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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칠석날 : 나의 어린 시절 칠석날과 관련된 이야기들 )
내가 어린 시절 용호리 살 때 같은 마을에 사시던 큰아버지 댁은 부자였다
큰아버지 댁은 우리 동창생이자 나의 사촌동생인 강윤규네 집이다
강윤규는 지금 해외선교사로 활동 중이며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큰아버지 댁은 집도 커서 대문입구 따로 대문출구 따로 대문이 두 군데나 있었으며
집의 구조는 네모자로 건축물이 지어졌고
대문입구로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큰 부엌과 아랫방 윗방 커다란 대청마루가 있고
대청마루 옆에는 방 두 칸 자리 사랑방과 부엌이 따로 있었다
대문 왼쪽에는 커다란 나락창고와 고구마 감자 채소 씨앗들을 보관하는 창고도 있고
소 외양간과 농기구 보관 창고와 닭장과 토끼장도 있었다
원래 이 집은 노적산 아래 대규모 복숭아 과수원과 방앗간을 운영했던 강희견 선배네 집이었다
큰 집에는 머슴이 있었는데 매년 음력 7월 7일 칠석날이 되면 큰아버지는 머슴에게 용돈을 주었다
머슴에게 용돈을 주는 풍습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긴 한데
적어도 내가 어린 시절 우리 마을은 칠월칠석날 아침에 머슴에게 용돈을 주었다
그 때는 우리 집에도 비교적 농사를 많이 지어서 사냥골과 때째와 동진들녁과 동네마을 앞 등등
여러 곳에 논들이 있었고
크고 작은 밭들도 있었고 큰 산도 있어서 우리 집도 비교적 괜찮게 살았다
큰 집에서 일하는 머슴은 10대 후반의 나이로 일을 하기에는 아직 어렸는데
나는 머슴을 그냥 형이라고 불렀다
형 이름은 “인석“이었고 성은 모른다 언제나 이름만 부르고 성은 부르지 않아서 기억이 안 난다
인석이 형은 어릴 때 아버지가 많이 아팠는데 치료를 받지 못해서 병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고
엄마는 아기를 낳다가 몸이 부어올라서 침쟁이가 와서 한 뺨이나 되는 기다란 침을 여러 군데
맞는 도중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후로 아기는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형은 집안 일가와 외가댁 등 여러 곳들을 전전하면서
고아로 지내다가 큰 집에 와서 머슴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큰아버지가 일을 잘하고 힘이 좋은 어른 머슴을 마다하고 일부러 나이도 어린 머슴을 둔 것은
머슴 형이 부모를 잃고 갈 데가 없다보니 배 곪지 말고 밥이나 얻어먹으면서 일이나 도와달라는
의미에서 데려오지 않았을까 생각 된다
나는 그런 머슴 형이 큰 집 사랑방에 살면서 일 년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힘들게 일하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여름에는 밭에 쪼그리고 앉아서 혼자 일하는 인석이 형에게 찾아가서 사카린 물도 가져다주고
삶은 옥수수와 찐 감자도 가져다주었다
인석이 형은 한창 자라날 나이에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늘 배고파했고 먹을 것들을 가져다주면
언제나 모두 남김없이 맛있게 다 먹었다
형은 일을 하다가 힘들 때는 가끔씩 풀밭에 앉아서 돌아가신 엄마 아버지가 보고 싶다면서
호미자루를 들고 먼 하늘을 쳐다보고 흐느끼면서 하염없이 울기도 했다
형은 엄마랑 아버지랑 같이 사는 내가 너무 부럽다고 말 할 때가 종종 있었다
인석이 형은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밭고랑에 앉아 풀을 뽑거나 논에서 피사리를 하고
저녁나절 어두워지면 소가 먹을 깔을 잔뜩 베어서 한 지게씩 지고 돌아오곤 했다
머슴 형은 한여름에 뜨거운 태양 아래서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면서 일을 하다 보니
옷은 언제나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땀 냄새가 진동해서
저녁에 풀지게를 지고 돌아올 때는 잠시 풀지게를 작대기로 세워놓고
개울가로 내려가서 온몸을 씻고 옷을 벗어서 흐르는 냇물에 대충 행군 다음 물기를 짜내고
젖은 옷을 다시 입은 채로 풀지게를 지고 돌아오곤 했었다
그 당시 인석이 머슴 형은 몸이 멀쩡하거나 성한 데가 한 군데도 없었다
풀을 베다가 손가락을 베이거나 가시에 찔려서 진물이 나거나 손등은 멍들어서 부어올랐고
허벅지와 장딴지는 풀잎에 긁히거나 벌레한테 물려서 여기저기에 상처투성이고
얼굴은 햇볕에 익어서 새까맣게 타버렸고 상체는 모기한테 물려서 벌겋게 부어오른 곳이 여기저기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형은 부모님이 안 계시고 혼자 남아서 머슴살이를 하다 보니 아파도 아프다고 말해줄 상대가
없어서 모든 것을 참고 버티면서 스스로 앞가림을 할 수 밖 에 없었다
