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에서 길은 인간이 이룩해 놓은 업적 중에도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야생동물이 물을 마시러 다니고, 인간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걸었던 길. 길을 통해 다른 곳으로 이동함으로써 인간의 생활환경이 바뀌게 됐고, 또한 길은 과학 문명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지금은 우리의 조상들이 걸었던 자연 속 길을 찾아 옛 추억을 회상하면서 걷는 것 자체가 힘든 세상이 되고 말았다. 본보에서는 잠시나마 부모세대들이, 부모의 부모세대들이, 나아가 더 이전 우리 조상들이 걸었던 길의 향취가 조금이나마 묻어 있는 경남지역의 ‘걷고 싶은 길’을 찾아 회색 건물에 싸여 매연과 소음에 찌들린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1>진주 가좌산 테마길
진주지역 새로운 개발지역인 진주시 가호동 일대. 10층이 넘는 아파트 단지를 비롯해 상가, 공공기관, 주택 등 고층건물들이 빽빽하게 밀집해 있고, 출퇴근시간대에 홍수처럼 밀려드는 차량들을 소화하지 못해 교통지옥으로 변하는 등 이 일대는 갈수록 삭막해지는 회색도시화되고 있다. 이같은 도시의 복잡함 속에서도 가좌산은 가호동 주민들을 묵묵히 지켜 주는 안식처가 되고 있다.
연암공대 사거리에서 연암공대 정문 방향으로 30여m 가다 보면 왼쪽편으로 갈레길이 나온다. 가좌산 테마길이다. 도시화가 되기 전부터 예전부터 이곳 주민들이 즐겨 찾았던 길이다. 이 길은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 남부산림연구소에서 연구목적으로 운영 중인 가좌시험림이 있어 어느 갈레길 보다 산림경관이 수려하고, 수목이 잘 조성돼 있다. 이 때문에 진주시가 ‘걷고 싶은 길 10선’ 중 ‘제 9길’로 선정했다. 이에 따라 진주시는 가좌산 갈레길 3.3㎞를 시민의 정서함양과 건강증진을 위해 2009년 1월부터 5월까지 8억원을 투입해 ‘테마가 있는 도심 숲길’을 조성했다. 즉, 걷는 코스코스 마다 이야기 꺼리나 다른 느낌이 있다는 뜻일 게다.
◇청풍길
가좌산 테마길 입구에는 광장이 나타난다. 광장에는 ‘구간별 테마’를 알리는 종합안내판이 이곳을 찾은 시민들을 반긴다. 입구에서 왼쪽으로 틀어 청풍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짙은 색깔의 나무데크가 빨리 올 것을 재촉하는 듯하다. 데크를 지나니 나무 발판 길이 나온다. 양쪽으로 차나무가 줄 지어 서 있는 길을 걷다 보니 고즈넉함이 느껴진다. 마치 차밭이 유명한 절을 찾아가는 느낌이다. 차나무의 효능 탓일까 들이키는 공기에 마음속 깊이까지 맑아지는 것 같다. 한겨울 오전의 차가운 공기인데도 ‘춥다’기 보다는 ‘시원하다’는 느낌이다. 나무 발판길을 하나 둘 세며 올라 가자 어느듯 대나무 숲에 닿았다.
◇대나무 숲길
이곳 역시 ‘대나무 숲길’이라고 적힌 팻말이 나타난다. 청풍길과 마찬가지로 나무 데크가 먼저 손짓한다.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대나무 숲으로 난 데크길로 향한다. 대나무 숲길 입구에 들어서자 스산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겨울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들 끼리 부딪치며 “쏴 쏴”하고 낸다.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어찌 보면 혼령을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음산한 귀곡 산장에서 울려나오는 소리 같기도 하다. 어렸을 적 엄마를 따라 외가에 갔을 때 집 뒷쪽 대나무 숲에서 나는 소리 같기도 하다. 어린 나이에 겨울 밤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무서워서 엄마 품을 파고들었던 옛 생각도 소록소록 나게 한다. 왕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어 끝나는 구간에 이르자 ‘어울림 숲길’이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테마 주제 자체가 스산하고 음산했던 ‘대나무 숲길’과는 영 딴판인 분위기를 보여 준다. 대나무 숲길 오른쪽으로는 대나무가 품종별로 식재돼 줄을 서 있다. 대나무 하나 하나 마다 학명이 적힌 대리석 푯말이 나무의 이름을 알게 한다. 이곳에서 대나무 품종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어울림 숲길
어울림 숲길에 들어 서자 하늘을 향해 쭉 뻗은 편백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 온다. 두 갈레 길이 나온다. 황톳길로 난 길과 데크 길이다. 청풍길과 대나무 숲길을 걸을 때 데크 길로 왔기에 잠시 황톳길로 갈까, 나무 데크로 난 길로 갈까 망설였다. 그렇지만 쭉 뻗은 편백나무를 더 가깝게 보기 위해 데크길을 택했다. 데크길을 따라 편백나무 숲으로 들어 가니 길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는 원시림에 온 듯한 착각에 빠져 든다. 도심 속에 이같은 원시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뿐이다. 어울림 숲길 전망데크에 서니 석류공원 팔각정이 눈앞에 나타나고 멀리 시청도 보인다. 데크 길이 끝나자 팻말이 곧바로 ‘물소리 쉼터’로 가는 길을 알린다.
