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中國旅行
2013.08.11~15
부산-경-신향-안양-북경-부산
꼭두 새벽에 일어나 어젯밤 챙겨 둔 짐을 들고 바로 출발지인 김해공항으로 나갔다. 중국 여행이다.
08시 15분 부산 김해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09시 50분에 이미 북경에 닿았다. 시차는 한시간으로 한시간을 번 셈이다.
북경 공항에는 부슬비가 내린다. 우산을 쓰기에도 안쓰기에도 애매한 날씨. 그냥 그 독하다는 북경의 산성비를 맞는다.
하늘은 온통 잿빛 생기가 없는 무채색이다.
천단공원
나무 아래에서 향수가 깃든 중국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귀 기울여보니 마치 문화혁명 당시 홍의병들의 선동 가요 같다. 아마 현지 동호회 모임인 모양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북경 유물은 네개다. 천단공원,자금성,이화원,만리장성이 그것이다. 첫 출발을 천단 공원에서 시작한다.
천단 공원으로 가는 긴 회랑
긴회랑은 놀러 나온 북경의 많은 시민들로 붐비고 수공예품을 파는 사람.카드놀이를 하는 사람, 장기를 두는 사람등 많은 노인들이 한가롭게 더위를 식히며 소일하고 있었다. 야시장을 방불케하는 인파였다.
수공예품을 파는 사람
천단 공원을 서울의 파고다 공원과 비슷하다고 설명한것은 가이드의 큰 실수이다. 비슷한 점은 노인들 소일하는 장소라는 정도이다.
천단공원은 북경을 대표하는 상징물일뿐더러 유네스코에 등재된 기념물이다. 파고다 공원이 준 잘못된 선입견 때문에 천단 공원을 충실히 보지 못한 우를 범했다.
결과론적이지만 나는 가이드의 첫 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싸구려 커트 머리에서부터 문화재를 설명하는 불성실한 태도에 이르기까지 가이드에대한 불만은 이번 여행동안 늘 따라다녔다.
천단 공원은 1420년 명나라 영락제 때 지어진 건물로 높이가 33m에 이르는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건물이다. 당삼채의 코발트빛 단청이 아름답고도 황홀한 분위기를 창출한다. 그 무엇을 가져다 두어도 어울릴것 같은 완벽에 가까운 색감과 구도.
황제께서는 몸소 일년에 한번 동짓날을 택해 이곳에서 제사를 올리셨단다. 그 화려한 분위기가 눈에 선하다.
오늘 우리가 방문한 곳은 천단 공원의 주건물인 幾年殿에 불과 하다 황제가 제사를 올리는 천심석이라던가 소리가 돌아온다는 그 유명한 황구우의 회음벽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그냥 근성 근성 자리를 떠난다.
볼 것과 볼 필요가 없는것은 여행자가 결정해야할 사안이다 마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시간에 쫒겨 중요한 유물들을 지나쳐야하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
개인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보아도 한무리의 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중국 인민에 대적할 생각 마라. 대대손손 몰려올것이다. 중국의 힘은 바로 이 인민의 힘에서 나온다.
이 많은 인구들의 뜻을 다 모은다는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전쟁은 질서를 낳고 질서는 왕국을 건설했다. 중국은 여전히 왕국이다. 개인이란 없다.
베이징 남자 화장실
"샹치엔 이샤오뿌 원밍이따뿌"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것을 문명의 관점에서 說한 내용이다.
유명한 베이징 카오야 (북경 오리) 식당
한국인의 입맛을 고려해 향료를 덜 사용했다는 베이징 카오야. 먹음직스럽다. 따라나오는 사이드 디쉬도 좋았다. 오리살과 뼈를 고아만든 백숙에 손이 유독 갔다. 오리 고기를 구절판 처럼 전병에 여러가지 야채를 얹어 먹었다, 껍질이 고소했지만 기름기가 좀 많은것 같았다. 껍질을 바삭하게 기름기가 느껴지지 않게 구워서 오리살과 함께 먹는것이 포인트.
십찰해(쓰차하이) 十刹海라고 부른다. 놀잇배가 떠 있는 그렇고 그런 공원같았다.
인력거 투어
우리나라로 말할것 같으면 서울 북촌처럼 명청대 건물이 보존된 구역을 인력거를 타고 여행한다 골목은 좁고 집은 단조로왔다. 한 집을 택해 방문해 보았는데 실재 사람이 사는것 같지는 않고 관광용으로 오픈해 놓은듯 싶었다. 중앙에 중정이 있고 사방으로 가옥이 둘러싼 서울의'ㅁ'자 구조를 닮은 집이었다. 골목과 회청색 벽돌로 지어진 일관성있게 지어진 외벽,붉은 문, 문의 여러가지 장식을 제외하고는 단조롭고 따분한 골목이었다.
북경의 이 더러운 공기를 마시며 땀을 흘리는 인력거꾼이 하루에 얼마를 벌던 내 관심 밖이다. 그들과 나 사이에 갑과 을이 존재할것 같지도 않다. 오로지 위엔화로 연결된 그들과 나 사이의 이 완벽한 격리가 그들이 흘린 땀의 대가를 조용히 치르게 해 주었다. 인력거로 십찰해 주변을 돌며 오로지 그의 등만을 쳐다본다. 내가 더우니 그는 더욱 힘들것이다. 북경의 날씨, 정말 지독하다.
胡同
베이징 사람들은 뒷골목을 호동 즉 후통이라고 부른다. 북경에는 이름 붙여진 골목이 6000여개이고 이름없는 골목이 13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고도답게 정말 소털처럼 골목이 많다. 북경의 골목길을 다 연결하면 만리장성 보다 길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어느정도인지 짐작해 보기 바란다.
북경 주택의 전통 양식은 사합원(四合院)이라 하여 중앙에는 중정이 있고 가옥이 사방에 배치된 형태이다. 현재 보존 지구에 있는 집들은 정부의 보조를 받아 함부로 개인이 개조할 수 없다고 한다. 집이 가지는 사회적 위치는 대문에 표시된 여러가지 장식들로 표현된다. 대문의 석주가 장고나 북이면 무관,책이면 문관 이런 식으로.
집모양과 외관의 끈질긴 동질성이 이곳에 모여사는 주민들이 다 고만 고만함을 느끼게하지만 어떤 집은 130억이 넘는 고가의 주택이라고 하니 주택의 가치를 너무 과장하는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골목의 인상은 한마디로 회색 인민복의 인상이다. 신분의 높낮이가 느껴지지않는 만인 평등의 인상이 그대로 주택에 전해진 느낌이다.
북경역
고속열차를 기다리는 중국 인민들. 명색이 고속열차인데 자꾸 지연을 알린다. 열차가 지연된다는 소식은 옆에 있는 중국인민들이 쏟아내는 일치된 탄식을 통해 알 수 있다. 하~ 하고 한마디 탄식을 뱉어내고 나면 그만이다. 더 이상의 술렁거림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의 연착이 몇번 계속된다면 어떨까. 일치된 탄식 속에서 커다란 일체감같은것을 느꼈다. 이것이 공산국가의 감정조절이구나. 중국 인민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조용하고 스마트한 도저히 중국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고속열차를 북경 서역에서 타고 두시간 삼십분 후에 기분 좋게 신썅 (신향)역에 도착했다.
천둥 번개가 치고 천지가 개벽한듯 비바람이 몰아쳤다. 그렇게 메마르다던 이곳 날씨를 비웃기라도 하듯 혼비백산할만한 천둥이었다.
밤새 비바람이 불었는지 아침이 쾌적하다. 버스로 한시간 반가량 걸려 구련산에 도착하였는데 어제밤 강풍으로 도로에는 곳곳에 나무들이 쓰러져있었다.
하늘이 우리를 도우셨는지 너무도 좋은 날씨다. 다만 더운 공기로 수분이 증발하며 계곡 가득히 연무를 만들어 사진 찍기에는 딱 더러운 날씨였다.
