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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4 주일말씀/ 삿7:15-23
사사 기드온
말씀 : 정삼지 담임목사
기드온 하면 씩씩하게 일하고 사역하는 그런 모습으로 많이 인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드온 협회라는 단체가 있는데, 여행하다 보면 호텔 서랍에 기드온 협회에서 나온 성경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기드온 협회는 지금도 말씀 전파에 힘쓰고 있습니다. 성도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기드온과 관련된 내용이 마음에 많이 새겨져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원래 기드온은 기드온다운 용감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용사도 아니고, 집안도 대단하지 않았고, 힘도 없고 소심하고 비겁하며 열등의식에 쌓여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을 만나서 역대 사사 중에 가장 뛰어난 사사요, 성경의 가장 뛰어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칠 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삿6:1).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삿6:6). 미디안의 손에서 7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미디안 하면 모세가 떠오릅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지날 때, 미디안 광야였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중서부 쪽에 미디안 광야가 있습니다. 미개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있었던 민족입니다. 정말 보잘 것 없는 민족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하나님의 떠나고 불순종하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키웠습니다. 미개하니까 아주 잔인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당했기 때문에 더욱 잔인해졌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과 연합하여 7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압제했습니다. 얼마나 지독하게 괴롭혔는지, 이스라엘이 산으로 도망가고 굴을 파고 지낼 정도였습니다. 농사를 지었는데, 추수할 때에 와서 다 빼앗아 갑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해서 그런 족속을 키우셨습니다.
사사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연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스운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돌아오라는 메시지입니다. 빨리 돌아오라고 하는데 안돌아오니까 얼마나 잔인한가 하면, 그들이 빼앗으러 올 때, 메뚜기 떼같이 많이 들어와 잔인하게 짓밟습니다. 그런 세월을 7년을 보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는 방법인데, 이스라엘은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세운 사람이 기드온입니다. 기드온은 얼마나 소심했는가 하면, 밀을 타작할 때인데, 당당히 밀을 타작하지 못합니다. 미디안이 보이면 빼앗아 가니까요. 그러니까 포도 짜는 틀 속에 들어가서, 슬그머니 타작해서 슬그머니 가져오려다가, 갑자기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것입니다.
고난의 때는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만큼 심각하지 않다면,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이 너무 심하고 방법이 도저히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는데, 하나님이 대단한 사람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농사꾼 기드온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는 밀 타작을 숨어서 해가지고 와서, 어떻게 좀 양식을 얻으려고 했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개인이 삽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교회가 삽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을 때 나타나시고 찾아오십니다. 찾아올 만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 보고 계시다가 기드온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그의 대답에서 기드온은 영웅이 아닌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삿6:11-12).
“큰 용사여”하고 부르면서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크다’라는 단어는 우리 역사 속에 가장 큰 것입니다. 가장 위대하고 대단하다는 의미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에서의 ‘크다’도 마찬가지 뜻입니다. 상상도 못할 큰 역사를 말할 때 ‘크다’를 사용합니다. 기드온이 ‘큰 용사’라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찾아오실 때 분명하게 ‘큰 용사여’하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실로 돌아가 보면, 기드온은 소심하기 짝이 없고 또 당당하지도 못합니다. 7년이나 고통을 당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없는 자신감을 상실한 그런 젊은이였습니다.
그리고 ‘큰 용사여’하고 부르면 ‘아멘’하고 나타나야 할 터인데, 하나님을 불신했고, 그 불신은 반항으로 나타났고, 그 반항을 또 열등감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정당한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불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 그리고 현실에 대한 불신은 기드온을 그렇게 열등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큰 용사여!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는도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었겠어요. 살펴보면 몇몇 안 됩니다. 신약에는 베드로가 있습니다.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 장차 반석이 되리라” 예수님이 베드로를 인정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런 분 중의 한 분이 바로 기드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멘’해야 하는데, 현실에 대한 불만과 하나님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서 아멘을 못합니다.
그리고 따집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삿:13).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는 과거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 좋았던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과거를 다 찢어서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어요. 현실이 너무도 불만스러우니까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셨고,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다고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렸지요. 거짓말을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버렸다는 것 자체도 무슨 뜻인지를 모릅니다. 현실만 보니까, 자신들을 미디안에 손에 넘겨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삿6:15).
