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다
꽃을 놓쳤다. 꽃가지를 꺾었는데 바닥으로 흩어졌다. 손은 빈 가지만 쥐고 있었다. 모래를 쥐었다. 손을 폈지만 시간 속으로 파묻혔는지 모래의 흔적이 없다. 쥐고 있다고 믿었지만, 손을 펴면 아무것도 없다. 그런 꿈을 꾸는 날 되돌아올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을 펼친다. 책갈피에 꽂아둔 단풍잎과 지난봄 보리수 가지에 남기고 간 새의 깃털 같은 것들을.
내 손은 무엇이나 잘 놓쳤다. 손을 놓치고 그릇을 놓치고 기회를 놓쳤다. 놓친다는 것은 안타까운 언어다. 나를 떠난 언어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간혹 다시 오더라도 언제인지 기약할 수 없다. 입술 밖으로 나온 말을 다시 주워 담지 못하듯 손을 놓은 관계들은 다시 손을 잡지 못했다. 그것들은 발자국을 지우며 고개 너머로 사라졌다.
손에서 놓친 것들은 엉뚱한 곳으로 가버렸다. 휴지는 하얗게 자신을 풀어헤치며 책상 밑으로 가서야 멈춰버리고 설거지하다 떨어진 접시는 와장창 몸을 부수며 바닥에 흩어졌다. 놓친 것들은 가속도가 붙고 엉뚱한 곳에 다다랐다. 의지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놓친 것들의 공통점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놓친 버스는 다시 타지 못했고 시간을 소비하고 미팅을 망치고 사람을 놓치는 릴레이를 했다. 내가 놓친 기회는 경쟁자에게 돌아갔고 내가 놓친 돈은 누군가의 지갑으로 들어갔다.
내가 놓친 소중한 것들. 한 번 놓친 희망들은 바늘처럼 촘촘히 가슴에 와서 박히기도 했다. 소망하는 것들이 나를 떠날 때 식어빠진 체념과 김빠진 무기력을 남겨놓고 가곤 했는데 길면 며칠, 짧으면 하루 이틀 동안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감정을 조절하느라 애를 먹곤 했다.
놓친다는 말은 하늘로 날아가 버린 풍선이다. 날개가 없는 것들에게 날아간다는 것은 아득한 실종이다. 아직도 기억에 또렷한 것은 동생이 놓친 풍선이었다. 그 헬륨 풍선을 우리는 ‘까치풍선’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에버랜드’지만 ‘자연농원’이라 불리던 곳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봄과 여름 사이로 기억된다.
자연농원에 놀러가서 남동생은 조르고 졸라 풍선을 손에 쥐었다. 결코 싸지 않은 풍선을 부모님은 망설이다가 큰 결단을 내리듯 사 주었다. 하얀 풍선. 가느다란 실에 연결된 하얀 고무풍선은 동생의 손놀림에 따라 우리 눈높이에 둥둥 떠 있었다.
그러나 동생의 행복은 길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풍선 끈을 놓쳤다. 동생의 울음이 풍선처럼 하늘로 높이 올라갔다. 자연농원 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생은 발을 구르며 울었다. 원망과 안타까움과 간절함이 묻은 동생의 울음은 하늘로 떠가던 풍선만큼이나 서럽고 아팠다.
무엇을 놓칠 때마다 나는 하얀 풍선과 동생의 울음을 기억해내곤 한다. 코발트색 하늘에 하얀 점으로 멀어져간 풍선. 소중한 것은 어처구니없이 떠나간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무언가를 놓쳤을 때 나는 하얀 풍선이 연상되었다. 동생의 그 집착처럼 끈끈하고 까맣게 절은 분노와 무력감을 되씹어보곤 하는 것이다. 신은 내 편이 아니라면서.
내게 있어서 놓치는 것과 풍선의 연합은 극단적 경험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체념과 슬픔을 함께 몰고 왔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자극과 무조건 자극이 여러 번 연합해야 고전적 조건이 형성 되지만 극단적인 고통의 경험은 단 한 번이라도 조건 형성 반응이 나타나듯 말이다. 전쟁이나 고문, 성폭력이나 가정 폭력처럼.
내가 놓친 어떤 손은 다시 오지 못했다. 병실에 도착했지만 이미 그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 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고 급히 갔지만 자동차는 골목을 헤맸다. 무거운 눈 입자들이 하얀 꽃잎처럼 떨어져 차 유리창에 내려앉았다가 이내 녹았다. 저녁은 일찍 시작되었고 우리는 너무 늦었다. 마지막 인사를 그렇게 놓쳤다. 이승의 끈을 놓친 손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내가 놓친 것은 따뜻하고 아프고 슬픈 손이었다. 나를 업어준 손이었고 등록금을 내어준 손이었고 내 생애 가장 사랑한 손이었다. 나는 끝내 그 손을 놓쳤다. 내가 놓친 것 중 가장 안타까운 것이었다. 그 손을 놓치고 나는 둘째에서 첫째가 되었다.
잡은 것보다 놓치는 일이 더 많다. 잡은 고기를 놓치고 집토기를 놓치고 가까운 것을 놓친다. 눈앞의 편리함 때문에 정말 소중한 것들을 놓치는 것은 아닌지. 지금도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을까 나는. 그리고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