그나마 큰 집이 아니면 갈 데가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혼자 남아 있는 어린 아들이 이렇게 사는 모습을 보고 계신다면 얼마나 슬프고
마음이 아프실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형이 너무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석이 형은 너무 착하고 친절해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일하고 있는 형한테 찾아가서
형이랑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형은 우리 집이 아주 바쁠 때는 가끔씩 우리 집에 와서도 일을 도와주곤 했었다
추석날처럼 명절이 되면 일은 하지 않지만 형은 갈 곳이 없어서 큰 집 사랑방에 종일 누워서
혼자서 쉬는 게 전부였다
형은 평소에 동네 사람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명절날이 되어도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았고
사랑방에서 혼자 남아서 여기저기 아프고 쑤시고 상처 난 곳에 아까징끼를 바르면서 쉬고 있었다
명절날은 아버지가 형을 우리 집으로 데려오라고 해서 우리 가족과 함께 명절 음식을 먹곤 했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아버지는 어릴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큰아버지랑 어렵게 살아온 이야기를
형에게 들려주면서 용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착하게 살아야 한다면서 위로를 해주신 것 같았다
아버지와 엄마는 학교도 못 다니고 큰 집에서 죽어라고 일만 하고 있는 머슴 형을 측은하게 여기시고
귀한 음식이 있으면 언제나 형을 불러서 함께 먹도록 했다
여름철 비가 많이 와서 사냥골 시냇물이 많이 불어나면 머슴 형은 나를 업어서 물을 건너갔고
어떤 날은 고구마가 땅이 갈라터지면서 커지기 시작하자 엄지손가락 굵기의 어린 고구마를 캐서
시냇물에 씻어서 나에게 먹으라고 건네주었다
또 어떤 날은 잎이 넓은 콩잎과 들깨 잎을 따다가 풀무치를 잡아서 들깨 잎으로 감싸고는
가는 풀줄기로 묶으면서 엄마가 돌아가실 때 이렇게 했다면서 염하는 모습을 재현해 보였다
그러면서 형은 간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지난밤에는 꿈속에서 엄마를 만나 부강장터를 함께 돌아다녔는데 엄마가 고무신발도 사주시고
돌아올 때는 눈깔사탕도 사주셨는데 함께 집으로 오다가 성황당 고개 쯤 올 때 잠을 깼다고 했다
잠을 깨보니 날도 새기 전 새벽이었는데 그 이후 날이 밝아올 때까지 돌아가신 엄마가 보고 싶어서
잠을 한 숨도 못 잤다고 했다
노적산 너머 아래쪽 금강줄기 강변 근처에 엄마 아버지 산소가 합장으로 함께 모셔져 있는데
오늘 따라 너무 보고 싶어서 찾아가 뵙고 싶다고도 했다
형은 내가 어려서 뛰는 속도가 느리다보니 풀무치를 잡지 못하자 형이 대신 쫒아가서 잡아주었다
뜨거운 대낮에 사냥골 밭에서 일을 하다가 잠시 쉴 때 형과 나는 아카시아 나뭇잎 한 줄기씩 따서
가위바위보 해서 이기는 사람이 아카시아 잎을 한 장씩 뜯어내는 게임을 했는데
잎사귀를 먼저 모두 떼어내는 사람이 진 사람의 이마를 한 대씩 때리기를 여러 번 했었다
잔디 씨앗이 달린 풀줄기를 긴 것으로 뽑아서
엄지와 검지 손으로 누르고 쭉 밀어 올리면 물방울이 생긴다
형과 나는 물방울 끼리 싸움을 붙여서 물방울을 뺏어오는 쪽이 이기도록 하는 게임도 했었다
또 우리는 각자 강아지 풀 줄기를 뜯어서 쪼갠 다음 코에 붙이고 콧수염을 만들기도 하고
풀줄기를 열십자로 걸어서 서로가 잡아당긴 다음 풀줄기가 먼저 끊어지는 쪽이 패하는 게임도 했었다
형은 논두렁에서 풀을 베다가 왕아치(방아깨비)를 잡으면 나에게 주었는데
나는 손으로 왕아치 뒷다리를 모두 잡고 있으면 왕아치가 길다란 몸을 굽신굽신 하면서
구부렸다가 폈다가를 반복하며 인사하는 것처럼 보여서 재미 있었다
어떤 날은 밀밭 속에서 갓 태어난 노고지리 새끼를 발견하고 함께 구경하기도 했다
형은 노고지리 새끼를 양손으로 살며시 들어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는
“너는 엄마 아버지가 벌레를 물어다 줘서 참 좋겠다
많이 먹고 잘 자라 거라“ 하면서 그 자리에 도로 놓아주었다
또 언젠가는 가을철 낙엽이 지고 난 뒤에 우리 집에 있던 오동나무를 4토막 내더니
오동나무 가운데에 구멍을 내고 바퀴를 만들어서 작은 수레를 만들어서 나에게 주었다
나는 넓은 마당에서 작은 수레에 내 동생을 태우고 마당을 빙빙 돌면서 끌고 다녔다
인석이 형은 가족이 없는 고아로 살다 보니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는 아이들을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그 형은 마음씨가 너무너무 착하고 온순한데 평소에는 말이 없고 조용해서
