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중매를 찾아서
전남 순천엔 유명한 절 세 곳이 있다. 송광사와 선암사, 금둔사다. 우선 송광사는 한국 불교의 승맥을 잇는 승보사찰이다. 보조국사 지눌을 필두로 열여섯의 국사를 배출한 이 절은 상보사찰 중 하나(승보사찰)다. 조계산 넘어 태고종 본찰인 선암사는 건축물로 유명하다. 맞배지붕이 처마를 잇대어 가는 절집 건물은 한국적인 절의 옛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한 곳으로 꼽힌다. 심지어 돌다리가 보물로 지정되고 칙간까지 문화재인 절이다. 반면 금둔사는 겉보기엔 큰 특징이 없는 작은 사찰일 뿐이다. 하지만 이곳은 봄의 사찰이라 부를 만하다. 해마다 가장 먼저 홍매화를 피우기 때문이다. 하여 마음 급한 상춘객들은 이맘때면 꼭 이 절을 찾는다. 눈이 귀한 남도 땅이지만 운이 좋으면 눈 속에서 소담하게 피어 있는 설중매를 보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기자도 그런 행운을 얻을 뻔했다. 지난 18일 오전 서울을 출발할 때만 해도 조금 흐린 정도였는데 도중에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매화만 피었다면 설중매를 구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은 이미 제한속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함양을 지나면서 눈은 그쳤다. 간간이 햇살까지 내비쳤다. 조바심 속에 낙안 금둔사에 도착했을 땐 뒤쪽 금전산 봉우리와 대웅전 기와에 잔설의 흔적만 남았을 뿐, 매화 가지에 앉았던 눈은 영롱한 물방울로 변해 여린 꽃잎을 씻어주고 있었다.
"참으로 장관이었지라. 불공드리고 나서는데 산은 중턱까지 허옇고 그 속에서 홍매는 더 벌건디, 혼자 보기 아깝더만요." 속세에서 사진을 찍다 머리를 깎았다는 금둔사 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런 장관이 올 겨울 들어 벌써 세 번째 연출됐다고 한다. 꽃이 일찍 피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음력 설을 전후로 피지만 올핸 정초부터 붉은 자태를 선뵈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에 눈이 내리면 그대로 설중매다. 하지만 남도의 햇살은 쉽게 눈을 거둬가니 장관을 목도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단다. 위로 아닌 위로인 셈이다.
*** 매화에 집착하는 이유
"매화에 물을 줘라(命淮盆梅)." 퇴계 이황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평생 매화를 가까이 두고 매화에게 국사를 의논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매화사랑이 지극했던 퇴계다. 퇴계처럼 유별날 정도는 아니라도 옛 선비들은 대부분 매화에 매료됐다. 엄동의 추위에도 의연하게 꽃을 피워내는 절개가 가상하고 느껴질 듯 말 듯 은은하게 풍기는 향이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문인이 매화를 칭송하는 시를 짓고 화폭에 매화를 담는 일을 수양의 일부로 생각했다. 이른 봄이면 눈 속에 묻힌 매화를 찾아 탐매(探梅)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금둔사의 홍매는 선비들의 흠모를 받았던 토종 매화의 계보를 잇는다. 20여년 전 사찰이 중건될 때 고개 넘어 선암사 주지 지허스님이 낙안마을 조씨 집안의 고매에서 몇 그루 얻어와 경내에 심은 것이 오늘날의 금둔매다. 비록 수령이 짧아 가녀리고 성긴 가지지만 가장 먼저 붉은 꽃잎을 토해내 기어코 봄의 약속을 잊지 않는 생명력은 옛 시조의 글귀 그대로다. 아랫동네 매실농장의 왜매처럼 일시에 와락 꽃을 피워내지도 않는다. 그저 십여 송이가 피었다가 추위에 사그라지면 다음 십여 송이가 망울을 터뜨리는 식이다. 외롭게 봄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봄볕 따스해지면 고개 넘어 선암매나 광양.해남의 청매에 영광을 물려주고 다음 봄을 기약하는 것이 금둔사 홍매인 것이다.
이번 추위에 화사하게 피었던 몇 송이 붉은 꽃잎은 시들고 말았다. 하지만 추위를 묵묵히 견딘 가지 끝에는 봄기운을 가득 머금은 꽃망울이 다시 부풀고 있다. 물방울 머금은 꽃망울은 영롱하기까지 하다. 마지막 추위가 지나가면 보란 듯 꽃을 피워낼 것이다. 몇 발자국 떨어져 대웅전 정면에 서있는 청매에도 반쯤 터진 꽃망울이 그득하다. 금둔사는 봄꽃 동네의 초입이다.
*** 여행정보
호남고속도로 승주IC에서 나와 857번 지방도로를 타면 선암사.금둔사.낙안읍성이 차례로 나온다. 서울에서 순천역까지 하루 10여 차례 기차가 다니며 순천역에서 낙안읍성까지는 63번 버스를 타면 된다. 순천역에서 낙안읍성까지 자동차로 20분 거리. 읍성에서 금둔사는 5㎞, 금둔사서 선암사는 11㎞ 떨어져 있다. 선암사는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가 8점이나 있지만 엉뚱하게도 가장 유명한 것은 해우소다. 여느 재래식 화장실과 달리 남녀 화장실의 입구가 하나로 가다가 양쪽으로 갈라진다. 벽과 문으로 꽉 막히지 않고 바람과 햇빛이 스며들어와 서늘하면서도 양명하다. 창살 사이로 겨울 눈꽃이며 봄의 매화가 어릿하게 눈에 들어온다. 선암사에 심어진 홍매는 수령이 600년을 넘겼지만 해마다 가장 화사한 꽃을 피우는 것으로 유명하다.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위치한 송광사까지 6.7㎞의 산행길도 권할 만하다. 굴목재를 지나지 않고 조계산 정상으로 돌면 한 시간 정도 더 걸린다. 금둔사 코앞에는 낙안온천이 있다. 2003년 문을 연 '시험온천'이지만 수소이온 농도가 가장 높아서 한국 온천 중 수질이 가장 매끄럽고 깨끗하며 아토피성 피부질환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061-753-0035, 5000원) 내쳐 낙안읍성까지 가면 100채가 넘는 초가집의 물결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것도 박제화된 전시용 건물이 아니라 처마에 시래기가 달리고, 담장 안에서 개가 짖는 진짜 집들이다. 1.4㎞에 이르는 성곽 위를 걸으면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질녘 밥 짓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마을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것만으로도 옛 마을의 정취에 흠뻑 취할 수 있다. 많은 주민이 민박(1실 3만원)을 하므로 하룻밤 묵어가기에 좋다. 민속마을 보존회 사무실(061-754-3150)에 연락하면 숙소를 안내해 준다.
첫댓글 매화의향기가.........................그리워지는 게시물.......*^^*
포토사랑방에 들렀다가오니 반가운 금둔매가 다시 반겨주네요 영롱히 맺힌 눈녹은 물방울을 매달고서~~~~
영롱한 매화좋네요...송광사들려 .낙안읍성 가봤는데 정말 성곽위를 걸으며 마을을 보았는데 참 멋있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