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를 준비시키시는 하나님
사도행전 7:17~22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스데반 집사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내기 위하여 모세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그를 준비시켜 영적 지도자로 세워가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섭리를 보게 되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무지함을 보게 되며,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하나씩 준비해가시는 하나님의 기이한 손길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본문 말씀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교훈들을 배워가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라는 것은 창세기 15장에서 나오는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국 땅에 나그네로 지내다가 그곳에서 종이 되어 사백년 동안 괴로움을 당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심판하시고 그 백성을 이끌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나와 하나님을 섬기게 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이제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이 지낸 지 4백년 기간이 차가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들일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도 이루시고자 그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그 사백 년 동안 크게 번성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그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모세를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한번 하신 말씀을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가십니다.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장래 일도 다 정하시고 그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세상 역사는 우연도 아니요 방향 없이 흘러가는 것도 아니요 인간 자신이 역사의 주체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로서 그의 뜻과 계획을 따라 하나 하나 이루어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전세계적으로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보면, 우연히 일어나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이미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한 일들인 것을 우리도 실감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일어날 징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1:10 이하에서 이렇게 예고하신 바 있으니,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 전쟁, 큰 지진, 전염병, 각종 폭염, 우박, 무서운 폭우, 기근 등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주변의 북한, 중국, 미얀마, 베트남,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 저 인도 지역에서 끊임없이 기독교인들이 박해의 대상이 되어 피 흘리고 있지 않습니까? 저 인도 북동부 마니푸르 지역에서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무장한 폭도들에 의하여 마을이 불태워졌고 기독교인 남성들은 힌두교 폭도들에게 맞아 죽고 여인들은 발가벗겨졌고 집단 강간을 당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경찰들도 그러한 폭도들의 행위를 방조하고 내버려두었습니다. 인도 매니푸르 주의 기독교인들이 항의하고 데모하니까 인도 언론에서 뒤늦게 문제를 삼고 반응을 하고 있지만, 지난 5월에 일어난 이 포악하고 흉측한 박해가 우리 기독교인들이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박해당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전 세계적인 박해 현상도 주님이 미리 말씀하신 말세의 징조로서 오늘날이 세상의 끝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는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구원과 영광을 위하여 세상의 모든 역사를 그의 정하신 계획대로 지금도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말씀들은 하나도 헛되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놀라지 말고 두려워 말고, 하나님의 손에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삶을 맡깁시다. 주님께서 친히 이르시기를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누가복음 21:17~19)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우리 자신이 박해의 현실을 맞닥뜨릴지라도 두려워하지 맙시다. 만약 우리가 박해를 당할진대 도리어 우리에게 영광의 영이 함께해주실 것이요 장차 지극히 영광스러운 상이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과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만사를 주관하시고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보호해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기도로 맡깁시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순전한 믿음을 지켜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8절 말씀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애굽에 새 왕조, 새 정권이 들어서서 요셉의 공적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왕이 들어선 것을 말해줍니다. 요셉은 애굽 역사 속에 큰 위기를 건너게 해준 큰 인물이기 때문에 새 임금이 요셉을 알지 못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새 임금은 요셉의 공적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입니다. 일부러 그의 국가적인 공로를 평가절하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처럼 받은 은혜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오늘날 “군사부일체”라는 말은 낡은 말이 되었습니다.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하나라고 하는 이 감사의 존경을 담은 표현은 구닥다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있어야 우리 국민의 행복과 평안이 있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애국자들의 공로, 이 나라를 위하여 헌신한 외국의 헌신과 희생에 대한 감사함을 잃어버리면 안됩니다. 김일성이 쳐들어내려온 육이오 때에 미군 장병만을 계산하면 무려 미군 병사 54,246명이 이 땅에서 전사했습니다. 그들과 그 귀중한 꽃다운 아들들을 잃은 그 부모의 가슴에 얼마나 큰 아픔이 있겠습니까? 그 희생 덕분에 우리가 이 자유와 신앙을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미국 패권주의를 위한 것이라는 말로 평가절하하는 자들은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감사함을 모르는 은혜를 모르는 자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와 행복이 그들의 희생 위에 있음을 기억하고 은혜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스승의 은혜도 기억해야 합니다. 요즘 서울 강남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 때문에 교사들의 아픔이 봇물 터지듯 터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길러주는 선생님들을 존경해주고 은혜를 기억해주지 않고 도리어 저주와 위협을 가하는 자들은 은혜를 저버린 자들입니다. 참으로 이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영적인 은혜는 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해준 저 영국의 선교사님들, 미국, 호수, 독일의 선교사님들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평생에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할 줄 아는 저희가 됩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 속에 있는 세속적인 것들을 떨쳐버리게 하시려고 세상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18절로부터 19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우리가 알다시피 요셉은 야곱의 열한째 아들로서 형들에게 배신당하여 노예 신분으로 애굽에 팔려 왔다가 온갖 고생 끝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지극히 높여져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칠년 흉년의 큰 위기를 지혜롭게 넘기게 하여 애굽 백성들을 다 죽게 될 위기에서 구출해준 크나큰 국가적인 은인입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요셉의 가족과 친척과 그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북부 평야 지역인 고센 지역에서 평안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협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애굽의 왕조와 정권이 바뀌면서 요셉이 베푼 은혜를 기억하지 않는 임금이 애굽 왕좌에 올랐습니다. 