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룡애 위, 붓을 들고 흰 비단폭을 검게 물들이는 여인이 있었다.
날고 튀어 오르고… 그리고 그때마다 마불(魔佛) 하나, 연화(蓮花) 한 송이가 피어 난다.
물살이 연화 사이로 흐르고, 마불의 그림자가 물 위에 드리워진다.
"아아, 일백 마공 중 아흔세 가지는 찾아냈으나 가장 중요한 일곱 가지가 왜 찾을 수 없단 말인가?"
"아, 무룡이 그것을 다시 한 번만 보여 준다면 비밀을 알아낼 것도 같은데… 그는 내가 자신보다 강해지는 것이 싫어 그것을 보여 주지 않고 폐관에 들었으니……."
찌이익-! 이제껏 공들여 그려졌던 흰 비단 위의 그림이 길게 찢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부인,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정말 귀하신 분입니다. 바로… 광랑군이십니다."
잠시 후 멋들어지게 생긴 청년 하나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섰다.
"하하! 진씨 부인께서 계시다는 것을 알고 찾아왔습니다."
"지…지난번에는 큰 실례를 한 것 같아요. 한데, 어인 일로 찾아오셨나요? 너무도 갑작스러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여인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표정의 변화를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일각 안에 쳐들어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십중팔구 시체로 남을 것입니다."
"하하! 여기까지 오는 도중 매복을 보지 못했는데… 보이지 않는 천라지망(天羅之網)이었군요?"
얼마 후, 대추 한 접시와 천지차(天地茶) 두 잔이 날라져 왔다.
운중행은 차를 마시다가 문득 찢어진 비단폭을 가리켰다.
"이것은 저희 종파의 천 년 보물입니다. 천 년간 사라졌다가 나타난 것으로 천불연지도라는 것입니다."
"이 안에는 일백 가지 무공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이것 하나하나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저는 그 중 아흔세 가지만을 찾았냈을 뿐입니다."
진씨부인은 쓸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천을 내려놓으며 어깨를 가볍게 떨었다.
"사사로운 일이라 말씀드리기 거북하나, 사실 이 그림의 원본은 제 남편이 갖고 있습니다."
"예. 다행히 암기력이 좋아 눈을 감고도 그대로 그려낼 수 있으나……."
"하지만 원본만은 못합니다. 원본을 다시 한 번 본다면 나머지 비밀을 알아낼 것도 같은데……."
운중행은 호기심이 이는 듯 찻잔 안의 차가 식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진씨부인은 쓸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쐐애액-! 그녀 뒤쪽으로 날아드는 날카로운 도기가 있었다. 두 자 길이 죽도가 무시무시한 도기를 뿌리며 바짝 다가든 것이다.
파팍-! 날아든 죽도는 그대로 진씨부인의 등에 꽂히고 말았다.
진씨부인은 등판에 이어 복부에 장인을 맞고 위로 날아 올랐다.
"으하하, 배화교의 요녀! 너를 처단하는 것은 억조창생을 위하는 일이다!"
운중행은 진씨부인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며 광소를 터뜨렸다.
진씨부인은 뒤로 날아가며 몸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마음대로 되지를 않았다.
"으하하! 나는 광랑군이다. 복수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도전하라!"
광랑군의 웃음 소리가 커지며 사방에서 열 사람이 날아들었다. "감히 교주님을 암습하다니… 네놈을 쳐죽이겠다!"
부인십시위가 바짝 다가서는 데는 찰나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하나, 광랑군 운중행은 이미 모습을 감춘 후였다. 그는 반대편 벼랑 밑으로 뚝 떨어져 내리며 순간적으로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휘익-! 벼랑 아래 흑의인영 하나가 지극히 빠른 속도로 날고 있을 때였다.
꽈꽈-꽝-! 산의 이곳저곳에서 연달아 폭음이 일어났다.
흑의인은 폭음 소리를 들을 때마다 회심의 미소를 내지었다. 그는 진씨부인의 복부에 장인을 날린 후 빠져 나온 광랑군 운중행이었다.
그가 냉막히 소리칠 때, 숲에서 불쑥 걸어나오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아주 파랬고 눈썹 역시 기이한 청색을 띠고 있었다.
