이 끼어 있었다.
이때 단 한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이 있었는데 5연대장의 연락병 임창해 당시20세다
허리에 총을 맞고 신음 중 국군에 구출되었다.
이 죽음의 골에서 이영회와 노영호 두 지휘관은 각각 다른 방향에서 약간의 대원을
이끌고 필사적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갔다.
2천여면에 이르는 이영희부대의 빨치산들이 군경토벌대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숨어 들어간 골짜기에 1월 마지막 토벌작전을 취해 화력
공세가 10여일 동안 퍼푸어진 곳도 이 능선 좌.우의 거림골과 대성골이라고 한다.
남부군 사령관이었던 이현상 역시 부근의 계곡인 빗점골에서 최후를 맞았으며
대성골에서 사살되었을 때 그의 수첩에서 詩가 나왔다고 한다.
智異風雲當鴻動(지이풍운당홍동) 지리산의 풍운이 바야흐로 크게 움직이니
伏劍千里南走越(복검천리남주월) 검을 품고 남쪽으로 천리길을 달려왔네
一念何時非祖國(일념하시비조국) 뜻은 한시도 조국을 생각지 아니한 적 없고
胸有万甲心有血(휴유만갑심유혈) 마음속에 끓는 피가 솟구치네
정맥 마루금은 직진으로 진행하며 의신마을 방면은 좌측편으로 내려서면 된다.
의신마을은 국립공원 내 취락지구로 형성되어 있는 인구 220여 명의 96세대로
구성되어 있는 자연동화마을이다.
천혜의 생태환경을 갖추어 마을 주위 경관이 수려하며 지리10경을 연계하는 관문으로
산악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정표: 삼신봉5.3km / 의신마을6.9km /세석대피소2.2km
▼입석바위 지나고..
▼이정표 세석대피소 1.7km 지점 지나고..
▼절구는 거주지의 흔적. 과거 빨치산이 살았던 흔적들이 아직도 곳곳에서 보인다.
음양수 샘터 가는 길에 목책 등로길이 이어지고..
▼음양수(陰陽水,해발1,450m) 샘터 도착
음양수(陰陽水)는 음양수제단이 설치된 바위 아래에 있는 석천(石泉)으로
햇볕이 드는 쪽이 양수(陽水)이고, 그늘진 곳이 음수(陰水)라 한다.
두 줄기 물이 음양화합이 되듯 자식없는 사람이 마시면 아이를 낳는다는 전설이다.
음양수 전설은..
아주 먼 옛날 지리산 대성동 계곡에서 살았다 전하는 한쌍의 남녀가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호야(乎也), 여자의 이름은 연진(蓮眞)이라 하였다.
이 두사람은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었으나 한가지
이들에게 단 하나 부족한 점이 있다면 자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산과(山果)를 따러 나간 사이 근처에 살던 검정 곰이 찾아와
연진에게 세석평원에는 소원대로 아들, 딸을 낳을 수 있는 음양수라는 신비의 샘이
있다는 것을 자랑삼아 알려 주었다.
연진은 기뻐하며 단숨에 음양수 샘터로 달려가서 기적의 샘물을 마셨는데, 평소에
곰과 사이가 좋지 못한 호랑이가 음양수의 신비를 인간에게 발설한 사실을 지리산
산신령에게 고해바치니 대노한 산신령이 곰을 토굴속에 잡아 가두었고, 호랑이는
그 공으로 백수의 왕이 되었다.
또한 음양수의 샘물을 훔쳐먹은 연진에게는 잔돌평전에서 혼자서 평생토록 철쭉꽃을
가꾸도록 하는 무거운 벌을 내리게 되었다.
그 날부터 연진은 세석평원에서 손발이 터져 붉은 피가 흘러내리도록 꽃밭을 가꾸니,
세석의 붉은 철쭉꽃은 연진의 슬픈 넋이 스린 꽃이라 한다.
그 후 연진은 촛대봉 정상에 촛불을 켜놓고 산신령에게 속죄를 하다가 그래로 망부석이
되었는데, 촛대봉 바위는 가련한 연진의 굳어진 모습이라고 하며, 천왕봉 산신령도
연진의 가련한 모습을 보고 노여움을 풀고 기적의 샘 음양수를 인간에게 개방하여
지금도 아이가 없는 부부가 이 곳을 찾아 샘물을 마신다고 한다.
