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의 자서전
나의 삶은 1964년, 크로아티아의 자그렙이라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도심 밖의 작은 마을에서 나의 형과 조부모님과 함께 6살까지 살았다.
신이 나에게 주신 아름다운 선물을 발견하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5살 때 라디오에서 우리 가족이 아주 좋아했던 포크송과 컨트리송이 흘러나오면 내 모든 마음을 담아 아주 크게 노래하곤 하였다.
그 때 나의 부모님께서는 미국에서 (우리 가족이 살)집을 마련하시기 위해 미국에 계셨다. 1970년 부모님께서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셔서 우리들을 데리고 다시 미국으로 떠나셨다.
우리는 뉴욕의 키스코산에 있는 한 의사의 사무실 위층에서 살았다. 아버지께서는 길 건너 새 병원에 전선을 놓아주는 일을 하셨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동안에 병원에 있는 창문을 통해서 우리들이 무엇을 하는지 보고 계실 때 마당 앞에서 형과 함께 놀곤하였다.
7살이 되어서, 커네티컷의 그린위치로, 길가에서 가장 멋없는 집으로 이사했다.
도착하고 나서 얼마 안되어 나의 형, 존은 기타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바로 그의 옆에서 내 안의 모든 것을 노래했다. 우리들은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컨트리 음악을 연주했다.
우리는 미국에서 모두가 오직 컨트리 음악만을 듣는다고 확신했다. 우리의 연주 실력은 꽤 좋아졌다.
얼마 되지 않아서 아버지께서는 그가 찾으신 폴란드의, 유태인의, 그리고 베테랑의 클럽에서 우리가 연주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들을 데려가기 시작하셨다.
9살 때 나는 교회의 성가대에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11살 때 레드 제플린을 알게 되었고, 나의 모든 삶은 변화했다.
삶이 점점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형과 나는 이런 종류의 음악을 좋아했지만,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인정(쉽게 허락)해주시지 않았다.
우리 자신의 운명을 추구하려는 자유를 위한 계속된 다툼이 있었다.
13살에 우리는 “티져”라는 밴드를 결성해 레드 제플린과 블랙 사바스, 그리고 우리가 만든 노래들을 연주했다.
모건 워커라는 프로듀서가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 자신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기도 전에 우리는 뉴욕 시에서 리허설을 하였고 우리의 첫 음반을 위한 노래들에 열중했다.
그러나 그 바램들이 이루어지기 전 모든 것이 무산되었다.
15살에 나는 “미션”이라는 밴드에 그 밴드의 리더인 엘리옷 루이스(나중엔 “에브리쥐 화이트 밴드”의 팀원이 됨)와 함께 합류했다.
나는 스튜디오와 작곡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밴드를 탈퇴하였다.
얼마 후, 난 던 스트루라는 신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 신사는“수트케이스 스튜디오”, 커네티컷주의 노르워크에 있는 리허설콤플렉스의 사장이었다.
그는 내가 밴드 “미션”에 있을 때 나이트 클럽에서 공연하는 것을 보아왔었다.
그는 내가 그의 스튜디오 안에서 리허설을 하고 있는 밴드들 가운데에서 반드시 어떤 밴드의 팀원이 될 것이라고 강하게 믿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과 한번 해보겠다고(만나 보겠다고) 승인했다.
16살 때 제임스 워드, 크리스 리솔라, 그리고 잭 윌킨슨과 함께 합류했다. “레드 알버트”가 결성된 것이다.
8년 후 잭은 존 파울러와 교체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리듬 기타 연주자인 프랑크 디코스탄조를 더해서 5인조 밴드를 결성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MCA와 계약했고, 우리의 데뷔 엘범인 “Steelheart”를 내놓았다.
전 세계에서 백만장이 팔린 앨범 말이다.
우리는 전 세계를 투어했고 두 번째 앨범인 “Tangled in Reins”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계속 했다.
아시아와 유럽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서, 우리는 투어를 위해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 “그레이트 화이트”라는 밴드를 도왔다.
투어의 마지막에 단계인 할로윈의 밤에 콜로라도 주의 주도 덴버에 있는 맥니콜의 무대에서 우리는 밴드“슬로터”의 오프닝 무대이자 쇼의 마지막을 공연하기 위해서 초대받았다.