그는 요셉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는 자였고 그 친척인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고마움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자였습니다. 세상은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는 데 재빠릅니다. 그러한 것들은 좋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마음에 새기고 힘써 갚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요셉을 알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혀 모르는 완고하고 패역한 왕을 왕위에 세운 데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이었지만,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택하시고 그 후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려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자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어느틈엔가 애굽 땅에 눌러 살게 되니까 평안하고 안정된 것 같습니다. 요셉 덕분에 애굽 백성들로부터 큰 간섭 없이 살 수 있었고 자식들도 번성하고 가축들도 늘어나니까 좋았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고센 지역은 애굽의 나일강 하류 지역이어서 땅도 비옥하고 물이 많아서 먹고 사는 데 편리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사는 것이 만족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틈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내심으로 애굽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이 일제 때에 저 만주 지역과 연해주 지역이나 하와이나 미국에 건너가서 살다 보니까 그 후손들이 나중에는 자기들이 중국 사람, 러시아 사람, 미국 사람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그 정신이 애굽 사람처럼 되어서 애굽 사람들이 좋아하는 우상 숭배를 열심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태양신도 섬기고, 나일강도 신으로 섬기고, 개 신, 고양이 신, 뱀 신, 악어 신, 황소 신도 섬겼습니다. 애굽의 왕 바로도 태양 신의 아들이라고 믿고 그를 숭배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죽은 자의 영혼이 사후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며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사람이 죽으면 그 내장들을 다 파내고 오랫동안 건조시켜 미이라로 만들어 무덤에 보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잡다한 잡신 숭배와 우상 숭배들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어느틈엔가 받아들여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조상에게 나타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가 많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믿고 마음에 품고 늘 염원해 왔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것은 마음에 전혀 두지 않고 애굽 생활에 만족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어느틈엔가 깊이 물들어 있는 우상 숭배, 잡신 숭배로부터 그들을 건져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평안히 살고 있는 애굽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섭리적으로 요셉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고 또한 안다할지라도 절대로 그 공덕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애굽 왕을 세워셔 이스라엘에 대하여 핍박하며 적대적인 행동을 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취하시는 자기 백성에 대하여 종종 행하시는 구원의 전략적 행동이십니다. 자기의 택한 백성들이 세상에 취해서 세상에 안락함을 느끼고 세상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을 때에 그의 백성들에게 실패를 겪게 만듭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와 속임과 비천함을 겪게 만듭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정이 뚝뚝 떨어지게 만듭니다. 더 이상 세상을 좋아하고 애착할 마음이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을 찾게 되고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이 주시는 바 축복의 약속이 소중한 줄 알고 그것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도 아직도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분이 있습니까? 아직도 세상에서 이름을 떨치고 싶고 사람들 앞에서 우쭐대고 싶고 세상 일락을 좀 누려보고 싶고 세상 자랑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리시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지혜로우셔서 그것들이 우리에게 절대로 유익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귀하고 더 복되고 참되고 영원한 것들을 우리가 받아누리는 데 방해가 될 것임을 아시기에, 세상 것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것들을 갖게 되면 도리어 교만해지고 세상 가운데 우쭐거리고 은혜는 다 쏟아버리고 하나님 백성다운 성품과 성령의 감동은 다 잃어버리고 신앙은 껍질만 남을 것임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정이 뚝 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실패와 배신을 겪게 하시고 낮아지게 하시고 외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야 정신차리고 주님을 소중한 줄 알고, 세상 것보다 더 영원하고 참된 주님이 주신 영적인 은혜와 축복과 영생과 천국을 붙잡을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난날 겪은 고난과 역경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돌아보시고,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세속적인 관심와 욕심과 헛된 자랑이 있다면 과감하게 십자가 아래 다 파묻어버립시다. 그리하여 세상의 왕 마귀에게 속한 자가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님 백성이라는 것을 확실히 선택하고, 세상과 예수님 사이에서 우물쭈물 왔다 갔다 하는 자가 하나도 없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20절로부터 22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이 능하더라”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새 임금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이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커진 세력을 약화시켜서 애굽 사람들의 종으로 삼아 마음껏 부려먹으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온화하고 우호적인 태도를 완전히 거두고 철저하게 그들을 노예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대한 토목공사인 성을 짓고 피라미드를 만드는 중노동 사역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제로 투입하였습니다. 조금도 쉴 틈도 주지 않고 엄청난 양의 노동량을 채우도록 하여 그들의 몸을 약화시키려 했습니다. 그래도 그 자손이 번창하니까 더 어려운 일들을 시키는데, 흙 이기기, 벽돌 굽기, 농삿일에 그들을 내몰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여전히 번성해갔습니다. 그래서 바로 왕은 꾀를 내어 이스라엘 산파를 매수하여 이스라엘 여인들이 출산할 때에 남자는 죽이고 여자 아이는 살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어서 왕의 명령을 어기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낳는 남자아이들도 살렸습니다. 그리고 왕의 추궁을 받자 지혜롭게 대답하기를 이스라엘 여인들은 애굽 여인들과 달리 몸이 튼튼하여 자기들이 도착을 하기 전에 아이를 낳아버려서 죽일 수 없었다고 지혜로운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결과 애굽 왕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이스라엘 자녀들은 점점 더 번성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핍박과 시련 속에서 도리어 더 번성해가는 은혜를 입기도 합니다. 저 중국에서 믿음의 형제들이 더 많이 번성한 것도 한 예입니다. 저 북한에서도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중에 조용히 자기 백성들을 세워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짐작하는 대로 20만 명 내지 40만 명 정도만 아니라 그 이상이 예수님을 믿는 백성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애굽 왕 바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애굽 군인들을 시켜 이스라엘에 아들이 태어나면 무조건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면 살려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멸족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이대로 가면 결국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은 세상에서 끊어질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어떤 경우에도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그 위기 때에 하나님께서 한 가지 기적 같은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한 위중한 시기에 레위 지파 고핫의 아들 아므람이 요게벳이라는 아내를 통하여 남자 아이 모세를 낳게 되었습니다.