한편 집에 돌아 온 남편 호야는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춘 부인을 찾으러 온 산을
헤메다가 칠성봉 중턱에서 까마귀로부터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듣고, 바로 세석평원으로
달려갔으나 신신령의 저지로 만나지 못하고, 절벽 바위 위에서 애타게 아내를 부르다가
그대로 망부석이 되었는데, 칠성봉에서 세석으로 올라가는 곳에 솟아있는 암봉을
호야봉이라고 한다.
이정표: 쌍계사15.3km 청학동8.8km 의신7.9km / 세석대피소1.2km
▼음양수(陰陽水)제단 도착
택리지에 "온 산에 잡귀신을 모신 신당이 많아서 봄 가을마다 사방의 무당들이
모여들어 기도한다"라 하였으며, 이 산중에 민간신앙의 제장(祭長)이 가장 많고,
또 제전(祭典)이 속생하고 있음은 그 만큼 이 산이 영산이라 함을 증좌(證左)함이다.
빨치산 여성 15명이 1953년에 쫓기다가 최후를 마쳤다는 반란의 역사 격전지다.
남부군 몰락 후 토벌대 포위망에 피할곳이 없게되자 음양수 주변에서 김점분이 이끌던
여성 남부군들은 권총으로 자결하였는데 그녀들의 애달픈 넋을 달래 주려고 쌓은
재단이라고도 전해진다.
출입통제 구역 영신봉 가는 길은 재단 좌측 뒤쪽으로 이어가고...
▼공터에 사람이 지낸 흔적이 있는 비박터를 지나서...
잠시 후 만나는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이어진다.
▼등로 좌측으로 절벽이며, 등로길은 희미하지만 뚜렷하게 이어지는 좌측편에
등로길따라 가야 한다.
거미줄과 나무에 기생충등 피해서 이어가다 좌측에 있는 암봉을 올라 조망하며 간다.
▼창불대 암봉 올라 건너편 자살바위를 바라본다.
자살바위는 훗날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빨치산 여성대원들이 국군에 포위되자
이곳 자살바위에 올라 대성계곡 방향으로 몸을 날려 생을 마감 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자살바위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창불(唱佛)은 예불에서 오분향례를 염송하거나 부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뜻한다.
▼기도 재단터도 보이고..
병풍바위도 눈으로 보이는데..구름에 가려 조망이 안된다.
▼자살바위 암릉에서 주변을 보지만...
▼영신봉 아래 암릉 도착..우측으로 돌아 좌측으로 올라 간다.
이곳에서 조금 올라 가면 영신봉 이정표에 도착하게 된다.
영신봉 이정표 건너편으로 영신봉 암봉이 있는데.. 오늘은 조망도 없고...
낙남정맥이라는 의미를 두고 갈까 하다 이곳을 영신봉 암봉으로 위안 삼는다.
▼영신봉(靈神峰).1,651.9m) 도착
영신봉은 경상남도 하동군 하개면,함양군 마천면, 산천군 시천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백두대간 낙남정맥의 출발점이 되는 곳이다.
서쪽으로 칠선봉(1,576m)과 삼각고지(1,470m)가 있고, 동쪽으로 촛대봉(1,703.7m),
천왕봉(1,915m), 남쪽으로 삼신봉(1,284m)에 이어지는 주요 능선들이 영신봉에서
갈라지며, 영신봉에서 남서쪽 사면으로 내려오면 화개면 대성리인데, 산골짜기에서
발원한 화개천 상류가 남서방향으로 흘러나간다.
영신봉은 산 이름 자체가 신을 맞이하는 봉우리라는 뜻으로 풀이되며, 제단은 없지만
이곳에서 지리산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지라산의 수많은 봉우리들 중 가장
영험한 기운이 모엿다해서 영신봉이라 불리우고 있다.
낙남정맥은 이곳 영신봉에서 시작해 경남땅의 수려한 봉우리들을 두루거치고
낙동강하구 고암나릇터에서 꼬리를 내리는 도상거리 232km의 낙남정맥길을
우리는 제2구간 부터 시작을 해서 이제야 이렇게 제1구간으로 걸어 온 것이다.
영신봉 이정표: 세석대피소0.6km/벽소령대피소5.7km 연하천대피소9.3km
백두대간상에 위치하고 있는 영신봉 갈림길 이정목이며,영신봉정상은 이곳에서
우측편 통제구간으로 올라서야 암봉이 있지만..조망도 없고...
이곳에서 낙남정맥 출발지를 땜방 방식으로 산행을 마무리를 한다.
▼영신봉 아래 헬기장 지나고..
