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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건녀폐인
작가:건어물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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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짙은 회색빛의 하늘. 그 흔한 별 하나 조차도 없었던 최악의 밤이었다. 이왕 밤이 될 거면 내 존재 까지
도 가려줄 수 있는 그런 깜깜한 밤이 될 일이지, 밤하늘이라고 해서 너무 큰 걸 기대했던 모양이다. 멍
청히 앉아 나직이 흘러나오는 연예뉴스를 응시하고 있는 내 옆에는 메이크업 잡지들만 수북이 쌓여 있
었고…
“유명 연예인의 러브콜 세례로 많이 알려진 메이크업 아티스트 고유리씨가 동양인 최초2007 세계 뷰티
메이크업 대회에서 대상을 거머쥐었습니다. 현재 영화배우 정우설씨와의 스캔들로 그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마약 밀입국 및 마약 소지로 체포된 모델 오차담 군의 소식입니다. 지난 11일 저녁 8시 경 자택에서
쓰러진 채 발견 된 모델 오차담 군은 병원 검사 도중 대량의 마약 성분이 검출돼 경찰의 수사를 받았습
니다. 현재 그는 구속된 상태이며...”
외로이 울려 퍼지는 TV볼륨을 듣고 있자니, 책상 한 켠에 쌓아 두었던 종이쪼가리들을 죽죽 찢어버리고
싶어 손이 근질거리는 터였다. 엄마가 왜, 우주를 돌아다니는 작은 먼지가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그 이
유는 전적으로 아빠한테 있다.
누구보다도 고왔던 엄마였는데…그런 엄마의 품에 안길 때마다 풍겨오는 살 내음은 꽤 오랜 시간이 지
난 지금까지도 내가 엄마를 놓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엄마-
이 두 글자에 담긴 파워는 생각보다 강해 순식간에 나를 멈추게 하는 아주아주 강력한 무기.
그래서 그랬다…내가 아빠를 더 더욱 용서치 못하는 것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지긋지긋한 일상. 벗어나고 싶은 나날들. 그러나 알고 있었다. 절실히 도망치고 싶은 만큼, 영원한 도피
처는 없다는 것을.
"아미 왔니?"
"아줌마도 참 뻔뻔하시네요."
별이 흔하다고 누가 그랬던 가. 그건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였다. 밤하늘에 총총히 박혀있을 법한 별
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니었다. 고개만 들면 별을 볼 수 있다는 얘기는 구닥다리나는 가짜 얘기일 뿐이
다.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내 머리 위 하늘엔 별이 없으니까….
엄마, 엄마가 사는 우주로 가면 날 받아줄 건가요?
너덜너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잎사귀 같은 열일곱 내 인생.
....꽃이 필 순 없을까요?
.........
..
미소녀 심리 ST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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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건녀폐인
작가:건어물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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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여기는 지구. 여기는 지구.
2009년. 신(新)분제 사회.
가늘고 기다란 유전자들이 권력을 독점한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시대.
예쁜 자가 살아남고 살아남은 자가 예쁜, ‘좀 더 가늘게 좀 더 길게’ 행성의 사람들. 몸뚱이가 가늘수록,
면상 떼기가 작을수록 꽃가마 타고 장원급제 하는 신진 관료들. 거기다 훌륭한 쭉, 빵 자격증만 취득해
도 바로 임금님 승은을 입는 마마들. 그리고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애초에 신의 총애를 등에 업고
태어나는 건지.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아주 그냥 헉! 하는 외모, 그게 바로 중전마마 급.
잠깐. 여기가 어디냐고?..아아, 말했듯이 여기는, 퍼런 별 지구가 맞다.
[저는 지금 2009 세계 뷰티 메이크업 대회에서 3년 연속 대상을 차지한 고유리씨의 귀국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반면에 내 신분은 참으로 고달프다. 궁은커녕 집 한 채도 없이 국밥이나 퍼주는 아낙네일까? 아니면,
윗 전분들 발가락 때 닦아주는 무수리일까?
언제나 그들 밑엔 내가 있고 내 위엔 그들이 있다는,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
“이모! 여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이모 못 찾겠어!”
나는 이 새 퍼런 지구가 싫다. 너무도 싫다!
01
오늘 누가 귀국한다더니,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공항에는 사람들이 넘쳐흘렀다. 하마터면 수많은 카
메라 줄에 발이 꼬여 넘어질 뻔한 사태도 있었고 사람들 어깨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내 어깨가 남아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럼 화장실에서 기다려요, 이모!”
그렇다. 이 엄청난 인파마저도 신기한 나같이 촌시런 애가 공항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미국에 사는 이모
의 귀국기념으로 마중을 나간 것인데. 맹세코 다만 그 뿐인데 그런데 그것이, 나를 ‘운명’ 이라는 손아
귀에 걸려들 게 한 것임을, 정확히 45초 후에 알게 되었다는 건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억울한 일이었
다.
\화장실 입구
...
...........
이모를 보면 먼저 포옹부터 찐-하게 해야지? 그리고 같이 맛난 걸 먹으러 가는....
..
응.?
으응.....?
.....!!!!!!!!!!!!!
눈이 뿅하고 튀어나올 것만 같은 내 심장 박동수에 발이 당최 떨어지질 않았다. 이모와의 재회에 설레
던 발걸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돌팍처럼 굳어버린 이유는, 시력 1.5를 자랑하는 내 눈에 비친, 야
릇한 스타킹. 남자화장실에서부터 나온 건지 기다랗게 놓여있는 커피색의 스타킹 한 짝! 들어올 테면 들
어 와봐, 라며 날 도발하는 슈퍼마켓 3000원짜리 스타킹! 때문 이었으라.
..무시하고 지나가자. 무시하고 지나가면 그만 인 것을, 관절 그 안이 왜 궁금해지는 건지! 야동 한 번
본 적 없는 내가(하, 하, 한 번은 봤다.) ‘혹시..공공장소에서 19금적인 무언가를..’과 같은 생각에 심장
이 벌렁 거리는 이유는 백프로 할리우드 영화 탓이겠지.
살금. 살금. 살금.
궁둥이를 쑥 빼고 고양이 살쾡이 마냥 조심히 걷는 이 순간에도 내적갈등은 진행 중이었다. 볼까 말까,
볼까 말까. 함 봐볼까..? 에잇! 그냥 보지 말까?...그래. 냉철한 울 대뇌님을 믿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
데...본능에 치우쳐 버려 이미 고개를 쏙 들이민 나를
“..아...아악!!!!! 읍!!!!”
강하게 잡아끌어 입을 틀어막는 한 물체가 있었다.
“헤-!”
그건 바로 위아래 속옷만 입고 있는, 몸매가 기가 막히게 끝내주는 여자였다. 엄청난 손힘으로 내 아구
를 꽉 쥐고 있으면서도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는 이 중전 마마급의 여자는 날 막무가내로 화장실로 끌
고 갔다.
\공항
내 얼굴의 반을 가리는 선글라스, 기본 10cm를 훌쩍 넘긴 킬 힐, 한 손에는 여행용 캐리어, 그리고 몸
에 착 밀착되는, 보기만 해도 아찔한 정장을 입고 걸어 나오는 나를 기다렸는지 대기하고 있던 취재진
들이 먹이를 발견한 괴물처럼 달려들었다.(쥬라기 공원을 생각하시라.)
