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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 3국의 두번째 나라 라트비아입니다.
이 나라 역사도 파란만장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구글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똑똑한 네이버의
도움을 받아 검색 해 보았습니다.
1290년 게르만족 상인과 선교기사들이
건너와서 나라를 세웁니다.
격세지감이라면 이런 기분일겁니다.
유럽연합에 편입되기 전의 이곳
보더지역은 얼마나 삼엄한 곳이였을까요.
대단한 위세를 떨쳤을 세관 건물은
현재는 호스텔과 매점으로
초라한 신세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발트 3국은 나라 이름은 각각 다르지만
지정학적으로 이웃하고 있는 이유로
역사상으로도 거의 비슷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빌미가 되어
1591년 폴란드에 종속되었다가
1629년엔 스웨덴이 점령합니다.
1721년 표도르황제와의 전쟁에 패해
러시아 통치가 시작됩니다.
1918년 독립을 승인받였으나
1940년 다시 소련연방에 가입합니다.
2차대전이 발발하자 리투아니아와 함께
독일에 점령당해 그 치하에 들어갑니다.
아시다시피 독일의 패망으로 전쟁은 끝나고
다시 소련 연방으로 들어갑니다.
대부분의 구 소련 연방 국가들은
소련의 패망으로 자동적으로 독립을 얻었는데
이 나라는 독립쟁취를 위하여
가장 열심히 노력한 나라입니다.
반소 세력들과 급진 개혁파들이 일찍부터
영향력있는 독립세력으로 성장하여
소련 정부의 골치거리였습니다.
이들의 주도하에 1989년 8월에는
발트3국 공동으로 100만 여명이 참여하는,
620km에 달하는 '인간 사슬'시위를
소련당국을 자극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당시 무척 긴장이 고조되었는데
의의로 그렇게 소련이 무너지면서
주권을 되찾은 나라입니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 입구입니다.
시내 중심가에 미리 예약한 호스텔을
어렵게 찾아갔으나
당초의 입실 예정시각보다 늦었다고
숙박을 거절당했습니다.
텅 비어 있는 호스텔이면서
아주 불친절하고 퉁명하게.
여행사가 미리 정한 일정표대로
움직여야하는 그런 피동적인 여행이 싫어서
차를 가지고 출발한 우리 여행입니다.
떠나고 싶으면 떠나고, 더 있고 싶으면
그냥 눌러앉아도 되는 자유로운 여행입니다.
늦은 시간이였지만 다른 숙소를 찾아
잠만 자고 이튿날 아침 일찍
리투아니아를 향해 떠났습니다.
다소 주관적인 표현이겠지만
시골의 수준과 도시의 수준이라고 할까,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라트비아보다는
리투아니아가 훨씬 세련되고 친절하고
여유롭다는 것을 쉽게 알수 있었습니다.
리투아니아 제 2의 도시 Kaunas입니다.
고가도로에서 내려다보니 야영장이 있어
서슴없이 찾아갔습니다.
여행을 떠나 처음으로 캠핑을 합니다.
당초부터 유럽에서는 캠핑을 예상하고
그 준비를 했습니다.
차에 매달려만 있었던 어닝을
석달만에 처음으로 펼치자
몽골에서부터 따라온 흙먼지가
뿌옇게 떨어졌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도 많은 먼지가
굳게 잠긴 지퍼속까지 침투했을까요.
물 한 방울 없이 걸레질로만으로
오랜만에 간이 세차를 하였습니다.
그동안 캠핑카들이 줄을 이어 들어옵니다.
멋진 시설의 조리장, 더운 물 샤워장,
전기 공급장치에 풀장까지 있었습니다.
아직 물가가 저렴하다는 이 나라
저렇게 1박에 18유로입니다.
약 22,000원 정도입니다.
세면장과 조리대 청소를 마친 뚱보 아줌마
멋진 빨강색 비키니로 갈아입고선
수영을 하더니
금새 다시 옷 갈아입고
내게 윙크를 남기고 퇴근합니다.
'비키니는 나처럼 풍부한 여자가 입는거야'
하는 걸 너무나 당당하게 강조하는 듯한
자신감 가득 찬 그 모습이
초비키니 입은 미녀의 민망한 모습보다
훨씬 보기 좋았습니다.
사진? 비키니 보기 바빠서 못찍었습니다.
리투아니아의 Kaunas시 올드타운입니다.
대부분의 유럽도시들은
올드타운이 따로 있습니다.
