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회장은
죽지 않았다
강 문 석
아파트는 신도시 북동쪽 끄트머리에 자리 잡아 남서 방향을 바라보고 앉았다. 6백년 세월 넘게 곡창지대였던 문전옥답을 뭉개고 그 자리에 앉힌 인공도시 안이다. 신도시 중앙에 터를 잡은 국립대학병원 건물이 아파트에선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병원 옆으론 십 수년째 흉물스럽게 방치된 거대한 공터도 보인다. 공터는 그 자리에 들어서기로 한 공과대학과 첨단과학분야 학과가 대도시에서 옮겨오지 못한 때문이라고 했다.
공터로 인해 뚫리다 만 직선도로가 막혀 시민들 불편이 커지만 지역 정치인은 선거 때만 자신을 다시 뽑아주면 꼭 해결하겠다는 공약을 십 수 년째 되풀이하고 있다. 대학병원 초기엔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린 봉하마을 사람도 헬기로 도착하여 병원 지붕 상공을 몇 바퀴나 돌면서 소란을 피웠다. 그땐 시신이 산으로 가지 않고 병원을 찾은 것도, 헬기장 없이 초대형 국립대학병원이 문을 연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8백 세대를 넘는 23층짜리 아파트 단지에 인생 여든에 이른 공 노인이 20년 전, 신규분양 때 입주하여 지금껏 살고 있다. 그는 직장을 그만 둔 뒤에도 10년 넘게 대도시에 살다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공 노인이 이곳에 사는 동안 아파트는 그대론데 많은 이들이 떠나고 새로운 이들이 다시 입주했다. 아파트 공화국인 나라에서 노년에 아파트에서 만나 정을 나누던 사람들이 떠날수록 공 노인의 마음은 허전해져갔다.
공 노인의 허전함은 바로 외로움이었다. 그의 외로움은 날이 갈수록 점점 짙어졌다. 공 노인은 이러다간 안 되겠다 싶어 앞서 살던 대도시로 되돌아가려고 여러 번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때마다 할멈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할멈은 이미 마련해 놓은 하늘공원 안 유택이 사는 아파트에서 멀지 않으니 이곳에서 임종을 맞으면 조용히 거기로 들겠다는 생각인 모양이었다. 공 노인은 진퇴양난에 빠지고 말았다.
인생 말년에 글을 쓴다는 구실로라도 따로 방을 구해 대도시를 찾아갈까 하다가도 자칫 졸혼으로 비칠까봐 그 마저도 결행하지 못한 공 노인이었다. 신축 아파트에 처음 입주했을 때만해도 반상회 제도가 살아있어 서로 이웃을 알 수 있었다. 만나는 사람끼리 인사도 주고받으며 때론 서로 오가기도 했다. 특별한 음식을 만들거나 직접 농사 지은 채소나 과일이 있으면 서로 나누기도 했으니 노년은 그만큼 행복했다.
공 노인이 일흔에 진입할 무렵엔 의기투합해서 함께 북유럽 여행까지 다녀온 부부까지 있을 정도였다. 해외여행으로선 북유럽 크루즈여행을 지금까지 못 잊는 공 노인이다. 그땐 같은 라인에 공 노인 또래 노인이 네댓이나 되어 자신이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 아파트 신규 입주한 세대 중 이제 서넛만 남았다. 그런데다 새로 입주한 젊은 사람들은 전세입주가 많아 이사 주기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이제 승강기로 오르내리면서 공 노인이 만나는 주민 중 서로 인사를 나누는 세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노년을 적적하게 만드는 환경이지만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공 노인이다. 요즘 들어 하루가 다르게 점점 건강에 자신이 없어지는지 공 노인 할멈은 내세 얘길 부쩍 자주 입에 올린다. 반백년 넘게 살을 맞대고 살아온 반려자가 이렇게 나오니 공 노인 자신도 가까이 다가온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공 노인은 오래 전 가톨릭신문 기자 때, 대구 성직자묘역 입구에 붙은 ‘오늘은 나, 내일은 너’란 경구가 떠올랐다. 죽은 이들이 전하는 통렬한 메시지를 접하자 공 노인은 묘역에 붙은 경고문치곤 가장 설득력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맞아!’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면서 공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깊은 한숨을 토했다. 그때까지 그는 죽음이 자신의 일이라고 한 번도 생각생각히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 너무도 당연한 진리를 그는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너나 없이 대부분 죽음을 잊고 산다.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나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공 노인도 살아왔다. 하지만 죽은 이들이 가르쳐주는 침묵의 가르침 ‘오늘은 나, 내일은 너’는 항상 죽음을 잊지 말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라는 것이 아닐까 싶어 그때 묘역에서 공 노인은 그만큼 숙연해졌던 것이다.