난생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어리둥절한 느낌을 넘어 딱 기절하기 직전의 상태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은
1초도 안 되었고
“소감 한 말씀 해주세요!!!”
“고유리씨! 언론에 모습을 안 드러내는 이유가 뭡니까??”
“소디섭씨와의 스캔들이 사실 입니까??”
그리고 그때였다. 취재진에 둘러싸여 한 발짝도 못 떼고 있을 즈음, 내 어깨를 잡아채는 묵직한 손.
그래. 정확히 말하면 남자의 강한 손.(_*) 그 정체불명의 남자는 내 짐을 들고 취재진들을 헤치며 앞
으로 나아갔다. 나는 뭣도 모르고 이끌려 나가다 고개를 돌려 남자의 굳게 닫힌 턱 선을 응시했고
이 사람...화났나?
괜히 나까지 위축되는 마음으로 복숭아 뼈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열심히 걷고 있을 때, 마침 그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전화는 왜 안 받아? 아주 작정이라도 하셨나 보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는 빳빳이 굳은 채로 헛기침만 콜록. 콜록.
“오늘 밤에 우리 집으로 와.”
또 다시 콜록. 콜록.
..................................
........
..
“몸 부서질 각오는 됐겠지? 오늘은 그냥 안 넘어가.”
....................
.....콜록. 콜…쿠웨에에에웩취……!!!!!!!!! 콩닥. 콩닥. 콩닥. 콩닥. 콩닥. 콩닥.
ㅏㅁㅇ러ㅏㅇ세상에 세상에ㅈ댜어ㅏㄹ 꽥!!!!!!!!!!!!!!
오장육부가 흔들릴 만큼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혼미해진 나를 검은 색 차 안으로 쏙 집어넣은
그는 돌연 사라졌고 충격으로 놀란 내 심장을 잠재 울 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후아.. 후아... 시간이 필요해 시간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되뇌어 볼 필요성을 느끼고 있을 때, 차는 저만치 출발했더랬다.
생전 처음 보는 동네 입구로 들어서기 시작하자, 그 제서야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사님이 유리씨를 위해 준비한 특별 선물 입니다. 열어보십쇼.”
운전석에 앉아있던 기사는 말했다.
특별 선물 이라는 게, 바로 내 옆자리에 놓인 은빛의 탐스러운 상자를 말하는 건가요? 꿀....꺽.
“오늘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데...여기는 또 어디죠..?
한 손엔 캐리어를, 다른 한 손엔 선물을 든 채 퉁퉁 부은 발목을 자랑하며 내린 나. 차는 얄밉게도 처량
한 나를 부웅 지나쳐 가버렸고 이 낯선 동네에 홀로 남겨진 나는 오늘 하루를 이 단어로 마감 하겠다.
‘헐.’
\남자 화장실
....
그러니까 나에게 죄가 있다면, 혈육에 정이 이끌려 이모 마중을 나온 죄 밖에 없다.
“미안해요. 제가 사례는 단단히 할 테니까 제발 도와주세요. 제 옷만 입구 그냥 공항만 빠져 나가주시면
돼요. 별거 아니죠?”
다짜고짜 제 옷 벗겨놓고 이제 와서 그런 말 하시면 뭐해요...어쩌다 이런 발칙한 일에 휘말리게 됐는지
고민하다 두 개골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그저, 망할 팬티스타킹의 유령에 홀려 이리로 들어오게 된 것
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건 자기 합리화의 특효 때문이겠지.
중전마마 급 되는 얼굴과 몸매로 내 펑퍼짐한 교복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입고 있는 여자는 비루하기
그지없는 내 몸에 자신의 옷을 건네줬다.
“이거 입어 봐요!”
“그냥...옷 만 바꿔 입으면 되는 거죠?”
“헤- 사람들이 조금 달려들지도 몰라요.”
“네?”
“근데 그건 걱정 말아요. 나 지켜줄 사람은 있으니까. 아차, 내가 아니지. 나 말구 꼬마 아가씨.”
나는 지금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으나 이 언니의 손아귀 힘을 한번 경험해 본 나로서는, 그래...그럴 용기
는 없다.
“난 고유리예요. 꼬마 아가씨는요?”
..엉엉!! 옷이 너무 작습니다!!!!!
“...읏챠...! 휴...노, 노아미요.”
진짜 찔끔찔끔 울고 싶은 내 심정과는 다르게, 두 볼이 발그레 해지면서 실실 웃는 언니는 같은 여자인
나도 홀딱 반하게 생겼더랜다. 근데...고유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인데...
“아차! 머리랑 얼굴 조금만 봐줄게요.”
대뇌를 꾹꾹 쥐어짜며 생각에 빠져있을 때, 교복을 완벽하게 소화한 언니에게선 파릇한 여고생의 분위
기가 물씬 풍겼고 구석에 놔두었던 큰 여행 가방을 열어 재껴 분주하게 내 이곳저곳을 손보기 시작했
다. 그리고 슬쩍 본 가방 안에 있는 건 엄청난 양의 화장품.
...두근.!
그리고 대단히 빠른 속도로 내 얼굴이며 머리며 완성해 가는 언니의 정체는 대체 뭘까?
“입술이 나랑 비슷하게 생겼네?”
그러더니 그 많은 화장품을 뒤적거려 내 입술에 마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립밤을 시작으로 립스틱, 그리
고 립글로스까지. 내 눈은 언니의 손놀림을 한 번도 빼 먹기 않고 따라갔던 것 같다.
“우와....”
“부디 잘 살아 남길 바래요. 꼬마 아가씨.”
“언니는...어디 가세요?”
언니에게선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나와는 너무도 다른 사람.
“애인 만나러!”
싱긋 웃는 언니는 마침내 폭풍 같았던 이 현장을 빠져 나갔고 홀로 남겨진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
고 또각또각 앞으로 전진 했다. 아까 그 립스틱은 몇 호였을까...? 하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 채 휘청휘
청. 나를 기다리는 것이 생전 처음 보는 수십 수백의 괴물이라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
.................
P.S 내가 깜빡 잊고 있었던 것들.
첫째. 우리 이모는 주구장창 화장실에서 나를 기다리다 결국 쓸쓸히 택시를 탔다고 한다.
둘째. 예쁜 언니가 가져간 내 교복은 딱 한 벌뿐인 교복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학년 새 학기 3월이 되었다.
-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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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건녀폐인
작가:건어물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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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방불명 모드라니까 왜 자꾸 전화야?”
유리는 샤워하러 들어가는 애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말했다.
-..속 긁지마.
“헤- 벌써 알아버렸어?”
-걘 누구야? 설마 단역까지 고용할 줄은 몰랐지.
교복 치마를 만지작거리는 유리의 입가엔 장난 끼가 묻어있다.
“조금은 실망인 걸? 보자마자 알아차렸어야지. 우리가 보통 사이야?”
-..속 긁지 말랬지.
“택배로 보내줄게.”
-뭐?
“내 대역 잘 소화해준 꼬마 아가씨 교복. 능력껏 잘 찾아봐 어디.”
-야. 고유리 너...
“메이크업 박스 다시 받아와야 하지 않겠어? 김 비서한테 듣기론 굉장히 고가라고 하던데.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상자, 나 은근히 기대했다구...그래서 말인데.....
................
...
우리 오랜만에 내기나 한 번 해볼까?”
...
