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05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누가복음 9장 28절-36절
미국인들이 평상 생활 중에서 매년 평균 9백만 단어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 5백만 단어는 ‘나’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시대정신을 말해 주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이토록 자기 PR시대에 살고 있으며, 자기 본위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나 자신만 부각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을 차지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을 타락시키려는 사탄의 무기는 너무나 오래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재래식 무기에 무기력하게 넘어지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탄의 재래식 무기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얼마나 교만한 존재인지 너무나 잘 아는 사탄은 그 교만을 자꾸만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그 어리석음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지금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잘 살 수 있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관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나 한심한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힘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단 한 번도 숨을 쉴 수 없고, 단 한 가지도 생각할 수 없으며, 단 한 푼의 돈도 벌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무능하고, 한심스런 존재인지를 바로 깨닫는 것이 참 된 신앙으로 접어들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 거만을 피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만의 뿌리는 내가 커지려는 욕망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잘못된 독립심과 반항심을 치료하시고자 우리에게 제시한 방법이 있는데 바로 포기하여 변화되는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공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변화 산이라 불리는 곳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불과 40여 일 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산을 오르신 목적대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그러자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주님과 함께 대화를 합니다. 그러나 졸다가 깬 제자들은 자신들의 눈 앞에 펼쳐진 그 놀라운 광경을 보면서 자기들의 기준과 판단을 가지고 예수님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하면서 지냈지만 그들의 목적과 가치관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자기에게 주어질 놀라운 은혜만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들의 지금까지의 신앙을 점검해 보면서 지난날부터 지금까지 포기하지 못한 것을 포기하여서 올 한해는 바른 목적과 가치관을 가진 바른 신앙인으로 변하는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어떤 신앙에서 어떤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씀하니까?
감정적인 신앙에서 이성적인 신앙으로 변해야 합니다.
32절과 33절입니다.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주님은 이제 다가올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일 때문에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은 너무 피곤하여 졸다가 일어나보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황홀한 장면이 펼쳐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흥분하기 잘하는 베드로가 “선생님 여기가 좋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삽시다.”라고 제안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비몽사몽간에 말하므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토록 감정에 치우쳐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신앙은 이렇게 감정적인 신앙에서 이성적인 신앙으로, 나의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는 신앙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화 ‘최후의 만찬’에 얽힌 일화가 있습니다.
그 그림은 사실 대 수도원을 경영하는 어느 부자로부터 의뢰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성미가 얼마나 급한지 날마다 독촉이 빗발칩니다. “빨리 그려 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빈치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한 장의 성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명상하고, 그리고 인물구상과 모델 찾기 등 긴 준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중요했던 것은 최후의 만찬 사건이 고난 주간에 이루어졌던 사건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잘 담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빈치가 가장 빨리 찾아낸 모델이 있었는데, 바로 가룟 유다의 모델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누구입니까?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주님을 따라다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만족을 위하여 고난의 성화를 독촉하는 수도원장의 욕심 사나운 얼굴을 모델로 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화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욕심 때문에 자꾸 자기 생각만 강요하는 수도원장과 같은 사람은 아닌지 생각해 보는 한 해가 되기 바랍니다.
베드로처럼 자기가 무엇을 추구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내 생각만 주님께 내세운다면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갈구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보다 내가 더 잘 알고, 내 생각이 더 합당하며, 나아가서 내 생각을 주님께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변화되려면 나를 비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룩한 것을 더 많이 채워 주시기 원하신다면 그분이 주시지 않은 내 나름대로의 생각은 이제는 모두 비워야 할 것입니다.
이날 이렇게 정신없는 소리를 했던 베드로는 훗날 감정적인 신앙을 버리고, 거듭난 신앙을 갖게 되었으므로 베드로전서 4장 13절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때, 기뻐 뛰면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외치게 되었습니다. 이성적인 신앙으로 거듭난 베드로는 안락과 영광보다는 고난을 즐거워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중심의 신앙에서 예수 중심의 신앙으로 변해야 합니다.
34절에서 35절입니다.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변화산에는 그야말로 드림 팀(Dream Team)이 구성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민족의 영웅 모세, 놀라운 영력의 대명사 엘리야, 그리고 그들의 대표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정말 이렇게 세분이 함께 계셨다면 거기가 천국이 아니고 어느 곳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베드로는 흥분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래서 초막을 짓자고 예수님께 제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속마음은 세분을 위하여 초막을 짓겠다는 것이 아니었고, 그 황홀한 분위기, 그리고 이렇게 행복한 환경을 자기 곁에 붙잡아 두겠다는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외침이었을 뿐입니다.