태항산을 간다고 했을 때 제일 처음 부딛힌 문제가 바로 태항산의 명칭이다.
太行山이라 쓰고 태항산이라고 읽으며 중국에서는 타이항산으로 발음한다는것이다. 行을 다닐 행으로도 읽을 수 있지만 줄항으로도 읽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탓이다. "태항산" 즉 '큰 줄기의 산'이란 뜻이다.
두번째 의문은 우리가 태항산에 간다고 했을 때 대체 어디가 태항산이냐는 거다. 태항산은 '큰 줄기의 산 '즉 산이라기 보다는 태항산이 포함된 큰산의 권역을 의미하는 모양이다. 산이라기 보다는 산맥의 개념에 더 가깝지 않을까? 북경 만리장성에서 시작된 지형이 산서, 하남 ,하북 삼성을 거쳐 600km를 뻗어 내려 온다니 태백산맥에 태백산이 들어있고 소백산맥 중에 소백산이 포함된것처럼 태항산맥 어딘가에 오리지날 태항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좌우간 우리가 오늘 방문하는 구간은 태항산맥의 일부인 구련산과 왕망령,천계산 일원이 될것같다. 한국에서 오는 등산객들도 주로 산꼭대기를 케이블카로 오르면 도교 사원이 있다는 천계산과 만선산 코스.구련산 코스 그리고 임주의 대협곡 이렇게 대체로 세부분으로 나누어 트레킹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계곡 입구에서부터 가슴을 방망이 치던 황홀하고 웅장한 스카이라인은 끝없이 이어졌고 빵차(좁은 협로를 따라 차가 오르는 관계로 서로 교행이 어려워 수시로 빵빵거린다고 부쳐진 이름)를 타고 산을 오르는 중에 대체 하늘 아래 이런 풍경을 두고 세상을 하직했다면 얼마나 억울했을까하는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보기 좋은 꽃도 자꾸 보면 식상하는 법, 흥분이 어지간히 가라앉을 무렵 우리는 차에서 내려 마침내 계곡 투어를 시작했다.
계곡 중간에 누군가 양을 방목하여 키우고 있었다. 하기야 도망 갈 곳도 없으니 가두어 키우는것과 매 일반이지만.
파흔과 나열
파흔은 얕은 해변에서 파도가 모래를 이동시켜 형성한것이다.
거북이 등 두껑 모양의 나열은 응고되지않은 침전물에 탈수가 일어나 균열되면서 형성된 지질을 말한다. 그렇게 쓰여있다.
죽은 사체의 살가죽 같은 힘을 잃은 핑크와 파래처럼 엉긴 초록을 얼버무린듯한 단촐한 색들의 터널이다.
그때 나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처럼 불현듯 내 지나 온 無彩의 삶이 떠올랐다.
미래를 향한 내 꿈의 창은 늘 닫혀있었고 희미하거나 모호했다.
의사가 되기위해 살아 온 내 20대를 제외한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았을까. 내 삶은 이미 이십대에 다 끝나버린걸까.
과거를 향한 내 연민이 현실적 도움을 줄리도 없고 그렇다고 내 청년 시절 또한 모노크롬 일색인데 나는 여전히 과거를 향해 지이류와 같은 캄캄한 꿈을 꾸고 있다.
산을 어느정도 오르자 철계단이 보이고 계곡이 새모가지처럼 좁아지며 비단 항라를 펼친듯한 고운 실폭포가 부끄러운듯 몸을 사리며 떨어졌다.
절벽을 따라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돌계단이 마치 차마고도에 온듯 신기하기만했다.
자연에 파묻혀 자연을 체험하며 이곳을 터전으로 살고 있거나 혹은 살아 온 인류들을 생각한다는것은 참으로 가슴벅찬 일이다.
아울러 나도 그들의 일원이 되어 인류 공통의 삶을 함께 향유하는 동료애를 느꼈다.
위대한 인류의 발자취, 어떠한 역경이라도 제것으로 만들고 마는 인간의 의지. 그 힘이 깃던 길을 나도 따라 걷는다.
아찔하지만 올라 온 만큼 힘이 느껴지는 돌계단.
묘하게도 계단을 오를수록 꿈이라는 형태로 내 내부에 잠재했던 희미한 삶의 감각들이 새삼 타오르기 시작했다.
죽음이라는 궁극적 무기력이 산을 가렸던 연무처럼 사라졌다. 차분한 사색이 또박 또박 걷는 걸음처럼 착실히 따라왔다. 엄정하기 이를데 없는 중도의 감정이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흥분은 사라지고 호흡처럼 마음은 안정되었다. 도교 사원을 왜 이리 높은 곳에 지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것 같았다.
999 계단을 쉬엄 쉬엄 오른다. 사진을 찍고 찍어 주고 처음 보고 처음 느끼는 기막힌 풍경 앞에 높이에 대한 부담을 실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계단 바깥으로 잠시만 고개를 빼고 보면 아찔한 절벽의 높이가 우리가 얼마나 높은 곳을 오르고 있는가를 직시하게 된다.
높은 벼랑 끝에 서 본적은 있지만 오늘처럼 절벽을 체험하지는 못했던터라 높이에 대한 오늘의 경험이 무척 이채로왔다.
높이의 이채로움
나는 걷거나 걷는다고 믿는다. 나는 온갖 노력을 동원해 멀거나 혹은 높은 곳에 이르지만 그 멀거나 높은 곳의 위치에 선다는것은 내가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왔다는 사실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의 현 위치와 내가 오르려고 하는 다음 위치의 차이를 실감할 수 없다. 나는 다만 바람에 실려 움직이는 한낱 먼지일 뿐. 오늘은 바람도 없다.
성채는 천국이요 이상향이다. 다시말해 다다를 수 없는 곳이다. 다다를 수 있는 천국은 없다.
성채는 권력이요, 한없는 기다림이요, 돌아오지않는 샤무엘 베케트다.
그러기에 인생의 본질을 보는듯하다. 성채는 삶의 비로자나불이다.
도교사원 후정궁
계단 끄트머리에 도교사원이 있었다. 여기서 부터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된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나는 비옷을 입지 않는다. 물 한모금 마시고 길을 떠난다. 워낙 큰 감흥을 얻었기에 늘 떠나는 집처럼 마음이 담담하다.
후정궁에서 바라본 계곡 모습
내가 어디를 가면 일반 일숙을 구할 숙소를 찾듯 이 길 끝 어디에선가 반드시 만날 그 어떤 의미를 가르쳐 다오. 산이란 이름의 현자여!
하늘 계단을 바라보며 웃는다. 살아가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이곳에 유일하게 없는것은 오직 불가능이 아닐까? 불가능이 어디에 있는가.
걸어서 이 절벽에 오르려한 사람은 만유인력을 우습게 여긴 최초의 인류일것이다.
나는 저 계단을 걸어 여기에 올라왔다. 올라왔다.
여기는 달이고 저 아래는 비 현실처럼 멀어보인다. 하지만 나는 여기 올랐다.
삶에 불가능의 가시를 빼버린 그 최초의 발상으로 인해 내 삶에 또 하나의 문이 열린셈이다.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란 설명을 유보한 아름다움이다.
이 크다란 아름다움 앞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아!하고 내뱉는 탄성이야 말로 아름다움의 궁극적 표현이 아닐까.
백과 흑으로 색이 양분되듯 감정이 하나의 음으로 응축된다.
'할' 하고 내뱉는 선승의 일갈처럼 그저 연신 아!를 반복할 뿐이다.
나는 산을 바라보는 사람의 뒷모습을 좋아한다. 빨리 걷지 못하는 내 신체적 특성상 주로 타인들의 뒷모습을 많이 찍어온 경험도 경험이지만 산을 마주한 인간의 모습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소통을 느낄 수 있다.
즉 풍경을 등에 지고 찍는 인물 사진은 뭔가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느낌이 들지만 산을 바라보는 뒷모습은 작위가 해제된 인간 본연의 모습이랄까, 자연에 순응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훨씬 안정적인 느낌이 든다.