02
오늘따라 아침햇살이 눈이 부시다. 눈이 부시다 못해 창피하기 까지 한 건, 단정한 학생들 사이에 끼지
못하는 체육복 차림의 나 일테지. 발칙했던 ‘그 날’. 낯선 곳에서 내려져 택시비로 한 달 치 용돈을 모
조리 쏟아 부었다는 바로 그 나알.! 나는 굉장히 찜찜한 일에 말려든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역시나 적시나
고 유리, 중전마마 급의 그녀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 중 하나였던 것이다.(연속 3연승 세계 메이크
업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지, 아마?)
“거기 느! 교복은 우짜고 체육복 입고 왔나.”
교문 앞을 정승처럼 지키고 있는 학주. 참새가 방앗간 옆을 설마 그냥 지나쳐갈까, 학주 역시 날 불러
세운다.
“..잃어버려서요..새로 살 때까지만 봐주시면 안 돼요?”
“우짜다가 잃어버렸는데? 요즘 애들이 교복도 훔쳐가나? 저어기 가서 있으라.!”
날 왕따로 보는 측은한 눈빛의 학주를 지나쳐 삐죽 삐죽 걸음을 옮기는 나. 학주가 말한 ‘저기’에는 나
같이 복장 불량인 애들이 수두룩 쌓여있었고 그 애들은 모두 운동장 7바퀴를 돌아야 하는 공동 운명체
였던 것이다.
몇 분 뒤-
새 학년 첫 날부터 끙끙 대며 뛰는 내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다가도 나중엔 그런 생각조차 귀찮아져 신
발을 질질 끌며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수군거리는 소리가 적잖이 들려왔다.
“..야..쟤 오 차담 아니야?”
“..뭐? 그럴 리가...”
“아냐 맞는 거 같은데?”
숨이 차 잔뜩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휭- 돌려 보면 교문 앞에 주차되어 있는 흰색의 차량 두 대와 가방
을 한 쪽 어깨에 삐딱하게 맨 채 서 있는 한 남학생. 복장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그는 착실하고도 반
듯한 모범생이었다. 또 기럭지는 왜 그렇게나 길쭉한 건지. 여자 애들이 수군수군 할 만 한 바디라인을
가지고 있단 말씀인데,
“근데 쟤...마약 해서 감옥가지 않았어..?”
나만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는 모양이다.
\교실
“안녕하세요. 1년간 여러분들의 담임을 맡게 된....”
담임의 지루한 서론은, 지금이 제일 중요한 시기라느니, 어쩌면 이미 늦었다느니, 말만 길게 늘어놓을
뿐이지 그 뒤엔 결국 ‘대학 잘 가세요.’ 라는 말이 대기 중이라는 건 갓난아기도 알 판 이었다.
“오늘 전학생 두 명이 우리 반으로 올 거예요.”
턱을 괴고 바라본 창문 너머의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오늘의 대기는 그 어느 날 보다도 날 포근
하게 했다. 그래...이 느낌이다. 날 보듬어주고 쓰다듬어주는 엄마의 손길. 나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전학생들은 언제 오는데요?”
“그, 글쎄.? 분명 뒤 따라 왔었는데...이상하다..”
팟.!
아련하게 다가왔다가 금새 사라지는 엄마의 손길 때문인지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 당장 옥상에 올라가
이 기분을 더 만끽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까지 다다르자 담임에게 찍히는 일까지도 감수하고
선 헐레벌떡 뛰쳐나갔다. 그러나 내 간절한 바람은 예상치 못한 이들에 의해 깨졌으니..
“..와그작...와그작...”
“........”
옥상 문을 힘차게, 이내 벌컥- 열어 젖혔을 때, 내 눈 앞에 나타난 건 계단을 두 세 개씩 뛰어오르며
상상했던 나른한 그 풍경이 아니었다. 낯선 이들.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한
여학생과 그런 여학생을 가만히,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남학생, 그리고 그 둘 사이의 묘한 기류.
..다시, 내려갈까? 아직도 옥상 문고리를 잡고 있는 내 손에 힘이 슬며시 빠지기 시작할 때 일순, 바람
이 불었다. 이마를 살짝 간질이는 바람이, 나와 그들을 훑고 지나갔다. 마치 내가, 지구로 떨어지는 운
석이 된 기분이었다. 우주의 힘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만 하는, 누군가 내 등을 미는 듯한 느
낌.
한발짝.. 두발짝..그들을 향해 조심스레 다가가자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가만히 서 있던 남자애는 뒤를
홱 돌아본다. 그리곤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오는 그 와의 거리는 고작 30cm.
“쟤 무서워.”
“네?”
“나 좀 살려줘.”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는 남자애. 차분히 날 내려다보는 눈빛이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경고하는 것 같
아 나도 모르고 침을 꼴깍 삼키고 말았다. 그는 말도 없이 내 팔목을 잡아끌며 주저앉아 있는 여자 곁
으로 걸어갔다. 당황한 나는 바보처럼 어...어..! 거렸고, 마침내,
“이상한 여자야.”
“........”
“쟤 좀 봐. 지금 흙 먹고 있잖아.”
바비 인형처럼 긴 다리에 긴팔, 연예인 못지않은 외모, 그리고 하얗다 못해 투명하기 까지 한
가냘픈 이 여 학생은
“...지..진짜네요”
흙 한줌을 입안에 털어 넣고 있었다. 이 경악스런 장면에 나와 남학생은 어이없는 시선을 마주했고
사지가 마비된 것 마냥 몇 분을 그렇게 굳어있을 때,
털썩-!
와그작와그작 잘만 씹어 먹던 여학생이 별안간 쓰러지고 말았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좀처럼 몸이 움직
여 지지 않는 우리는 또 그렇게 몇 분을 굳어 있었고 슬슬 이성이 돌아오는 건지 그 여학생의 몸 상태
가 심히 걱정 되더라..
찰싹..! 찰싹!
“이봐요! 정신 좀 차려 봐요!”
“죽었나봐..”
“....야.!! 눈 좀 떠 봐!!!!!”
내 손과 이 소녀의 볼이 빨개지도록 뺨을 툭툭 쳤으나 아무런 미동도 없는 여학생.
“저기! 등 좀 빌려주세요!”
“뭐라고?”
“등이요! 빨리!”
“뭐..?”
“등!!!!!”
한시라도 빨리 양호실로 옮겨야 되겠다는 생각에 남학생에게 도움을 청했건만
“싫어.”
“에..?”
“나 쟤 무서워.”
“........”
“못 업어.”
...이런 망할.
나는 흐느적거리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남학생에게 한 번 더 부탁했다.
“그럼 그쪽이 잡아 줘요. 내가 업을 테니까.”
가만히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남자를 무시한 채 쓰러져 있는 여학생을 부축해 내 등에 업었다.
나보다 10센치 이상은 더 커 보이는 키와는 달리, 몸무게로는 10키로 더 적게 나가는 듯한. 흔히 깃털
같다고 하는 표현이 정말 딱 인 여자.
“야.!! 옥상 문 열어!! 아씨. 얘는 왜 이렇게 가벼운 거야??”
오늘은 산뜻한 새 학년 새 학기를 맞이하는 3월.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했던 하늘.
“나 내일 다시 전학갈래..”
“넌 닥쳐!”
...이 모든 게 누군가의 장난 인걸까?
.........
..