경제규모가 성장하고 인구가 증가하자
구 시가지를 그대로 두고 도시 외곽에
거주지전용의 베드타운 신도시를
만드는 것은 우리와 유사합니다.
하지만 구 도시의 무분별한 신축 재개발을
엄격히 규제하고 잘 관리하여
오늘날 관광 산업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시청사 앞의 광장입니다.
역시나 큰 규모의 성당이 자리하고 있고
넓은 광장이 있습니다.
로마시대부터 광장은
시민들의 토론의 장소였다고 합니다.
그 토론을 통하여
민주주의가 성장했다고 배웠습니다.
또 어느 도시나 광장이 시의 중심입니다.
광장에 사람이 앉거나 쉬지 못하게
시설물을 설치하거나 통제하고 있는 도시는
현재까지 모스코바와 서울 뿐인 것 같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커피숍을 많이 이용하세요.
Kavine라고 표기 되어 있습니다.
커피나 음료 외에 음식도 팔고 있습니다
일반 식당보다 저렴하니 많이 이용하시길.
간단한 식사를 하고 나서 커피를 마셔도
우리나라 별다방이나 콩다방에서 마시는
아메리카노 보통 사이즈 한 잔 값이면
충분한 금액입니다.
우리나라..
소득수준이 많이 향상되었다는 것과,
그보다 물가수준은 더 많이 올라갔다는
사실을 여행다니며 자주 느낍니다.
그런데 광장 한복판의 자전거 장식은
어떤 의미일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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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이 열리면 친구들은
붉은 의상을 입고 축하를 해 주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
앞의 성당에서 결혼식 시작을 기다리는
아가씨들을 양해를 얻고 찍었습니다.
오른쪽의 할머니,
"젊었을 때 나의 그 미모를 따라오는 애는
하나도 없구먼...."
라고 하시는 걸 눈빛만 보고도 알았습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먹고살기가 바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세계입니다.
특히 글쓰는 사람과,
그림 그리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아! 음악은 좀 해 보았습니다.
가라오케 처음 들어온 시절부터 다녔으니
제법 오랜 시간 노래를 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이름의 그분이 가왕으로 등극한 탓에
너무 일찍 그 그늘에 덮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쩔수 없는
슬픈 사연도 내겐 있답니다.
숨은 그림 보너스가 있는 장면입니다.
시가지 한복판을 흐르는 강 건너엔
아직 공장이 머무르고 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개발이 더욱 진행되면
저 공장도 분명히
수년내 외곽으로 쫓겨나게 될 겁니다.
도시의 다른 광장에 장이 서고 있습니다.
장돌뱅이 출신이라 시장을 보면
둘러보아야만 맘이 놓입니다.
건물의 벽 전체를 장식한 벽화를
보는 재미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을 존경하는 마음이
또 솟구칩니다.
그림을 배우고 싶습니다. 특히 세필화를.
집에서 기른 유기농 과일과 농산물,
햄, 소세지, 치즈, 훈제 고기류, 수제 의류...
좋아하는 것들은 너무너무 많은 데
실을 공간도 모자라고, 게다가 돈도...
간식용으로 몇가지 과자를 샀습니다.
한참을 달리다 꺼내서 먹기 시작했는데,
차를 되돌려 시장으로 되돌아가서,
가진 돈 전부 털어서 사오고 싶을 만큼
맛있었습니다.
맛보다 가격은 더욱 맛깔스러웠답니다.
행여 리투아니아 여행가시면
커피숍과 광장의 시장을 꼭 기억하시길.
폴란드로 넘어갑니다.
차를 타고 유럽을 가시거나
유럽에서 렌트해서 다니실 경우에는
예전 국경지대의 이 안내판을 잘 보시고
충분히 납득하고 다니셔야
훗날 벌금고지서가
대륙을 건너 댁까지 찾아오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바이크가 당당한 대접을 받고 있음과,
시간대별로 제한속도가 다른 현명함,
소형차들의 성능을 존중하여 충분한 속도로
달리게 한 점 등은 본 받고 싶습니다.
2차선 국도의 제한속도는 90Km/h이며
고속도로 최고제한속도 140Km/h입니다.
이곳 사람들, 아마도
우리의 중앙고속도로 정도라면
속도무제한 도로로 지정했을 겁니다.
러시아를 벗어나 여기까지 오면서
도로에서 사고가 난 흔적이나
사고 현장을 본 적이 없습니다.