여기 어디 비탄의 백설이 영감을 덮는 불온한 기운이 있는가. 냉소의 얼음이 굳어지면 청춘은 사라지는것. 불굴의 의지와 어린 아이의 용기로 마침내 대자연과 하나되었으니 샤무엘 울먼의 청춘을 여기서 새삼 예찬한다.
여행을 떠난다는것은 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것 이 천애의 낭떠러지에 꿋꿋이 선 나를 보라.
청춘은 인생의 어느 기간(期間)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재
노재 뒤에 절벽을 오르는 계단이 있다. 절벽 길 위의 유일한 탈출구인것 같다
내가 산을 사랑하는 이유는 산행에는 돈의 효용성이 그다지 발휘되지 않기 때문이다. 산행은 무엇보다 본질적이며 그것이 산행이 지닌 매력이다.
산을 정말 행복하게 타는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부럽다. 태연하고 고통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내게 산행은 전쟁과 같다. 그런데 왜 나는 필연적인 고통을 무릅쓰며 매번 산을 또 오르게 될까? 그런걸 보면 고통에 대한 인간의 기억이 지극히 짧다는것을 알 수 있다. 고통은 단편적인데 반해 산행을 통해 얻는 성취욕이 더 크므로 고통을 충분히 덮을 수 있어서 일까.
고통에대한 상상력이 극단적으로 커다면 아마 나는 다음 산행을 포기했을 것이다.
내 삶에 대한 모든 연민은 사실 다 거짓이었는지 모른다. 내 살 속에 숨어있던 뼈가 살을 찢는 고통을 줄 때 비로소 고통은 현실이 된다.
내 신경이 스스로 만든 고통을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화해하는 순간 고통의 연민으로부터 나는 해방되었다. 구름 걸린 먼 산의 모습이 그렇다는거다.
아름다운 이단 폭포
용봉 폭포
용봉폭포가 보인다. 목적지인 주가포 마을이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단으로 떨어지는 용봉폭포의 환상적인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멀리 황감두 마을이 보인다
여기사는 사람들은 아프면 어떡할까. 시장은 어디서 보아올까. 학교는 있을까. TV는 볼 수 있을까. 핸드폰은 통할까 세상 모든 사소한 걱정거리에도 불구하고 이 곳 사람은 이 곳 사람인 채 살아간다. "삥 커러 여우마? "하고 물었다가 가이드에게 핀잔을 들었다. 차가운 콜라도 여기서는 찾아서는 안되는구나. 그런 곳이로구나. 모든 의구심이 사라졌다. 여기는 중국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시원한 콜라 한모금이 간절한 시간이다. 벼랑에 우리가 올라선 순간 퇴로는 없다. 질러갈 수 있는 지름길도 없다. 오롯이 계곡을 따라 마을이 나타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걸어야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나는 배가 고프다.
바위에서 떨어지는 석간수를 다 받아먹는다. 흐르는 물에 목을 축인다. 하지만 허기만은 달랠길 없다. 배가 고픈건지 갈증인지도 알수 없는 무언가에대한 갈망이 용솟음쳤다.
사람은 누구나 살기 위해 먹는다. 허기에 지친 지금의 나는 무슨 색일까?
구름체
우리나라의 꽃이 대륙 깊숙이에서도 피어난다는 사실이 놀랍다. 마치 동향의 사람을 만난듯 기쁘다.아름다운 보랏빛꽃. 하지만 솔체인지 구름체인지 확실한 구분이 가지 않는다.
산길에 오아시스가 있다면 이런 풍경이야말로 오아시스가 아닐까.
목이 마른자를 유혹하고, 길 위에서 지친자에게 안식을 주는.
좁디 좁은 협로를 따라 걷다 뜻밖의 공지를 만나자 분에 넘치는 위안같은것을 느꼈다.
한뼘 땅뙤기를 개간하며 이 땅에 터전을 이룬 사람들. 한방울 물을 소중이 하는 아프리카 사람처럼 땅을 이슬처럼 여기고 살아갈까.
북경에서 신향역에 이르는 그 끝도 없이 넓은 땅을 두고 이들은 왜 산양의 삶을 택했던 것일까? 그들 삶을 지탱하는 마른 가지와도 같은 문화의 밑바닥이 궁금했다. 시장이 아니라 호기심이 나를 불렀다.
왕망령
왕망이 최후를 맞이한 전설이 서려있는곳이란다. 왕망은 전한과 후한의 사이에 신나라 황제로 잠깐 등장한 인물이다.
일각에서는 왕망을 실패한 개혁군주라 칭하고 일각에서는 도덕군자를 빙자한 나라도둑으로 폄하한다.
우리가 왕망을 눈여겨 보는것은 그 시대에 유통했던 왕망전이 김해 패총에서 불에 탄 쌀과 함께 발견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가야와 왕망의 신나라 사이에 교역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것이니 왕망이라는 이름에 내가 유독 관심이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왕망령을 오르다 보면 바둑을 두는 신선의 모습을 만든 상을 볼 수 있다. 아마 중국 바둑의 발원지가 이곳 왕망령이란 설이 있는 모양이다. 저장성 항저우의 란커산이란 설이 지배적이지만. 물어도 쉽게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답답하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2200년경 순왕이 우매한 아들을 깨우치기 위해 바둑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바둑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바둑이 결코 우매한 사람이 배우기에 좋은 도구는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왕망령에서 바라 본 산수는 우리나라 선비들이 중국의 풍경 화첩을 모사할 때 교범으로 썼던 그 산수화를 정말 빼어 닮았다.
정선의 진경 산수와는 완전히 다른 산세이다. 나비가 첩첩히 앉은 모습같기도 하고 한여름 연못에 가득한 연꽃잎을 보는듯도 하다. 화분에 함초롬이 자란 원예화를 본듯하기도 하고 농담을 달리하여 그린 묵화같기도 하다.
한참 정신없이 풍경에 빠져들 찰라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은 고요히 말이 없는 가운데 시간은 왜 나를 이리도 재촉하는지....
술패랭이
마치 설악의 한쪽을 떼어 낸것 같은 선경이었다. 산은 구름과 숨바꼭질을 하며 겨우 한번씩 숨겨진 자태를 보여 주었다. 물기가 남은 얼굴처럼 모습이 처연하게 아름다웠다.
넋이 아예 빠져버려도 좋을것 같은 비경을 비장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사랑 할 때 눈을 멀게했던 황홀도, 흉기가 되어버린 이별의 말 한마디도 세월이 흐르면 단지 비유로 낡아가는 법.
나 떠나고 나면 무엇이어도 좋을 산이여! 스스로 젖은 적 없는 메마른 내 마음을 흔들어 나는 오늘 무슨 이름으로 그대를 부를까?
미역취
지표에 드러난 광석은 마치 옥돌처럼 연하고 부드러워 보인다
절구채가 가득한 풍경
절구채와 이질풀
아름다운 보랏빛 절구채
"꽃에 미친 사람들 덕분에 세상의 종말이 좀 더 늦추어 졌을거란 생각이 든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점점 사라져가는 거친 세상에서 그래도 철따라 꽃이피는 그 뜻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법정-
세상에 종말이 왔을 때 종말의 형장으로 끌려가는 인류에게 남은 유일한 위안은 꽃이 아닐까?
왕망은 혀로 일어나 혀로 망한 인물이다. 루머 정치에 강했다는 뜻이다.
고구려와 특히 악연인 인물인데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살해하여 그 목을 말 꼬리에 묶어 가져오게한 이도 바로 그였다. 그리고 고구려를 하구려라 부르며까지 고구려의 존재를 폄하했다.
그런 그도 죽어서 혓바닥까지 동강내어 사람들에게 먹히는 얄궂은 운명을 맞이했으니 입으로 흥한자 입으로 망한 꼴이 된 셈이다.
하지만 한 인간의 개인사야 어찌 되었던 왕마령은 한 인간의 역사를 대륙의 역사에 투영한 채 처연히 아름답다. 공연히 구름이 비껴가며 인간사의 무상함을 알린다.
