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블레이크,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Ancient of Days), 1794년, 23.3×16.8cm, 런던대영박물관
창조의 첫날이 밝기 전, 태초에 땅이 있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너무 많고 커서 바다(깊음) 같았다. 신비주의 시인이기도 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는 램버스(Lambeth)에 살 때 환상 속에서 컴퍼스로 지구를 측량하는 노인을 본 후, “깊은 바다 앞에서 컴퍼스를 세우고 있는 하나님”1을 그렸다.
빛 자체이신 창조주(Urizen)가 컴퍼스를 벌려 어둠을 측정하는데, 날카로운 컴퍼스는 짙은 구름 사이를 가르는 번개 같다. 컴퍼스가 흑암을 찢을 때 강한 바람이 불어 창조주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180도로 휘날린다. 이 바람은 바다(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일 터다.
빛이신 하나님께서 땅에 쌓인 흑암을 번개 불빛 같은 컴퍼스로 뚫고, 동시에 흑암의 복판에 두 점을 찍으신다. 최대한 손가락을 넓게 벌린 컴퍼스로 찍은 두 점은 어떤 흑암도 넘어올 수 없는 경계선이 된다(잠 8:27). 블레이크는 땅에 흑암이 깊지만, 하나님의 영이 강한 바람같이 흑암 위를 운행하실 때, 하나님께서 흑암을 통제하기 위해 빛으로 경계선을 긋기 직전을 보여 준다. 컴퍼스로 그어진 경계선은 동그란 지구 모양이겠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빛으로 동그랗게 두르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3-4).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빛이라 부르시고, 빛이거든 비추라고 말씀하셨다(마 5:14-16). 블레이크의 그림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빛의 점이 되어 어둠을 뚫고, 또 함께 빛의 선이 되어 어둠을 통제하라고 명령했다고 해석한다. 점 하나 하나가 모여 선이 되고, 선은 동그랗게 연결되어 함께 세상을 품는다. 수염과 머리카락을 180도로 휘날릴 정도로 태초부터 힘 있게 활동하셨던 ‘하나님의 영’은 제자들을 몰아, 빛이 닿지 않던 ‘땅끝’까지 가서 빛이 되게 하신다. '땅끝'까지 온 세상을 동그랗게 품는다.
제자들이 동그랗게 대오를 이루어 함께 품어야 할 땅은, 태초에 그랬듯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가득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게 아니었다. 땅이 있었고, 땅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버무려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창조하신다. 빛 자체이신 하나님의 창조는, 이제 빛으로 부름 받은 제자들의 몫이다. 하나하나 예리한 점이 되고, 점과 점이 이어져 함께 선이 되어 동그랗게 세상을 다스리라고 블레이크의 그림이 말한다.
외면하고 싶은 흑암이 있다. 주님은 고개를 돌리지 말고, 응시하길 원하신다. 흑암을 응시하는 점이 되고, 또 점들이 모여 함께 흑암을 감싸는 동그란 선이 되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