또 제한속도 이상 과속하는 차들도
본 적이 없습니다.
교통문화의 측면에서 보면 확실히
선진국이 분명합니다. 부러웠습니다.
캠핑장 팻말이 보이면 그냥 들어갑니다.
뭐든지 맨 처음이 어렵지,
한 번 해보면 두번째부턴 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랑한다고 하세요.
사랑하고 싶으면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세요.
인생 짧습니다.
망설일 시간조차 아깝습니다.
아무리 세탁을 잘 했다고 한들
남이 덮었던 그 이불,
남이 깔았던 그 요보다
내 낡은 번데기 침낭이 한결 편안합니다.
세간살이가 적나라하게 다 드러납니다.
어릴 시절 선생님 가정방문 오셨을 때의
느낌과 비슷합니다.
저 하얀 통에 담긴 체리 1Kg.
우리 돈 2천원쯤입니다.
과일로 요기가 된다면
과일만 먹으며 끼니를 떼우겠습니다.
식비도 절약되고,
좋아하는 과일 실컷 먹으며.
이튿날 바르샤바로 가다가 잠시 세웠습니다.
약 4천만, 우리와 비슷한 인구입니다만
전체 인구의 95%가 카톨릭입니다.
들판의 밀밭 입구에도 십자가를 설치하여
깊은 신앙심을 표시할 정도입니다.
작은 소도시 윔자입니다.
한때는 유럽 중부지역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대장 부리바의 나라였습니다.
지금 지도를 펴 보아도 러시아, 리투아니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
체코, 독일 등 7개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습니다.
아파트, 위 아래와 옆집만 있는데도
소음충돌 등이 쉼없이 생기는 데
7개국과 국경을 같이하니 오죽했을까요.
다른 나라들의 끊임없는
침입과 지배를 받았습니다.
근세에 와서도 100년이 넘도록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차대전 직후 독립하여 공화국이 되었지만
독일이 이 나라를 침공함으로써 다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고, 그후
독일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기온이 30도를 넘어서자
소방서에서 소화전에 호수를 연결했습니다.
광장에 물을 뿌리자 아이들 세상입니다.
광장은 저렇게 거추장스러운 것 없이
넓고 자유로워야 합니다.
바르샤바에 도착했습니다.
유럽 대도시의 주차전쟁은 악명이 높습니다.
미리 인터넷을 검색하여 시내 인근지역
캠핑장에 숙소를 확보하고
트램을 이용하여 시내 구경을 나섭니다.
별 네개짜리 캠핑장입니다.
대장 캠핑장 투숙 기념 팁입니다.
도로 근처의 캠핑장은 피하시길.
폭주족이 모여있는 캠핑장도 피하시길.
리조텔내에 클럽이 있는 캠핑장도
주저말고 그냥 통과하시길.
밤새 시끄럽습니다.
유럽의 도시에서는 트램이 재미있습니다.
국내에 없기 때문에 생소하기도 하고
창밖의 풍경도 즐기고, 주차걱정도 없습니다.
캠핑장 관리실에서 트램 승차권을
구입하여 나갔습니다.
최초 승차후 30분, 60분, 90분간 횟수나
차종에 관계없이 마음껏 환승할 수 있는
승차권 제도가 여기도 있었습니다.
바르샤바 광장입구에서 대리석 벤치를 베고
따스한 햇살아래 잠이 들면 어떤 꿈을 꿀까요.
당신의 삶도 영원하지 않다고,
그 삶에 예행연습도, 리허설도 없다고,
오로지 지금 매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하면
보다 나은 삶이 다가 온다고
얘기해 주고 싶습니다만 ,
말도 통하지 않고,
어쩌면 나보다 그가 훨씬 더 행복할지도 몰라
조용히 물러납니다. 사실은
저런데서 잠들 용기조차 내겐 없습니다.
꿈...
나이탓일까 요즘은 꼭 새벽녘에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드는데 전혀 다른 꿈을 꿉니다.
코페르니쿠스
1473년 이 도시의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이곳 크라쿠프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9년간 이탈리아와 그리스로 유학가서
철학과 천문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신부가 되었습니다
지구는 가만히 있고 하늘이 돌아간다는
교회의 천동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지동설을 주장합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한테도 욕을 실컷 듣고
나중에 교황한테까지 신성모독이라고
꾸지람을 호되게 듣습니다.
목숨걸고 지동설을 주장한 그의 용기.
