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대룡산(大龍山) 시비림(詩碑林) (下)
정영기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6. 정사재정영기시비(靜思齋鄭榮基詩碑)
肖像畵 : 鄭勝周 교수 畵
立碑
2017년. 정사재시비 立碑紀念
<前面>
思鄕
前梅後栢屬諸兒
着葉開花兩未知
幽蘭孤竹當寒歲
應笑主人歸去遲
고향을 그리워하며
앞에 매화 뒤에 동백
아이들에게 맡기고
잎이 핀지 꽃이 핀지
모두 모른다
난초나 대나무도
추울 때를 당하여
아마도 주인이
더디 온다 웃겠지
<左側面>
大龍山吟 贈靜思齋鄭兄
貝城東有一高峯
控壓群岳勢傑雄
鍾氣曾生三斗老
登科早與聖君逢
雲仍兮有靜思子
才藝幼殊諸巷童
儼已業成從遂衆
詩碑異日想其風
대룡산을 읊다.
정사재 정형에게 주다
보성의 동쪽에 하나의
높은 봉우리 있으니
여러 뫼뿌리를 끌어 누르고
형세가 우람하고 웅장하다
기운이 뭉쳐 일찍이
삼두공 어른이 태어났는데
과거에 올라 일찍 임금과 만났다
후손으로 이제 정사재가 있는데
재주가 어려서 다른 애들과 달랐다
엄연히 이미 학업이 이루어져 제자가 많으니
詩碑로 뒷날 그 기풍을 생각하리라.
丙戌暮春之初 松潭 弟 李栢淳
<後面>
靜思齋記
<右側面>
綠陰芳草勝花時
正値風和日暖時
三春佳節靜中移
江東晴竹知繁葉
安宅古松應擎枝
芳草無邊渾似夢
綠林倒影亦盈卮
天涯何處君思我
萬里綿綿再會期
녹음방초승화시
바로 바람 화창하고
날 따뜻한 때를 만나
三春佳節이 조용히 온다
강동의 晴竹은 잎이
번성했으리라 짐작되는데
안택의 古松도 아마 가지를
쳐들고 있으리라
방초는 끝이 없어 혼연히 꿈속 같고
푸른 숲은 그림자를 드리워
술잔에 가득하다
하늘가 어디에서 그대는 나를 생각하는가
만리 먼 길고 긴 재회의 기약이여!
* 成均館漢詩白日場 受賞作品임.
7. 탁상비(卓床碑)와 의자비(椅子碑)
대룡산 상봉 탁상비 건립
묘정 앞에 매화원 조성
대룡산 정상에는 바위가 없기 때문에 소풍객들이나 등산객들이 편히 앉아서 쉴 장소가 없다.
많은 산악인들이 대룡산 산행을 하면서 사진과 글을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정상에 서서 산 아래 풍광을 감상하거나 흙바닥에 비닐이나 자리를 펼쳐 놓고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다.
鯫生은 생각 끝에 편안하게 16명 정도 의자에 앉아서 다과와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대형 돌탁상을 설치하여 놓았다. 기왕이면 음식을 먹으면서 대룡산에 대한 시를 감상할 수 있도록 ‘대룡산 팔경시’를 새겨 놓았다. 아마 산 정상에 이와 같은 탁상비와 의자비는 이 지구상에 유일무이(唯一無二) 할 것이다.
탁상비와 의자비
(1)
(2) 의자비
달맞이꽃
일선에도
달맞이꽃이 피었다
이름 없는 아저씨
무덤 위에도 피었다
어두움이 살금살금
기어드는 저녁이 오면
노오란 입술을
살며시살며시 벌린다
여름밤 꿈과 함께
노래 부른다
참바람 꿈바람과 함께
춤을 춘다
기다리고 그립던
달님 생각에
마음껏 가슴 벌려
곱게곱게 몸단장 한다.
1959년 백마고지에서 지은 동시인데 서울국제매일신문에 당선되어 전국의 초·중등학생들에게 널리 애송된 작품임.
겨울바다
아늑한 해변
바다와 호수를 갈라놓은
방조제 위를 함께 걷는다
바다에 떠있는 백사장
그 위의 소나무가
더더욱 푸르르고
갈대밭 너머엔 철새들이
겨울을 나러와서
짝을 짓는다
언제나 시간이 모자란 사랑
눈으로 입술로
바다의 사랑은 바위에 부딛쳐
소리를 지른다
사랑은 주는 쪽이 더 행복하다
흰 거품 일으키는 파도가
힘차게 밀려와서
수많은 진주를 다져놓고
눈덮힌 산 위를 날아서
가고파 하는 희원(希願)은
가슴이 후련하다.
