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그리움의 영토
허 열 웅
오랫동안 수행의 길을 떠났던 젊은 스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는 스승을 찾아가 인사를 올렸습니다. ‘이곳을 떠난 지 얼마가 되었느냐’ 스승이 물었죠. 10 년이 지났습니다. 이 말은 들은 스승이 제자의 공부를 물었습니다. ‘그래 그동안 자네는 무엇을 얻었는가?’ 그러자 젊은 스님은 꼬챙이 하나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땅에다 커다란 동그라미 하나 그렸습니다. 이 모습을 쭉 지켜보던 스승이 다시 물었죠. 그래 그것뿐인가, 다른 것은 또 없는가? 그러자 젊은 스님은 발로 동그라미를 쓱싹쓱싹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절을 나가버렸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입니다.
둥근 종에서 울려 퍼지는 은은한 소리는 세파에 찌든 심란한 마음을 쓰다듬어 주어 마음을 맑게 해줍니다. 둥근 악기에서 뿜어 나오는 선율은 감미로워 즐거움도 주고 때로는 깊은 사색에 빠져들게 합니다. 둥근 항아리는 여백을 보여주어 내 마음을 비우게 만듭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열매는 둥글게 여물어 갑니다. 고목 곁이나 큰 나무아래 그늘에서 벗어나 햇볕이 있는 땅으로 바람 따라 굴러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나지 않고 둥글어야 합니다. 그곳에서만 싹을 틔우고 성장할 수 있으니까요.
둥근 것은 그리움의 영토입니다. 해도 둥글고 달도 둥글지만 내 마음도 둥글어야 합니다. 지구가 둥글고 그 지구를 에워싼 한 없이 넓은 허공조차 무한한 원의 도형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뜻하는 동그라미는 그냥 동그라미가 아니죠. 여기에는 시간적 공간적 테두리도 없습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도 없고 ‘이곳-저곳’이란 공간의 나뉨도 없습니다. 그럼 무엇이 있을까요, 테두리조차 없는 동그라미, 그 하나만은 온 우주에 꽉 차있을 뿐입니다.
원불교의 일원상一圓像은 형상으로 표현하면 동그라미 입니다. 진리의 상징적 표현으로 부처, 하나님, 진리, 도, 태극과 같은 궁극적 진리를 가리킨 답니다. 우주만유의 생성변화를 주재하고 있지만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색깔과 언어와 형상만 다를 뿐 신이 창조한 하나입니다. 다 함께 어울려 스님이 지운 경계와 구분 없는 둥근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옛날 돈 엽전을 보면 겉모양은 둥글고 안 구멍은 네모입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고 믿어서 만들었답니다. 나는 그 동안 살아오면서 엽전의 둥근 하늘 보다는 땅을 내려다보며 모나게 살아온 세월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큰 원을 대롱으로 보면 직선으로도 보입니다. 이 세상의 커다란 원을 속 좁은 대롱으로 바라보며 직선이라고 우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까이에서보다는 멀리서, 측면 보다는 고개를 돌려가며 둥글게 전체를 보아야 합니다.
스님은 동그라미를 그렸다가 왜 지웠을 까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한 세상에 태어나 같이 살다가 언젠가 모두들 죽음으로 끝을 맺습니다, 우주 생멸의 섭리로 보면 찰나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선을 그어 경계를 만들고 서로 구분하여 차별하고 질투하고 멸시합니다. 때로는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부자와 빈자라는 계층으로, 그리고 老, 少라는 세대 구별로, 피부 색깔로, 자기가 믿는 종교에 따라 경계를 긋지요, 너는 누구편이냐? 하면서 내 편이 아니면 미워하고 몰아내다 못해 총칼을 휘두르는 것도 불사하지요, 이 모두가 둥글지 않고 모가 난 때문이겠죠, 동그라미를 지운 스님은 10년의 세월을 수행하다보니 경계를 허무는 것이 진리의 첫걸음이라 생각한 게 아닐까요,
요즈음 국회의원 입후자들이 말하는 동서화합이니 국민화합이니 하는 말들도 여기에 해당되겠지요, 그 뿐일까요? 줄을 그려놓으면 자유와 억압, 삶과 죽음의 선이 생깁니다, 동그라미 이쪽의 삶에는 통제와 고통이 있겠지만, 동그라미 너머의 삶에는 자유와 환희가 있겠지요,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바람이 되고, 꽃이 되고 푸른 들판의 동그라미 밖일까요? 아니면 때 묻은 세속에 시달리는 안일까요? 우리는 내 것, 네 것, 내 사람 네 사람, 이란 이름으로 동그라미 안에 자기 영토를 만들어 놓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대시하며 동그라미 밖으로 밀어내고 있지요.
어제 일산의 호수공원에 갔었습니다. 조약돌 하나 수면을 향해 멀리 던져보았지요. 물수제비를 뜨며 둥근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번져가는 동그라미에 주파수를 맞추어 놓으니 낯설지 않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동안 가두어 두었던 기억도, 잊고 있던 소식들도 생각났습니다. 내가 그 동안 찾아 헤맨 시어詩語도 잔잔한 물결위로 떠올랐습니다. 나는 동그라미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잔물결의 동그라미가 호수가로 밀려오는 것을 보면서 부재했던 그리움 쪽으로 내 마음도 둥글게 물결 따라 가고 있었습니다.
내 나이 빛과 어둠이 녹아든 노년에 이르렀습니다. 흰 머릿결은 가늘어지고 이마에도 눈가에도 주름이 늘어났습니다. 이런 현상은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고, 모났던 마음은 둥글어지고, 다른 사람의 속도에 신경 안 쓰고 자기 능력에 알맞은 속도를 헤아릴 줄 알아야한다는 표시라고 생각됩니다. 그 동안 날카롭던 것은 유연해지고, 상처는 치유의 흔적으로 남아 모든 것에 감사하는 법을 터득해야 할 때입니다. 마음이 둥글어지면 친구가 찾아오고, 대할수록 넉넉합니다. 아무리 모난 마음으로 왔다가도 둥근 사람의 따뜻함에 그만 녹아지고, 아무리 큰 문제를 안고와도 둥근 사람에게는 작아집니다. 둥그러진다는 것, 그건 욱신거리는 상처를 머금고 사는 일일수도 있습니다.
둥근 나이테에 감긴 세월 앞에 넉넉해져야 하겠지요, 젊은이들이 생각할 수 없는 사유의 깊이로 세상을 헤아려야지요. 우리가 무심히 보고 있는 달의 앞면만이 아니라 그 뒷면도 볼 수 있어야 하는 혜안이 필요하지요. 세상을 평면적이거나 포물선으로 보다는 둥글게 본다는 것은 지식보다는 지혜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을 너그럽게 품고 사셨던 어머님께서 제게 늘 해주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애야! 세상은 모나지 않게 항상 둥글둥글 살아가야 한다.” 둥근 그리움의 영토인 어머님의 얼굴이 보름달로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