스페인에 가 본적은 없지만 사라사테의 로만차 안달루시아를 들으며 막연히 이 곳을 안달루시아로 상상해 본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느껴졌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하는데 내 삶의 궤적을 함께한 수만은 사람들은 다 어디가고 나는 지금 아내와 둘이 험하디 험한 이국의 산중에 서 있다. 마치 우리 둘만이 선택되어진 유일한 사람인것처럼.
살아있기에, 살아서 살아있음을 느끼기에 응당 지불해야할 채무. 그런 슬픔이왔다.
천계산 풍광지구
천계산 하면 괘벽공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0여명의 사람의 힘으로 13년의 공사 끝에 만든 터널이다. 첩첩산중 마을과 세상을 소통하는 길을 연것이다.
길 어귀에는 10인의 동상이 서있고 주윤발처럼 생긴 리더의 간판도 보인다.
우공 이산의 고향다운 현대판 기적을 이룬 사람들. 과연 대륙적 기질의 소유자라 할만 하다. 괘벽공로를 통과하며 특히 인상에 남는것은 환기와 조명을 위해 뚫어 놓은 환기창이다. 모양도 제각각이요 크기도 제각각. 오히려 기계적이지 않는 수공의 아름다움이 더 느껴졌다.
천계산 풍광지구는 노아정이라는 도교 사원이 있는 산의 정상과 그 정상을 오르는 케이블카,전망대등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왕망령 하산길에 절벽 너머에서 천계산을 바라보고 오는것으로 만족해야했다. 하지만 케이블카가 아닌 우리 두 다리로 산을 올랐기에 오늘 우리가 오른 산이 더 값지다.
선계를 지나 인간의 세계로 오는 길은 마치 하늘을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지상의 풍경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상상 속의 풍광이 눈 앞에서 요술을 부리듯 재현되었다.
흐린 날씨 속에 풍경은 더 몽환적이었고 몽환은 현실감을 빼앗았다. 몽한적 현실이라!
내가 몽상가가 되어버린것일까 비유가 필요없는 절대적 숭고함. 그 커다란 아름다움의 원천을 가슴에 새기며 풍경을 뒤로한다.
태항 산맥 위치도
아침 햇살에 금빛으로 빛나는 태항산 줄기
임주 태항산 대협곡 들머리
임주라는 이름이 태항산 앞에 씌여 있는것으로 미루어 이곳이 임주 땅이란것만은 분명하다 한국 산악인들이 많이 다녀가는 탓에 한글 막걸리 입간판도 눈에 띈다. 여하간 산을 사랑하는 한국사람들의 기질은 알아줄만하다. 우리나라에서 세계 정상급 산악인이 괜히 배출된것이 아니다.
도화곡 들머리
임주 태항산 대협곡을 지나는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다. 빵차를 타고 협곡을 구경하며 길을 따라 오르는 방법과 우리처럼 도화곡을 트래킹하며 임도에 이르는 방법이다.
도화곡은 아직 채 계발이 이루어 지지 않아 사람의 손때가 느껴지지만 그 자체로도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손색이 없다. 오르는 길은 그리 가파르지 않아 누구라도 쉽게 오를 수 있다.
도화곡
신선의 거처란 이런 곳을 두고 하는 말이지 싶을 만큼 선경 그 자체다. 선경을 해치는 나무 판이 물위에 놓여있어 마음이 쓰였지만 우리처럼 단체관광 온 사람들이 모여 사진 찍기에는 더 없이 좋은 장치가 아닌가.
이런 곳에 와보면 세상사를 물량으로 헤아리는것 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것같다. 신선노름이 따로 있겠는가? 7성이 붙은 하루 수천만원의 호텔방이 이 곳보다 좋은 점이 무어란 말인가.
어느틈에 질긴 공감과 유대감이 일행을 단단히 결속시켰다. 사하구 번개팀들 참 대단하다. 대단해서 대단한것이 아니라 취지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결속이 우리를 대단하게 만들어버린것이다.
사람들이 촬영을 위해 가설대로 이동하는 사이 나는 잠시 마음을 가다듬는다. 흰눈처럼 감동이 내려와 나를 울먹이게했다.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운명의 힘이 나를 흔들었다. 고요가 처연함을 부채질하였는지 이윽고 마음마저 맑아 옴을 느꼈다. 한 줄의 감흥으로도 오늘 여행을 다 끝내버릴 수 있을것 같았다.
글은 감정의 번역이다.
번역의 침화과정을 견디며 간신히 태어난 한 줄기 詩語처럼 시원하게 폭포가 떨어진다.
자연이 주는 비경 앞에 말들이 머뭇거린다. 무기력의 슬픔 속에 스스로를 디스하듯.
안온한 삶을 거부하고 온 몸으로 걸어왔던 우리에 비해 삶의 단물만을 즐기는 자의 삶이 더 칭송 받는 이 구역질 나는 세상의 기준에 나는 염증을 느낀다. 몸으로 이룩한 노력의 보상이 내 몸 어딘가 비듬처럼 쌓일지라도 나는 영원히 내 몸과 함께한 노력들을 자랑하겠다.
구련폭
도화곡 입구에서 도화촌까지는 걸어서 한시간 반 가량 시간이 걸린다. 도중에 크고 작은 소와 담,함주,이룡희주 구련 폭포등 다양한 풍경들을 만날 수 있고 사과와 오이등을 파는 현지의 소박한 주민들도 만난다. 소박해 보인다고 관광객들에게 다 소박한것은 아니다. 오이 하나를 두고 무슨 흥정이냐 싶지만 현지민과 타국인 사이에 일어나는 소박한 흥정이야말로 삶의 색다른 맛이 아닐까.
협곡을 따라 난 구절양장의 꼬불길
직선이 아닌 길. 구부러진 오이처럼 등외의 품질로 밀려났지만 고유한 오이향을 그대로 간직한 정녕 길다운 길. 그래서 눈을 끌고 마음을 걸게되는 길.
대륙의 한국어
고행을 택한자의 싸움은 이미 이 싸움에서 내가 이긴다거나 진다는 표면적 결과를 중요시 하지 않는다.
내 내부에 싸움을 붙여두고 그 싸움 자체를 무위화 할 수 있는 깊은 긍정의 힘을 오히려 중요시 한다.
나 자신을 이기리라는 부정의 형식으로 표현된 이 깊은 긍정의 힘. 다시 말해 궁극적 승리의 확신이야말로 나 스스로를 향한 지대한 사랑이 아닐까.
다랭이밭
절벽 위의 도교사원
절벽 위에 사원을 지어야겠다는 발상은 인간의 오랜 관찰의 결과이다. 솔개의 습성을 관찰한 인간은 벼랑에도 집을 지을 수 있음을 깨닫았다. 수평적 관념을 수직에 적용한 이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 오늘날 이곳을 찾은 관광객을 흥분 시킨다.
깊고 푸른 벼랑을 내려가는 일행
벼랑이 더 깊고 길이 더 아슬할수록 길을 탐험하는 이에게 흥분은 배가된다. 더 극적이고 더 위험한 장치들을 찾는다.
이들이 찍은 사진을 봐도 알 수있다. 심도를 더해 더 깊이 높게 찍어 높이와 깊이를 과장한다.
이런곳에서 놀았다는거다.
계곡을 건너는 jip line
이것은 또 무엇인가? 모험심이 가득한 여행자들 눈에 절벽에 걸린 짚라인이 들어온다. 모처럼의 기회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양 허벅지에 보조장치를 걸고 라인에 몸을 실어 계곡을 건넌다. 솔직히 중국의 안정성을 백프로 신뢰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재미만은 놓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나게 스피드를 즐기며 짚라인을 타고 만다.
담력이 보기보다 센 집사람
왜 하필 통로를 이모양으로 만들었을까. 앞사람의 방뎅이에 코끝을 드리밀고 거의 엎디디다 시피 길을 빠져나간다. 키가 큰 나는 그것도 용이치 않아 오리걸을을 하며 걸었다. 여하간 재미있다. 특이할수록 ,괴로울수록 즐거워하는 이 인간들의 반응을 어떻게 설명하랴.
