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다리밟기의 유래
집필자 한양명(韓陽明)
정의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인 놋다리밟기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
역사
홍건적이 1360년 11월 19일 침략을 시작하고 수도 개경을 향해 진격을 시작하자,
공민왕은 동년 11월 19일 왕궁을 떠나서 몽진 길에 올랐다.
파주, 양주, 광주, 이천, 충주, 용궁 등을 거쳐서 동년 12월 15일에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인 당시의 복주에 도착한 뒤에,
지역민의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머물다가 개경을 수복한 뒤인 이듬해 2월 신축일에 환도했다.
환도 이후 공민왕은 안동 주민들의 환대에 보답하기 위해서 백옥대와 옥관자,
상아홀 등의 진귀한 물품을 하사하는 한편,
복주목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켰으며 조세를 면제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놋다리밟기의 유래에 관한 전설은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형성,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줄거리
두 개의 유래담이 전한다.
첫 번째 이야기이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공주와 왕후를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에서 고생을 한 일행이 안동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송야천(松夜川) 입구에 이르렀을 때,
마중 나온 주민들 가운데 부녀자들이 왕후와 공주가 발을 적시지 않고 내를 건널 수 있게
허리를 구부려 등 위를 밟고 건너도록 했다.
주민들의 환대에 감격한 공민왕 일행은 원래 경주까지 갈 예정이었으나 걸음을 멈추고
안동에 머물다가 난이 평정된 뒤에 개경으로 돌아갔다.
유래를 기술할 것 다음으로 두 번째 이야기이다.
공민왕이 공주를 데리고 안동에 몽진해서 머무는 동안 매우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이를 황송하게 여긴 주민들이 왕과 공주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놀이를 고안했다.
그것이 바로 공주로 하여금 부녀자들의 등을 밟고 가게 하는 놋다리밟기이다.
분석
이 전설에는 공민왕의 몽진 경로 상에 있던 여타 고을들과 달리
고려의 건국 당시부터 깊은 인연을 맺고 있던 안동에서 환대를 받았다는 내용과 함께,
놋다리밟기는 바로 왕에 대한 지극한 충성을 표현한 놀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특징
강강술래의 유래담이 임진왜란 당시 위기에 처한 이순신 장군이 승기를 잡는 데 기여한 여성들의 활약을 강조하는 것처럼,
놋다리밟기의 유래담도 위기에 처한 공민왕 일행을 위해 벌이는 여성들의 충성스런 면모를 담고 있다.
의의
이 전설은 국난의 위기상황에서도 애국과 왕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지 않는 지역민,
특히 여성들의 활약상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면모는 강강술래와 월월이청청 등의 여성 집단놀이 유래담에도 공통적인 것으로서
충이라는 국가이데올로기가 민간의 여성 놀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출처
안동의 차전과 놋다리(임동권, 한국민속학논고, 집문당, 1971).
참고문헌
강강술래와 놋다리밟기의 지역적 전승양상과 문화적 상황(임재해, 민속연구2,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1992),
공민왕 관련 민속놀이의 문화적 가치와 역사적 인식(임재해, 고려 공민왕과 임시수도 안동,
안동시․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2004),
놋다리밟기의 유형과 풍농기원의 의미(임재해, 한국문화인류학7, 한국문화인류학회, 1985).
출처 -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