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09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 15절-17절
1598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심당길의 14대 후손으로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도 세계적인 도자기 공예가로 성공한 심수관씨가 한국에 귀국했을 때 강연을 했던 내용입니다.
그가 초등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께서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물레 위에 고령토 진흙 덩어리를 올려놓고 그 물레 한가운데 진흙 위에 바늘을 꼽았습니다. 그리고 물레를 돌리면서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심수관씨에게 물었습니다.
“이걸 보고 뭘 느끼느냐?” “돌아가는 물레 위에 움직이지 않는 바늘이 보입니다.”
“그래 참 잘 보았다. 돌아가는 물레 중심의 움직이지 않는 중심이 앞으로 네가 추구해야 할 인생이란다.”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하신 말씀이지만 그는 너무 나이가 어려서 그 의미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이 아주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의미를 알 수는 없었지만 마음 속에 오래 간직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성장해서 아버지로부터 도공의 삶을 이어 받았을 때에는, “끝없이 기술을 연마하라”는 의미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 말씀의 의미는 “비록 일본 땅에 와서 일본말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조선 도공의 얼을 이어받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말고 살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라고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돌아가는 물레, 즉 일본이라는 이 물레를 쫓아가다가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결코 일본 도공들을 흉내 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네 몸 속에 흐르는 조선인의 피, 네가 가지고 있는 조선인의 얼, 네가 가지고 있는 조선인의 손가락, 그것으로 조선인만이 빚을 수 있는 도예품을 만들어야 이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 현실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진리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중심의 바깥쪽은 너무나 빠르게, 그리고 현란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는 정신이 돌아 버리던지 엉뚱한 곳으로 튕겨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중심을 바라보면 진리의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른 신앙인,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중심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형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킵니까? 바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은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진정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요한복음 21장을 통해서 참사랑의 실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그러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결단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지난주에 이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먼저 예의를 갖추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저희가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렇게 부르는 것은 아주 격식을 갖추어 부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상대를 부를 때, 두 가지 방법으로 부릅니다.
한 가지는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부르는 방법이며, 또 한가는 그의 출신 지명을 부르고 이름을 부르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새의 아들 다윗’ ‘여분네의 아들 갈렙’ ‘눈의 아들 여호수아’ 등으로 부르는 방법과 ‘나사렛 예수’ ‘디셉 사람 엘리야’ ‘가룟 유다’ ‘아리마대 요셉’등으로 출신 지명을 부르고 이름을 부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의를 갖추어 상대를 부르는 것은 먼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고 나중에 부르고자 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신 것은 베드로에게 예의를 갖추어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를 어떤 관계입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스승과 제자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같이 사도가 땅에 떨어진 세태에서 스승과 제자로 맺어진 것이 아니고, 당시에는 스승은 주인이나 마찬가지이고, 제자는 종이나 마찬가지인 관계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 (Lord)라고 부르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종이나 다름없는 제자, 그것도 예수님을 배반해서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 수 없으므로 잔뜩 기가 죽어 있는 눈치만 보고 있는 베드로에게 예의를 갖추어 불러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뿐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그렇게 불러 주셨습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예의를 다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요한복음 13장 4절에서는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족식을 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하여 겉옷을 벗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무릎을 꿇고, 열두 명을 차례로 발을 씻기시고 난후 12절을 보면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승이면서도, 주인이면서도 더구나 조금 후면 비겁하게 도망할 제자들에게 최선을 다해 예의를 갖추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최대의 예의를 갖추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들입니까? 우리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감히 입을 열어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는 미련한 존재들이고,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더러운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시면서 빈손으로 오시지 않으시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면서 찾아 오셨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므로 ‘예’를 다하여 하나님께 ‘경배’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최선을 다해 예의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예의를 갖추게 됩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면 주님을 저주까지 했던 베드로가 주님께서 자신들 찾아오셨다는 말을 듣고 놀라운 변화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성미 급한 베드로가 벗고 있었으면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었을 것을, 바다에 뛰어들면 바닷물에 젖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의를 갖추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예의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을 예의로 감동시켜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예의를 갖추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먼저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배반자라고 추궁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방법은 아주 독특합니다.
