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종철 국제심판이 자신이 운영하는 축구전문용품점을 소개하고 있다 |
◇조기축구회에서 국제심판까지
그가 심판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조기축구회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1년여 선수 생활을 했던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조기 축구회에서 다시 공을 차기 시작했다. 사회 생활을 막 시작한 약관의 나이 때다. 팀에서 막내인 탓에 심판은 늘 그의 몫이었다. 공을 차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심판을 봤다. '욕이나 먹지 말자'고 마음 먹었는데 어느새 지역 조기축구계의 명 심판이 됐다.
그러던 언젠가 형님들이 "재능이 있는 것 같다. 심판으로 나서보는게 어떠냐"고 권하기 시작했다. 그 역시 우연한 기회에 스포츠신문에 난 대한축구협회의 '심판 공개 모집' 광고를 보게 됐다. 시험과 인터뷰를 거친 끝에 89년 3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듯 거침없는 행보가 이어졌다. 92년 1급 심판에 이어 95년에는 K리그 전임 심판이 됐다. 97년 국제 심판에 도전해 꿈을 이뤘다.
권 심판은 당시를 기억하며 "(국제심판)10명중에 꼴등으로 턱걸이를 했어요"라고 웃었다. 하지만 순위는 순위일뿐. 그는 그라운드에서 실력을 백분 발휘해 '그라운드의 포청천'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2001년에는 후원회도 생겼다. 치기공사, 변호사 등이 회장단을 꾸려 그를 뒷받침하고 있다. 권 심판은 "선수가 아니면서도 대중적으로 이름이 기억되는 심판이니 얼마나 행복합니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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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축구 인생
그는 경북 영일에서 태어났다. 직업 군인인 부친 때문에 전국을 돌아다녀야했다.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지금 살고 있는 서울 은평구 증산동이다. 권 심판은 83년부터 이곳에서 축구전문용품점을 운영하고 있다. 89년 백년가약을 맺은 아내 김경숙씨(41)를 만난 곳도 아 지역이다. 우연찮게 2002년 한일월드컵의 감동이 남아있는 상암월드컵경기장이 인근에 들어섰다. 자신은 심판이고, 축구전문용품점을 운영하는 데다 '한국 축구의 중심부'인 월드컵경기장까지 지근거리에 있으니 그야말로 축구에 둘러싸여 사는 셈이다. 권 심판 역시 "축구빼면 시체죠~"라고 웃었다.
심판예찬론이 이어졌다. 일반인 신분으로 전 세계를 다녀볼 수 있다는 이유다. 우즈베키스탄, 구 소련은 물론이고 중동 전 지역을 누비고 다녔다. 북한만 제외하면 세계 곳곳 안 다녀본 국가가 없다는 설명이 줄줄이 이어졌다. 국제 심판에 대한 자부심이다. 매년 9월 병원검사, 평가 점수, 영어 회화, 규칙 필기 시험은 물론이고 엄격한 체력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 한 번 합격했다고 자격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권 심판은 "심판은 명예직이어서 노후 대책이 없다. 그래도 해 볼만한 직업이다. 내 아들이 희망한다면 적극 지원해주고 싶다"라는 말에서는 자신이 평생 가졌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물씬 배어났다.
물론 톱클래스의 국제 심판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활동하는 심판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도 권 심판은 낙관적이다. 앞으로 유럽처럼 주말리그가 정착되면 심판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권 심판은 "96년 프로심판 전임제가 처음 생겼는데 심판과 선수의 연봉의 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며 "전업·겸업 여부도 중요하지만 심판들의 기량 향상을 위한 여러가지 제도적인 뒷받침도 따라야 한다"고 지적했다.
권 심판이 AFC로부터 엘리트 심판 강사, 감독관 코스 참석을 알리는 이메일을 공개하고 있다. |
◇신뢰는 심판의 훈장
한껏 명예를 누린 권 심판이지만 장수할 만큼 욕도 실컷 먹었다. '안티팬'도 그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존재다. 그는 "공 하나로 전 세계인이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축구의 묘미다. 동업자 정신이 필요하다. 팬들은 선수를 보기 위해서 경기장에 온다. 안티 글은 역설적으로 축구에 대한 열정을 뜻하는 것 아닌가. 내 안티 팬이더라도 축구장에 오셔서 마음에 안들면 화도 내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가셨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말은 그래도 선수들로부터 받는 신뢰감은 심판으로서 가지는 훈장이다. 국제 심판 수가 적고, 중요한 경기일수록 단골로 배정되는 심판이 있기 때문에 선수들과 친해지는 경우가 많다. 중국 축구의 영웅인 하오하이둥도 그런 경우다. 언젠가 경기장에 입장하자 몸을 풀던 하오하이둥이 "어이, 친구 왔냐?"고 인사를 했다. 권 심판은 웃으며 "내가 네 친구냐. 따거(형님)이라고 부르라"고 되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2001년 8월 중국이 월드컵 본선 진출을 결정짓는 중요한 경기를 맞았다. 하오하이둥은 이날 주심을 맡은 권 심판을 보고 두 손을 모으며 "따거!"라고 외쳤다. 하오하이둥은 유별나게 심판에게 간섭이 많은 선수다. 정작 권 심판에게는 항의하는 동료 선수들을 저지하고 나선다는 게 그의 자랑이다. K리그에서도 마찬가지다. 권 심판은 "페널티킥을 선언하면 선수들로부터 거친 항의를 받는데 오래 알고 지냈던 한 선수가 나서 동료들을 달래고 나설 때가 있다. 그만큼 나를 신뢰한다는 말인데 그럴때 가장 뿌듯하다"고 털어놨다.
◇월드컵의 아쉬움은 후학을 통해
권 심판은 내년 1월 아시아축구연맹(AFC) 엘리트 심판 강사·감독관 코스에 참가한다. AFC가 이메일을 통해 직접 통보를 해왔다. 아직 국제 심판 정년이 1년 남았지만 조기 은퇴하는 이유는 심판 이후의 삶을 그려봤기 때문이다. 권 심판은 "20대 중반의 나이로 일찍 심판을 시작해 남들보다 더 오래 뛸 수 있었다. 감독관, 강사 등 축구 관계자로서 활동하고 싶다는 꿈때문에 은퇴 결심을 내린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난 2006독일월드컵 무대에 서는 기회를 아쉽게 놓쳤다. 2006년초 아시아 국제 심판 중에서 독일월드컵을 위한 최종 6인에 선발됐고, 최종 평가에서 상위권이었다. 정작 아시아 지역 배정 인원이 줄어들면서 일본 심판에게 밀렸다. 권 심판은 "지금부터 체계적으로 양성해야 월드컵에 서는 한국인 심판들을 배출할 수 있다"며 "내가 못 이룬 꿈을 후배들을 통해 이루도록 일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강재훈기자 freespirit@sportsseoul.com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tg=news&mod=read&office_id=073&article_id=0000088353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K리그 최고의 미남심판이 사라지는군요 이제 최광보님의 납득할 수 없는 맥가이버 머리나 보고 살아야 하다니 흑흑 ㅡㅜ
최강보랑 고금복이랑 이영철 이 쓰리톱심판이 제일싫던데
우리도행복해
수고하셨습니다.
권종철 심판 k리그에서 욕 참 많이 먹던 심판이었는데ㅋ 그래도 꽤 괜찮은 심판인것 같네..
ㄷㄷ잘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