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eet People-용평 story, Birch Hill
물에 젖은 채로도 불에 넣으면 ‘자작자작’ 하며 타들어 간다는 자작나무.
하얀 수피가 너무나 아름다워 옛날 우리 조사들이 무척 귀하게 여겼지만, 워낙 추운 곳에서만 자라는 탓에 남한에서는 그동안 좀처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영화 ‘닥터 지바고’의 눈부신 설경을 기억하는 사람은 자작나무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눈이 시릴 만큼 하얗게 펼쳐진 설원 위에 하얀 수피를 입고 하늘로 곧게 뻗은 자작나무 숲을.
내가 자작나무를 본 것은 1990년 유월 백두산에서였다. 아직도 겨울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백두산의 하얀 자작나무는 어느 시에서 표현한 것처럼 ‘나무의 여왕’ 그 자체였다. 잎 하나 달지 않는 나목(裸木)의 모습이 그토록 아름다운 나무도 흔치 않으리라.
예로부터 내려오는 자작나무에 관한 전설 하나.
자작나무의 하얀 수피를 조심스럽게 벗겨 내 그 위에 때 묻지 않은 연정의 편지를 써서 보내면 사랑이 이루어진단다. 이루지 못할 사랑일수록 자작나무로 만든 편지가 힘을 발휘한다나.
자작나무의 수피를 보면 그 전설이 생겨난 것이 이해가 간다. 겉보기와는 달리 자작나무의 수피는 살을 에는 듯한 강추위를 어떻게 견뎌 낼까 싶을 정도로 무척 연하고 부드럽다. 추위를 잘 견디기 위해 수피 밑에 지방을 잔뜩 비축해 놓다보니 그리 된 것인데 그 덕분인지, 아니면 정말 전설이 효험이 있어서인지 자작나무는 오래 전부터 사랑의 매개 역할을 해왔다.
백두산에서 자작나무를 보았을 때 내 머리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사랑하는 이에게 밤새워 편지를 쓰는 한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사랑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며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자작나무 수피 위에 말 못할 속마음을 적어 내려갔을까. 살을 에는 듯한 추위도 애틋하게 솟아나는 그 연정만큼은 막지 못했을 것이다.
한겨울 밤 흔들리는 촛불 아래서 펜촉을 호호 불어가며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눌러 쓴 편지, 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완성된 편지는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볼까 조심스럽게 서랍 안에 감춰졌을 것이다. 수줍음에 보낼까 말까 고민만 하다가 결국 서랍 안에서 세월과 함께 묵혀진 편지도 적지 않았으리라.
백두산에서 돌아와 자작나무에 대한 그리움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는데, 최근 들어 강원도 등지에 자작나무를 많이 심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북유럽이나 만주, 아니면 백두산에서나 볼 수 있던 자작나무를 이제 가까운 곳에서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반갑던지. 아니, 자작나무 자체보다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그 전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가슴 설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부푼 마음을 안고 딸아이에게 자작나무의 전설을 얘기했더니 아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요새 아이들은 답답하게 연애편지 같은 거 쓰지 않는단다. 대신에 즉석에서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로 사랑을 확인한다나.
“나, 너 좋아해.”라는 말을 쓰고, 보내고, 상대가 확인하는 것까지 십 분이 채 안 걸리는 사랑 전달법. 편지를 받고 괜찮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OK. 아니다 싶으면 그 즉시 NO라고 자기표현을 한다고 한다.
내가 촌스러워서 그런가, 사랑을 쉽게 주고받는 신세대들이 한편으론 부럽지만, 그만큼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가 퇴색되는 게 아닌가 싶어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문자 메시지나 이메일보다는 자작나무 껍질 위에 편지를 쓰는 그 마음이 더 애틋한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쓰고, 지우고, 고민하고, 포기하고 접었다가 다시 꺼내 들어 밤을 새며 연애편지를 쓰던 그때가, 그 마음이 말이다.//
16년 전으로 거슬러 2015년 5월쯤 해서, 내가 대검찰청감찰부 감찰 제 2과 검찰수사서기관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매년 한 번씩 시행하는 전국검찰 정기사무감사의 일환으로 서울서부지방검찰청을 들렀을 때, 그 청 직원으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 받았었다.
소위 ‘나무의사’라고 불리는 우종영 선생이 쓴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이 글 머리의 글은 바로 그 책 속에 ‘자작나무’라는 소제목으로 실린 글 그 전문을 옮겨 적은 것이다.
내가 ‘자작나무’라는 그 이름과 그 나무에 담겨 있는 전설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그때 그 글 덕분이었다.
자작나무 지천이었다.
우리가 1박 2일의 일정으로 강원도 용평을 찾았을 때, 길도 그렇고 산도 그렇고, 그 주위 온통이 자작나무 풍경이었다.
한두 번 다닌 곳이 아님에도 이번에는 그 자작나무 풍경이 유난히 내 시선에 많이도 잡혀들고 있었다.
우리가 두 번의 라운딩을 한, 용평의 명문 골프장인 Birch Hill cc의 자작나무 풍경은 더 빼곡했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남몰래 부끄러운 사연이 하나 있었다.
그 골프장의 이름인 Birch Hill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동안 무심히 그 골프장을 찾고는 했던 것이다.
이번에야 알았다.
바로 이 뜻이었다.
‘자작나무 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