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몽룡을 위한 변명
나는 여름이 좋다.
“아휴 더워, 더워 죽겠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뭔가 살아있는 기분이 든다. 막상 미칠 듯 덥고, 눈 닿는 모든 곳에서 물이 주르르 흐를 것처럼 끈끈하고 괴로울 때면 이게 좋은 건지 아닌지 생각조차 할 수 없지만, 나가려는 정신머리를 살짝 붙들고 생각이란 걸 해보면, 그래도 역시 난 이런 여름이 좋다.
어릴 때 우리 집은 2층 단독주택이었는데, 내 방은 2층에서도 끝 방이었다. 바람이 통하지 않아 여름엔 정말 더웠다. 에어컨도 흔하지 않을 때라, 그저 각 방에 선풍기 하나로 여름 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밤에는 찬물 샤워한 뒤, 선풍기에 젖은 수건 올려놓고 냉큼 모기장 안으로 들어가 누워 조금이라도 시원한 바람을 얻기 위해 몸부림쳤던 기억이 난다.
공부하는 주체의 의지와 목적,
즉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라는 마음이 가장 중요
(출처: 픽사베이)
고1 여름방학 때 나는 두꺼운 세계명작소설전집 읽는 재미에 빠졌다. 엄청난 크기와 두께의 검은 양장본 수십 권. 시집간 언니가 보던 책이었는데, 보기만 해도 질려서 손을 대지 않다가, 그 방학 때 읽기 시작한 것이다. 스탕달과 마가렛미첼, 이광수와 톨스토이… 원하는 작가들을 종횡무진 오가며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책상에서 읽다가 자세를 바꾸고 싶으면 침대에 누워 읽기도 했다. 그러다 또 팔이 아프면 침대에 엎드린 자세로, 머리를 침대 밖으로 내민 채 팔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바닥에 펼쳐진 책을 넘겨가며 읽었다.
어느 더운 여름 그렇게 엎드린 채 책을 읽는데, 아래층에서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부르셨다. ‘으제니 그랑데’였는지 ‘골짜기의 백합’이었지, 분명 발자크의 작품이었던 것 같은데, 너무 빠져 있어 쉽사리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채근을 몇 번 더 받고서야 몸을 일으키니, 침대와 몸이 닿았던 부분이 땀으로 펑 젖어 쥐어짤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그 찜통더위 속에서 읽던 그때처럼 재미있는 독서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다.
꼰대 같은 말이 될지 모르겠지만 공부나 독서, 혹은 일을 할 때 주변 환경은 ‘어느 정도’는 중요하지만,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인은 아닌 듯싶다. 공부하는 주체의 의지와 목적, 즉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라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춘향이 집 찾아갈 저녁시간만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이몽룡
여기, 도무지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한 청년이 있다.
새 책을 내어 보니 시전이 선전되고 논어가 보국어되고 맹자는 탱자되고 통감은 꾹감되고 주역은 누덕이 되고 한줄이 두줄이 되어 글자가 모두 헛보일 제, 하늘 천(天)자 큰 대(大)되고 따지(地)자 못지(池)되고 쓸용(用)자 달 월(月)자 되고 날 일(日)자 눈목(目)자되고 손 수(手)자 발 족(足)자 되고 등 배(背)자 배 복(腹)되고 밭 전(田)자 가로 왈(曰)자라, 차례없이 누더기글로 읽어 갈 제
중략
자시(子時)에 생천(生天)하니 호호탕탕 하늘천, 축시(丑時)에 생지(生地)하니 만물 번성 따지. 춘풍세우 호시절에 현조남남 가물현. 금목수화 오행 중에 토지중색 누루황. 금풍사비 석기하니 옥우쟁영 집우. 안득광한천만간에 살기좋다 집주. 구년지수 어이할고 하우천지 넓을 홍. 세상만사 믿지마라 황단하다 거칠황.
중략
임 계신 곳 바라보니 천리만리 나물여. 이 몸이 펄썩 내려 평생소원 이술성. 춘하추동 다간 후에 송구영신 해세. 인간법을 마련하니 대전통편 법중율. 군자호구 네 아니냐 양구 상합 법중여(呂). 만반 진수 다들여라 맞절 보자 고로조. 나는 죽어 볕양되고 춘향 죽어 구름되어 날등빗치 빈난배필 게 뉘라 지엄하리 이룰치. 비우같이 뿌린 사랑 금석같이 맺을 결. 깊은 정을 서리상에 비할진대 송백강이 굳은 언약 제 어이 변할소냐
〔춘향전〕
춘향이 집 찾아갈 저녁시간만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이몽룡의 마음이다. 따지고 보면, 춘향이를 모티브로 연상해 공부하는 건 그리 나쁘지 않은 공부법이다. 그러나 이몽룡은 읽던 책 넣어두고 다른 책을 꺼내고, 또 다른 책 꺼내가며 도무지 마음을 잡지 못한다.