마을 사람들과는 일체 어울리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고 여러 가지로
너무너무 잘해주고 친절 했었다
그 당시는 머슴 형이 내 이름을 가장 많이 불러준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형과 사이좋게 지내다가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내판 역에서 기차사고로 돌아가시고 난 뒤
그 해 말에 우리가족은 강촌 외가댁으로 이사 가는 바람에 그 뒤로 인석이 형과 소식이 끊어지면서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알 수 가 없다
내가 강촌으로 이사 간 뒤로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고 있을 때는 가끔씩 인석이 머슴 형이
생각나서 보고 싶을 때가 있었다
예전에는 머슴이 일 년 동안 부잣집에서 일을 해주면 쌀 한가미니를 받았다
쌀 한가마니면 논을 한마지기 살 수 있는 큰 돈 이다 그만큼 쌀은 귀한 존재였다
내가 어린 시절 용호리 우리 집 마당에서 애롱애롱 소리가 나는 탈곡기를 발로 밟으면서
벼를 털 때는 마당에 벼 한 톨도 남기지 않았고
가을철 벼를 베고 추수가 끝나면 동네 아줌마들과 아이들은 논으로 벼 이삭을 주우러 다녔다
쌀이 그만큼 소중했다
우리 집은 쌀이 있어도 땅을 사 모으고 재산을 늘리는데 쓰기 위해서 쌀밥을 해먹지 않았고
보리밥이나 죽을 쒀서 식사를 해결하였다
머슴은 보통 연말에 일 년치 노동의 대가를 한꺼번에 받는데 이것을 세경이라고 불렀다
머슴살이를 10년 정도 하고나면 논과 밭도 어느 정도 장만하고 작은 시골집도 지을 수 있어서
남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도 먹고 사는 것은 해결이 되었다
그때부터 부지런히 농사짓고 열심히 일을 하면 차츰차츰 땅을 늘려가면서 가난에서 벗어나
보다 나아지는 생활로 발전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부잣집에서 머슴을 두고 농사짓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국 전쟁이 끝나자 집이나 땅을 잃은 사람도 많고 피난 내려와서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
머슴살이라도 해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았다
주인 나리가 어진 사람을 만나면 머슴도 보다 편하게 지낼 수가 있지만
성격이 거칠고 욕심이 많은 주인을 만나면 쉴 틈도 주지 않고 일을 아주 많이 시키기 때문에
머슴 생활은 육체적으로 힘든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사람취급을 받지 못해서
이중고에 시달리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참고 감내해야만 했다
다른 마을에서 잘 사는 사람 중에는 실제로 머슴 생활부터 시작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 땅을 사고
열심히 일을 해서 부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
요즘 말로 맨몸으로 시작해서 자수성가한 머슴출신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머슴이 건강하고 잘 생긴 미남인데다 성격도 좋고 부지런하며
나무랄 때 없이 성실해서 부잣집 주인은 무남독녀 딸과 결혼시키고 재산을 물려주어
대를 이어가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의 머슴은 옛날 노비처럼 취급 받아서 주인과 종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격적으로 천한 대접과
업신여김을 받으면서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힘들게 살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옛날 노비는 자유가 없으며 대감 나리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지만
그래도 머슴살이는 주인댁에 일을 해주고 연말에 노동의 대가를 받기 위해서 본인이 자발적으로
지원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부잣집이 아니더라도 남편이 죽어서 농사지을 사람이 없거나
다른 직업 때문에 일손이 부족해서 많은 농사지을 수 없는 경우에도 머슴을 고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요즘 말로 일은 힘들고 고달프긴 해도 머슴살이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임금도 연봉으로 받는 직업 이었다
머슴도 처음에는 갈 곳이 없어서 아무리 힘들어도 죽으나 사나 그 집에서만 일을 해주었지만
그 이후로 부잣집에서 일 손이 달리는 집이 많아지고 머슴을 필요로 하는 집이 많아지자
머슴들은 대우가 시원치 않은 집주인을 만나면 연장계약을 거부하고 다른 집으로 옮겨가기도 하였다