밀레니엄 새 천년을 맞이하여 KBS에서 2000년 1월 1일 0시에 낭송한 작품임.
그리움
대룡산 춘란
2019년 3월 30일 탁상비와 의자비 입비
8. 서예작가 소개
(1) 역당(亦堂) 구회승(具會升)
자(字) 영회(永會), 호(號) 역당(亦堂) 벽주(碧疇). 1911년 12월 2일 충북 음성군 금왕읍 쌍봉리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과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에게 사사. 1939년 11월 15일 권위 있는 동경 태동서도원전(泰東書道院展)에 죽난도(竹蘭圖)를 출품하여 한국인 최초로 입선하였다. 1939년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과를 졸업하고 경동중학교(京東中學校)와 청주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58년 청주대학(淸州大學) 한문교수에 임용되었다. 중・고등학교 한문교과서 폐지에 반대운동을 펴다가 이듬해 교단을 물러났다.
1959년 서울로 상경하여 강동구 길동에서 후진 양성과 작품 활동에 전념하다가 1984년 1월 10일 향년 74세로 타계하였다. 해서(楷書)와 행서(行書)에 능했으며 특히 사군자(四君子)중 묵죽난도(墨竹蘭圖)는 당대에 독보적이었다.
저서로는 ≪亦堂遺稿≫가 있다. 나는 유학을 떠나기 전 약 1년간 사군자 치기와 해서를 배웠으며, 내가 받은 귀한 작품은 <靜思齋>현판, <歲寒三友圖>병풍, 墨竹蘭圖액자 3점, 合竹扇 작품, ‘乾坤純和’액자 등이 있다.
(2) 춘조(春兆) 이상훈(李相薰 1919~2004)
1930년 충북공립사범학교 졸업, 일본미술학교 졸업 후 서양화가가 되었다. 서울시 장학관을 거쳐 광희중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맞을 때까지 평생을 교육자로 보냈다. <조선일보> 연재 ‘師道’의 첫 번 주인공이다.
대종교(大倧敎) 제11대 총전교 재직 당시 소인의 요청으로 우석부군(友石府君)의 비문을 해서(楷書)와 한글로 써주셨다.
(3)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 1926~2007)
진도에서 태어나 소전(小田) 손재형(孫在馨)에게 배워 예서와 행서에 뛰어났다. 1992년 고향인 진도에 남진미술관(南辰美術館)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문화예술발전에 힘쓴 공로로 보관문화훈장과 세계평화예술상을 받았다.
장전이 전남예술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6촌 아우인 전남대학교 예술대학장 정승주(鄭勝周)교수가 가선대부공(嘉善大夫公) 비문을 예서(隸書)로 받아왔다.
(4) 남송(南松) 김영묵(金永黙 1926~2003)
1926년 전북 부안에서 출생했다. 스스로 서법(書法)을 읽혀 행서(行書)와 예서(隸書)에 독자적인 남송체(南松體)를 이룩하였다. 강동 ∙ 송파서예가협회장을 맡았으며 강동구 상일동에서 2003년 6월 21일 타계할 때까지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해학(諧謔)과 풍류(風流)를 즐겼으며, 특히 전국 수석인(壽石人세)들이 南松 작품을 선호하였다. 세종문화회관을 비롯하여 여러 지역전(地域展)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고 ≪鍾鼎款識(종정관지)≫ 편저와 3권의 서록(書錄)을 남겼다. 주요 휘호로는 강동예찬시비 ∙ 고하 송진우선생기념비 ∙ 제12대종정대종사영적비 그리고 운명 3일전에 쓴 대룡산시비가 있다. 여담이지만 대룡산시비를 쓸 때는 손에 힘이 너무 없어서 붙잡아 드렸고, 세 번이나 쉬어가면서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나는 약 1년간 예서(隸書)를 배웠으며, 내가 받은 작품은 <臥龍齋>현판, <艸堂八景> 대형액자, 대형合竹扇 작품, 대형 족자 春夜宴桃李園序 등 7점이 있다.