기드온은 아주 못마땅해 합니다. 자기는 가장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12지파 중에 므낫세 지파가 있는데, 그 집안 중에 우리 집은 가장 약하다고 합니다. 약하다는 뜻은 모자란다는 뜻도 있지만, 저 아래 하급이라는 것입니다. 내놓을 만한 인물도 없고 내 놓을 것도 없고 가난하고 못 살고 어려운 그런 집안입니다. 그 가운데 자신은 가장 작은 자인데, 나를 어떻게 쓰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용사라면 용기가 있어야 하고 열정이 있어야 하고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는 열등감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열등감과 이런 유약함과 소심함의 존재인 기드온을 하나님은 바꾸셔서 크고 위대한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것은 열등감이요, 소심함입니다. 내가 조금만 더 있더라면 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가 없는 것이지요. 용사로서 있어야 할 자신감, 용사로서 있어야 한 자질, 그 어떤 것이 없어서 오늘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 모든 것을 일컬어 열등감이라고 합니다. 열등감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맥스웰 멀츠라는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인들 중 95%는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 자기 집안이 므낫세 지파 중에 가장 약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안에서 자기가 가장 작은 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나 다 힘있게 나아가야 하는데, 발목을 붙잡는 것이 열등감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다 있어서,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데, 열등감은 가치관의 잘못에서 오는 것입니다.
신앙은 가치관입니다. 신앙이 딱 들어서면 열등감은 사라집니다. 그것을 우리는 자아정립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만나면, 자기를 자기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신 것처럼, 신앙은 거기서 출발합니다. 예수님이 나 같은 자를 받아주신 것처럼, 나도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유약하고 소심하고 열등감에 있는 기드온을 큰 용사로 보시는 자아관, 내가 나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여기서부터 인생은 시작이 되는데, 예수님을 진짜 만나면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 말씀 앞에 깨지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어떻게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므낫세 지파 중에 가장 작은 집안인데요. 집안 중에 가장 작은 나인데,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니다. 잘못된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돈이 있어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돈에 인생을 몰두하게 됩니다. 돈이 있다고 가치관이 바로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공해야 하는 것에 가치를 두니까, 성공 못한 자신이 한없이 작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성공해야 성공일까요. 한도 끝도 없습니다. 어느 정도 돈을 벌어야 성공하는 것입니까? 어느 정도가 어느 정도입니까?
그래서 열등감과 우월감은 같습니다. 하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자유케 해주고 평안을 주고 자존감을 높여줍니다. 기드온은 소심해서 밀을 마당에서 타작을 못합니다. 미디안이 빼앗아 갈까봐 숨어서 타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와서 한 마디 하니까, 버럭 화를 냅니다. 열등감의 가장 큰 표현은 화내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고 노발대발하는 것은 열등감이 그만큼 깊다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전에 우리에게 이적을 베푸셨는데, 과거의 이적은 어디가고, 미디안에게 7년 동안이나 고통을 받게 하십니까? 다 쏟아 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기드온을 용장 기드온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 실력과 네 능력으로는 할 수 없고, 나팔을 불어라, 항아리에 횃불을 들어봐라, 역사 속에 이런 전쟁이 어디 있으며, 네가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느냐” 하십니다. 전쟁을 해야 하는데, 미디안 군인 13만 5천을 300명이 가서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항아리 들고 거기에 횃불을 들고, 그리고 나팔을 들고 싸운 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전쟁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 인생이 말도 안 되는데, 하나님이 쓰시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초라한 전쟁이 될 뻔했습니다. 그런데 그 초라함이 가장 대단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인생관이요 자아정립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나도 할 수 있다고 성경은 부단히 매일 매일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내 능력이 아니고, 네 능력으로 항아리를 가지고 이길 수 있느냐? 네 능력으로 횃불가지고 이길 수 있느냐? 네 능력으로 나팔 불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느냐? 절대로 못 이깁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자신을 바꾸시고 이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열등감의 특징은 끊임없이 비교하는 것입니다. 비교만 하면 되는데, 자신을 깎아 내립니다. 연필을 깍듯이 깎아 내립니다. 플러스 인생이 있는가 하면 마이너스 인생이 있는데, 사람들은 열등감 때문에 자신을 계속 깎아 내립니다. 하나님 깎아 내리도록 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니고, 우리를 세우시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중심의 열등감은 자기 확신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자기 확신이 결여됨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계속 덧붙여야 하고, 계속 나가야 하기 때문에, 쉼 없는 힘겨운 인생을 살게 만듭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과거에 매여서 좌절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내 삶속에 왜 실망하고 좌절합니까? 열등감입니다. 한 청년이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려고 하는데, 바로 옆에 자기보다 월등히 근육이 좋은 남자가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가 질려서 멍하니 서있습니다. 열등감으로 운동한 기력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귀한 사람입니까? 