머슴들은 하루 종일 힘든 일을 아주 많이 하기 때문에 밥을 엄청나게 많이 먹었다
머슴들이 먹는 밥그릇은 제일 큰 밥그릇에 수북하게 올라오도록 밥을 펴줘도 몇 수저 뜨면
밥그릇이 텅텅 빈다
그래도 머슴들은 돌아서면 배고프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도 밥을 아주 많이 먹는 사람은 옛날 머슴이 밥을 먹는 것 같다고 말을 한다
조선시대 실화로 양반가문의 서자로 태어난 반석평은 부잣집 노비로 천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고 있었다
주인이 보니 노비가 공부하려는 의지가 강하고 똑똑해보여서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를 가난한 양반집으로 양자로 보냈다
반평석은 열심히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고 형조판서에 올랐다
반평석은 길을 가다가 자기 노비문서를 불태워버리고 양반의 신분으로 바꿔준 옛날 주인집 아들을 만났다
알고 보니 옛날 주인집은 망해서 아주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반평석은 임금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주인집 아들에게 벼슬을 내려주도록 간청하여
벼슬을 얻게 해주어 은혜를 갚았다
반평석의 직계 후손이 바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다
먹을 것이 귀하던 예전에는 쌀이 최고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농자지천하대본이라고 해서 농사짓고 쌀을 많이 가진 사람이 최고였다
야구나 축구하는 사람은 밥 먹고 살기 힘들었다
연극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딴따라를 하는 사람도 밥 먹고 살기 힘들었다
지금은 반대로 쌀값은 헐값이 되어 버렸고
야구나 축구 선수는 돈방석에 앉는다
배우나 노래 부르는 가수도 돈방석에 앉는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
칠월칠석날과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로
칠월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에서 만나는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 이야기는 아니고 중국의 옛날 고전에서 유래된 이야기로 한국과 일본에도 전해졌다
견우와 직녀에 관한 자료를 많이 모아서 아래와 같이 이야기를 정리해 보았다
우리 친구들도 어린 손자나 손녀딸이 있으면 아래 이야기를 옛날이야기처럼 들려주면
재미있어하고 좋아해서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옛날에 밤하늘의 별들 중에는 옥황상제의 손녀딸이 있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얼굴도 예뻐서
귀한 공주 대접을 받으면서 할아버지의 총애를 듬뿍 받으면서 자랐다
손녀딸은 자라면서 부지런하고 베를 아주 잘 짜는 요조숙녀가 되었다
하늘에서는 직물과 베를 잘 짜는 여자를 직녀라고 불렀다
옥황상제는 손녀딸 직녀가 자라서 혼기가 차버리자 은하수 건너편에 사는 청년 중에서
미남인데다가 키가 훤칠한 청년인데 건강하고 성실해서 일도 잘하는 견우와 혼인을 시켰다
견우는 소를 아주 잘 키우고 부지런한 청년이었는데 한문으로 소 ‘우’자를 써서
소를 잘 키우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견우라고 불렀다
그래서 옥황상제는 견우와 직녀가 혼인을 하면 견우는 소를 잘 키우고 직녀는 베를 많이 짜서
아주 잘 사는 선남선녀가 될 거라고 생각을 해서 몹시 흐믓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견우와 직녀를 막상 결혼 시켜놓고 보니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두 사람은 달콤한 사랑에 빠져서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매일매일 둘이서 끌어안고 있으면 떨어질 줄 몰랐고
손녀딸 직녀는 견우 손을 잡고 마주보고 웃으면서 애교를 부리다 보면
하루 종일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손을 놓지 않았다
이렇게 견우와 직녀가 매일매일 일은 하지 않고 꽁냥꽁냥하면서 지내는 걸 보니
옥황상제는 실망도 크고 보면 볼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런 배은망덕한 녀석들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옥황상제는 견우와 직녀를 혼인시킨 것이 잘못되었다고 후회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옥황상제는 고민을 하다가 견우와 직녀 사이를 떼어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옥황상제는 견우와 직녀를 불러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너희 둘이는 은하수 맨 끝 쪽으로 떨어져서