운중행이 몸을 휘청일 때 죽도를 든 여인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흐흑, 청미예요. 중행마저 무림고수가 되었다니… 아아, 우리 둘은 역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입니다."
"이…이름조차 잊었단 말인가요? 당신의 이름은 중행이에요. 운중행!"
이게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흑의인은 진짜 운중행이 아니란 말인가?
"흐흑, 대영반까지 갔다가 중행을 못 만나고 돌아설 때에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흐흑, 한데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될 줄이야… 흐흑!"
이청미는 운중행의 모습으로 변장한 흑의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이 얼굴이… 이 얼굴이 바로 혈마맹주의 얼굴이라면… 나의 꿈은 십 년 앞당겨질 수 있다!'
"아, 사실 나는 기억이 흐릿해졌소. 마공 때문이오. 기왕이면 나에 대한 것, 그리고 당신에 대한 것을 자세히 얘기해 주시오."
이청미는 흑의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계속 서러운 눈물을 떨구었다.
그 순간에도 드넓은 비룡애는 회천무문과 배화교의 싸움으로 인해 혈세(血洗)당하고 있었다.
비룡애 정상, 전신을 피로 물들인 여인 하나가 누워 있다.
그녀의 주위에는 열 사람이 모여 있었다. 모두 침중한 표정이고 그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일도일장(一刀一掌) 모두 사혈(死穴)을 강타했소. 교주의 몸이 금강불괴지신 이상이기에 그래도 숨이 붙어 계신 것이오!"
"광…광랑군! 그놈을 찾아 찢어죽입시다. 으드득……!"
"제군은 세상 물정도 모르고 천불연지도와 더불어 폐관하고 있으니… 아아, 정녕 천통회의 앞날이 우려되는구나!"
부인십시위. 그들은 복받쳐 오르는 분노로 인해 머리칼이 뻣뻣이 곤두설 지경이었다. 그들이 통한의 눈물을 뿌릴 때였다.
휘휙- 휙-! 가벼운 파공성과 함께 일노일소(一老一少)가 비룡애 위로 떨어져 내렸다.
"후후, 내가 뭐라고 하더냐?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천일류에는 대적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드냐?"
왜소한 노인, 그리고 키가 후리후리하고 잘생긴 청년이 계집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비룡애 위로 날아오른 것이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부인십시위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스스스- 스슥-! 열 사람의 몸이 바람개비같이 맴돌자 무지막지한 회오리가 일어났다.
"어엇? 어이해 이러시오? 진씨부인이 위급한 듯한데 어이해 나를 괴롭히는 거요?"
흑의청년이 부인십시위의 의중을 알지 못해 의아해 할 때, 왜소한 노인이 손을 바짝 세우며 몸을 한 바퀴 돌렸다.
"아우야, 지금 당장 급한 것은 하나뿐인 목을 지키는 일 같다!"
우르르릉- 꽈꽝-! 벼락치는 소리가 잇따르며 노인의 몸뚱이가 삼 장 위로 날아 올랐다.
그의 입에서 핏물이 흐를 때, 부인십시위는 세 걸음씩 물러나서야 겨우 몸을 바로잡았다.
"전중태랑, 꺼져 버려라!"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네 더러운 목이 아니라 광랑군이란 놈의 목이다!"
흑의청년의 쩌렁한 외침이 십시위의 동작을 멈추게 했다.
운중행, 그는 두 번에 걸쳐 비룡애 위로 찾아온 셈이었다. 물론 먼저 온 자는 진짜가 아니었으나 십시위는 아직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운중행은 음공으로 십시위를 멈추게 한 다음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쐐애액-! 산호선자가 그의 등을 향해 연검을 흔들었다.
검빛이 유성처럼 흐르는가 싶자, 따당-! 경쾌한 금속성에 이어 답답한 신음 소리가 뒤따랐다.
"으윽, 강기로 검을 박살내고 나의 손을 찢다니……!"
산호선자는 부러진 검을 떨어뜨리며 다섯 걸음 물러날 때, 운중행은 진씨부인 곁으로 다가가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운중행은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그러나 마구 찢어지고 뒤틀린 진씨부인의 얼굴은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뇌리에 선명히 떠올랐다. 모두가 불에 데인 화상이었다.