\피오레 이사실
“...알아본 결과 요 인근에 있는 성천고 교복이라고 합니다.”
등받이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댄 남자는 비서에게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굳게 닫힌 그의 입술에서는
작은 한숨이 새어나오고 이윽고 1번 버튼을 길게 누른다. 그리고 총 네 번의 연결 음.
-여보세요?
“shit. 내기 콜이다.”
-정말?
“내기 조건이나 말해.”
-헤.. 흥미로워 지는데? 만약 메이크업 박스를 확실히 되 찾아온다면...
“..온다면?”
-자기한테 시집가지 뭐.
“........”
딱딱했던 남자의 표정이 씰룩 움직인다.
-왜? 별루야?
“너. 그 말 책임질 수 있냐.”
“내가 지금까지 거짓말 하는 거 봤어?”
“피식- 그럼 식장에서 보자.”
매력적으로 올라간 그의 입 꼬리와 번뜩이는 눈빛. 그리고 책상 앞을 떡 하니 지키고 있는 명패 하나.
‘(주)피오레 천 시 황 이사’
-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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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건녀폐인
작가:건어물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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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막 자전거를 마스터했을 무렵. 세상에서 제일 듣기 겁나는 말이 하나 있었다. 8년이 지난 지금 까
지도 숨 막히게 조여 오는
“젬마야. 요즘 살 쪘니?”
나의 엄마.
“젬마 너는. 유명한 모델이 돼야 한다.”
머리 끝 부터 발 끝 까지 완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엄마는 항상 내 겉모습을 지적하기 일쑤였고 유치원
때부터 발레, 농구, 체조 등 내 몸매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스트레스 때문인지 내 몸 상
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얼마 뒤 사건은 터졌다.
“어머님. 젬마의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
...
학교 신체검사를 통해 밝혀진, 체중 미달에 극심한 영양실조였던 나. 그렇게 양호 선생님과의 긴 면담을
끝내고 나온 엄마는 내 손을 말없이 잡았다. 그리고 알았다.
“젬마가 요즘 살이 많이 쪘대.”
.......
..엄마는, 나의 엄마는 악마였다. 어쩌면 날 바짝 말려 죽일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에 몸이 부르르 떨렸
다. 그때 나이, 내가 고작 12살이 되던 해였다.
“젬마. 나의 딸아...잘 보렴. 넌 이렇게 멋진 사람이 돼야 한다. 예쁜 옷에, 예쁜 머리에, 예쁜 화장에,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워킹 하는 거야.”
내 방 가득 유명 모델들의 사진을 붙여주는 엄마를 보며 난 결심했다. 그 ‘모델’ 이라는 거 죽기 살기로
해 보이겠다고. 저 마녀를 잡아두기 위해서 빗자루를 꺾을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쥐 죽은 듯이. 그리
고 그 순간, 내 시선을 사로잡는 아이답지 않은 뜨거운 카리스마의 한 아역 모델이 있었다...그래, 저 소
년이야. 저 옆에 꼭 서보이겠어.
그렇게 3년 뒤.
거식증이라는 빌어먹을 병으로 병원을 제 집 드나들던 나완 달리 그 소년은 세계랭킹 12위에 빛나는 최
연소 남자 모델이 되어있었다.
03.
교문 앞. 늘씬한 엔쵸 페라리에 기대어 전화를 거는 한 남자.
“적어도 이름은 알려줘야 될 거 아냐. 명찰만 쏙 가리면 나보고 어쩌라고. 후..널 누가 말리겠냐.”
\양호실
“전학생이니?”
양호선생님은 핏기 없이 누워있는 여학생을 유심히 살펴보며 입가에 묻은 정체불명의 물질을 궁금해 하
는 눈치였다. 나는 차마 흙이라고는 말 할 수 없어 민망한 헛기침만 몇 번 해댔고, 빨리 나가자고 내 체
육복을 쭉쭉 잡아당기는 이 망할 녀석으로 인해 오늘 내 기분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너희는 그만 나가봐도 좋아. 깨어나면 교무실로 연락 넣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한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런 내 속도가 못 마땅했는지 순식간에 내 팔을
낚아 채 후다닥 나가는 녀석. 요 놈 봐라? 약 냄새 가득했던 양호실을 나오자 한 달 치 에너지를 다 쓴
기분에 다리마저 후들거렸다.
“팔 좀 고만 놔줘.”
“쟤 내 스토커야.”
“팔 좀...”
“나 따라서 전학 왔대.”
“팔 좀...”
“어떻게 사람이 흙을 먹을 수가 있지?”
“........”
“그렇게 무서운 건 처음 봤어.”
“..팔 좀 놔여.!!!!!”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누구 말을 귓등으로 쳐 먹나.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최대한 건방지게. 그러나 날 가만히 보던 그는 이내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어 보인다.(이때 진짜 재수
없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너 같은 코 찔찔이는 알아서 어따 써먹게..?”
“오차담.”
“오차...뭐?”
“오차담.”
“그게 뭐 어쨌다구.”
“날. 몰라?”
저 눈빛. 저 출처 불분명의 알 수 없는 우월감은. 대체 뭐냔 말이다.
뜨악....반 쯤 입을 벌리고선 얼어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
“..날 지켜줄 사람은 그대뿐이야.”
또 내 체육복을 쭈욱 잡아당기는, 다시 찌질이 모드로 돌아온 녀석.
“맞을래?”
“차라리 때려.”
“........”
“쟨 죽어도 싫다.”
왜 그러냐는 듯, 그의 턱 짓을 따라 뒤로 시선을 돌려 볼 테면,
“야..나이스바디. 누..누군 안 무섭냐...?”
대체 언제 깨어난 건지, 우리에게 슬슬 다가오는 양호실의 소녀였다.
오지마.
오지마.. 오지마여!
간절한 내 외침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다가오는 소녀..
“너 누구니?”
“..나, 나?”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버벅 거리는 나완 달리, 도도한 눈빛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아이였다. 그리곤
내 뒤에 숨어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오차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데..
“모, 몸은 괜찮아? 갑자기 쓰러져서 걱정했어..난 노아...”
“짧게 말할게. 저 자식한테 관심 갖지 말아줘. 저 놈은 완전히 내 꺼야. 젬마 꺼.”
“..어?”
“젬마는 저 놈을 내 손아귀에 쥐고..인정사정없이 괴롭혀 줄 생각이거든.”
“........”
금세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따박따박 잘도 말한다. 그리고 저 어린애 같은 말투는 뭐야? 정신
없는 말에 순간 말문이 막힌 나는 ‘어..저기..그게...’ 머리만 긁적인 채 오차담을 쳐다봤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오차담은 입 모양으로 ‘스. 토. 커.’라고 한 글자씩 강조하며 지껄여대고...나에게 모든 책임을 넘
기는 것 같아 순간 속이 부글부글 끌었으나
...
그때. 나의 대장, 나의 대뇌님께서 친히 신호를 하사 하셨으니. ‘그들과 엮이지 말게나.’
.............
...넵. 대장 말을 받들겠사옵니다! 그래. 난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쓰러진 사람 업고선 달린 것이 죄가
된다면 차라리 내 운명을 걸어보겠다.
“저기..난 얘한테 전혀 관심이 없어. 정말 미안하다야..애가 몸매는 침 질질 인데
하는 짓은 영 개념 상실이라.. 이름도 촌스럽고.”