그 밤은 나에게 있어서 긴 영적인 여행의 시작이었다. “Dancing in the fire”를 공연하는 중 나는 조명 세트가 안전하게 되어있는지 모른체 올라갔다.
나는 떨어지고 있는 장비를 피하려고 했지만, 내가 벗어나기 전에 그것은 나의 머리의 뒷 부분을 가격했다.
나의 얼굴은 세트에 의해서 짓눌러졌다.
코뼈, 광대뼈, 턱이 으스러졌고, 뒤통수를 28바늘이나 꿰맸다. 척추 역시 뒤틀려졌다.
하지만 나는 18,000명이 보는 관중들 앞에서 일어나 무대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어떻게,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즉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나의 메니져는 다음 날 나를 비행기에 태웠다.
1000파운드(≒500kg)가 넘는 장비가 나의 몸을 일격했을 때 나는 죽어야됐을 뿐만 아니라, 비행기 안에서의 30000피트의 고도에서 나의 뇌는 폭파했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워 있을 때 사고로부터 얻은 진짜 고통이 확실해졌다.
몇 달 동안 정신적인, 육체적인 고통의 너무 심해서 나의 머리의 아주 작은 움직임에도 미칠 것 같았다.
“Steelheart”는 끝난 것이다. 소중한 기억들은 사라졌다.
나는 사고로부터 계속되는 어지러움증에서 내 자신을 찾았고, 가끔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체(무의식 중으로), 집으로부터 2시간 떨어진 곳으로 내가 차를 몰고 가는 것을 알게된다.
나는 꿈에서 존재하였고, 아무도 그것을 지각하지 못했다.
모두들 내가 괜찮은 줄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의뢰했던 많은 의사들의 대답은 같은 것이었다 -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한 신경 정신분석의사를 만나게 되었고, 그는 나에게 “TBI”(정신적 쇼크로 인한 뇌의 손상)가 있다고 설명해주었다.
끊임없는 집중과 다시 배우고, 나의 마음을 재프로그램하는 데 2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이 투쟁 속에서 나는 재정적인 보상을 받지도, 인정받지도 못하였다.
나는 나의 가족을, 나의 가정을, 나의 재산을 잃었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을 서서히 찾아갔다.
1995년, 31세에 케니 키노스키, 빈센트 밀레, 그리고 알렉스 마카로비치로 구성된 밴드를 만들었다.
우리는 영국에서 앨범 “Wait”의 작업을 했다.
이 앨범을 만드는 데 너무 힘들었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얼마간의 어지러움증을 느끼고 있었으며, 계속해서 앨범 작업을 계속했다.
우리는 이 앨범을“Wait”라고 명명했다.
왜냐하면 레코드 회사와 자신의 몫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나의 메니져 또한 나의 자유를 찾는데 양쪽 다 오랫동안 나를 파멸(저주)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큰돈을 지불하고 나서 나는 마침내 나의 직업을 가지고 떠날 수 있었으며 그 앨범을 2개월 후에 내놓았다.
앨범“Wait”의 믹싱 작업을 하는 동안에 나는 “새롭게 태어남”을 느꼈다.
의자에 등을 파묻고, 레코딩 콘솔에 두 발을 올리고, 눈을 감고 충분한 여유를 갖고 긴장을 늦추었다.
갑자기, 누군가 나에게 오고 있는 것이었다.
나의 프로듀서인 키트 울븐은 나를 훑어보더니 나에게 뭐가 잘못되었냐고 물었다.
나는 오직 “나는 지금 막 깨어났습니다”라고만 대답할 수 있었다.
내 인생의 다음 장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13개국에 32일 동안, 28개의 쇼에서의“Wait”발매와 함께 아시아 프로모션 투어를 계속했다.
그 투어는 타이틀곡인“Wait”가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1위에 도달하면서 놀라운 충격을 만들어 냈다.
우리는 후에 2개의 쇼에서 더 공연하기 위해서 한국으로 갔다.