요세푸스라는 유다의 역사가는 이스라엘 고대사라는 책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내려온 전승을 참고하여 모세의 출생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에게 계시하시어 그의 아들이 장차 지극히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주시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아므람이나 요게벳이 아이가 잉태되었을 때 놀라지 않고 기도로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태어날 때에도 산모 요게벳에게 아무런 산통이 없이 순조롭게 태어나게 하여서 애굽의 감시자들에게 출산 사실이 들키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라고 하였는데, 출애굽기 2장과 히브리서 11장에서도 이 점을 꼭 집어 반복적으로 언급하므로, 모세가 ‘아름답게’ 태어났음을 보여줍니다. 이 ‘아름답다’는 헬라어 단어 ‘아스테이오스’는 ‘도시적이고, 예의바르고, 세련되고, 잘 생기고, 우아하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보는 사람들은 그 용모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버리게 되는 신비가 있었습니다. 그 부모 아므람, 요게벳만이 아니고 애굽의 공주가 나일강에 목욕하러 왔다가 갈대 상자에 담겨져 떠내려온 모세를 발견하고 그 울고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너무나 그 아기를 사랑스러워서 자기 양자로 삼아 기를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이것도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입니다. 아기가 때어난 지 석달째에 도저히 아기를 숨길 수 없을 때에 나일강에 갈대 상자에 담아 물결에 내어놓았을 때에 그 갈대상자를 물결이 인도하여 마침 강에 목욕 나온 왕의 딸에게 발견되어 그의 양자가 되게 하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적 손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지목되어 보내신 자를 그 백성을 죽이려는 장본인인 애굽 왕 바로의 딸에게 발견되어 그 왕궁에서 길려져서 왕자의 모든 교육을 받게 되어 말과 일에 뛰어난 자로 길러진 것 자체가 기적적이고 기이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쓰임받을 자가 이스라엘을 파멸케 하려는 왕의 궁 안에서 왕자로 안전하게 성장하게 하시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왕궁에서 모세가 길러지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있었습니다. 그가 히브리인 출신이라는 것을 애굽 공주가 알고 있었고 시녀들도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애굽 왕 바로가 알고 애굽의 신하들이 알고 있었을 것인데도 모세를 죽이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셨습니다. 또한 모세가 노예들인 히브리인 출신으로서 애굽의 왕자들이나 배우는 당대 지구상 최고의 학문을 이룬 애굽의 궁중 학문을 다 배우고 사람들 앞에서 말이나 일에 능하게 되어 모두가 그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모세의 위대한 지도력 때문에 애굽 사람들이 모세를 차마 죽일 수 없었다고 요세푸스의 역사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과 은혜의 열매인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놀라운 능력과 지혜로써 자기 백성들을 신실하게 돌보십니다. “이제는 다 끝났다, 다 망했다, 더 이상 길이 없다, 희망이 없다.”고 덜퍽 주저앉을 상황에서,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기이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길을 열어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희망을 갖게 하시고, 하나님 백성의 대적들은 낮추시고 무력화시키곤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떤 경우에도 절망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믿고서, 우리도 아무리 큰 절망적 상황을 만나더라도 소망을 갖고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며 그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비록 우리 눈과 귀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지할 수 없지만, 분명히 하나님은 그의 무한하신 능력과 깊은 지혜와 우리를 향하신 신실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굳게 신뢰하고 아무리 앞이 캄캄한 중이라도 우리 마음에 믿음의 등불을 환히 켜고 우리의 미래를 소망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반드시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은밀한 중에 행하신 그의 기이하고 놀라운 지혜와 능력이 우리를 살리시고 위기를 넘게 해주시고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고 크나큰 간증거리로 남게 해주시고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리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