공포의 소라기둥
80여m의 소라기둥을 빙글 빙글 돌아서 내려오는 재미 또한 솔솔했다. 중앙에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일행을 끼워넣고 그의 비명을 즐기는 재미 또한 좋다. 깔깔거리다 언제 다 내려왔는지 발이 땅에 닿아있었다.
대륙의 사과
대륙은 크고 사과는 작다.
"빠따링 창청 환잉닌"
팔달령 장성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13.08.14
長城
만리장성을 오르는 로프웨이에서 내리면 긴 굴을 통해 장성에 접근한다.
그런데 그 굴을 통과하면서 맡은 역한 냄새는 아마 가장 중국적이라고 할만큼 매우 독특한 냄새였다.
서양인을 두고 노린내가 난다던지, 일본인이 우리를 두고 닌니쿠 쿠사이(마늘 냄새가 난다)하며 타 민족을 경멸하는 말을 쓰지만 이 곳에서 맡은 냄새는 정말 독특하고 대륙적이었다. 진시왕 때 부터 쌓인 중국인들의 냄새가 터널 아주 세부적인 구석까지 스며든 느낌이랄까? 아주 참기 어려운 기름 냄새였다. 어서 이 느끼한 기름 구덩이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만리 장성은 춘추 전국시대부터 북방의 유목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아온 성으로 진시황때 본격적으로 그 성을 연결하여 완성하였다. 하지만 건축물이라는 것이 불국사나 석굴암에서 알 수 있듯 끊임없는 개보수를 하지 않으면 금방 쓰러지고 만다. 그것도 수천년의 세월을 지탱해 온 장성이니 얼마나 개보수에 신경을 썼겠는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장성은 명나라 시대의 작품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절들이 비록 신라시대 사찰이라고는 해도 무량수전을 비롯한 몇몇 건물을 제외하면 거의 조선 후기의 건축물이듯 만리장성도 명나라 200년 동안 18차례나 개보수를 계속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6700여 km에 달하는 만리장성은 이렇듯 명대의 건축물이다. 과연 실제 와서 보니 인류가 자랑할 만한 위대한 건축물임을 부인 할 수 없다.
하지만 한가지 외침을 막기위한 효용성의 측면에서 의구심이 든다. 명대에 각고의 노력으로 장성을 개보수 하였지만 만주족의 침입으로 명은 멸망하고 만다. 장성을 못넘어 중원을 침탈하지 못한 역사는 없다. 물론 장성으로 인해 다소 지연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왕국의 흥망성쇄에는 별 영향을 못미친것 같다.
장성은 그 자체로 뼈아픈 역사이다. 지금 우리 머리 속에 박힌 위성에서도 맨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장성의 이미지는 이 시간부로 벗어버리기 바란다. 누가 이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만들었을까? 위성에서 만리장성이 보인다면 63 빌딩도,남한 산성도 맨눈으로 볼 수 있어야한다. 이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 통한다는것은 결국 장성의 아우라가 그만큼 커다는 것일거다.
현재 장성의 70%는 파괴되어 사라졌다. 장성을 축조하면서 희생된 인민은 인민의 나라가 서자 문화혁명 기간 집짓는 벽돌로 쓰기 위해 장성을 파괴했다. 장성이 인민의 집으로 돌아간것이다.
이것이 역사다. 역사는 궁극적으로 고요하다. 허무하다.
인류가 남긴 위대한 건축물의 이면에는 인류의 지대한 희생이 있었지만 높은 산마루에 성채를 쌓아올리는 동안 수많은 백성들이 희생된것은 자명한 이치다. 1리에 한명의 사람이 죽었다하니 만명의 사람이 장성을 축조하는 동안 희생된 셈이다. 희생된 백성은 돌 아래 그대로 묻혔고 만리 장성은 이름 그대로 만인의 무덤으로 남았다.
중국 교과서에도 실린 맹강녀의 전설
- 펌 -
어느 마을에 맹(孟)이라는 가문과 강(姜)이라는 가문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하고 살았다.
그 두 집안은 함께 넝쿨 박을 담 위에 심어 재배하면서 박이 열리면 그 박을 팔아 생긴 이익을 함께
나누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큰 박이 하나 그 담 위에 열리게 되었다. 물론 그 박이 여물자 두 집안의 가장들은 그 박을 나누어 가지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날을 잡아 그 박을 반으로 갈랐더니,안에서 "여자아이"가 나왔다.
양쪽 집안 어른들의 합의 끝에 이 아이를 맹씨 집안과 강씨 집안이 함께 양육하기로 합의했고, 이에 그녀의 이름은 양쪽 집안의 성을 따서 "맹강녀孟姜女"로 지었다. 그녀는 진시황제도 반할 만큼 예뻤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당시에 성 1리를 쌓을 때마다 한 사람씩 죽을 정도로 희생이 많았기 때문에, 만리장성을 쌓으려면 만 명이 필요하다는 노래가 나돌았다. 중국 소주에 살고 있던 만희량이라는 사람 또한 그 노래의 희생양이 되었다.
만희량은 관원들을 피해 떠돌아 다니다가 맹강녀의 집으로 숨어들어가 맹강녀를 만나게 되었다.
맹강녀와 만희량이 결혼한지 사흘도 안 되어 신랑은 관원들에 의해 만리장성 쌓는 곳으로 끌려갔다.
맹강녀가 만희랑을 기다린 지 반 년이 지날 무렵 꿈속에서 남편이 문을 두드리며 "추워 죽겠습니다." 라고 했다.
맹강녀는 그 길로 솜옷을 준비하여 만리 장성 쌓는 곳을 물어서 찾아 갔으나 남편은 이미 죽었다.
맹강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사흘 밤낮을 대성통곡을 하며 남편을 살려내라고 울부짖었다.
이때 천둥번개가 치며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졌고, 장성 40리가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장성 속에는 무수한 시체들이 나왔고, 맹강녀는 꿈에 그리던 만희량의 시체를 찾아 안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지금도 중국 하북성 산해관 쪽에 그녀의 묘가 있으며 그 옆에는 원망스런 눈초리로 만리장성을 바라보는 그녀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에 점령당한 만리장성 위에서 사람을 피해 사진을 찍는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목을 빼고 성의 측면을 겨우 찍다보니 사진이 많이 왜곡되어버렸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나 많다. 이 많은 인파는 여름날 해운대 해수욕장이나 붉은 악마 단체 응원 때나 경험한 인파이다.
햇빛 가릴곳 (하기야 북경 날씨는 햇살을 허용하지 않을만큼 심한 스모그 상태지만) 하나 없는 성곽에서 돌이 뿜어내는 찌는듯한 열기를 견디며 장성을 보러 온 인간들의 열의가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중국인에게는 중국에서 태어나 장성을 못보고 죽으면 인생이 말짱 도루묵이란 생각이 잠재되어있을까? 중국인민들의 위세에 눌려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더 할말이 없어진다.
사람들을 보라. 순대 속처럼 알차게 찬 저 사람들.
갑자기 순대가 먹기 싫어졌다. 순대를 먹으면 사람을 씹는 기분이 들것같다.
용머리에 몸을 실은 채 어두운 원심을 향해 아득히 빨려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의 저편에 입을 크게 벌리고 인간을 마음껏 흡입하는 괴물이 존재하는듯했다.
보이는것은 짙은 안개 속으로 소용돌이치듯 사라지는 역사의 그림자. 만리 장성은 역사의 저편과 현세를 잇는 고독한 케이블이다.
일찌기 이처럼 팽팽한 역사의 긴장감을 느껴본적이 있었던가. 읽을수 없는 엽서가 만력제의 무자비처럼 두터운 공기의 매질을 뚫고 날아왔다. 그리고 가슴을 지긋이 누르는 침묵이 이어졌다.
소외감과 같이 깊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팽게쳐진듯한 광장의 고독. 유구한 역사가 용융된 케미컬한 기분이었다.