옳다고 여기는 자기 신념을
목숨을 걸고도 굽히지 않는 그 용기가
요즘의 세상에선 보기 힘들어진 사실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그 유명한 성십자가 성당앞에
이렇게 잘 빠진 차가 정차하고 있었습니다.
일반인들이 죽어서나 한 번 타본다는
그 차라고 하기에는 투명한 뒷창이 거슬리고.
성당에 생화환을 배달하는 자동차였습니다.
잠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요한 바오르 2세
나는 무종교자입니다.
하지만 이 분은 알고 있습니다.
1978년 10월 교황에 피선된 요한 바오르 2세.
내가 군복을 입고 있던 84년 5월,
비행기 트랩을 내려와
처음 밟는 우리 땅에 입 맞추시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이분은 89년도에도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정치문제 해결을 위해
고르바초프 서기장도 만났고,
쿠바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전세계를 다니며 지상의 평화와 화해에
전력을 기울이는 모습에
많이 감동했었습니다.
카톨릭이 역사적으로 저지른 죄악에 대해서도
주저함과 망설임 없이 사죄를 실천하던
진정 평화의 사도 같은 느낌으로 기억합니다.
2005년도에 병환끝에 선종하셨습니다.
성당에는 다니지 않지만 무척 슬펐습니다.
성당 안에서 정문 밖을 내다본 모습입니다.
세상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진 모습이
무척 인상적으로 여겨져 사진에 담았습니다.
쇼팽
"때로는 그저 신음하고 고통스러워 하다가,
내 절망을 피아노에 쏟아낼 수 밖에 없습니다.
러시아 치하의 조국 폴란드를 생각하며"
Sometimes I can only groan,
and suffer,
and pour out
my despair at the piano!
그의 노트에 친필로 적혀 있다는 글귀입니다.
피아노를 배우면 건반이나 악보보다
먼저 만나게 된다는 그의 이름입니다.
불운한 시절의 폴란드에서 태어나
20살에 파리에 정착하게 되고
주옥같은 피아노곡을 이 세상에 남겨두고
39살에 결핵으로 사망합니다.
그렇게 음악과 살다가
죽고 나서야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묘비석 아래의 성당 지하에
그의 심장이 묻혀있다고 합니다.
안중근의사의 유해가 생각납니다.
내가 살던 동네 효창공원에
님의 가묘는 외로이 있는데...
코페르니쿠스, 쇼팽, 퀴리부인, 그리고
456년만에 처음으로 이탈리아 사람이 아닌
다른 국적의 교황인 요한 바오르 2세 외,
폴란드의 수많은 훌륭한 인물들이
이 바르샤바 국립대학을 통해 배출되었습니다.
1816년에 설립된 이 대학교는
국립대이기 때문에 등록금이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기숙사가 무려 6개 단지로 되어 있어
거의 전교생이 기숙사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지리적으로는 물론이고, 현실적으로도
우리하고는 너무나 동떨어진
세상임이 분명합니다.
봉체조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한명이 꾀부리면 다른 사람은 죽을 맛입니다.
무거워 도망갈까봐 하체가 없는 조각이라고
혼자서 헛설명해 봅니다.
상트에서부터 이런 테라스양식들이
많이 눈에 뜨였습니다.
아마도 여기서 보고 빼낀 듯 합니다.
왜 내가 카메라만 들면
아가씨들이 서둘러 다가오는 걸까요.
바르샤바에서는 한 블럭마다 성당이 있습니다.
그만큼 신앙심이 돈독하다는 반증이겠지요.
성당입니다.
시가지 한가운데서 집총한 군인들을 만납니다.
모스코바도 아닌데..
쇼팽공원으로도 불리는
와지엔키공원의 광장입니다.
공원이름이 외기 어려워
결국 수첩에 적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고층건물이 있는
지역이 신시가지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이런 너른 광장이
부럽다는 말입니다.
자세히 보면 앞의 사진의 군인들입니다.
이 공원에도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습니다.
2차대전 전몰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뜻깊은 불꽃입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왼쪽은 차렷 자세가 별로 마음에 안듭니다.
아마도 고참인 모양입니다.
공원 근처 식당의 화장실입니다.
바닥의 타일이나 세면대등이
흔히 보아왔던 상식적인 모양새와는
판이하게 다른 수준입니다.
변기도 상식을 벗어나는 모습입니다.