평생을 따로따로 살아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 이후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 저 멀리 반대편 끝으로 떨어져서 각자 홀로 살게 되었는데
홀로된 직녀는 매일매일 징징거리고 구슬프게 울면서 할아버지인 옥황상제에게
견우가 너무 보고 싶으니 제발 좀 견우를 만나게 해달라고 보챘다
이를 지켜본 옥황상제는 매일매일 훌쩍거리며 울고불고 하소연하는 손녀딸이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마음이 누그러져서 손녀딸 직녀에게 다시 명령했다
정 그렇다면 일 년에 딱 한번 일곱번 째달 일곱번 째날인 칠월칠석날 저녁에
하루만 만나도로 허락해주마^^
그 이상은 절대로 안 된다
그렇게 해서 견우와 직녀는 일 년에 딱 한번 음력 칠월칠석날 밤에 만나게 되었다
칠석날이 되어서 견우와 직녀는 일 년 만에 만났지만 은하수 강가를 사이에 두고 건널 수가 없어서
만나지 못하고 서로 떨어져 멀리서 얼굴만 바라보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러자 육지에서는 견우와 직녀가 울면서 쏟아지는 눈물로 냇물이 넘쳐나 범람위기에 처하자
까마귀와 까치들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건강한 까마귀와 까치들을 총동원해서
견우와 직녀가 만날 수 있도록 오작교를 만들기 위해서 일제히 하늘로 날라 갔다
그래서 음력 7월7일 칠석날이 되면 저 높은 하늘 위에 까마귀와 까치 떼가 모여서 얼굴을 파묻고
어깨동무를 하고 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밤하늘에 만들어진 이 다리를 오작교라 부른다
한자어로 까마귀 ‘오‘와 까치’작‘ 다리’교‘ 자를 합쳐서 오작교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따라서 오작교는 까마귀와 까치가 만들어준 다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해서 견우와 직녀는 일 년 동안 떨어져 지내면서 서로를 그리워 하다가
칠월칠석날이 되면 까마귀와 까치들이 뭉쳐서 만들어 준 오작교 위에서
일 년 만에 만나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회포를 풀게 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새벽닭이 울면서 날이 새기 시작하면 견우와 직녀는 또다시 헤어져서
길고 긴 1년의 세월을 다시 보내야만 했다
젊은 청춘을 밤낮으로 불태워도 모자라는 나이에 혼인을 해놓고도 이 두 사람은 함께 살지 못하고
헤어져야 할 때는 서로 마주 잡고 있던 손을 차마 놓을 수가 없었고 포옹을 한 채로
두 사람은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어쩔 수 없이 1년 뒤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억지로 돌려야만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나도 처량하고 안타까워서
보는 이들의 마음에도 측은지심이 생겨서 가슴이 쩐 하였다
만날 때도 반가 와서 눈물이 났지만
다음 날 새벽에 헤어지며 이별할 때 흘리는 눈물은 더욱 더 슬펐다
그래서 칠석날 밤에 비가 오면 견우별과 직녀별이 만나서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었고
다음 날 아침에 비가 내리면
견우별과 직녀별이 헤어질 때 슬퍼서 쏟아지는 눈물이었다고 하는데
칠석날 밤에 내리는 비를 '칠석우'라고 부른다
칠월칠석날 밤에는 까마귀와 까치들이 대부분 오작교를 만들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서
땅 위에서는 보기가 힘들었고
다음 날 아침에 발견되는 까마귀와 까치들은 밤새도록 하늘에서 오작교를 만들고 버티는 바람에
지칠 대로 지쳐서 까치가 소리를 내도 힘이 없어서 까치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으며
견우와 직녀가 밟고 지나가서 머리가 벗겨지거나 날개에 털이 빠진 까마귀와 까치가 많았다고 한다
직녀별아
실망하지마라 포기하지마라
할아버지인 옥황상제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그 누구보다도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손녀딸인 직녀별을 가장 많이 사랑 한단다
그러니 할아버지를 실망시키지 말고 부지런히 베를 짜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드린다면
옥황상제는 틀림없이 마음이 바뀌셔서 견우별과 함께 살게 해주실 거다
그 때는 매년 수고 해주고 다치기까지 했던 까마귀와 까치들에게도 보답해야 되는 거 알지?