나는 좌중을 압도하는 개성이나 특성을 지니지도 못했고 물에 물탄듯한 개성을 늘 중용이라 치부하며 살아왔는데도 장성의 요모 조모를 살피며 사진에 옮기려는 내 모습을 보며 나도 다른 사람과는 다른 나만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장성에서의 흥분은 이미 세상 모든 장성의 교범이 되어버린 장성의 모습에 있는것이 아니라 규모에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성곽은 존재하지만 만리 장성만큼 터무니 없이 긴 성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장성의 가장 유니크한 특징은 오로지 가공스런 길이에 있는것이다.
57년의 역사를 간직한 내 삶의 가장 유니크한 특징이 무엇인지 내 자신이 모르는것은 당연한가?
다른 사람이라면 쉽게 규정지을 가장 나다운 특징을 정작 나 자신은 모른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용경협(롱칭샤)
롱징샤(용경협)는 북경에서 한시간 반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지만 북경의 교통 증체를 감안한다면 시간적 의미는 없고 북경의 북서부에 위치하는 경관이 수려한 인공 수로라 생각하면 된다. 계림에 빗대어 소계림이라 불릴만큼 풍광이 아름답다.
지형을 잘 보면 지금껏 보아온 태항산의 지형과 많이 닮았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태항산맥이 북경에서 시작하여 하남을 향해 무려 600km를 뻗어 나가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나라 백두대간이 650여 km임을 감안할 때 태항산맥의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멀리 벼랑 끝에 서있는 정각을 바라보며 마치 오래되어 이제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는 괘종 시계가 생각났다. 텅빈 빈집에 홀로 똑닥거리며 돌아가는 괘종시계.
세상은 토라진 아이의 얼굴처럼 입을 다문 채 고요하다.
그 고요를 과장하는 물결 위로 배는 소리없이 나아갔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시계를 보듯 계곡을 살핀다.
엷은 연무가 감정에 막을 씌우듯 하오의 우울을 부풀렸다. 마음을 텅 비운 채 착실히 늙어가는 노인처럼 뱃길을 따라갔다.
대게 자연에대한 인간의 마음은 너무도 순수하고 강렬한것이어서 뜻밖의 풍경을 마주하는 순간 그 광경에 걸맞는 적당한 언어를 찾아내기 힘들다.
특별한 재능이나 학습을 거치지 않은 일반인에게 순간의 감흥을 언어로 표현하기란 쉽지않다.
사진을 찍는것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멋진 풍경을 대했다하여도 다 훌륭한 사진이 되는것은 아니다. 사진에는 사진의 언어가 있다.
누구에게나 보이는 범상한 풍경 속에서 보석같은 한장의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 시각의 언어화 작업이 아닐까.
물 구비구비를 돌며 언어와 풍경을 찾아내는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로 느껴졌다. 한 구비에서 다음 구비로 가는 관문이 있는것처럼 문을 열어 젖히면 금방이라도 모든 신비경이 쏟아져 나올것같은 조바심같은것이 마음을 사로 잡는다. 그런 조바심에 눈을 떼지 못해 전체를 조망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사실 수면에서 전체를 관망한다는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사진 속 풍경만을 줄곳 따라가다보니 롱징샤의 전체적 이미지를 잊게되었다.
같은 장면을 자꾸 보게되니 어쩐지 풍경이 식상해진다. 그 식상함을 아는지 느닷없이 공중에 곡예사가 등장했다. 협곡에 줄을 걸고 자전거로 계곡을 건너는 묘기였다. 사실 너무 높은 곳에 매달려 그 묘기를 상상할 뿐 즐길 수는 없었지만 기발한 발상인것만은 사실이다.
황하처럼 누른 흙탕물이 유구한 역사를 반증하지는 않는다. 다만 댐 상류에서 물을 방류하는 바람에 물이 탁해졌을 뿐이다. 탁류면 어떻랴. 물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당분간 살아가는 사자의 혼을 담았고 나는 몽유병자처럼 몽롱한 마음으로 배에서 내렸다.
명십삼릉 지하 무덤의 위치
명 13대 황제와 두 황후의 무덤
정능 입구에는 만력제의 무자비가 서있다. 자신이 죽은 뒤 자신의 공덕을 기리라고 세운 비였지만 신하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선왕의 공적이 없어 비석에 아무런 글도 쓰지않고 비워두었다한다.
만약 본인의 의사에 의해 無字碑를 세웠다면 만력제의 쿨함은 후세에 회자되었으리라. 하지만 명을 멸망으로 이끈 怠政의 주인공에대한 역사의 평가는 냉혹했다.
기분좋은 회색이다. 시대를 달리한 회색벽돌이 묘한 콘트라스트를 이루며 현대 미술과 같은 멋을 더한다. 회색 명암과 적당히 어울린 녹색의 나무들 또한 좋은 배치를 이룬다.
지하무덤으로 이르는 가짜 입구.
왕묘를 조성할 때 도굴을 염려하여 이렇게 가짜 입구를 만들어두는것이 일반화된 모양이다. 가짜던 어떻던 곡선이 주는 유려한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린다. 내가 도굴꾼이었다면 평생 이 자리만 뒤지고 있었을것 같다.
좌배전
황제의 시신이 안치되었던 곳으로 발견 당시 옥으로 장식되어있었으나 지금 보다시피 지폐만 가득하다.
만력제의 보좌
돈많은 중국인 답게 지폐가 즐비하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동전이 고작이었을것 같은데...
만력제 보좌 앞에는 큰 향 항아리가 있고 여기에 향을 태워 무덤 속 산소를 제거하여 내용물을 오래 보존할 수 있었다한다.
유물 상자
현재 유물은 없고 빈 상자만 남아있다. 모조품이라도 두었으면 무덤 속이 좀 덜 썰렁했지 싶다.
지하 궁전으로 들어서는 문
저 벽돌 하나가 무너지면 전체의 벽이 무너져 버리는 구조로 되어있다고 한다. 저 문의 열쇠를 푸는데 꼬박 일년이 걸렸다고 한다.
정원의 디테일
사후 세계와 현세를 통하는 문을 영성문이라고 한다. 이 문은 비록 영성문은 아니지만 문에 이르는 돌길의 실루엣이 하도 멋져 영성문을 염두에 두고 찍은 사진이다.
중국인들은 영성문을 나설 때 발을 세번 구르며 남자는 오른발,여자는 왼발로 문턱을 넘는다. 이 때 "워회이라리러" (我回來了)라고 크게 복창하며 자신의 혼을 데려온다.
이 때 지르는 소리가 하도 커 처음엔 무슨일이 생겼는줄 알았다. 문을 나서고서야 워회이라이러를 외치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사후 세계에서 살아 돌아 온 자의 발걸음
베이징 현대 건축의 아름다움
샤브샤브 가게
티엔띠쥐창(천지극장)
북경 스커스 관람
베이징 자지 여우이서!
(북경 서커스 재미있다!)
관람을 마치고
북경 서커스의 기예가 뛰어난것은 사실이다. 기발하고 다이나믹하다. 하지만 수많은 서커스에 익숙한 나로서는 서커스 자체가 마치 우리나라의 민속 공연처럼 식상했다. 몽고의 민속 공연에서 느꼈던 신선한 충격같은것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공연 도중 졸기까지 했다. 피곤했던 모양이다.
현대 중국 정치사의 가장 치부 천안문
지금 천안문에 속한 저 두 건물은 사실 자금성에 이르는 두 관문이다. 지금은 성곽이 사라지고 천안문 광장에 포함되어있다.
아침 이른 시각이다. 7시에 호텔을 출발하여 이곳에 왔으니 아마 8시도 안되었을것 같다. 하지만 광장에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하다. 새벽 네시 반에 있는 국기 게양식을 보기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천안문을 방문한다고 한다. 국기를 게양하는 동안에는 자전거도 탈 수 없다. 자전거에 내려서 걷는것은 상관없다. 왜 하필 그 시간에 국기를 게양해서 인민들을 고생 시키는지 당국의 의도를 모르겠다. 하기야 여기는 중국이니까.