춘향이 집에서 놀고 있는 몽룡(영화 〔춘향뎐〕, 2000)
몽룡을 못 가게 막는 춘향(영화 〔춘향뎐〕, 2000)
드라마나 영화는 옛날에 공부 좀 한다 하면 과거시험 합격하는 건 당연하고, 장원급제 역시 무척 당연한 것처럼 그려놓았다. 그 대표주자가 바로 이몽룡이다. 이렇게 춘향이 생각에 몸이 달아 날뛰던 녀석이 갑자기 한양에 올라가 마음잡고 공부하니 무려 장원급제를 했더라… 니,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말이다.
실제로 과거에 합격한다는 건 1900대 1의 경쟁률을 통과해야 가능한 이야기다. 몇 십 년을 과거공부에 바치고도 합격하지 못해 아버지와 아들 2대가 함께 응시하거나 3대가 응시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성균관 입학을 위해 피 튀기는 경쟁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는 교수만큼이나 연륜이 보이는 유생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안도현’이란 유생은 자신을 가르치는 ‘유창익’교수와 어릴 적 동문수학한 사이로, 성균관에 새로 들어온 유생들이 처음에 안도현을 교수로 알았다가 유생임을 알고 놀라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성균관 안에는 지금 중학생 나이대의 유생으로부터 지긋한 나이의 중년 유생까지 다양한 연령의 유생들이 공존했을 것이다. 어린 동문들을 보는 나이 지긋한 유생들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2010(출처: KBS2)
〔성균관 스캔들〕이 말랑한 퓨전로맨스 사극이긴 하지만, 현재의 대학 생활에 비견할 수 있는 조선시대 엘리트들의 학교 이야기를 그렸다는 것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드라마에서 그리는 유생들의 수업시간, 특히 정약용 교수의 논어 수업은, 다양한 시청각 체험과 질문법을 활용하는 현재의 토론수업과 흡사하게 그려져 있고, 계절 따라 운동경기는 얼마나 많은지…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술과 가무를 좋아하는 우리 한민족의 특성상, 매우 역동적인 일들이 그 안에서 벌어지지 않았겠는가 상상해 본다.
해마다 소위 SKY대 신입생의 출신 고등학교가 어디냐에 따라 통계를 내, 서열을 정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역시 마찬가지여서, 각 교육 기관들은 성균관 입학을 위해 피 튀기는 경쟁을 했다. 그래도 역시 중부학당 출신의 유생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2017(출처: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사임당은 아들 현룡(율곡)을 중부학당에 들여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율곡으로 말하자면 장원급제를 무려 9번이나 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린 천재 중의 천재였는데, 그의 뛰어난 재주도 재주지만 훌륭한 어머니 덕이 크지 않았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이 드라마에서 사임당은, 다른 중부학당 자모들과는 달리, 자신의 아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을 꾸게 한다. 그리고 현룡을 비롯한 자녀들은 모두 그 꿈을 위해 공부한다.
‘공부해서 남 주는’ 일
사실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다. 그들의 공부법 역시 모두 다르다. 그러나 공부한 이후 어떤 길을 가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율곡이나 다산이 ‘경학’ ‘경세학’에 몰두했다면 서유구나 정약전, 연암 박지원 같은 인물들은 ‘실학’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영화 〔자산어보〕, 2021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이 어부 청년 창대를 직접 발로 뛰어 따라다니며 습득했던 물고기에 관한 지식, 스스로 노론이면서도 노론의 정치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쉰 살의 나이에야 수령으로 벼슬길에 오른 박지원이 농민들의 피폐한 삶을 돕기 위해 직접 제작했던 베틀, 수레, 물레방아, 그리고 귀양살이 내내 자신의 손으로 얻은 농축수산업, 원예, 요리, 지리, 의약 등에 대한 지식을 집대성한 풍석 서유구의 책들.
관료로 진출해 일하는 것도, 백성들의 삶과 함께하는 것도 모두 ‘공부해서 남 주는’ 일이지만,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는 희생이 따른다는 면에서 내겐 후자의 삶이 더욱 감동으로 다가온다.
사랑을 위해 공부하자
(영화 〔춘향뎐〕, 2000)
앞에서 이몽룡의 장원급제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입장을 바꿔 그를 위해 변명 한 가지 말하자면 -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당시 몽룡에겐 ‘춘향을 만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춘향을 떠나 어찌 장원급제를 했느냐고? 목표가 변했으니까. 춘향과의 사랑이 그저 한순간의 불장난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선, ‘춘향과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기’ 위해선 부모와 가문에 대해, 그리고 춘향에 대해서 떳떳한 남자가, 대장부가 되어야 했으니까. 벌 받지 않기 위해 하는 공부는 견뎌야 하는 고통이지만, 나의 사랑을 위해 하는 공부는 신나는 도전이니까.
나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외쳐보자. 사랑을 위해 공부하자고.
집필자 소개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