얼마나 큰 용사입니까?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끝나는데, 다른 사람을 보아서 무엇 합니까? 열등감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열등감은 극복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 갖고 있는 것은 다 0입니다. 돈도 0이고, 권력도 0이고, 성공도 0인데, 1되시는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나 자신은 10이 되고 100이 되고 1000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 인생의 확실한 의미입니다. 내가 가진 내 재능과 능력이 의미가 아닙니다. 그 분에 내안에 들어올 때, 우리 인생은 빛을 발하게 됩니다. 이제 다른 사람을 바라보던 눈을 주님께로 돌려 바라보십시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날 때, 다른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의지할 대상도 아닙니다. 주님을 정말로 만날 때, 다른 사람은 내가 도와주어야 할 대상이지, 내가 도움 받을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부부관계도,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딱 일직선으로 나와 만남이 이루어지면, 사람들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조니 에릭슨 타다’라는 분의 삶이 참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 분은 어렸을 때 스포츠를 좋아해서, 말도 타고 수영도 하는 등 여러 가지를 하고 자랐습니다. 어느 날 해변 가에 가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어요. 수영을 좋아하니까, 그냥 바다로 다이빙을 했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바다가 충분히 깊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낮은 곳에 다이빙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가 바닥에 부딪혀서 그만 목이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때부터 이 분은 사지가 마비되어 자기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어제와 오늘이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운동을 좋아하고 활발히 활동하던 사람이 누워있는 것만 합니다. 화장실도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자살을 하려고 칼을 찾았는데, 칼을 찾을 수도 없었어요. 약을 먹고 죽으려 해도 약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런 나날을 보내다가 한 사람이 방문을 해서 성경말씀 한 구절을 소개해 주었어요.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그리고 조금 있다가 친구가 와서 그를 격려합니다. “너만 사지를 못 쓰는 것이 아니야, 예수님도 사지를 못 쓰셨어.” “뭐라고? 예수님이 무슨 사지를 못 쓰셨다고 그래?” “예수님은 십자가에 묶여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너만 그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고통을 당하셨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어. 그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 그리고 그 예수님이 너를 사랑하셔, 네 안에 계셔, 그 예수님이 너와 함께 하시면, 너는 새롭게 살 수 있어.” 친구가 전해준 예수님 말씀이 이분에게 감동이 되어 신앙을 갖게 된 거예요. “그래, 그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고, 그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가 할 수 있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이 말씀에 충격을 받고, “주여, 내가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회개하며 그 때부터 새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32권의 책을 썼는데,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손을 쓸 수가 없으니까, 입으로 그림을 배워 그렸습니다. 그래서 유명 화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두 손과 발을 멀쩡히 갖고 있잖아요. 이 분은 수백만 명에게 강연을 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결혼도 했습니다. 이 분의 삶이 영화로 만들어져서 상영이 되었습니다. 사실 누가 이 분보다 열등감이 더 많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세상에 곳곳에 나가 하나님을 자랑을 합니다. ‘고통이 클수록 영광도 크다’는 것이 강연의 결론입니다. 이분의 강연의 결론은 ‘하나님은 내 고통을 영광으로 바꾸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고통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만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다 이겨내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기드온의 현실을 이겨내도록 도와주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내가 마음을 걸어 잠그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치유 받은 사람이기에 여전히 행복하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자인가는 주님 앞에 갈 때에만 행복한 자인 줄을 아는 것이지, 사람을 본다면 우리가 행복한 자인 줄을 알 수가 없습니다. 누구를 봐도 남편의 사랑도 끝날 날이 있고, 아내의 사랑도 끝날 날이 있습니다. 그것만 바라본다면 꽃이 시드는 것처럼 언젠가는 반드시 시들게 됩니다. 그렇다고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돈도 떨어질 날이 있습니다.
아니, 그 깊은 바다에 가서 다이빙을 했는데, 그곳이 낮은 곳인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자신이 한 순간에 목이 부러질 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건강이 한 순간에 날아가잖아요. 인생이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우리는 열등감을 이겨내야 합니다. 나만 열등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 장애가 있고, 나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찾아오셔서 도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은 ‘에릭슨과 친구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장애가 있는 곳에 찾아갑니다. 그래서 울고 있으면 함께 울고, 휠체어가 없으면 전 세계 어디에 있든지 휠체어를 보내줍니다. 혼자 있어 외로울 때는 찾아가서 책을 보여주고 영화를 보여주고 함께 합니다. 그가 만약 장애를 안 겪었다면 세계적인 ‘조니 에릭슨 타다’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가 조니 에릭슨 타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 안에도 계시잖아요. 그 분이 우리를 바꾸어 주셨잖아요. “너는 큰 용사다.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는 큰 용사다”라고 하셨습니다.