08:15
이민영웅 기념비와 중국 국가 기념관
모택통의 친필 "人民英雄永垂不朽" (인민영웅영수불후) 여덟자가 씌여진 비석. 1952년에 세워졌다.
진정한 불멸의 영웅은 누구일까? 누구를 위한 비석일까? 인민의 시대는 왔는가?
천안문이 보이고 모택동의 초상화도 보인다. 한사람의 집을 만사람의 놀이터로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저 문을 통과한 사람들은 똑똑히 보고 알아야한다.
천안문하면 중국의 천안문 사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천안문 사태는 1989년 4월 후야오방 (호유방)의 죽음이 계기가된 민주화 운동으로 처음에는 학생으로 시작된 소요가 점차 시민들에게로 확산되어 천안문 광장으로 사람이 모여들자 당시 집권자였던 띵샤오핑이 기관총과 전차를 동원하여 무참히 군중을 살해하여 사태를 진압시킨 일로 중국 민주화운동의 효시로 꼽고있다. 지금 도 천안문 사태의 기념일이 되면 전세계 언론이 이곳에 집중되고 중국 정치의 지울 수 없는 상처이자 치부가 되고말았다.
천안문
기적처럼 그 많은 군중들이 소리없이 사라져버렸다.
곳곳에 사복 공안들이 숨어있다. 인상 더럽게 쓰고 이 더운날 검은 우산을 쓰고 있는 자는 다 사복 공안이다.
천안문은 광장의 북쪽에 위치해 있고 명 영락제 1417년에 지어졌다. 당시에는 丞天門으로 불리다 청대에 들어 천하를 편안하게 한다고 하여 天安門이라 부르게 됐다. 33.7m 높이의 천안문도 만리장성처럼 외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나보다.
깔끔한 모습의 초보 공안들.
군기가 빠짝 들어보인다.
자금성은 중국인들에게는 故宮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하며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천자가 기거하는 궁은 전체가 紫宮과 같은 禁地 구역이라는 데서 나온 말이다. 전체 면적은 72만 m2 이며 총 9999개의 방이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이다. 1409-1420년간에 건축되어 560년간 15명의 명황제와 9명의 청황제가 일생을 보냈고 105만점의 문물이 소장되어있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다.
태화문
태화문을 지나면 3전 즉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 나타난다. 우선 내 눈에는 붉은 회칠을 한 10m가 넘는 저 紫色의 벽이 참 마음에 안든다.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전체적인 통일성을 주기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거라는 생각도 해본다.
마음에 안들기로는 지붕색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고궁이 훨씬 아름답고 다채롭다는 확신이 생긴다.
한국 고궁에 표현된 오방색은 화려하거니와 고상하다. 고결하여 상대의 마음을 뺏는 동시에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가진것이 우리 궁궐의 오방색이다.
이에 비하면 자금성의 빛깔은 질리도록 통일적이며 위압적이다. 색자체가 명령이요 위엄이다. 범접을 허락할 여지조차 주지 않는것이다. 그래서 쉽게 질린다.
반면 우리 궁궐은 아무리 보아도 물리는 법이 없으며 자연과 어울려 늘 변화하는 역동성을 지니고 동시에 자연과 인공이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상호주의를 견지한다. 그래서 우리의 고궁은 지치는 법이 없다. 늘 새롭다.
자금성의 지붕은 찌뿌둥한 북경의 하늘에나 어울리는 색이다. 녹슨 양철지붕의 색이다. 반면 암청에 가까운 우리나라 궁궐의 지붕은 산뜻한 한국의 하늘에 아주 잘 어울린다. 자금성의 지붕을 뜯어 한국 궁궐에 씌워놓아보아야 별볼일 없다는거다.
태화전이 보인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의 배경이 된 그 건물. 청황조의 마지막 그늘을 게이 냄새가 물씬한 존론의 서정어린 눈빛과 함께 감상했던 그 영화.
그 영화를 보았을때 아내의 뱃 속에 들어있던 딸은 벌써 25살이 되었으니 정말 세월 한번 잠깐이다.
어린 푸이가 결코 넘을 수 없었던 자금성의 장벽을 열어 준 것은 역사였다. 그는 주인의 지위를 잃었지만 궁이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된 셈이다.
일생을 걸쳐 세번 왕이된 남자. 소련과 중국에서 14년간 감옥살이 끝에 정원사로 생을 마감한 황제. 죽어서야 황제의 묘에 안장된 이 지독한 역사적 인물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황제로 태어나 인민의 힘에의해 비로소 인민이 된 그사람.
황제로서 그의 지위를 마오주석에게 물려주었지만 한 인간의 실패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 毛도 가고 푸이도 간 지금.
교태전 앞의 사자견
사자로 알려진 사자견은 티베탄 마스티프로 현재 수억원에 호가하는 고급견종이다.
보이는 쇠항아리는 방화수를 담아두는 항아리라고 한다. 불을 끄기에는 특없이 모잘라 보인다.
보화전
태화전과는 달리 팔작 지붕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른다. 상식으로는 태화전이야 말로 위엄을 나타내는 팔작지붕이어야 할텐데. 누구한테 물어도 답해줄 사람도 없고..
디테일을 보면 잘 조성된 궁전이라기보다 돈들인 세트장 같은 느낌이다. 나무 한그루 없는 정원이 삭막하기 짝이없다.
지친다 지쳐 어른도 아이도.
중국 오성기의 색인, 혹은 오성기가 차용한 저 색을 중국인들이 좋아한단 말인가?
중국의 역사를 한국인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은 나로서는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비교문화는 가치의 우열을 가늠하는것이 아니다. 문화는 각자 고유의 이유가 있다.
저울로 정할 수 없는 단위가 없는 물질처럼 긴 인식의 터널 뒤에 중국의 역사 한편이 걸려있다. 여기서 어느 편이 더 좋은가는 단지 내 일방의 문제이다.
10:16
천안문에서 두시간 가량을 걸었다.
중국에 대한 일관된 시각은 인식을 한정시키지만 워낙 큰 문명을 평가하는데는 일종의 지침이 될듯도 하다.
내가 이 시점에 견지하는것은 딱 한가지 중국 문명권에 편입된 우리의 문화를 중국의 문화와 비교하여 우리문화의 독창성과 창의성을 발견하는 일이다.
자금성을 아무리 돌아봐도 한국적 이미지라고는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의 문화가 이미 독창적이라는 반증이다.
긴 길을 걸어오며 나는 우리 문화에대한 자존감 혹은 안도감같은것을 느꼈다. 그 긴 예속의 역사를 거쳐오면서도 우리문화는 결코 중국에 동화 내지 동질화 하지 않았다. 아류도 아니다. 확실히 그것을 느꼈다.
비로소 우리문화에 대한 자긍의 근거를 마련한것이다. 자금성을 걸어도 기분이 우쭐하고 당당한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리라.
정말 아무런 위압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차이를 느꼈다. 그 차이는 독창성의 차이였고 우리 문화에대한 확고한 자긍이었다.
위정자는 인민을 증오하고 인민은 인민과 위정자를 증오한다.
자유의 가치를 모르는 자는 반드시 누군가를 증오한다.
손톱을 숨긴 중국인의 증오가 보였다.
어화원
자금성 내 유일하게 나무가 심어진 곳. 자객이 나무 위에 숨어 황제를 노릴까봐 자금성 내에 나무를 심지 않은 걸까?
수목이 풍부한 우리나라 궁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우리 궁궐이 자연과의 조화에 역점을 두었다면 중국 궁궐은 철저히 인위적이다. 문화의 차이가 역력히 느껴지는 대목이다. 한폭의 자연인 창덕궁 비원에 비하면 얼마나 답담한 후원인지.
도수산
도수산은 인공으로 만든 돌산인데 서태후가 궐밖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자주 오른 곳이라고 한다. 9월 9일에는 왕과 왕비가 이 곳에 올라 달을 보며 즐겼다는데 지금의 북경하늘은 회색빛 일색. 달도 해도 잃은 지 오래인것 같다.