직녀별아
힘내라 파이팅^^
(참고로 우리나라는 까치가 길조이지만 일본은 까마귀가 길조이다)
마지막으로 칠월칠석날에 얽힌 이야기를 하나 더 하고자 한다
일본은 지역마다 다르긴 해도 일 년 내내 축제가 많은 나라 중의 하나이다
나는 젊은 시절 직장에서 일본으로 출장을 자주 다녔는데 이 맘 때 있었던 일 이었다
한 번은 아오모리로 가기 위해서 도쿄에서 북쪽으로 200km 쯤 떨어진 센다이 지역을 지나고 있었다
센다이는 인구 6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 도시로 해안가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였다
센다이 시내로 들어서는데 거리마다 인파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거리에는 수많은 형형색색의 깃발과 크고 작은 길쭉한 연등이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고
여러 가지 특이한 옷차림으로 몰려든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축제 기간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거리 입구마다 ‘다나바타 마츠리’라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우리말로는 ‘칠월칠석 축제’라는 뜻 이었다
거리에는 포장마차와 노점상들이 즐비하여 여기저기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는데
먹거리 코너에는 가는 곳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날씨가 덥다 보니 빙과류를 판매하는 곳들은 어디를 가나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 아주 특이했던 먹거리는
굵고 기다란 대나무 안쪽에 구멍을 내고 파이프처럼 만든 다음 대나무 통을 기울여 놓고
대나무 통 맨 위에서 물을 흘려보내는데
요리사는 물이 흐르는 대나무 통 위에서 삶은 국수를 대나무통 안에 넣고 흘려 내려 보낸다
그러면 관광객들은 빈 그릇과 젓가락을 들고 몰려들어 대기하고 있다가
길다란 대나무 통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린 국수를 재빠르게 먼저 건져서 먹는 행사였다
일본 사람들은 대나무 속에서 흐르는 물을 타고 내려온 국수를 ‘나가시소멘’ 이라고 불렀다
칠월칠석 축제 중 또 하나는 형형 색깔의 ‘단자쿠‘ 라고 하는 작은 색종이에 소원을 짤막하게 적어서
보드판이나 늘어진 깃발 같은 곳에 부착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적고 있었다
내용을 보니
오늘 하루는 실컷 즐기자. 오늘은 마음껏 즐기자. 모든 것 잊고 놀아보자
오늘은 실컷 웃어보자, 맛있는 거 골고루 먹어보자.