“........”
“반 애들이 모델이다 뭐다 수군거리는 거 나도 들었는데..정말 미안하다야..
내가 그런 쪽엔 영 관심이 없어서.”
“........”
“난 더 이상 복잡하게 참견하고 싶지 않아. 정말. 정말. 정말루. 미안하다야..”
“........”
“이상! 노아미의 얘기였어.”
나는 어색한 웃음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차분히 말했다. 그리고 흐르는 정적의 몇 초. 됐다. 끝이다. 이
젠 이 녀석들과 엮이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슬슬 교실로 가볼...
“젬마.”
..? 멈칫.
“난 예쁜이 젬마라고 해.”
“...앙...?”
“너에게 흙을 주고 싶어졌어.”
.......멍.......
“일종의 의식이야. 너의 영혼을 내 영혼과 융합시키기 위한.....”
“자. 자. 자. 잠까안!!”
“....?.”
“가, 가, 갑자기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죄송합니다. 대뇌님. 저는 당신의 말을 조금 더 새겨들을 걸 그랬나 봅니다.
“오차담을 골탕 먹이자. 너랑 나랑. 우리 둘이!”
“........”
“네가 맘에 들었거든.”
.........멍.........
언제 그렇게 도도했냐는 듯, 상당히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내 손을 움켜쥔다. 머릿속 에서 꽹과리가 수도
없이 울린다. 간간히 징도 들리고 말이다. 그리고 오차담의 살짝 격양된 목소리 또한 내 정신을 산만하
게 만드는데
“야 이 망할 계집애야. 참는데도 한계가 있어.”
“풋..”
“웃어?”
“벌써 잊은 건 아니겠지? 넌..그렇게 질질 바닥으로 끌려 내려오지 말았어야 했어..”
“........”
“너의 추락은 젬마 자존심에 꽤 큰 상처를 입혔거든.”
또 다시 도도하게 혹은, 매섭게 변하는 젬마. 이 아이, 대체 어느 모습이 진짜일까?
그리고 오차담의 얼굴 또한 급속도로 굳어져 갔다. 징징대는 것만 할 줄 알아보였던 녀석의 얼굴이 차
가워졌을 때, 내 기분 또한 그리 편치는 않았는데..갑자기 불쌍해 보이는 오차담 때문일까, 아니면 뼈마
디만 느껴지는 여자애의 하얀 손 때문일까? 역시 이런 상황에서 사태를 파악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
니었다.
“그러니까 젬마는. 너를 두고두고 괴롭혀 줄 생각이야.”
“..네 까짓 게 뭐라고.”
“한 번에 다 말해 줄 순 없지.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워 워...제발 날 사이에 두고 그런 눈빛들 좀 쏘아대지 말아라. 이것들아. 느그들 눈빛에 피부암 걸려 돌
아가시겠다고요!
..........................
.....
..
“내기 한 판 할래?”
.......멍.........
젬마라는 여자 애. 사람 멍 때리게 하는 데 뭔가 있다. 쓰리 멍 아웃! 그리고 벌써 승리감에 도취된 저
표정 까지. 하여간 얘나, 쟤나 정상은 아닌 게 확실하다. 우리 셋 뿐인 복도. 아무도 없이 텅 빈 곳을
한번 휘익- 둘러본 젬마는 순간 창문 밖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쟤 또. 무슨 일 꾸미는 거야..
싱긋.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젬마의 웃음. 대뇌님이 다시 한 번 말씀하셨다.‘피하거라!’
“저기 교문 앞에 외제 차...”
“........”
“........”
앙다문 입술의 오차담과 정신이 하나도 없는 나.
...........
“접수 해 보는 거야.”
....oh my 가뜨. 위대하신 나의 대뇌님. 빠져나갈 구멍은 없는 정녕 없는 건가요?
-3화 끝-
……………………………
출처:건녀폐인
작가:건어물女
……………………………
내가 고작 일곱 살 때, 우리 엄마는 죽어가고 있었다. 언제나 투명한 얼굴로 내게 부탁을 하던 엄마는,
다 죽어가던 순간에도 그 부탁을 잊지 않으셨다.
“아미야....”
당시, 영어를 몰랐던 나는 알파벳이고 뭐고 꼬부랑 글자 모양을 통째로 외우곤 했는데 그건 지금 생각
해봐도 눈물을 불러일으키는 내 효심이었다.
메이크업 베이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것저것을 들춰보다 한 물건을 집어 올려 엄마의 곁으로 다가간
다. 숨 쉬기도 힘든 엄마는 다 말라버린 입 꼬리를 간신히 올려 보이고 일곱 살의 나는 정성스레 엄마
의 얼굴에 펴 바른다.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단지 엄마가 기뻐한다는 일념 하나로 매일 밤 할머니 얼굴에 몰래 연습을 했었
다. 그것이 뭘 의미하는 지도 모르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아빠를 마냥 그리워했었다. 그것이 마지막 인
지도 모르고 같이 놀이동산에 가자는 엄마의 말을 철썩 같이 믿었다.
그리고 그것이...나와 엄마의 짧고도 강렬한 추억임을, 엄마가 내게 남긴 유언임을, 엄마의 마지막 사랑
임을, 나는 눈물과 고통의 시간 속에서 알게 되었다.
“넌 꿈이 뭐야?”
“........”
나와 엄마를 끝까지 외면했던 아빠와의 삶 속에서, 하루하루 싸워나가는 이 속에서,
꿈?
나에겐 단지 현실만이 존재할 뿐이다.
04
“내기에서 이겨봐. 그럼 다시는 너희들 앞에 안 나타날게. 이래도 안 할 거야?”
32차원 적인 젬마는 나와 오차담을 깐따삐야 별로 보내버리기에 충분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이 녀석들을 전에도, 그 전에도, 그 전 전에도 본 적이 없다. 이 녀석은 고작 굴러 들어온 전학생 일 뿐
이고 나는 이제 막 3학년이 된 박힌 돌이란 말이다.
내가 대체 이것들과 어째서 엮이게 되었는지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그래.. 옥상에 가질 말았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창문 밖 너머의 하늘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 머릿속을 쉼 없이 굴리며 혼자 자책하
고 있었을 때,
“그래. 까짓 꺼 한다. 시작해 당장.”
아직도 딱딱하게 굳어있는 오차담에게서 나온 말이 내 귓가를 흔들었다.
“그대 이름이 뭐였지? 어쨌든 그대도 무조건 해.”
씨익 웃는 젬마와 씰룩이는 차담이.(차담이는 젬마에게 완벽히 걸려들었다.)그리고 멍청하게 입을 떠억
벌리고 서 있는 나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이 게임을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교실
“그냥. 아무렇게나.”
대체 어떻게 해야 ‘접수’가 되는 건지 물어오는 나를 간단히 눌러버린 젬마의 말. 그리고 대각선으로 앞
에 앉은 오차담은 허탈한 웃음을 짓는 날 바라봤다.
“........”
어쩌라고 차담아.
“내가 이길 거니까 걱정 마.”
“........”
“나의 그대.”
....이 지랄하고 있다.
절실히 느끼는 거지만, 내 마지막 학창시절이 아무래도 순탄치 않을 것만 같다. 내가 말하는 건 공부에
‘쩔어’ 힘들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이 ‘진상들’ 때문에 말이다.
정확히 15분 전.