▼세석대피소 방향 우측으로 내려가고.....
▼세석대피소 도착
수년만에 다시 온 세석대피소 주변은 많이 변화 하였다.
대피소 주변을 조망하며 잠시 휴식을 한다.
▼세석평전(細石平田) 조망
세석평전은 신라 때 화랑도의 수련장으로 이용되었다고 하고, 6.25 전.후에는
빨치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한 곳이다.
지금은 멋지게 꾸며져 있고, 주변에는 세석대피소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의 광할한 고산지대의 넓은 평전으로 되어 있다.
과거에는 작은 돌밖에 없는 토양지대라 해서 잔돌고원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바꾸어
세석평원 또흔 세석평전이라 부르고 있다.
▼세석대피소/이정표 거림 6.0km방향으로 하산을 한다.
▼세석대기소 식수터 도착
세석산장 바로 아래에 있는 식수터 이며, 바로 아래에는 계곡이 있어 간단하게
몸을 씻을수 있는 곳이다.
수년 전에는 이런 시설이 없었는데..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하고 하산을 한다.
▼식수터 아래에도 호수로 물이 나오고 있다.
▼거림으로 가는 길..환영해 주는 등로길이 펼쳐지고..
▼청학동/의신마을 갈림길 도착
거림 5.5km 좌측으로 내려가고..
▼세석교를 지나고........
▼남해 삼천포를 찾아 보세요..란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전망대 도착
삼신봉과 외삼신봉, 그리고 그 좌측으로 뻗어 내리는 삼천표 방향 능선을
잠시 바라보고 이어간다.
▼데크 다리를 연이어 건너고...
▼거림 3.9km 지점을 지나고..
▼반달곰과 마주치게 된다면..회피 요령 프랑카드가 붙어있다.
1. 멀리 곰이 있는 경우 ..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나세요.
2. 갑자기(가까이서) 곰을 만났을 경우에는
- 먹을 것을 주거나 사진 촬영을 하지 마세요.
- 등을 보이고 뛰지 마세요.
- 시선을 피하지 말고 뒷걸음질로 곰으로 부터 멀어집시다.
3. 곰이 공격해 올 경우...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사용하여 저항하십시오.
▼북해도교 도착
북해도교란 다리 이름은 이 곳을 지나면서 부터는 일본 북해도처럼 기온이
급강하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는 자료 기록이 나온다.
▼거림계곡은 지리산 촛대봉과 세석평전에서 시작되는 본류와 연하봉과 촛대봉에서
발원하는 도창골의 지류 그리고 세석평전에서 남부능선의 한벗샘에서 발원한
자빠진골 등의 지류가 모여 형성된 커다란 계곡을 이루고 있다.
▼천팔교 데크 다리 도착
해발고도 1,008m 지점에 설치되어 천팔교란 명명을 얻었다고 한다.
▼이정표 거림 1.3km, 세석대피소 4.7km를 안내를 하고 있다.
▼집중 호우시 자동으로 경보 발령 및 안내방송이 되는 시설물이 설치 된 곳 지나고..
▼거림마을이 보이고.....
▼공원지킴터 도착... 주변에 음식점이 자리잡고 있다.
거림마을 아래쪽 버스 주차장으로 걸어 내려가고..
▼길상암 입구의 (지리산공비토벌루트) 안내판의 내용..
도장골은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남편을 찾아 입산하여 공비 활동을 했던
곳으로 빨치산들이 1951년 11월 하동 악양에서 보급투쟁으로 강탈한 식량을
운반하여 쌓아 놓았던 아지트도 있었다.
이 지역은 이영회 겔리라 부대가 1952년 가을부터 1953년 봄까지 세석평전을
중심으로 대성골과 도장골, 청내골, 칼바위 등을 옮겨 다니며 공비 할동을 했던
곳이다.
☞ 중산리에 있는 (지리산 공비 토벌 전시관)에는 지리산을 배경(산청, 하동, 함양,
구례, 남원등)으로 활동했던 빨치산의 토벌 과정을 종합적으로 구성, 입체적으로
전시하고 있음.
▼거림 버스정류장 도착
거림에서 세석대피소 구간은 봄철은 2월16일~4월30일까지, 가을철은 11월15일~
12월15일까지 산불방지 경방기간에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고 한다.
낙남정맥 제 1구간 땜방으로 잘 마무리 한다.
▼산청시내로 이동하여 뒤풀이 흙돼지 고기로 맛있게 먹고 무사히 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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