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 Frank William Schofield, 1889년 3월 15일 ~ 1970년 4월 12일) 선교사는
영국 태생의 캐나다 감리교 선교사이자, 수의학자이며 세균학자다.
일제 강점기 조선과 독립 후의 대한민국에서 활동하였으며,
제암리 학살사건의 참상을 널리 전파하였다.
그의 활동을 기념하는 뜻에서 '3·1 운동의 제34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가 만든 한국식 이름인 석호필(石好必, 나중에 한자어를 石虎弼로 개명.)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석호필은 한국 땅에 묻히길 원했고,
1970년 4월 타계해 서울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캐나다 출신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한국명:석호필)는
‘3.1운동의 34번째 민족대표’라고 불리우는 선교사이다.
1919년 2월 5일 저녁, 세브란스 학교의 직원 이갑성씨가
스코필드를 찾아가 두 가지를 부탁하였다.
"첫째, 독립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 백악관에 보내 주시오.
둘째, 평화시위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사진을 찍어주시오."
1919년 3월 1일, 스코필드는 한 손에 사진기를,
다른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파고다 공원에 갔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스코필드 박사는 총칼을 들고 진압하는 일제의 모습과
거기에 굴하지 않고 독립 만세를 외치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았다. 3.1운동 사진의 대부분은 스코필드 박사가 촬영한 것이다. 그는 만세운동과 독립운동가들이 감옥에서 당한 고문을 사진과 글로 세계 언론에 알렸다.
해방 후 영구 귀국한 스코필드 박사는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다.
그리하여 스코필드 박사는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힌 유일한 외국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일제가 사주한 사람에 의해 두 번이나 살해당할 위험을 겪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필드 박사가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였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힘이시오,
피난처시오, 요새가 되심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캐나다 출신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박사(한국명:석호필)는
‘3.1운동의 34번째 민족대표’라고 불리는 선교사이다.
1919년 2월 5일 저녁, 세브란스 학교의 직원 이갑성씨가 스코필드를 찾아가 두 가지를 부탁하였다.
"첫째, 독립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 백악관에 보내 주시오.
둘째, 평화시위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사진을 찍어주시오."
1919년 3월 1일, 스코필드는 한 손에 사진기를,
다른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파고다 공원에 갔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스코필드 박사는 총칼을 들고 진압하는 일제의 모습과 거기에 굴하지 않고 독립 만세를 외치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았다.
3.1운동 사진의 대부분은 스코필드 박사가 촬영한 것이다.
그는 만세운동과 독립운동가들이 감옥에서 당한 고문을 사진과 글로 세계 언론에 알렸다. 해방 후 영구 귀국한 스코필드 박사는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다. 그리하여 스코필드 박사는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힌 유일한 외국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일제가 사주한 사람에 의해 두 번이나 살해당할 위험을 겪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필드 박사가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였던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힘이시오, 피난처시오, 요새가 되심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바울은 두려움과 불안에 빠지기보다 믿음으로 "담대하라. 안심하라."라고 촉구한다. 불안은 상황이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에 나타난다. 그러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 가운데도 소망을 가질 수 있다. 바울은 배에 탄 사람들의 목숨을 부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담대하게 안심하라고 구원을 외쳤던 것이다. 우리도 바울처럼 믿음대로 되리라는 확신으로 구원을 선포하기를 소망한다.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선교사는 3·1 운동의 제34인으로 불리던 인물로
국립묘지에 최초로 묻힌 외국인이며, 유일한 외국인이다.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3번째로 수상하였다.
그는 세브란스 의학전문 학교에서 세균학자로 재직하던 당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만행을 카메라에 담아 외국에 고발하고,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각 나라 신문에 투고하였다.
당시 조선에 있던 수많은 선교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조선 백성의 편에 서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많은 힘을 기울였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결국 일제로부터 추방당했다.
그는 또한 세계적인 '수의학자'였고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병리학 강의를 맡았으며
지금도 수의대 구관 2층에는 문화훈장을 단 그의 사진이 걸려 있다.
1955년 그가 재직 중인 캐나다 온타리오 대학을 건강상의 문제로 그만두자
대한민국 정부는 그를 국빈으로 맞겠다고 연락을 했다.
1957년 그의 아내(당시 72세)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은 Canada의 민간 항공 조종사로 일하게 되자 1958년 한국으로 갈 뜻을 비추었다. 그러자 대한민국 정부는 광복 13주년 기념일 및 정부수립 10주년 경축 식전에
국빈으로 그를 초빙했고 8월 초 Canada를 출발한 그는 14일 김포국제 공항에 도착한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고 농촌생활은 허탈했으며
거리는 전쟁고아로 가득 찬 시기였다.
한국에 온 그는 8월 20일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을 방문하고 이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을 보였고 당시 학장이던 이영소 교수와 총장 윤일선 박사의 동의로
서울대학교 외인숙사에 방을 얻는다.
같은 해 9월초부터 그는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수의병리학을 강의하며
연세대 의과대학과 중앙대 약학대에서 강좌를 갖고 다른 대학에서도 강의를 시작한다. 그는 학교에 있으면서 50여명의 학생을 자신의 사비로 장학금을 만들어서 도왔으며
유학희망자들에게는 외국 대학의 장학금을 구해주고
적당한 일자리를 구해주는 등의 배려를 해 주었다.