'하루하루 삶에 충실할 때,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는 경구도 떠올랐다. 오늘 하루를 충만하게 사는 것이 죽음에 대한 가장 이상적인 준비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지금 공 노인 자신도 이미 늦었지만 죽음을 대비하지 않고 사는 것은 그만큼 후회도 클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죽음 앞에서는 소중한 가족마저 타인일 수밖에 없으니 세상에 올 때 혼자였듯이 갈 때도 혼자 떠나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파트 11층 1호엔 일흔 중반인 김 회장이 산다. 김 회장은 자신이 일군 영도 선박수리업을 2세에게 물려주고 노후를 주로 집에서 보내며 신도시에서 분양받은 작은 텃밭을 가꾸고 있다. 그는 팔척장신이지만 체격은 약간 왜소한데다 얼굴은 흑인처럼 검다. 같은 층 김 회장 옆집 이 사장은 예순 초반으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한 번씩 승강기에서 만나진다. 이 사장은 중키에 씨름선수로 보일 정도로 몸집이 우람하다.
이 사장은 휴일이면 주로 골프가방을 걸치고 나가며 평소엔 퇴근하면서 자신의 농장에서 직접 경작한 채소나 과일을 차에서 자주 내린다. 아파트에서 옆집은 건축물 구조상 단독주택 이웃보다 더 바짝 붙어있다. 비록 건물은 벽을 맞대고 붙었지만 그 거리감은 한없이 멀 수도 있는 게 아파트의 한계다. 18층에 사는 공 노인이 김 회장과 이 사장을 같은 라인 통로에서 처음 만난 지도 어언 10년 세월이 흘렀다.
공 노인이 승강기 안에서 김 회장과 이 사장을 자주 만나는 것은 둘이 흡연을 위해 집을 나서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인데도 실내에서 흡연을 못하니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김, 이 두 사람 말고도 라인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몇이나 더 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맨발에 슬리퍼를 끌고 집을 나선다. 영하의 겨울 날씨에도 그렇다. 그럴 때마다 공 노인은 입에 불을 지피면 발까지 데워지는지 궁금했다.
사실 아파트 단지 내 전역이 금연구역으로 지정된 것은 벌써 수년이 지났다. 기초단체에서 '끽연하다가 걸리면 범칙금 10만원'이란 경고문까지 붙여 놓았지만 흡연자들의 욕구를 꺾지 못하니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공 노인도 마흔 초반까진 담배를 피웠다. 그때까진 직장 사무실이나 집 안에 재떨이가 비품으로 있을 정도였다. 그랬던 것이 서울올림픽이 열릴 무렵 끽연 문제가 도마에 오른 적이 있었다.
자신의 건강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 캠페인은 일과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공 노인은 그때 마흔 중반이었고 그렇지 않아도 타고난 기관지가 약해 죽지 않으려면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를 받고 있던 참이었다. 군에서 시작한 담배를 끊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커피나 술자리에 앉으면 자신도 모르게 옆자리 사람의 담뱃갑에 손이 가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나라처럼 담배 인심이 후한 것도 공 노인이 담배를 끊는데는 장애가 되었던 것이다. 담배로 인해 벌어진 에피소드는 차고 넘친다. 1960년대 중후반, 그때까지만 해도 미군들이 한국 복무를 하기 위해 본국에서 수송선에 오르면 보름 동안이나 망망대해를 지나야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배 안에선 한국에서 주의해야할 사항을 반복해서 듣게 되는데 거지들의 나라이니 절대로 한국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는 당부도 들어있었다.
미군 병사들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거지’ 이야길 듣고 한국에 도착하여 부대에 배치되고 보니 한국군 병사들이 딱 그랬다. 겨울철 수송부 같은 곳에 일하다 쉬는 시간이면 양지 바른 곳으로 몰려가 한 병사가 담뱃갑을 꺼내면 주위 칠팔 명 병사들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한 개피 씩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지여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만큼 인정이 많은 때문이었다. 미군들 중엔 한국인의 온정주의에 매료되는 병사도 있었다.
그런 병사는 한 번씩 클럽에서 돌아올 때 양담배를 한 박스씩 들고 와서는 퀀셋 막사 안 한국군 병사 침대 위에다 한 볼씩 던져주곤 했다. 당시 막사 안 독방을 쓰고 있었던 공 병장에게도 노크를 한 후 담배 볼을 건넸고 공 병장은 미군 소대장에게 그 온정 얘길 전하면서 따뜻한 전우애를 이어갔다. 양담배를 받은 병사들 중엔 미군들이 좋아하는 한국의 전통 공예품 같은 걸 건넸고 그것들은 그들이 귀국할 때도 꼭 챙겨가곤 했었다.
며칠 전, 이 사장이 아침 출근길에 김 회장 집 대문 벨을 눌렀다. 문을 연 김 회장 부인에게 하얀 봉투를 하나 두 손으로 내밀면서 이 시장은 "그런 큰일을 당하셨으니 뭐라고 위로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늦게 소식을 들어서 죄송합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김 회장 부인은 평소 싱글벙글하던 사람이 생전 처음 보이는 심각한 표정에 "그런데 이건 무슨 봉투예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 사장은 "김 회장님께서 돌아가셨는데도 저희는 바로 옆에서 까마득히 몰랐습니다. 용서를 바랍니다"라며 다시 고갤 숙였다. 김 회장 부인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싶으면서도 마음을 가다듬어 “우리 아저씨, 오늘 텃밭에 해 뜨기 전에 모종내야 한다며 새벽 같이 나갔는데요…”라는 말을 건넸다. 그 말을 듣자 이 사장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다시 한 번 크게 놀라고 있었다. - 다음으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