(5) 송담(松潭) 이백순(李栢淳)
松潭선생 文集 (靜思齋記 ․ 臥龍齋記 ․ 賞鶴學術會 ,수록)
1930년 陰9월 9일 보성군 복내면 시천리에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2012년 2월 8일 향년 82세로 졸하였다. 7세 때에 부친을 졸라 천자문을 사다가 배우고, 9세 때에 복내국민학교에 입학하여 15세가 되는 봄 3월에 졸업하였다. 조부 낙천(樂川) 이교천(李敎川) 선생에게 한학을 19세까지 배웠다. 조부가 타계하시자 다시 국내의 대유(大儒) 간재(艮齋)의 제자 효당(曉堂) 김문옥(金文鈺), 현곡 유연선, 양재 권순명, 현당 이현규 선생 등을 찾아가서 약 2년간 가르침을 받았다. 21세가 되는 해부터 조부가 남긴 덕산정사(德山精舍)에서 한학을 계속 연구하면서 찾아온 학도들을 가르쳤다.
1993년 중국에서 열린 주자학 학술대회에서 강론과 서예문장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고향과 광주에서 후진을 양성하여 1000여명의 제자를 둔 한국의 마지막 선비가 되었다.
소인이 호주유학시절 서신으로 한문학문답을 4년간 하였는데, ‘松潭講學錄’과 제3시집 ‘우주보다 더 큰 사랑’에 수록되었다. 수차례 제자 되기를 간청하였으나 거절을 당했다. 송구스럽게도 친한 친구로 지내자고 하셨다.
고향에 갈 때마다 찾아가서 학문을 논했으며, ‘河東鄭氏四先生詩碑’와 소인의 詩碑文을 즉석에서 써주셨다. 방바닥에 화선지 전지를 펼쳐놓고 엎드려서 일필지휘로 행서(行書)를 쓰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한없는 존경심과 감탄이 저절로 솟았다. 마지막 남은 선비의 힘있고 훌륭한 글씨를 비석에 새길 수 있어서 기뻤다.
나에게 증정(贈呈)한 저서와 서예작품은 <續思師父曲> 말미에 모두 사진으로 찍어 첨부하였다.
(6) 죽포(竹圃) 조득승(趙得升)
1942년 壬午 5월 7일 보성군 미력면 석호산(石虎山) 아래에서 출생. 설주 송운회, 동호 임영선, 우당 문태석, 송담 이백순 사사.
한국문화예술대전 금상. 한국서법학회예술전 대상. 일본 동경미술대전 대상. 대한민국사회교육문화상. 자랑스런 송파인 송파구민 대상. 중국교류전 16차. 일본 NHK방송 <한국재발견>(한국 유명 서예인) 프로에 유명연예인 카타오카 츠루타로와 단독 30분간 녹화방송 수차 방영. 갑자서예회장. 저서는 竹林餘滴(漢詩集). 後石遺蹟.. 松竹墨錄集. 歸去來辭 등 다수.
죽포(竹圃) 조득승(趙得升)은 초등학교 동창인 조권승(趙權升)의 아우이다. 서울의 상학학술회(賞鶴學術會)에서 우연히 만나 친하게 되었다.
대룡산시비림(大龍山詩碑林)이 유명한 서예가들의 작품임을 보고 “저도 대룡산에 비석글씨 하나 남겨놓고 싶습니다.”라고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더 세울 비석이 없어서 안타까워 하였는데, 나더러 미리 묘비를 자술(自述)하여 주면 정성껏 써놓겠다 하였다. 살아있는 사람의 비문을 타인이 작문(作文) 불가(不可)나 자술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퇴계(退溪) ․ 다산(茶山) ․ 송담(松潭)선생님의 묘비(墓碑) 모두 자술한 것을 사후에 입비하였다” 했다.
그리하여 추생(鯫生)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는 수 없이 자술(自述)하게 되었다. 죽포(竹圃)는 와병중(臥病中)임에도 심혈을 기울여 전면(前面)의 대자(大字)와 후면(後面)의 해서(楷書)를 명필로 써 주었다. 사후에 자손들이 국립묘지에 안장하지 않고 대룡산에 매장하게 된다면, 죽포의 글씨 묘비가 대룡산에 세워질 것이다.
(7) 해창(海倉) 우경섭(禹慶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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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 7일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출생. 초등교사 정년퇴임.
40여 년간 친하게 지내면서 나의 시화전이나 액자 작품과 대룡산시비림의 한글을 모두 써서 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