그녀는 원래 그런 추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배화교주이기에 그런 얼굴이 된 기구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배화교에서는 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얼굴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여 마음껏 타 버리도록 했고, 그 결과 얼굴이 이렇게 추악하게 변하고 만 것이다.
너무나도 추악한 그녀를 향해 사랑을 구걸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지금 그의 이름을 부르는 중이었다.
"무…무룡, 처음 본 순간같이… 나…나를 사랑해 줘요. 어이해… 하룻밤도 보내지 않고… 나를 버리나요. 흐흑……!"
"무룡, 와 주었군요. 으음… 당신이 오실 줄 알았어요."
"사…사실… 당신을 속인 것은 없습니다. 저…저는… 아흔세 가지밖에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나머지 일곱 가지는… 제 능력으로는 알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울며 몸을 떨었다. 작고 아담한 손이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있었다.
"흐흑, 그런데 당신은… 내가 당신을 속였다 여기고 나를 버렸으니……."
운중행은 그녀의 손에 진기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의 얼굴빛이 조금 달라졌다.
`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군. 주화입마(走火入魔)에다가 오장이 자리를 바꿨다!'
십시위는 그의 차림새가 먼저 온 운중행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저희들끼리 전음으로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다.
전중태랑은 산세가 어떻느니 하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진씨부인 고란타는 계속 흐느꼈다. 그녀는 육체의 고통보다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운중행은 그녀가 왜 자신을 천통제군으로 착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무공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이 여인을 구하려면 이 여인이 익힌 마공보다도 막강한 마공으로 이 여인의 내공을 본래대로 되돌리는 수밖에 없다.'
마공구결이 주마등같이 떠올랐다. 그러나 진씨부인에게 쓸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배화교의 마공, 그것은 곧 천불연지도 안의 마공으로 기련혈마제가 전한 마공에 비해 뒤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찌해야 하나? 이대로 죽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진씨부인의 얼굴을 보고 실망이 크기는 했으나, 그녀가 자신에게 준 인상은 아직도 변하지 않고 남아 있지 않은가?
운중행은 중얼거리며 십시위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십방진(十方陣)을 친 상태였다.
"진씨부인을 이렇게 한 자가 누구요? 등뒤에 맞은 일도의 주인공은 알겠으나 또 한 사람은 누구인지……?"
"광랑군, 바로 네놈이거늘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
노성을 터뜨리는 화화태군(花花太君)의 눈에서 피눈물이 튀었다.
"네놈이 부인에게 아첨을 하다가 갑자기 암습하지 않았드냐?"
"이놈! 어서 부인을 살려내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은 부인과 함께 세상을 끝마쳐야 할 것이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설마 나를 가장한 어떤 놈이 진씨부인을 암습했단 말인가?"
"허허, 어떤 얼굴이 손을 썼건 상관할 일이 아니네. 아우, 중요한 것은 바로 이들이 천통회의 기둥이니 재빨리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네!"
`천통회는 혈마맹의 적이다. 진씨부인으로 말하면 천통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아닌가! 구한다 해도 결국에 가서는 내 손으로 죽여야 할 인물이다!'
머리통이 큰 난쟁이 노인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손을 쳐들었다.
그는 기련산 어귀에서 운중행의 길을 막은 바 있는 자였다.
대두신옹은 전에 비해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는 중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노부가 보건데… 세상에는 두 명의 광랑군이 있는 듯하오."
"부인은 기련산에서 귀하를 본 이후 틈만 있으면 귀하의 얘기를 했소. 부인은 귀하를 금란지우(琴蘭之友)로 여겼소. 그러기에 가짜에게 당하고 만 것이오!"
꽈르르릉- 퍼펑-! 사방에서 요란한 폭음이 들려 왔다.
"배화교 제자들은 죽을지언정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된다!"
회천무문의 고수들이 대거 몰려들며 진씨부인을 따라 중원으로 온 배화교도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비룡애 위는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근처의 싸움에 시선을 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두신옹은 유난히 큰 머리통을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귀하는 부인을 구해야 하오. 아시겠소? 귀하는 우리들의 신이신 고란타 교주를 구해야 하오!"