그 당시 나는 나의 전의 밴드 동료였던, 지미 워드에게 우리와 함께 서울의 올림픽 운동장과 부산에 있는 교주 홀에서 공연하자고 했다.
그 투어는 거대한 성공과 같았다.
그러나 이 앨범은 미국이나 유럽에선 법적인 문제 때문에 내놓을 수 없었다.
6년이 흐른 지금, 나는 내 자신의 레코드 회사인 StillHard 레코드를 가지게 됐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고, 앨범“Wait”는 Steelheart.com 여기에서 당신을 위해 이용(구매) 가능하다.
아시아 투어를 마치고 집에 돌아간 후에 나의 어머니는 백혈병과 오랜 투병 생활 끝에 56세의 나이로 임종하셨다.
1년 뒤 나의 친구 프랑키에 다니엘스, 내가 형이라고 부르던, 역시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나에게 엄청난 사랑을 남기고 떠나셨고, 또한 나에게 내가 사랑하고 매우 아끼는 아름다운 푸른 천사의 눈을 보내주셨다 - 후에 진정한 헐리우드 로망스라고 전해질. 프랑키에의 죽음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나의 두 번째 앨범의 프로듀서이자 옛 친구인 톰 워만으로부터 전화 한 통화를 받게되었다.
그는 나에게 영화 "메탈 갓" (나중에는 "락 스타" 로 다시 명명됨)에서 나의 목소리를 영화에 넣는 것에 대해 관심여부를 물었다.
나는 마크 월버그의 목소리 역을 맡았다. 나는 영화에서 8개의 노래를 불렀는데, 그중 하나가 앨범 "Wait"에서의 "We all die young"이었다.
이 프로젝트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 나는 나의 관심거리인 전자 테크노-트랜스의 세계를 추구하고, 음악을 등지고 있는 삶의 더 나은 감상과 이해를 얻기 위해서 3개월 동안 유럽을 여행했다.
베를린의 러브 퍼레이드로부터, 아름다운 아이비자의 섬에서, 암스테르담의 스모키스에서 바로 위의 것들을 추구할 수 있었다.
나는 3개월 동안 여행하고, 공부하고, 관찰하고, 또한 모든 것을 즐겼다.
나는 이 생각들과 경험들을 나의 다음 앨범에 구체화시킬 것이다. 유럽여행 후, 지쳐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년 동안 버지니아의 작은 산에서 동면했다.(활동을 하지 않았다)
이 시간동안 나는 나의 육체적인, 정신적인, 그리고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버지니아의 한 집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1주일 후에 나는 이곳을 떠나 당신 모두들의 앞으로 돌아갈 것이다.
새로운 시작의 시간이 왔다. 분노에서 평화로, 고통을 통해서 이해로, 인내에서 승리로와 함께 나는 당신 바로 앞에 있다.
스틸하트의 마이클 마티예비치가...
![](https://t1.daumcdn.net/cfile/cafe/1673A83E4F70F6E420)
첫댓글
스틸하트 팬이신가보네요 저도 참좋아했죠 캔스탑 미 러빙유 를 굉장히 좋아햇죠
팬이시네요..근데 너무 같은 혹은 비슷한 자료 중복하는것도 좋아보이지는 않군요
스틸하트 자서전은 처음입니다. 어쨋든 자제하도록 하지요~
크로캅하고 같은 출신인가보네요..자그레브..
스틸하트가 싫어질것 같네요
나도 스틸하트 좋아하는데 딱 이미지가,, 어릴적 상상했던 락커의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어요
- 예전에는 She's gone(쉬즈 곤)이나 'A tale that wasn't right(어 테일 댓 워즌트 라이트)' 이런 곡들이 유행했잖아요.
제가 땀흘리고, 부대끼면서 살았던 애들이 미군 애들인데 스틸하트(Steelheart)의 쉬즈 곤을 틀어놓으면 '게이가 불렀어?' 이런 반응이에요.
- 그래요?
'왜 이래?' '노래 왜 이래?' 음악 취급을 안 해요.
- 우리나라에서는 최고잖아요.
네. 그런데 진짜 별로 안 좋아해요.
출처 : 디시뉴스
기사링크 : http://www.dcnews.in/etc_list.php?code=succeed&id=19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