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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틴이라고 하는 젊은 여성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 영화에는 왜 우울증에 걸리게 되었는지, 도대체 저스틴이 우울증에 걸린 것은 맞는지에 대해 극히 모호하다. 결혼식에서 하객들을 놔두고 방안에 틀어박히고, 질질 짜고, 욕조 안에 옷 입은 채 들어가고 그 정도면 우울증인가? 이 영화에서 표현하는 우울증이란 그 정도이다. 극히 피상적이고 얄팍하게 우울증이 묘사되어 있다. 어떤 정신과의사가 그러던데, 우울증은 실제로 극히 위험한 병인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우울증에 걸렸다고 뽐내면서 뭔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을 로맨틱화하면서 그 느낌을 소비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실체 없이, 없는데 있는척하기....... 허세....... 사실 이 영화를 요약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2. 이 영화를 SF로 볼 수는 절대 없다. 지구보다 몇십 배는 더 큰 멜랑콜리아가 접근해 오는데 지구에는 아무 영향이 없다. 조그만 달도 지구에 그렇게 커다란 인력을 미치는데, 멜랑콜리아 정도 되는 거대한 별이 접근해온다면 지각이 뒤틀리고 지진에 화산 그리고 기상변동 해일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는 지구가 멜랑콜리아에 부딪쳐 먼지가 되어버릴 때까지 지구에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멜랑콜리아는 현실의 것이 아니다.
3. 우울증(에 걸렸다고 해 봐야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우거지인상쓰고 달밤에 나가서 멜랑콜리아별을 보는 것이 다지만) 에 걸린 저스틴은 밤하늘에 있는 별을 보고 자신과 동화시켜나간다. 영화 처음에 저스틴이 이 별을 우연히 보면서 저 별 이름이 뭐냐고 한다. 그러자 곁에 있던 사람은 멜랑콜리아가 아닌 다른 별이름을 말한다. 어느 어느 성단에 있는 잘 알려진 별이라면서....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면서 갑자기 그 별의 이름은 멜랑콜리아가 되고 이 별이 지구에 다가온다고 사람들이 말한다. 어쩌면 이것은 의도된 것이리라. 이 별은 지구에 다가오는 멜랑콜리아가 아닌, 지구로부터 수백만광년은 떨어진 곳에 있는 어느 성단의 별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별은 저스틴이 자신의 우울증을 대응시키기 시작하면서 멜랑콜리아가 되고 저스틴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이 별은 물리적인 존재일 수 없다. 사람들은 어느 성에서 지구종말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즐겁게 인생을 소비하다가 몇 달 (혹은 며칠) 후에 갑자기 멜랑콜리아가 지구에 부딪친다고 패닉에 빠지는데 이것이 현실일 리 없다. 몇 달 전에는 그런 별이 있는 것도 몰랐다가 몇 달 후에 멜랑콜리아가 지구에 가까이 와서 몇 주 있으면 충돌한다고 자살소동을 벌이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오늘날에도 어느어느 별이 지구에 부딪칠 수 있는데 그 시간은 몇 백년 후가 될 것이라는 둥 그런 뉴스를 접한다. 하물며 지구보다 수십배나 큰 행성이 태양계안을 돌다가 지구에 부딪친다는데 그걸 부딪치기 몇 주 전까지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멜랑콜리아는 저스틴이 불렀기에, 그리고 저스틴이 자신 내부에 있는 우울증에 동화시켰기에 여기 오는 것이다.
4.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은 저스틴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일들일 수 있다.
5. 사실 이 영화에 주구장창 반복되는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 전주곡은 이 영화의 주제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오페라는 한 마디로 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현실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현실과 규범, 제약이 존재하는 “낮의 세계”로부터 신비롭고 초월적이고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밤의 세계” (죽음 그리고 초월적인 세계)로 가려고 한다는 내용이다. 어쩌면 이 전주곡이 영화를 설명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스틴은 세상 모든 것이 싫어져서 자기파괴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절망과 좌절이 아닌, 황홀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햄릿의 오필리아처럼 황홀의 절정에서 투명하게 흘러가는 물결에 빠져 익사하고 싶은 사람이다. 저스틴은 바그너의 오페라 속 트리스탄과 이졸데같은 인물이 아닐까? (바그너의 전주곡 중에서도 영화에 반복되는 부분은 트리스탄의 유도동기이다. 즉, 트리스탄의 테마라는 것이다.) 저스틴이 살고 있는 지구는, 허세에 가득찬 부르조아, 위선자들 그리고 둔감한 인척들이 살고 있는 낮의 세계가 아닐까? 저스틴은 그것을 참아내기 어렵다. 그리고 멜랑콜리아는 그런 저스틴이 소멸과 죽음 그리고 멸망으로서 낮의 세계를 쓸어버리기 위한 수단일 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런 저스틴의 열망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이 영화에서 나오는 지구종말은 멸망이 아니겠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이요, 초월이요, 정화됨이리라. 멜랑콜리아에 부딪친 지구가 먼지가 되어 사라진 것일까? 멜랑콜리아는 실재하는 별이 아니니까...낮의 세계를 압도하는 밤의 세계이니까... 지구는 세례를 받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멜랑콜리아와 충돌한 이후 지구는 새생명을 얻는 탄생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정말 실망이다. 이 영화는 라스 폰 트리에감독의 영화가 아닌, 바그너의 작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좋은 부분은 바그너의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관심 있으신 분은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이라는 노래를 찾아 들어보시라. 이졸데가 초월적인 상태에서 환희의 절정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는 과정을 음악화한 것인데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곡이다. 두번 다시 없을 음악이다.)
