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지
맷돌 호박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묵혀둔 화덕 위에도 오래된 담벼락 위에도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지난 늦봄 아버지는 몇 개의 구덩이를 파고 대여섯 개씩 호박씨를 묻었다. 척박한 자갈 언덕을 등지고 세력을 불려 나가며 애호박과 잎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었다.
가을의 속도는 느린 듯 갑자기 빨라진다. 물기 말라가는 잎을 젖히고 호박을 찾는다. 덩실한 열매가 등불처럼 달려 있다. 가뭄과 뙤약볕, 태풍을 이기고 기어이 여물고만, 장한 결실이다. 기우뚱한 자리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허공에 매달려도 너끈히 버틴 것은 모두 꼭지 덕분이리라.
꼭지는 잎사귀나 열매를 가지에 달려 있게 하는 짧은 줄기를 말하지만, 도리깨의 자루 머리에 낸 구멍에 끼우는 나무 비녀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꼭지는 두 부분을 연결해주는 존재인 것 같다. 호박 꼭지는 예부터 임산부들이 유산 방지를 위해 이용하는 민간요법 중 하나이다. 임신 중 출혈인 ‘태루’가 있을 때 볶아서 가루를 낸 후, 찹쌀 뜨물이나 미음에 타서 마시면 좋다고 한다.
엄마가 자리를 보존하고 누운 지도 여러 해 지났다. 언니는 맏이라는 자리 때문에 수발을 자청하고 나섰다. 24시간을 대기하며 곁을 지키다 보니 온전히 누릴 개인 시간이 없다. 한창 여물 나이에 언니의 계절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한다.
아름드리 호박을 찾았다. 반질반질하고 껍질이 단단한 것으로 보아 잘 여문 것임을 알겠다. 좌우 균형이 맞고 곡선을 타고 흐르는 감촉은 매끈하다. 단단한 꼭지를 떼고 쪼개보면 담황색의 속살을 내보일 것이다. 왼손으로 밑동을 받치고 오른손에 힘을 준다. 단단히 붙어 있어 꼼짝하지 않을 것 같은 줄기가 손가락 두어 마디를 남기고 뚝 부러진다. 지지대가 없어도, 탱자나무에 매달려서도 너끈히 버티던 호박은 때가 되면 저절로 알아서 넝쿨을 버린다.
자고 일어나면 요양원으로 떠난 동네 어른의 택호가 하나둘 담을 넘어온다. 누구네 소출이랄 것도 없이 구판장에 모여 함께 마늘을 까고, 파를 다듬고 콩을 고르던 손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친구 대부분을 요양원으로 보낸 엄마의 목에는 호루라기가 걸려 있다. 성마르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 달려가 보면 말을 내보내지 못한다. 생각은 떠오르지만 낱말이 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번번이 허탕 친 호출은 언니의 하루를 48시간처럼 길게 만든다.
엄마의 몸은 거의 근육을 잃었다. 억세고 건강하기만 했던 촌부의 손은 혈기를 잃어버리고 파리한 핏줄만 남아 있다. 피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아 차갑기만 하다. 돌려 눕하려 했더니 침대 난간을 힘주어 잡는다. 아직 손아귀의 힘은 그대로인 것 같다.
저 다섯 손가락 안에 엄마는 무엇을 잡아두고 싶은 것일까. 희미한 기억이나 꺼져 가고 있는 생명, 혹은 완치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일지도 모른다. 제사를 모실 때는 “내 병을 가져가 달라고 할머니께 빌어보라.” 말하기도 했다. 당시엔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웠는데, 이젠 나도 그 말을 붙들고 싶어진다.
아잔 브람은 ‘놓아버림, 즉 마음을 버림으로 기울이고 그것을 계발하는 쪽으로 향해야 한다.’고 한다. 깊은 수행으로 이러한 강력한 상태에 도달하면 주요한 원인을 버리고, 놓아버리고, 포기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핏줄에 걸린 일이라면 어디 쉬운 일인가. 맺었다 떨어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지만 쉽게 놓을 수 없다.
‘때가 되면 엄마도 요양원으로 보내야 하지 않을까?’ 차마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예의도 아니지만 모든 시간을 담보 잡히며 돌보고 있는 언니 정성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다. 기약 없는 일에 언제까지나 매여 있을 측은함도 외면할 수 없다.
검버섯 같은 얼룩이 군데군데 나 있는 호박이 보인다. 손으로 꼭지를 들어 올리는데 툭! 하고 떨어진다. 꼭지가 떨어진 자리에 하얀 오각형 무늬가 생겼다. 초여름 노란 꽃으로 등불을 밝히고, 성성한 여름엔 초록빛 열매를 매달더니 황금빛으로 익은 후엔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내 낙엽이 지리라. 나무는 요즘 잎자루에 특수한 세포층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이 떨켜로 인해 잎은 곧 나무를 떠나겠다. 자연은 이처럼 언제 붙들어야 하는지, 언제 놓아야 하는지를 잘 아는 존재이다. 조막 같은 덩굴손으로 나뭇가지를 잡아야 할 때, 꼭지를 떨어뜨려 땅으로 돌아갈 때를, 언니와 엄마에게도 머잖아 떨켜가 생길 것이다.
삶은 붙드는 것과 놓는 것의 순환이다. 태어날 때 우리는 모태로부터 꼭지를 떼고 세상에 저를 붙들어 맨다. 그러다 때가 되면 붙잡고 있는 모든 걸 놓게 된다. 어쩌면 형상이 없는 시간이 제 실체를 보여주는 존재가 꼭지인지도 모르겠다.
가을이 조금 더 이별 쪽으로 깊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