시끌벅적, 안 그래도 한 가닥 하는 여자들의 수다가 절정에 치닫는 순간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나와 함께
들어온 두 전학생 때문에. 백만 배 더 자세히 말하면 ‘전직 모델’ 오차담의 등장으로 눈 뒤집혀진 아이
들.
“오..오..오차담이다!!!!!!”
순식간에 오차담 주변을 둘러싼 무서운 여 학우들은 나와 젬마를 밀쳐내기에 이르렀고 난 그때 보았다.
번뜩이는 젬마의 눈빛을. 위험수위에 도달하는 그녀의 콧구멍을!
“차담아! 여기 싸인 좀!”
“싸인?”
“으응!!!”
“...까먹었는데”
카운트다운 들어갑니다...아멘...10.....9.....8.....7.....6.....5.....4.....3.....2........
...................
..
촥-!!!!!!!!!!!!
“아악_!!! 뭐야!!!!!!!”
“썅!!!! 눈에 뭐 들어갔어!!!!!!”
“어떤 년이야...!!!!!!”
뭐긴 뭐겠니 이것들아. 젬마 표 흙이시다.
“비켜. 오차담 건들지마.”
젬마 특유의 도도 포스를 풍기며 그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데 왠지 모를 뿌듯함이 드는
건 왜일까..오차담 너도 혹시..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설마? 자리에 앉은 오차담을 여
전히 힐끔 힐끔 쳐다보는 시선들은 있었지만, 첫 등장 때보다는 한층 차분해진 분위기인데..
드르륵.
그때 또 다시 앞문이 열렸다.
깔끔한 세미 정장에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들어오는 한 남자 선생님. 나는 몸도 마음도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버렸기에 다른 아이들처럼 호기심을 발동하진 않고 그저 책상 위로 몸을 고이 눕힐 뿐이었다. 첫
날부터 이런 행동은 곤란하다는 걸 알지 만서도 벌써 반쯤은 잠들어 버린 나였다.
웅얼웅얼....
.......
꽤 괜찮은 목소리로 뭐라 뭐라 얘기하는 것 같은데....
........
으으. 시끄러워.
차분했던 내 정신에 살짝 틈이 생기자 그 사이로 들어오는 한 음성.
“...특히 여학생들 잘 들어. 봄 여름 가을 겨울 매번 아프다고 나뒹구는 애들. 그 즉시 바로 운동장 열
바퀴에 태도점수 5점씩 감점이다. 그리고 생리통이다 뭐다 불쌍한 표정 떨어봤자 안 통하니까. 빠질
생각일랑 지금부터 버려.”
“........”
..시끄럽다고!
“체육수업을 대충 시간이나 때우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녀석들은 몸 부셔질 각오해라.”
........................
....
시끄...! 으음....? 뭐, 뭐가 부셔진다구요...?
.....
..네...? 벌떡_!!!!!!!!!!!!!!!!!!
지. 지. 지.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헤롱대던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몸 부셔질 각오해라.’
‘몸 부셔질 각오해라.’
유독 귀에서 길게 맴도는 이 말. 이 말투. 이 음성. 천근만근 무거웠던 눈이 순식간에 말똥해졌다.
“몸 부서질 각오는 됐겠지? 오늘은 그냥 안 넘어가.”
.왜 그때가 떠오르는 거냐고. 빌어먹을 공항사건이!
“거기 너 뭐야?”
“........”
“불만이라도 있나?”
“...누구세요?”
“뭐?”
“선생님. 정말 선생님 맞으세요?”
“........”
“........”
말 그대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듯한 질문에 여기저기서 풋-하고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사
뭇 진지한 표정으로 잠에서 덜 깬 듯한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선생님. 그 모습에 덩달아 나까지 아밀라
아제 대량 꿀꺽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왜?”
“........”
난 이때 엄청난 내적 갈등을 느껴야 했다. 왠지 ‘그’가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온 몸을 휩쓸고 지나가자
비로소 침대 밑에 꽁꽁 숨겨둔, 3주 분량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은빛의 상자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하하하...방금 제 꿈에 나오셨잖아요.”
실없이 웃는 나와
“그래 영광이다.”
억지로 웃어 보이는 선생님. 나는 선생님의 시선을 피해 조용히 다시 앉았으나..어금니를 힘껏 깨물며
억지웃음을 짓는 선생을 보고야 말았다.
“만나서 반갑다. 앞으로 너희들의 체력을 담당하게 될....”
잘 생각해 봐야겠다. 예기치 않은 사건이 또 연달아 일어나버렸으니. 이걸 어떡한담...?
정말로
“..천시황 이라고 한다.”
잘 생각해 봐야겠다.
\쉬는 시간
“시작 안 할 거야? 그럼 나 먼저 한다?”
“........”
종소리에 딱 맞춰 일어난 젬마와 차담이는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나를 흔들었다. 그러더니 포스트 잇
한 장을 꺼내는 젬마는 중얼중얼 거리며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차에다가 오바아트 한방 뿌려주면 게임 오버인데...오늘은 이상하게 소화가 잘 된단 말야.”
[010-9597-XXXX 전화주세요. 차 긁은 범인을 목격했습니다.]
“이걸로 뭘 어쩌려구?”
“가서 차 좀 박박 긁은 다음에 이거 붙이고 올게.”
또 나왔다. 저 천진난만한 표정. 아마도 젬마는 ‘상황에 맞는 표정’을 다시 배워야 할 듯싶다. 그러다 가
만히 있던 차담이도 포스트잇을 빌려 슥슥 무언가를 적는 것 같은데..
[010-3453-XXXX 비싸게 돈 받고 팔 수 있는 전직 모델 오차담의 정보 드립니다.]
...아주 작정을 하셨네요. 이 둘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에 나도 모르게 포스트잇 한 장을 뜯고 있더라.
복잡한 머리. 심란한 마음. 거슬리는 물건. 떼고 싶은 인간들. 해결 불가능의 이 출렁거리는 것들을 어
찌해야 하나.
010-6777-XXXX 거리낌 없이 휘날려 쓴 번호와 멈칫 한 손. 그리고 순간 떠오른
“몸 부서질 각오는 됐겠지? 오늘은 그냥 안 넘어가.”
약 3주 전의 그 목소리. 에라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고유리가 애인을 만나러 간대요.’
이런 터무니없는! 나에게 전화 올 일은 절대 없을 거야...그 외제차 주인...
-4화 끝-
……………………………
출처:건녀폐인
작가:건어물女
……………………………
“어. 김 비서. 내 차 좀 회사 앞으로 갖다 놔.”
시황의 연락을 받자마자 부리나케 성천고로 향한 김 비서는 이사님의 차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곳저곳 성한 데가 없을 정도로 빽빽이 낙서당한, 그가 유독 아끼는 차.
주변에 돌덩이 몇 개가 떨어져 있는 거보니 누군가 고의로 긁어 놓은 게 분명했다.
이사님이 보시기 전에 빨리 원상복귀 시켜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김 비서의 손이 바삐 움직였고..
차 앞 유리에 붙여져 있는 세 장의 포스트잇을 바라보다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어이쿠....하여간 요즘 애들이란...”
김 비서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불같은 성질의 이사님이 아시면 하늘이 노하고 땅이 흔들릴 만한 일
이었으니까.