좋은 디자인을 위해서는 상식을 깨뜨려야
하는 게 분명합니다.
비교적 우리에겐 생소한 이름입니다.
Adamowi Mickiewiczowi
폴란드를 다니며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의
다음으로 이 사람의 동상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교황의 동상은 심플하고 단아한데
이 양반의 동상은 하나같이
화려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19세기의 폴란드 낭만시인이라고 합니다
그는 상트 페트로브러크대학의
교수였다고 한다.
웅장한 모습의 바르샤바 왕궁입니다.
14세기 처음에는 목조 건물이였다고 합니다.
그후 수도가 크라쿠프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붉은 벽돌로 재건축되었다고 합니다.
화강암이나 대리석이 아닌
벽돌로 지은 왕궁이나
충분히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젠 아줌마들도 내 카메라앞에 모입니다.
바르샤바 구시가지입니다.
물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곳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공습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다고한다
대단한 사실은,
단순한 복구작업이 아니고
군관민이 합동하여 그 폐허속에서
파손된 건물 조각이나 유물의 일부,
부서진 건축재료 등을 최대한 확보하고,
엄격한 고증을 거쳐 거의 원형 그대로
도시를 복원해 내었다고 합니다.
이런데서 이들의 대단함과 장기적인 안목,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일찍 간과하는
현실성에 진정으로 감탄하게 됩니다.
구시가지 작은 호텔의 창문 장식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올려다보며
사진을 찍을만큼 유명인입니다.
이런 사소한 디테일들을 즐기는 재미가
여행의 피로를 줄여줍니다.
영감님 초상권?
그런거 없을 겁니다.
바르샤바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랍니다.
성당건물과 벽을 같이하며
다른 건물들이 붙어있습니다.
우리네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감히 불경스럽게 성당에 붙어서 건물을 짓다니...
그만큼 성당이 서민들에게 친숙하기 때문인가요?
이런 작은 골목 입구의 돌계단이나
벽의 가장자리 등 모든 부속 건물들까지
낡고 오래된 것처럼 보이기 위해
계획적으로 복원된 것이라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이 지역 건물들의
외부 수선공사 등은
시 당국의 엄중한 심사를 거쳐야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관리되며 만들어진
시광장의 모습입니다.
비슷비슷한 크기이면서
똑같은 성냥갑 건물은 한 동도 없습니다.
모양과 크기, 높이 뿐만 아니라
색상도 같은 계열이지만 제각각입니다.
이런 걸 보려고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광장 한복판의, 바르샤바의 심블
인어공주입니다.
1855년에 만들었다고 표시되어 있으니
당연히 전후에 새로 복구된 동상일 겁니다.
바닷가에서 아름다운 선율의 노래로
선원을 홀려 배를 침몰시키는 게
전문이라고 들었는데
칼과 방패를 들고 도시 한가운데 있다는 게
조금 생뚱맞기도 합니다만
이곳의 트래이드 마크로 자리잡았으니
변신 전업에 성공한 셈입니다.
성곽의 한쪽 벽면에
2차 대전 당시의 참상과
전후의 복구과정이 담긴 사진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상 이런 비극은
두번 다시 생겨서는 안될 것입니다.
공원 외곽에 저렇게 여유롭고
고풍스런 집들이 눈길을 끕니다.
넓은 시선이 확보되는 높지 않은 주택
고개를 위로 젖히지 않아도
하늘이 보이는 주택
똑같은 모양이 아닌 저마다 개성이 있는 주택
나무와 숲과 잔디가 있는,
초록을 바탕으로 하는
이런 집들이 좋은 주택이라고
혼자 결론을 내려 봅니다.
유럽의 여느 도시처럼 이곳도
페인트 낙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상점 진열장, 지하철, 육고, 담벼락...
도시 곳곳에서 낙서하는 현장을 보면
바로 신고해 달라는 안내문을 보았습니다.
멋지고 훌륭하여 저절로 감탄이 나오면
예술이 되는 데 아직 그 수준이 안되니...
보금자리 캠핑장으로 가는 트램을 기다립니다.
이 오래되고 멋진 도시에도 독서를 즐기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우리와 크게 다른 점 중의 또 하나가
길 가면서, 카페에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거나
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열명중 아홉명이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서울의 지하철 풍경.
근데 그 풍경이 조금씩 그리울 때가 있으니
여행 기간이 제법 되어가나 봅니다.
http://blog.naver.com/feelyoume
세 식구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한 자동차여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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