오늘의 축제 기분을 영원히, 행복이 가득한 하루,
아름다운 추억 많이 만들기 등등 여러 가지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거리에는 여러 가지 색상 별로 만든 비단 천에 글을 써서 기다란 대나무에 매달고
세워 놓아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번화가 머리 위에는 우리나라 부처님 오신 날 연등이 매달린 것처럼 여러 가지 색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등들이 매달려 밤에는 불을 밝히도록 되어 있었다
또 어떤 번화가 거리 머리 위에는 종이로 만든 초대형 종이인형들이 즐비하게 매달려 있었다
동행했던 도요타 직원에게 물어보니
칠월칠석 축제는 일본의 5대 명절 중의 하나로 전국적으로 지역마다 열리는데
축제 기간은 보통 3~5일 정도 걸리며 축제 행사와 내용도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저녁에는 연등행사와 거리를 행진하며 관광객들이 함께 모여 춤추는 시간도 있고
칠석 축제 마지막 날 밤에는 대규모 불꽃놀이 행사도 있다고 했는데
나는 일정이 바빠서 많은 행사들 가운데 지극히 일부만 보았고 대부분은 관람하지 못했다
그 중에서 센다이 지역에서 열리는 칠월칠석축제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하며
3일 동안 찾아오는 관광객 수만 3백~4백만 명에 이른다고 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구 60만 도시에 관광객이 3백만 명 이상이 몰린다면
지역 경제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참고로 일본의 경우 칠월칠석 축제는 양력 날짜에 하는 도시도 있고 음력날짜에 하는 도시도 있다
올해 도쿄 같은 경우에는 칠석축제를 양력 날짜로 5일간이나 성대하게 치렀다
중국에서는 칠석을 정인절(情人節)이라 하여 연인이나 부부가 서로에게 선물을 주거나
마음을 표현하는 날이다. 칠석날은 혼인신고 건수도 대폭 늘어난다고 한다.
요즘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칠석날이 되면 연인들 사이에 선물 주고받는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고 한다
이미 결혼한 부부끼리도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작은 선물을 준비하면 어떨까 싶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비해서는 지방 도시마다 특색 있는 축제가 다양하게 점점 늘어나고 있다
복숭아나 단감 홍시 같은 과일 축제도 있고 고추아가씨 선발대회와 인삼축제 버섯축제와
같은 축제도 있고 소래포구에서는 김장철에 젓갈 축제도 있다
함평 나비축제와 무주 반딧불축제와 같은 곤충축제도 있고
강원도에서는 숭어축제나 빙어축제 같은 물고기 축제도 있고 남해안에서는 전어축제도 있고
여러 수목원에서는 다양한 꽃 축제도 열리고
국화꽃 수국 벚꽃축제 등 꽃 축제도 열리면서 축제 종류도 예전에 비해서는 다양해지는 것 같다
내가 사는 부산의 경우에는 광안리에서 어방축제가 열리고 기장에서는 멸치축제가 열리고
가을에는 부산대교 불꽃축제가 열려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역별 축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지역 홍보는 물론 지역 경제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성의 없는 축제나 요식행위로 치르는 행사에는 관광객이 오지 않는다
일본의 칠월칠석 축제를 보면 전국적으로 지역마다 따로따로 행사를 하는데
도시가 적은 센다이 축제가 가장 인기가 많아서 관광객이 제일 많이 몰린다
우리나라도 앞으로는 지역별로 보다 더 질 좋은 축제와 다양한 볼거리를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행사들이 연중 내내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요즘 같은 여름철에는 더워서 축제도 별로 없는데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우리나라 무궁화꽃 축제를 많은 지역에서 열리도록 해서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꽃을 널리 알리고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꽃이 되었으면 한다
벚꽃 축제는 전국적으로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우리나라 꽃인 무궁화 축제는 행사도 거의 없고 사람들에게 관심도 없으니
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무궁화 꽃은 7월부터 10월까지 피었다가 지기를 반복하는데
나팔꽃처럼 아침에 피어나 하루 종일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어 떨어지고
다음날 아침에는 다른 가지에서 다시 꽃이 피어난다
그러므로 무궁화꽃은 지금이 한창 피어나는 절정기이다
나무 한 그루 당 3개월에 걸쳐서 약 3천 송이가 피었다가 지기를 반복한다
생명력이 아주 강해서 가지를 꺾어서 아무렇게나 심어도 뿌리를 내리고 살아나기 때문에
무궁화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국민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지금은 천안 병천 마을에 가보면 맛있는 병천 순대국 맛도 즐길 수 있고 아름다운 무궁화꽃도
많이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우리나라 몇몇 지역에서는 여름철 무궁화 축제가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 순천만 국가 정원에서는 매년 8.15 광복절을 전후해서 33년째 무궁화 축제가
열리고 있다
여름철에는 볼만한 꽃도 별로 없는데 꽃이 크고 아름다운 무궁화 꽃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보급시켜서
여름철 마다 무궁화 축제가 열려서 삼천리금수강산이 온통 무궁화 꽃으로 화려하게 수를 놓았으면 한다
글쓴이 강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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