05
인터넷 검색창에 ‘오차담’이라는 이름을 몇 번이나 지우고 쓰고 지우고 썼는지...엔터를 칠 듯 말 듯한
떨리는 손. 왜 이렇게 망설이는지 모르겠다. 그가 유명 모델이었다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마약을 했었
단 사실을 나 혼자만 몰랐기 때문일까?
유명 모델에게 이런 사건이 터졌을 땐 분명 대대적으로 보도가 됐을 터인데 나 혼자만 기억을 못한다는
것은....그래! 우리 대뇌님은 별 중요하지 않은 사건을 저장해 두는 법이 없다!
나는 괜히 짜증이 솟구쳐 컴퓨터를 거칠게 껐고 문득, 내일 1교시가 체육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뒤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몸 부서질 각오는 됐겠지? 오늘은 그냥 안 넘어가.”
으으으.
잊을 만하면 생각나버리는 빌어먹을 목소리. 그때 그 남자의 얼굴을 확실히 봤어야 했다. 그리고 왠지
모를 쌔-한 느낌의 체육선생 또한,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네 주인은 어디 있는 걸까?”
나는 먼지를 털기 위해 내 놓았던 은빛의 상자를 눈으로 한번 쓸어내고선 다시 어두컴컴한 침대 밑으로
집어넣었다.
\운동장
“안녕?”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지만,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걸어오는 젬마 저것은 정말 사람이 맞는 걸까?
아무리 말랐어도 저렇게 나무젓가락이 될 수는 없을 텐데 말이다.
“다시 전학가고 싶어...”
그리고 왠 만한 이 아니면 멋 내기 힘들다는 후질 근한 학교 체육복을, 엄청난 간지로 소화해내는 오차
담 또한 정상인은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아침밥들은 먹고 왔나?”
휘적휘적 걸어와 쌀쌀맞은 눈으로 우리들을 둘러보는 체육선생님의 등장으로 내 기분은 한층 더 무거워
져만 갔다. 자기가 뭐라도 되는 냥 우리들을 내려다보는 저 눈빛. 정말 안 든다. 중저음의 목소리 톤이
은은하게 울릴 때, 예상외로 너무나 딱딱해서 자꾸만 움찔거리게 된단 말이다.
“너희 같은 애송이들이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뭔 것 같나?”
“........”
“..그딴 게 있을 리 없다. 담배나 피고 그 시답잖은 연애나 할 바엔 차라리 뛰어라.”
불뚝 솟아있는 선생님의 목젖이 위 아래로 움직였다. 그거에 난 왜 입이 점점 벌어지는 건지...
“난 수험생이랍시고 책상에 엎어져있는 꼴은 절대 못 봐. 내 시간에는 죽기 살기로 움직여야 될 거다.”
그런데 그것이 나 혼자만 ‘변태’가 돼버린 것은 아니었다. 체육 선생은 오차담 못지않은 몸매로 벌써부
터 여학생들의 로망이 된 듯하다. 대놓고 빤히 선생님만 쳐다보는 몇몇의 무리들. 눈에선 오로라가 반
짝 이는데 역시 슬슬 입이 벌어지더라.
나이는 대체 몇 살인건지 아직 탱탱한 피부가 눈에 훤히 보이는데 제길...
원래 총각선생님이 여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건 당연한 이치지만 이 선생은 좀 다른 듯싶다.
그런 여학생들 하나하나를 다 주무를 것 같은 수완에, 마음 깊숙한 곳 까지 꿰뚫을 것 같은 눈빛에,
이목구비의 강렬한 선이, 단순한 ‘인기’에서만 머무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만 할 때까지 뛰어!”
걸핏하면 어금니 깨무는 저 무서운 습관만 아니라면 말이다.
“전화 안 왔어.”
쌜쭉한 표정으로 말하는 차담이와 그런 그를 덤덤히 바라보는 젬마, 그리고 나는, 이 얽히고설킨 거미줄
에 걸려든 불쌍한 잠자리 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거미는 누굴까...
“그만 두자. 의미 없는 일이야.”
내가 말했다. 그러자 금세 흥미를 잃은 듯한 젬마는 손 안의 흙을 만지작거린다.(젬마는 늘 흙을 쥐고
다닌다.)우리 셋은 그렇게, 도중에 끊겨버린 내기 하나로 묶여있는 아슬아슬한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부터 피구를 하겠다.”
헥헥... 헉헉..
못 해도 7바퀴는 돈 것 같다. 그런데 저 선생은 숨에 차 정신없는 학생들은 보이지도 않는지 바로 피구
를 시작하겠단다. ‘네가 한번 뛰어봐라 이놈아!’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은 굴뚝같았지만 만약 그랬다간
저 선생 이빨에 잘근잘근 물어뜯길 게 분명 했다. 저 선생 보기보다 엄청 성격 더러운 것 같으니까.
저 선생...진짜로 맘에 안 든다.
“살인 피구라고 들어봤나?”
“........”
“지금부터 공에 맞아 죽는 사람은 나한테도 죽는다.”
사납게 번뜩이는 눈빛에 나를 포함한 전체 학생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야 원 죽기 살기로 해야 할
참이었다. 체육시간 하나가 이렇게 서바이벌 틱 하다니...너무 힘들다고요!
“능력껏 버텨봐라.”
....
무심히 던지는 저 말을 시작으로 남-녀 골고루 편을 가른 우리 반. 그리고 말 한마디 없이 서로의 눈치
만 보는 가운데 ‘공포의 피구’가 시작되었다.물론 처음엔 공도 살살 던지고 선생님 눈치 보느랴 ‘살인’은
커녕 타박상도 못 입힐 정도였는데...
“여자라고 봐주는 건 없다. 무조건 공으로 맞춰.”
그런 우리의 피구가 영 맘에 안 들었는지 보다 못한 선생이 끼어들었다. 냉랭하게 울려 퍼지는 그 음성
하나에 공의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소리 하나 조심했던 직사각형 안의 우리들은 점차 비명 비스무리
한 소리가 터져 나왔고 발걸음 또한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피구에 불이 붙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나 역시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어있을 때, 상대편이던 차담이가 멍하니 흙이나 만지고 있는 젬마를 향해
공을 던질 태세 인 게 아닌가.
빌어먹게도 내 예감은 적중했고
저 젓가락 같은 애 맞춰서 뭐가 그리 남는다고, 온 힘을 실어 팔을 뻗는 차담이.
순간, 본능인지 뭔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내 몸이, 차담이가 공을 던지는 동시에 젬마를 향해 뛰어갔고
퍼억-!
역시나 그의 공에 어깨를 맞아버린 나였다.
그리고 놀람과 미안함이 섞인 눈으로 날 바라보는 차담이와 젬마. 이 웬수들....
“우씨.....”
나는 비집고 나오는 말을 뒤로 한 채 찌릿하게 느껴지는 통증을 부여잡고 나갔다. 그러자 그 통증보다
더 한 눈길로 날 노려보는 선생님. 공에 맞은 것도 죕니까? 소녀...억울하옵니다..! 목 끝까지 차오른 말
을 끝내 내뱉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기가 팍 죽어서는...
그렇게 죄인마냥 선생님 옆에 서 있는데, 요령이 생겼는지 눈치껏 공을 던지는 반 애들이었다. 나만 죽
이고 다들 살아 남겠다 뭐야! 괘씸한 마음에 입이 삐죽 나오는 날 보았는지 체육선생은 ‘못생긴 입술 내
밀어봤자 이미 죽었는데 뭘 어쩌라고.’ 라며 막말을 지껄인다. 성격 차암 까칠하다.