대두신옹은 고집스레 말하며 품에서 검은 구슬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전중태랑의 눈빛이 달라졌다.
"진천뢰(振天雷)! 그 무서운 물건이 아직까지 세상에 남아 있었다니……!"
대두신옹이 꺼내 든 것, 그리고 구시위가 하나씩 갖고 있는 진천뢰는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화기였다.
분위기가 삼엄해졌다. 십시위들은 결코 이성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씨부인의 말에 절대 충성을 맹세한 자들이었다. 진씨부인이 죽는다면 그들 열 사람도 따라서 자결할 것이다.
진씨부인 고란타, 그녀가 죽음 앞에서 부시시 몸을 일으킨 것이다.
면사는 이미 떨어져 나간 후로 그녀의 추악한 얼굴이 숨김 없이 드러나 있었다.
귀신조차 무서워 고개를 돌릴 듯한 얼굴인데, 두 개의 호롱불이 붉게 타오르고 있어 더욱 소름이 끼쳤다.
"크흑, 역시 부인이십니다. 누가 감히 부인을 살해하겠습니까?"
십시위가 흐느낄 때 고란타는 운중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운중행은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고란타의 곁으로 다가섰다.
고란타는 아랫배에 난 손바닥 자국을 지그시 누른 채 피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떤 강력한 힘이 그녀를 일어서게 했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진짜 광랑군이 나를 암습한 것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부인, 어떤 자가 나로 변장해 부인을 해쳤는지 아시오?"
푸른 피, 그녀는 피를 줄줄 흘리며 말을 조금 더듬었다.
"오장육부가 박살이 났고 기경팔맥이 뒤틀렸어요. 나는 지금… 금기로 여겨지는 한 가지 마법을 이용해 일 각 동안만 숨을 붙이고 있는 거예요."
고란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핏기 없는 얼굴로 근처를 바라보았다.
"아쉬운 것이라면 저희 종파의 보물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그것을 찾기 위해 중원으로 나왔습니다."
운중행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란타를 응시했다. "찾기는 했으나…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제게 천불연지도가 있는 위치를 알려 주었습니다. 저는 그 대가로 그에게 천불연지도를 찾아 주었지요."
"아아, 저는 저의 힘이 유한함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광랑군께 한 가지 부탁을 하려고 합니다."
"염치 없는 계집의 부탁이라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제가 믿을 사람은 광랑군 한 분뿐이기에 감히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전중태랑은 아불음을 안아 들고 있었다. 그는 고란타가 자신을 보자 멋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그는 고란타가 운중행과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서쪽으로 높이 날아올라 자리를 피했다.
고란타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은 얼굴과는 달리 아주 희고 고왔다.
너무나도 추악한 얼굴, 그러나 그 밑에 감추어진 아름다움은 그 추악함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제 능력은 얼마되지 않으나… 운 좋게도 저는 수많은 수하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제 얼굴을 보십시오. 이런 얼굴을 갖고 소박맞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고란타는 회한의 눈물을 떨구었다. "하여간 제게는 많은 수하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배화교에 속한 동시에 천통회에 속해 있습니다."
그녀는 거기서부터는 전음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상태에서 내공을 쓴다는 것은 아주 힘겨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저는 천불연지도를 찾아 나온 것이지요. 그것을 찾느라 이유 없는 살상을 했고, 그 덕에 마녀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고란타는 갑자기 손을 내밀어 운중행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고란타의 눈에서 살광이 일어났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를 찾아가 달라는 것입니다."
"고란타를 진짜 사랑했는지 아니면 이용하기 위해 사랑을 가장했는지?"
고란타는 품안에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아주 얇았다.
"이 안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습니다. 진무룡이 꼭 갖고 싶어하는 물건이지요."
고란타는 가죽 주머니를 운중행의 품에 넣어 주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면… 그것은 상공께서 가지십시오. 제 부탁은 그것뿐입니다."
"그는 마불전 근처 봉황동(鳳凰洞)에 은거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곳이 천통회의 진짜 총단이지요."