6. 나는 앞서 말한 이유에서 이 영화는 저스틴이 존재하는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저스틴의 내면적인 모험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선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두 연인들은 밤의 세계로 건너가는 초월적인 죽음을 이루는 데 성공한다. 저스틴의 경우 설득력 없는 우울증에 대한 묘사로 바그너 오페라 속 인물들처럼 절실함이랄까 투명함같은 것이 덜하지만 그래도 역시 초월적인 죽음을 이루는 데 성공한다.
7.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저스틴은 자신의 주변에 존재하는 위선적인 세계에 혐오감을 느끼지만 한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자신의 분노에 난폭함과 잔인함 그리고 힘을 부여하기 위해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인 멜랑콜리아를 불러오는 것일 수도 있다. 저스틴과 그녀의 언니 – 상식적이고 저스틴을 염려하며 돌봐주는 언니 – 간 관계는 영화가 점차 진행되고 멜랑콜리아가 지구에 접근함에 따라 대립과 갈등관계가 되어간다. 저스틴의 우울증은 우리가 저스틴의 입장에 서느냐 언니의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8. 이 영화는 해석의 재미도 없는, 아주 무미건조한 것이었던 듯하다. 키에슬로프스키감독의 두 명의 베로니카나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같은, 무한히 열린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아 하나의 해석이 애초에 불가능한 그런 깊이 있는 예술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작품은 분명 대가퀄리티가 존재하는 것 같다. 영화를 보면 이것을 만든 감독은 대가구나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그러면 대가의 걸작인가? 그것은 모르겠다. 안티크라이스트는 걸작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영화는 어딘지 피상적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걸작의 위치가 아닌, 괴짜감독의 컬트영화로 제 자리를 찾아갈 것이라는 예측을 해 본다.
9. 이 영화의 대사는 정말 맛깔나지 않는다.
10. 영화 초반 화보 같은 장면들은 좀 많이 느끼하다. 찬탄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창조력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에너지들의 중첩이다. 이 정도 찍을 능력 있는 감독들은 무척 많이 존재할 것 같다. P.S. 몇 가지 수수께끼들 1) 저스틴과 그 언니가 머무는 고립된 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인도 보이지 않고 그 집에는 저스틴과 언니, 형부 그리고 조카 이렇게만 존재한다. 왜 저스틴의 언니는 멜랑콜리아가 지구에 부딪칠 때 마을로 가고자 하였을까? 2) 저스틴은 생명 학대로 나아간다. 인간의 모든 생명을 경시하고, 동물을 학대하고, 멜랑콜리아가 지구에 부딪쳐 모든 생물을 멸망시킨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듯하다. 이것은 저스틴의 우울증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3) 저스틴의 우울증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근원은 멜랑콜리아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4) 건전한 상식으로 영화 내내 등장인물들의 기준점이 되어 안정감을 유지하게 해주던 형부는 왜 가장 먼저 자살했는가? 5) 왜 저스틴은 결혼식에서 멜랑콜리아를 처음 보게 되었는가? 결혼식에서 저스틴은 자신이 계속 일해 오던 회사 사장을 속물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킨다. 왜 결혼식인가? 이 모든 것들의 시작이 되는 결혼식이라고 하는 것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이 영화는 저스틴이 결혼식에서 보게 된 환각일지도 모른다. 저스틴은 피곤한 결혼식 중에 자기 방으로 잠깐 왔다가 늦는 바람에 결혼식에 차질을 빚게 된다. 이때 저스틴은 잠에 빠져 꿈을 꾸게 된 것은 아닐까? 6) 영화 마지막은 지구가 멜랑콜리아에 부딪쳐 먼지가 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데 이 장면 뒤에 무엇이 왔을까? 정말 모든 것이 사라진 무無였을까? 나는 이 영화의 핵심이 지구가 멜랑콜리아에 부딪쳐 먼지가 되는 바로 그 장면이 아니라, 그 뒤에 나오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절정 그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절정 바로 그 직전에 끝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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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화에 쓰인 음악을 알면 이런 깊이의 해석이 가능한 거군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영화에 대해 실마리를 풀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