자금성의 끝이 보인다. 왕들은 대체 여기서 무얼 하고 살았단 말인가. 중국이라는 넓디 넓은 땅덩이를 두고.
문득 자금성이 레고 블록으로 만든 장난감 처럼 느껴졌다. 왕들은 그기 살은 거다.
그기 비하면 마지막 황제 푸이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했으니 푸이야 말로 레고 월드를 탈출한 유일한 황제가 아닐까
경산 공원
경산공원은 자금성 호성하 해자를 만들며 파낸 흙으로 만든 해발 108m의 나지막한 인공산으로 황실 공원으로 쓰였다. 원래는 북방의 모래먼지를 막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정제는 저기서 자금성을 바라보며 목을 메어 자살했다. 그러고 보면 삼전도의 굴욕을 참아가며 조선을 보전한 인조 임금에대한 평가를 다시 해야할것 같다. 그가 죽음을 택하지 않고 굴욕을 택하였기에 조선의 역사는 이어졌다. 만약 순정제처럼 죽음 을 택하였다면 조선은 중국의 역사에 편입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굴곡이없는 인간사가 없듯 위기가 없는 역사도 없는 법. 강한 자가 살아 남는것이 아니라 결국 살아남은자가 강한자임을 증명한 셈이다.
고궁 박물원으로 돌아 온 황제의 집.
호성하를 바라보는 연인
너비 52m 깊이 6m의 호성하
물낯은 고요하고 적요가 드리운 실루엣은 애잔하다.
세월은 어디로 흘로 어디로 돌아가는지 해자에 실린 내 마음은 속절없다.
의식이 존재의 변방을 허무히 떠돌았다.
마지막 황제 푸이에 나오는 여치가 생각나서 한장
어찌나 잘 우는지 어린시절 보릿대로 만든 여치집에 여치를 잡아다 처마 밑에 걸어두고 소리를 들었던 추억이 생각났다.
슈슈 짝통 상가.
1500위안의 디오르 가방을 200위안을 주고 샀다. 재미삼아. 짝퉁의 말로가 궁금하다. 10000원을 주고 초상화 한점도 샀다.
옥류관
옥류간에서 온반과 냉면을 시켜먹었다. 담백한 맛이었다. 냉면은 메밀을 덜 쓰고 전분을 많이 넣어 음식이 고급스럽지 않았고 평양냉면의 고유한 맛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온면은 닭고명을 얹은 일종의 국밥인데 기미는 맞았지만 구성이 허접했다. 음식이 주는 시각적 팩트도 턱없이 모자랐고 전반적으로 신경을 쓰서 내놓은 음식이라기보다는 단체 손님을 겨냥한 즉석 음식에 가까왔다.
박은별
참 예쁘게 생긴 아가씨다. 톡 쏘는게 탄산수 맛이다.
은별이의 꼬임에 빠진것은 아니지만 결국 비싼 들쭉술 한병을 사서 마셨다. 도수가 세다. 향은 가히 싫지 않았고 뒷긑도 없었다. 술맛을 모르는 나이고 보니 이런 저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남자들은 그저 북녀의 한동작 한동작에 혼줄을 놓은듯 싶었다.
재미없는 옥류간 공연
이 재미없는 공연에 빠져 이화원 관람을 놓친것이 이번 여행의 가장 뼈아픈 패착이다.
보이차
짜증나는 점원의 약장사식 설명을 장황하게 들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茶를 사고 싶은 생각이 멀어졌다. 우롱차를 후루룩 들이켜야한다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았고 우리가 아는 花茶가 단순히 쟈스민을 따서 말린 차가 아니라 녹차에 쟈스민의 향을 가한 차라는 사실도 알았다. 화차라고 보여주는 차에 실제 쟈스민 꽃이 없었다.
열심히 차를 얻어마시고 사지는 않았다. 여자 점원이 사기꾼같아 보여서다. 조선말(한국어)를 하는 중국 사람들이 죄 싫어졌다. 조선말(한국어)에 어눌한 중국 본토인 보다 더 얄미웠다. 한국인을 속이기 위해 고용된 자객같았다.
798예술지구 갤러리에서
진정한 사고의 자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철저히 의도되는것이어야한다. 의도되어도 좋은 자유야말로 진정한 자유다. 사려깊은 모방이야말로 창의력이란 볼테르의 주장에 동의한다면 지금의 내 행위도 자유에 기반한 창의적 행위이다.
-펌-
798은 북경 북쪽의 대산자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본래는 국영 798공장 등의 전자공업의 공장지역이었다. 2002년부터 여러 예술가들과 문화기구들이 여기에 들어와 거하기 시작하면서, 어느정도 규모를 이루어 빈 공장을 빌려 개조하였고, 점차 화랑, 예술센터, 예술가의 아뜨리에, 디자인회사, 레스토랑, 칵테일바등 각종 공간의 집합체로 발전되어서, 국제화 색채의 "SOHO식의 예술취락", "Loft 생활방식"이 형성되었다.
당대예술, 공간 건축, 문화사업과 역사문맥, 도시생활환경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서, 798은 이미 하나의 문화개념이 되었으며, 각계 전문가와 대중들에게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도시문화와 생활공간의 개념에 영향을 끼쳤다.
거대한 천박하기 짝이없는 기구와 밝은 천장같은 건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들은 50년대 초 소련의 건설지원과, 동독 책임하의 설계 건설된 중요한 공업지구였었으나, 수십년에 지나고 세월이 바뀌어, 개혁개방과 북경도시문화가 자리를 잡고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바뀌어 감에 따라, 지구화의 물결이 밀어닥쳐 798공장등 이러한 기업들은 재정의 재발전의 임무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본래있던 공장은 멀리 이전되어, 본래의 자리에는 필연적으로 도시의 정의와 발전에 맞는 오염이 없고, 효율적이며, 지식을 요하는 새로운 형식의 산업이 일어나게 되었다. 수많은 예술과와문예계 인사들이 이곳으로 들어와 살게 된 것은, 역사적 추세의 반영인 것이다.
이는 본래 있던 역사문화가 남긴 것에 대해 보호를 한다는 전제하에 그들이 본래있던 공업,공장을 새로정의하고 디자인 하였으며 개조해서, 건축과 생활방식의 창조적 이해를 가져왔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사진이 참 마음에 든다.
모델께 감사드린다. 이번 여행중 가장 현지화된 모습이 아닐까 문화는 이처럼 체험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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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pri Mera Ke Ya Mas (우리에게 더 좋은 날이 오겠지) / Agnes Baltsa |
첫댓글 박학다식.... 입이 안다물어집니다요..... 음악도 좋고....사진은 더 좋고....
薄學多食 ㅋㅋ
에이 그라지 마이소예 ....... ㅎㅎㅎ 博學多識 이깁니다.
헐!!!
흠.....
끙~~~~
휴~~~~ㅠㅠ
끙~~~~~은 뭡니까?
설마^^*
여행 새로 단디 했습니다..
가이더는 혼자 머시라 떠들며 내빼고.. 없는 실력에 셔트만 누르다가 국제 미아까지 될 뻔 했는데
제가 어디를 여행 했는지 이제 확실히 알았습니다^^ㅋㅋ
poll 님께 가이드 비 따로 드려야 하지 않나요?
이 작가의 뒷모습을 찍은 작가도 실력이 나쁘지 않네요.. 물론 재단을 하셨겠지만^^;
그리고, 저기 담력이 있다는 절벽 타고 건너오는 뇨자~ 자세히 보세요..
클나겠네.. 작가님 집사람 아입미더~!
저라예~! 멋찐 모델!!^^;
이제 제 사진은 하나도 정리 안해도 되겠지요? 속이 다 시원하네요..
좋은 사진,음악,친절한 역사 설명,풍부한 감성까지 다 까발켜 보여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누구면 어떻습니까.나는 울 마눌이라고 찍었는데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