이 황홀한 광경 속에서 주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나눈 대화의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내용을 31절에서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실 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고민하시고 계셨다는 말씀입니까? 바로 십자가를 지실 일 때문에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도 못한 베드로는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그가 천국 문에 이르자 문지기가 “당신은 누구죠”라고 물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문지기가 말을 합니다. “내가 보니 당신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무 어이가 없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문지기에게 묻습니다. “아니 당신이 그것을 어떻게 안다는 말이요?” 그러자 문지기가 대답합니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예수님의 말씀은 별로 없고, 온통 철학자의 지식으로 가득 차 있지 않소? 그러니 당신은 철학자일지는 모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아니요.” 이 말을 듣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깜짝 놀라서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꿈의 내용이 도무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습니다. “그렇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답게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만 생각하리라.”
여러분!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머릿속은 무슨 생각으로 가득 찼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생각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미국의 한인교회 장로님께서 년 초에 제직 수련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아주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수련회기간 동안에 당시에 인기가 높던 “한명회”를 못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수련회기간에 “토요일에 돌아가면 한명회를 실컷 보리라.” 결심하면서 토요일을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수련회가 끝났습니다. 그래서 토요일 밤늦도록 한명회를 보았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던지 거의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장로님의 기도차례였던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순서가 되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들을 이곳에 불러 주셔서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우리 같은 죄인들을 불러 주셔서 황공하옵나이다.”라고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들의 생각과 세상에 취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마음과 정성을 기울이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만을 생각하는 신앙에서 주님만을 생각하는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높은 곳을 추구하던 신앙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37절입니다.
“이튿날 산에서 내려오시니 큰 무리가 맞을 새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소리 질러 가로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 아들이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귀신들린 아이를 그 부모가 데리고 와 이처럼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산 밑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였습니다. 문제들이 있었고,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곳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낮은 곳으로 내려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천상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순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낮고 천한 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참된 신앙일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신 이유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참뜻이 어디에서 이루어져야 할지 분명히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 오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고난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의 뜻은 “나는 너희들 때문에 십자가를 질 것이니, 너희들은 문제가 있고, 아픔이 있는 곳에서 나의 사랑을 전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국이 아프리카를 탐험할 때 두 영국인의 행동이 크게 대비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황금전쟁을 일으켜 아프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엄청난 금과 다이아몬드를 영국에 들여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영국을 진정 사랑하는 애국자이며 영웅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사람은 영국의 침략전쟁과 노예제도를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영국인들로부터 반역자요, 배신자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전자는 세실 로드(Cecil Rhodes)이고 후자는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후 세실 로드의 무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영국의 국립묘지에 안장돼 세계인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흑암의 대륙에 최초로 들어간 데이비드 리빙스턴선교사는 수십 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의료사업과 선교사역에 30년을 헌신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육체는 극도로 쇠약해졌기 때문에 영국의 모 교회는 즉시 돌아올 것을 통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몇 달 후 제단에서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으로 죽어있는 그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후 발견된 그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3월 19일은 나의 생일이다. 나의 모두인 예수님께 나를 바친다. 주님! 나의 헌신을 받아 주소서.”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어찌하여 전혀 다른 평가를 받고 있습니까? 한 사람은 높은 곳을 향하야 나아갔고, 한 사람은 낮은 곳을 향하여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는데, 바로 지극히 작은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사랑으로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 대상은 높고 고귀한 사람이 아니라, 미약한 존재 즉 지극히 작은 자, 낮은 자입니다. 그들을 사랑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인간은 예외 없이 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을 비우게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아주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모세는 40세가 되어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 이루어보려고 할 때는 ‘말’에 능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때에는 ‘말더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종교적 달변’이 ‘영적 말더듬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나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남다른 장점이 하나님과 영적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안타까운 장해물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가장 선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 자신에게나 이웃에게나, 교회에 커다란 상처를 주지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오직 예수만 바라보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생각합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그러기 위해서는 감정적인 신앙에서 거듭난 신앙으로 변해야 합니다. 또한 자기 중심의 신앙에서 예수 중심의 신앙으로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높은 것을 추구하는 신앙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안일하고 평안함만 추구하는 신앙에서 고난을 통하여 주님의 아픔을 체험하는 헌신하는 신앙으로 변화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의 만족을 얻기 위한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던지, 죽던지 주를 위해 하겠다.” 고백하는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