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 18,15).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짓거든 단둘이 만나 타이르고, 그래도 안 되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타이를 것이며, 그래도 안 될 양이면 교회의 도움을, 그래도 안 될 때에 비로소 다른 민족 사람이나 혹은 세리처럼 여기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해 본다면, 남의 죄에 무관심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분명 공동체이고 하느님의 한 자녀이기 때문에, 나 혼자만의 평안이나 나 혼자만의 구원은 결코 우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나 자신만 죄를 피하면 그만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깨우쳐주신다. 아마도 남의 죄에는 무관심하고 오히려 남의 죄를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냈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안전장치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죄’에 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 결코 나와 의견이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 단죄하라는 말씀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나와 이견을 가진 이들의 생각을 ‘나쁜 것’이라고 쉽게 판결내리고 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만 의견이 다를 뿐인데, 그것을 마치 ‘죄’ 문제로 비화시켜서 단죄하는 것은 결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닐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남의 ‘죄’에 대하여 접근할 때 ‘참견’이 아닌 ‘사랑’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의로움을 더욱 빛내기 위해서 남의 죄에 접근하는 것은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이 일삼던 일일 뿐이다. 진정 그의 구원을 걱정해주지 않는 ‘참견’이라면 오히려 도움보다는 해가 되지 않을까?
뭐니뭐니해도 사랑이 최고다. 모든 것은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도 사랑 때문이 아니었던가? ‘사랑’이 전제되어야만 남의 죄에도 무관심하지 않고, 나 혼자만의 평안도 꿈꾸지 않을 것이며, 남으로 하여금 진정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나의 ‘희생’도 감수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율법 전문가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으로 남을 단죄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던 이들에게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라는 말씀은 굉장히 충격적이지 않았을까?
“형제 여러분,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로마 13,8; 제2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