장훈 선수 아시지요. 야구 3,085안타를 쳐서 일본 야구계의 영웅이 된 인물입니다. 이 분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서울여대 교수가 강연을 했습니다. “일본에 장훈이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이었는데, 당시(1960-70년대)최고로 야구를 잘하니까, 일본에서는 일본으로 귀화하라고 했어요. 장훈선수는 귀화를 안 하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 당시 일본사회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일본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하겠다고 하니까, 그 때부터 장훈 선수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뿌리에 대한 프라이드를 가져야 합니다. 돈 보다 못한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프라이드가 아닙니다. 성공보다 못한 하나님이라면 치워야지요.
“어느 날 장훈 선수가 타석에 섰는데, 한 일본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조선놈은 가라, 왜 조선놈이 일본에 와서 야구를 하느냐’하면서 고함을 쳤습니다. 그러자 다른 한 일본인도 ‘조센징 빠가야로’합니다. 가라는 것입니다. 왜 일본 땅에서 야구를 하느냐는 것이지요. 야구를 하려면 네 나라에 가서 하지, 왜 일본에서 하느냐는 것입니다. 일본에게는 야구의 자존심이 있습니다.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관중들이 나쁜 말로 야유를 합니다. 조용해졌을 때, 장훈 선수가 나와서 관중들을 향해 한 마디를 했습니다. 그 말이 “니혼진 빠가야로!”라고 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한 마디였습니다. ‘그래! 나는 조선놈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한 마디는 해야 합니다. 정말로 우리를 기죽이는 세상에 대해 한 마디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자존심이요, 이것이 예배자의 자존심입니다. “그래 나는 크리스천이다!” “그래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이 한마디가 우리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찬양할 수 없지요. 마지막 믿는 자의 한 마디는 우리의 신앙을 견고히 세워줍니다. 그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트를 잡았습니다. 분위기가 적막할 때에 타석에서 공을 쳤는데, 장외 홈런이 되었습니다. 야유했던 자들의 기를 팍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서울여대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처음으로 내 입으로 이 말을 했습니다. ‘그래 우리 아버지는 청각장애인이다. 내 아버지는 벙어리다. 그래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 나는 공고를 나왔고 삼수를 하고 대학을 못 갔다. 그래서 뭐, 그래서 어쩌라구’” 이 서울여대 교수님은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대학 교수가 된 것입니다. “조센징 빠가야로” 라고 말하는 것은 일본인이 아닙니다. 열등감과 상처에 대해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입니다. 내 안에 있는 상처받는 열등한 내가 나를 향해 ‘너는 조센징이야, 너는 그것밖에 안 돼, 너는 안 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밖에 있는 누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바로 나 자신이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이 “므낫세 지파 중에 우리 집은 가장 천한 집안이고, 우리 집안에서 나는 가장 약한 사람입니다. 그런 내가 뭘 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뒤집어서 바꾸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 아닙니까? “아니야, 너는 큰 용사야,” 하나님은 기드온을 그렇게 쓰셨습니다. 야유 받는 중에 홈런을 치는 것이 훨씬 멋있는 삶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 청각장애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홈런을 치게 하시면 되잖아요. 내 인생을 그렇게 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기드온입니다. 내 삶의 환경이 나를 야유하고 비난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십시오. 그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삶이 주는 공을 장외 홈런으로 한번 때리십시오. 멋있게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삿7:16-17). 미디안 사람은 13만 5천명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하나님은 한 사람으로 밖에 안칩니다. 한 사람 치듯 하니까 무기가 필요 없습니다. 너희는 300명인데, 그들은 한 사람이야, 그래서 전세가 역전되어서 미디안은 1이고, 기드온은 300입니다. 그러니 300:1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잡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항아리 들고 가면 되고, 횃불을 들면 됩니다. 나팔을 불면 끝나는 것입니다. 미디안은 1사람에 불과하니까요. 하나님의 계산법은 이렇게 차원이 다릅니다. 전쟁의 싸움 방법도 엄청나게 특이하고 독특합니다. 세상에 이런 전쟁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어마어마합니다. 하나님은 지혜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열등감을 날려 보내지 않는 한 일어설 수가 없습니다. 내 스스로는 날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해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기드온이 된 것입니다. 열등감에 찌든 못난 기드온이 잘난 기드온이 된 것입니다.
장훈 선수는 야유와 비난 속에서 장외 홈런을 날렸습니다. 3,085개 안타를 치고 영웅의 전당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한국인을 빛낸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자연은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장훈씨에게 주신 특별한 은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장훈을 능가한 장외 홈런을 날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말입니다. 주를 의지하고 시원하게 한 방 날립시다.
“당신은 뛰어난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별 재주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주십니다.”
-제이 데이빗, 브레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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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