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고후 3: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신약 성경, 특별히 서신서 이후부터는 ‘조문’, 또는 ‘법조문’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여 ‘영’, 또는 ‘성령님’과 반대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옛 언약 아래의 성도들은 돌 판에 새겨진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웠다면 새 언약의 성도들은 아예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신 성령님을 통해 모든 진리로 인도함을 받습니다(요 16:13).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나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mind에는 아직 육신(flesh, 하나님 말씀에 반대하는 사고방식으로 ‘죄의 본성’ 아님)이 남아 있기에, 우리가 내적으로 받는 인도가 참으로 성령님의 인도인지 확인하려면 말씀과 비교하여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약의 성도들에게 없었던 것을 우리가 가진 것이 있다면 바로 성령님의 내주와 인도하심입니다.
혹시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강행했을 때 차후 깊이 후회해 보신 적 있지 않으십니까? 여기서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또는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은데...’ 하는 것이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라면 그것과 반대로 행동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 하나에 ‘종교성’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화를 다들 아실겁니다(눅 10:30-37).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이 있었는데 당시 종교지도자였던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갑니다. 이들이 바로 우리의 종교성을 보여줍니다. 그들도 양심으로는 거의 죽게 된 그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는 걸 알았겠지만 그들이 따랐던 율법, 즉 법조문에는 사체를 만지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민 31:19). 그 법조문이 그들의 양심을 굳어지게 한 것입니다. 반면,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불리는 그 사람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의 마음 속 양심이 일하는 것을 막아서는 ‘종교성’이 없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구속사역 이후의 성도들에겐 양심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성령께서 내주하십니다. 죄책감을 함께 주는 양심이 아니라 항상 진리로 인도하시며 우리 안에 있는 의를 깨우쳐주시는 성령님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 시스템을 많이 받아들인 사람일수록 이러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힘이 듭니다. 세상 시스템으로 인해 마음이 무뎌져서(굳어져서) 성령님의 인도를 캐치하는 게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는데, '종교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절하면서도 하나님 뜻대로 한다고 오해할 가능성이 큽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예화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말입니다. 내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인지, 종교성이 강할 뿐인지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만 구분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성령의 역사라고 믿는 '그것', 내가 신앙을 지키는 행위라고 믿는 '그것', 그것들이 새 언약에도 나오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그래서 바울은 ‘이 세대('종교성'을 포함한 세상 시스템)’를 본받지 말고 mind를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롬 12:2). 우리 혼의 영역에 막힌 그 (세상 시스템의) 담을 허물어 우리 영 안에 가득한 진리의 보화들이 쏟아져 나오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성령의 인도를 받고 싶습니다. 받아라, 받아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먼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막거나 왜곡하는 우리 mind 속, 이 세상 시스템의 막힌 담을 허무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도 주께서 오실 길을 예비합시다. 더 가볍게 달리기 위해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립시다(히 12:1).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사귀어 주님의 진리 외에 온갖 잡다한 것들을 내 삶에서 끊어버리는 2024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