고란타는 말하다 말고 힘겹게 손을 들었다. "그는 저를… 겁내고 있습니다. 아니, 저를 겁내고 있다기보다… 저를 따르는 사람들을 겁내고 있다고 해야 옳은 말이 되겠지요."
"그는 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면 바른 대답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 바른 대답을 들으려면… 제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운중행이 기겁하며 놀랄 때, 고란타는 이를 악다문 채 손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운중행이 놀라 그녀의 손을 나꿔채려 했다. 그러나 고란타의 손은 그가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 속으로 두 치 정도 뚫고 들어갔다.
고란타는 숨 넘어 가는 소리를 내며 눈을 하얗게 뒤집었다.
운중행은 다급히 품안에서 약병 하나를 꺼냈다. 그는 급히 유리 마개를 딴 다음, 약병 안의 내용물을 고란타의 입 속으로 흘려 넣었다.
운중행은 안절부절하지 못하며 망연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비운의 여인 고란타, 그녀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운중행은 용기를 내어 얼굴을 그녀의 얼굴 쪽으로 가져 갔다. 그는 입술을 고란타의 입술 위에 덮었다.
고란타는 입을 조금 벌렸다. 그 순간을 이용해 운중행은 숨을 깊이 내쉬었다.
"휴우, 자청유(紫淸油)를 먹였으니 곧 괜찮아지리라. 비록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지는 몰라도… 죽지는 않으리라."
휘휙- 휙-! 웃음 소리와 함께 비룡애 위로 날아드는 두 사람이 있었다.
냉영은 길다란 보따리 하나를 오른팔과 허리 사이에 끼고 있었다.
악설지는 옷을 피로 물들인 채 요염한 웃음을 짓고 서 있었다.
`고란타… 정말 강하다. 그리고 광랑군 네놈도 마찬가지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그의 눈에서는 질투가 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운중행을 보며 피식 웃었다.
"후후, 광랑군께서도 배화교 사람이 된 줄은 몰랐구려."
"나는 남과 잡담이나 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비켜다오."
"광랑군, 이곳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너 하나라면 살아 나갈 수 있으나 고란타를 데리고는 가지 못한다."
냉영의 말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비룡애 주변을 물샐 틈 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다 죽게 된 고란타와 함께 이곳을 빠져 나간다는 것은 사실 무리였다.
냉영은 소매 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주머니를 꺼내자마자 아주 짙은 향기가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냉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주머니 안에 든 것은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영약인 천년화리의 내단이었다.
냉영은 운중행을 회유하듯 은근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운중행은 눈썹을 꿈틀대다가 한 가지를 보게 되었다. 냉영의 허리띠 사이에 죽도가 꽂혀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 온 것이다.
자죽신도(紫竹神刀). 그것은 얼마 전 잔월인자가 고란타의 등을 찌를 때 쓴 물건이 아닌가.
`잔월인자의 죽도가 어떻게 저놈의 수중에 있지? 흠, 전중태랑 노인이 있었다면 포위를 뚫을 수 있을 텐데… 그 노인은 어디로 갔을까?'
"네게는 정말 좋은 조건이다. 나는 어려운 것을 묻지 않는다. 단 한 가지만 정확히 대답해 주기만 하면 된다."
고란타는 피를 계속 흘려내고 있었다. 운중행의 옷마저 그녀가 흘린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지 않은가!
운중행은 쓰디쓴 숨소리를 내다가 결국 냉영의 제의에 따르기로 결심했다.
"네 이름에 관한 것이다. 네가 기련혈마제의 전인이자 혈마맹주인 마군자 운중행이 맞느냐?"
운중행은 자신의 비밀을 냉영이 소상히 알고 있다는 데 사실에 저으기 놀라고 말았다.
"후후, 과연 광랑군이 마군자 운중행이로군. 후후, 대답은 들은 셈이니 이제는 가도 좋다."
악설지마저 그의 뒤를 쫓아 사라져 가자, 비룡애 위에는 운중행 혼자 남게 되었다.
"고란타… 중원인들이 모두 나쁘지는 않소. 내가 그것을 입증해 주겠소."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