누가복음 5장 4절에서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하셨던 주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요한복음 21장 6절 말씀으로 맨 처음 주님과 베드로가 만났을 때를 재현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8장 18절에 “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라고 예수님을 부인하던 상황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에게 “이 배은망덕한 배반자야!”라고 윽박지르지 아니하시고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올려 있고, 떡도 있더라.”라고 요한복음 21장 9절을 통해서 배반하던 상황을 재현시켜 베드로 스스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우리에게 먼저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무슨 기회를 주신 것입니까? 바로 우리가 먼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사랑은 오래 참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오래 참는다’는 헬라어 ‘마크로뒤미아’(makrothumia)에 해당하는데, 이 단어는 ‘디오’(dio)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 뜻은 ‘희생한다’ ‘나를 바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말씀은 ‘사랑은 기회를 주는 것이라’는 말씀이며, ‘기회를 준다’는 것은 ‘사랑은 나를 희생하는 것이다’ ‘사랑은 나를 바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배신했던 사람이 정신 차리기까지 기다리는 것은 그만큼 내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위선적인 모습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으로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내가 그만큼 고통을 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내 속이 타고, 내가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면서 나를 희생하며, 나를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수고가 따른다”고 말씀하셨지요. 주님께서도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가 사해지기 위해 주님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고, 바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추궁하기 전에 스스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추궁하기 전에 먼저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먼저, 모두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주님께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하셨던 명령입니다. “네 말대로 나를 다른 사람들보다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고,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들에게 이렇게 하라.”라고 하신 명령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주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베드로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으시고 난 후에 “나를 사랑한다면 나에게 이렇게 하라” 하지 않으시고 “내 양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뿐만이 아니라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에서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양들은 어떤 양들을 의미합니까?
맨 처음의 ‘어린 양’은 ‘아르니온’(arnion) 즉 ‘갓 태어난 양’을 뜻합니다. 두 번째 ‘양’은 ‘프로바티온’(probation)입니다. 이것은 ‘성장 중에 있는 양’ 즉 ‘청년기에 있는 양’을 뜻합니다. 세 번째 ‘양’ ‘프로바톤’(probaton)은 ‘성장이 끝난 양’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명령하신 의도는 무엇입니까?
바로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아르니온’ 즉 너보다 연약한 사람, 너보다 수준이 낮은 사람도 무시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프로바티온’ 즉 나와 같은 사람들끼리도 서로 경쟁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나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프로바톤’ 즉 너보다 수준 높은 사람들도 질투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보다 수준이 낮고 약하면 경시하기 쉽습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은 경쟁의식을 느끼기 쉽습니다. 또한 나보다 잘난 사람에게는 질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써 ‘먼저’ ‘어떤 사람이든’ ‘모두’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먼저 모두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은 ‘먼저 찾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찾아가 말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먼저 찾아가 말을 걸고 그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먼저 찾아가서 말을 걸고 그의 필요를 채워줬다고 해서 무시하지 말고,
‘예의를 갖추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참고 ‘회개할 기회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지 말고, 나보다 연약하고 수준 낮은 사람도, 나와 같은 사람도, 그리고 나보다 높고 잘난 사람도 모두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의 모습을 두 주 동안 생각해 보면서 두 종류의 반응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아주 어렵다’는 반응일 것이며, 또 한 가지는 ‘아주 쉽다’는 반응입니다.
그렇다면 왜 ‘아주 어렵다’고 말씀하십니까?
바로 자기 의지로 사랑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찌하여 ‘아주 쉽다’고 말씀하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셨고, 지금 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함께 하시니 그분이 도우시면 무엇이 어렵겠느냐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랑을 배웠어도 내 의지로 실천하려면 作心三日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시면 너무나 쉽습니다. 성령은 사랑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이렇게 혼란한 시기가 있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혼란 속에 있습니다.
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정부 여당은 야당 연합에게 많은 의석을 내 주고 말았습니다. 여소야대입니다. 그래서 윤석열 대통령은 남은 임기를 제대로 마칠 수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위기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어떻게든 반드시 어떤 결과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에 반드시 결과를 남깁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가? 어떻게 사랑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순종했는가? 분명히 결과로 남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결과를 남기시겠습니까? 바라기는 주님처럼 섬기고 사랑했던 사람이라, 작은 예수로 살았던 사람이라는 결과로 남기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