◇물소리 쉼터
팻말에서 조금만 올라가니 체육공원이 나타난다. 그곳에서 평일 추운 겨울인데도 5~6명 주민들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3개의 테마길을 걸어 와 이미 몸은 운동하기 좋게 풀려 있는 상태다. 여기에서 몇가지 운동기구를 이용해 잠시 운동해 보는 것도 이곳을 찾은 묘미다. 가호동에 살다 6년전에 금산면으로 이사갔다는 이필림(55)씨는 “이사 가도 이곳이 너무 좋아 간혹 찾아 와 걷곤 한다”며 “이렇게 걷기 좋은 코스가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고 말했다. 체육공원이 끝나는 지점에 ‘맨발로 황톳길’이 적힌 안내판이 서 있다.
◇맨발로 황톳길
안내판을 뒤로 하고 올라 가니 대나무 숲길 만큼 크지는 않지만 양쪽으로 대나무가 서 있다. 대나무에는 어린이집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정성스레 만든 작품들이 걸려 있다. ‘나무잎 모양’을 하고 있는 아이들 작품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황톳길을 따라 조그만 걸으니 ‘풍경길’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나오고 ‘고사리 숲길 800m’ 팻말도 바로 앞에 서 있고, 전망 데크가 잠시 쉬어 가란다.
◇풍경길
전망 데크에 올라 서니 바로 밑에는 연암공대 전경이 나타나고, 멀리 진주시가지가 보인다. 확 트인 시야에서 도시 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사라져 감을 느낄 수 있다. 아늑하게 난 풍경길을 따라 걸다 보니 가좌산 테마길을 모두 걷고 다시 돌아오는 시민들을 만날 수 있다. 요즘은 겨울철이라 그리 많지 않지만 다른 계절에는 많은 시민들이 찾아든단다. 험한 길이 아니라서 아이들도 쉽게 걸을 수 있어 엄마를 따라 온 아이도 문득문득 보인다. 앞에서 콩닥콩닥 뛰면서 ‘엄마’를 부르는 모습이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다. 풍경길은 가족간에 정을 느낄 수 있는 길인 것 같다. 풍경길에 이어 고사리 숲길이 나타난다.
◇고사리 숲길
팻말은 오른쪽은 석류공원, 직진은 경상대 방향임을 알린다. 경상대 방향으로 올라 가니 얼마 못가 고사리 숲길이 나온다. ‘고사리 숲길 190m’라고 적힌 팻말을 따라 오른쪽으로 틀었다. 야트막한 오르막이 이어지다가 다시 내리막으로 가는 길에 고사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겨울철이라서 그런가’하고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반환점’이라고 저힌 팻말이 나타난다. ‘반환점’에서 다시 왔던 길을 가기 싫어 오른쪽 길로 방향을 잡았다. 이 길을 따라 가니 ‘고사리 숲길’이라는 의미를 알게 됐다. 한겨울인데도 푸른 고사리들이 길 옆에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고사리를 바라보며 조금 걸으니 다시 풍경길이 나타난다. 다시 돌아가는 길이다. 돌아오는 길에서 ‘물소리 쉼터’에 닿으면 ‘어울림 숲길’ 방향으로 가지 말고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것도 좋다. 황톳길 따라 오른쪽에는 쭉 뻗은 편백나무 숲을, 왼쪽으로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다양한 수종을 만날 수 있어 테마길을 걷는 또다른 재미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