10월 2일 경향신문에 를 통해 발전된 한국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당부했다. 그는 과거 한국에 있던 시절 지인들이 운영하는 전쟁고아를 위한 유린 보육원과 봉은 보육원을 Canada, 미국, 유럽의 수의사친구들을 통해 도와주었으며 그 해 일어났던 <2·4 정치파동> 즉 국가보안법을 강행으로 통과시킨 일에 대해 1959년 1월 3일 한국일보 1면에 [1919년을 회상케하다]라는 글을 써 이승만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정치적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Canada에서의 일들을 정리하고 한국에 영주하기 위해 5월 초 Canada로 돌아간
그는 9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동안 그의 친구들은 운영본부를 미국 Missouri주 Kansas시의 월간잡지 'Veterinary Medicine' 본사에 둔 'The Schofield Fund,'를 설립했다. 또한 한국에서 그는 연구 활동도 열심히 하여 돼지 위축성 비염에 대한 논문을 써 미국 수의학회지에 발표했다.
이승만 정권은 1959년 초부터 공공연한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을 해오던 박사에 대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다.
4월 신학기에는 대학에서의 강의를 반정부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명목으로 중지시키고 그와 친한 사람들을 위협하고
그의 거처인 4평짜리 외인숙사를 비우라고 통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의 시위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자
이후 새 민주당정권(장면 정부)은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12월 17일,
대한민국 수립 후 3번째로 스코필드 박사에게 수여하였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서울특별시 행운의 열쇠>를 박사에게 증정하였다.
또, 그는 61년 1월 한국일보에 <내가 본 한국혁명>이라는 4·19 목격기를 실었고,
같은 해 5·16이 일어나자 6월 영자신문 'Korean Republic'에
<5·16 군사혁명에 대한 나의 견해>를 투고하였다.
또 Canada의 Guelph시의 'Daily Mercury'지에 한국의 군사혁명을 소개했다.
한편 그는 한국의 제자들과 함께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여 [고양이 폐에의 Paragonimus의 침범], [창경원 동물원 꿩에 발생한 New-castle disease], [전염성 고양이 간염],
[한국소의 Globidiosis의 병리조직학적 연구], [돼지의 Pasteurella multocida에 기인하는 급성소염성 폐렴]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수의학자였다.
Ontario 대학에서 수의 병리학 교실의 정교수로 일했으며 독일 Munchen의 Ludwig Maximilian Univ.에서 명예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수의학회 연례회의 <국제수의학회상> 12번째 수혜자였으며
Canada의 프랑스계 수의학 협회로부터 를 받았다.
또 Toronto 대학의 개교 기념 100주년 기념식에서 명예 법학박사,
경북대학교 명예 수의학박사, 고려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서울대학교 명예 수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수의과대학 병리학협의회의 공로회원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의 유명한 업적으로는 [외관상으로 출혈성패혈증과 기종저처럼 보이는 새로운 소 질병의 원인체인 Sweet Clover]라는 논문에서 소의 사료로 쓰이는 부패한 Sweet Clover에 Cumarin이라는 혈액응고 방지성 물질을 밝혀내어 지금도 쓰이고 있는 살서제 Warfarin과 혈액응고 방지제 Dicumarol의 원료로 쓰이고 있다.
2012년에는 캐나다 국영방송 CBC 가 주도하여 건국 이래 캐나다를 빛낸 100명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는데 약 14만명의 대상자 중에서 선정된 것이었다.
Schofield 박사는 1970년 4월 16일 당시 을지로 국립 중앙의료원에서 영면하셨다.
사실 그의 한국 체류기간은 그리 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동안 그가 보여준 한국 독립운동에 일조한 노력과 인류애적 사랑을 실천한 베품의 정신, 그리고 한국 땅에 묻히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을 보면 그의 한국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가 서울대학교 수의과 대학에서 많은 학생을 도왔음에도
최근까지도 그곳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변변한 행사 하나 열리지 않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런한 그의 인류애적 실천을 기억하고 보답하자는 움직임이 최근들어 한국과 캐나다에서 동시에 서서히 일고 있다는 점이다. 은혜를 갚는 일은 축복이다.
그리고 사람 사는 도리이다.
2009년부터 스코필드 박사에 대한 추모 움직임이
캐나다 교민회로부터 시작되어 2012년 토론토에서
대대적인 추모 행사가 열리게 되었다.
2012년 6월 1일 오후 2시에는 토론토 시정부로부터 토론토 동물원안에 십만평의 부지를 기증받아 스코필드 박사 추모공원을 조성하게 되었다. 개막행사에는 마틴 연방상원의원과 마이클 챈 관광문화장관 등 60여 명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했다.
추모공원은 한국보훈처로부터 80만 달러, 온타리오 주정부로 40만 달러를 지원받아
기반 공사 및 스코필드 박사 동상을 세우는 등 1단계공사를 마쳤다. 추모공원에 들어설 정자는 한국에서 전문가가 제작하여 분해한 후 공수하여 현장에서 재조립하는 형태로 건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