그렇게...비로소 지루하게 계속되던 피구가 끝이 나자
“넌 따라와.”
...정말로 나를 죽일 셈 인가보다.
\교무실
“이름.”
“네?”
“이름이 뭐냐고. 선생님은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한다.”
“...노아미요.”
“후...그래 네가 저번에 잠꼬대 하던 그 애군.”
제대로 겁먹은 나.
“...선생님. 절 대체 어떻게 죽이실...거죠?”
나는 울상이 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교무실에서, 그것도 제일 맘에 안 드
는 체육 선생님 앞 에서 제 정신으로 있다는 것은 불가능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선생은 그야말로 가소
롭다는 듯이 살짝 입 꼬리를 올리며 말을 한다.
“내가 이 학교에 있을 동안 내 눈과 귀가 되어줘야겠다.”
“...네? 제가요?”
“네가.”
“확실히...제가요?”
“확실히 네가.”
나는 ‘이게 무슨 수작이야’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 선생 대체 무슨 꿍꿍일까.
산소부족을 외치는 대뇌를 달래면서 나는 그의 말에 다시 집중했다.
“..사람 한 명을 찾고 있거든. 근데 이름도 모르고 학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른다. 꽤 힘든 작업이 될 것
같아서 네가 도와주면 좋겠다.”
“제가 큰 도움이 될까요?”
“큰 도움까진 바라지도 않아. 그냥 잔심부름만 하란 소리야.”
순간 불끈! 뒤틀렸으나
“하필 왜 저예요?”
나는 억울함을 잔뜩 담은 눈으로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제가 지금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
거든요...거기다 선생님까지 감당하고 싶진 않네요. 이런 내 깊은 뜻을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벌어
진 입 사이로 실 웃음 하나를 흘렸다.
“꼭 너일 필요는 없었지. 단지 네가 공에 맞았을 뿐이야.”
“........”
“잘 부탁한다. 쫄병.”
쳇...재수없어...
“그런 의미로 숙제 하나를 내 주지.”
서랍을 뒤적여 쪼글쪼글 구겨진 종이를 건네주는 선생은, 다행이도 딱딱하게 얼어가는 내 표정까진 살
펴보지 못했나 보다.
“얼마 전에 내 차에 장난친 녀석들이 있다는데...그 중에 이게 좀 거슬리거든? 어쩌면 내가 찾는 사람일
지도 몰라. 그러니까 쫄병 네가 한 번 전화해서 알아 봐.”
“........”
“그리고 즉시 보고하도록.”
여기가 무슨 회사입니까, 와 같은 불만도 잠시. 내 손에 있는 이 믿을 수 없는 종이에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 차가, 선생 꺼 였어? 공항에 그 남자가....정말로 선생 이였어? 설마설마 했던 일이 바로 눈앞에
나타나고야 말았다.
‘010-6777-XXXX 고유리가 애인을 만나러 간대요.’
오차담보다도, 젬마보다도, 더 질기고 강한 악연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야 말로 상대하기 벅찬 사람.
“서..선생님이 직접 하셔도...될 것 같은데요...”
“두 번 말 하는 거 싫어한다고 분명 전했을 텐데. 쫄병이 왜 있겠냐. 나는 이런 하급일은 안 맡는다.”
“........”
“일 처리가 더디군. 넌 비서 체질은 아닌 것 같다.”
시종일관 무뚝뚝하게 대하는 선생을 보며 괜히 기가 죽은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 그런 거에 투정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내 앞에 놓인 크고 큰 산. 어떻게 넘어야 하나, 벌써부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그냥 걸어 넘어? 아님 케이블을 타?
.....아님..아예 넘지 말아? 이실직고해서 가장 정상적으로 푸는 방법이 있긴 하지만....
\
“빨랑 복귀 안 해? 너 밀린 일이 산더미야. 알긴 알아?”
시황은 깨끗이 고쳐져 있는 차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대체 얼마나 망가져 있었으면 이틀이 넘도
록 코빼기도 보지 못했나, 하는 의구심을 가진 채.
-응. 아직 안 가.
“...너 사실대로 말해. 또 애인 생겼냐.”
-글쎄?
“뭐 상관은 없지. 어디 맘껏 놀아봐. 곧 있음 꼼짝없이 웨딩드레스 입어야 하니까.”
-헤에.? 벌써?
내색 않던 유리가 짐짓 놀란 목소리를 내자 슬그머니 입 꼬리를 올리는 시황이었다.
“그건 내 쫄병한테 달렸다.”
-5화 끝-
……………………………
출처:건녀폐인
작가:건어물女
……………………………
“오차담 빨리 일어나! 피팅 하러 가야지!”
상의를 벗고 자는 게 그의 오래된 습관이라는 걸 알면서도 시은은 늘 떨렸다. 누가 그를 열여섯 어린
소년이라고 하는 가. 그는 최고의 모델이자 시은에게는 남자로 다가온 사람이었다.
“시끄러...”
눈을 비비며 나직하게 내뱉는 말 하나에도 시은의 가슴은 요동을 쳤다. 과묵한 성격의 그가 이렇듯 다
정한 눈으로 날 바라봐 줄 땐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그러나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었기에 이
렇게도 애틋한 거겠지, 시은은 항상 생각한다. 집에서 정해준 약혼자까지 있는 스물일곱의 여자가 바로
나, 천시은 이니까.
“나 그 쇼는 싫어.”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디자이너...저번에 누나한테 키스한 새끼잖아.”
“그냥 인사치레가지고 뭘 그래.”
널 사랑해.
그의 그 흔들림 없는 사랑이 나를 너무 벅차게 만들어 지금이라도 당장 너와 함께 떠나고 싶어. 이깟
정략 반지 하나에 내 사랑을 옭매어두는 어리석은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차담아..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 줄래?”
말없이 날 안아주는 그의 품에서 조금은 울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너와 나의 마지막이 될 줄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겠지. 갑작스레 떠난 나를 묵묵히 기다리다가도 예상치 못한 내 결혼소식에 날
원망하고 있을 너.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네 곁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나.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어 심장 깊숙한 곳에 너를 감춰둬야만 했던 못난 나를 용서해 주겠니?
그리고 간간히 들려오는 너의 안 좋은 소식들은 날 너무 아프게 해. 그렇지만 넌 절대 스스로를 포기하
려드는 애가 아니란 걸 잘 알아...
차담아. 난 아직도 널 사랑해. ....내 마음이 들리니?
06.
“순대 먹으러 가자! 떡볶이 국물에 요로코롬 찍어서.....”
“시끄러!”
이 놈. 모델이라는 거 아마도 뻥이 아닐 까? 세계를 주름 잡았다면 저렇게 방정맞게 말할 수는 없는 거
다! 나는 급 피로해지는 느낌에 마른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 날 이후 며칠이 더 흘렀지만 여
전히 내 머리는 복잡했고 아직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차담이와 젬마도 우리의 첫 내기
는 잊었는지 어느 덧 평범하게 지내기 시작했지만 나에겐 그 이상의 무언가가 짓누르고 있었다.
한마디로, 도저히 선택이란 걸 내릴 수 없는, 패닉의 상태란 말씀이다!
“야아. 순대 먹고 땡땡이치자!”
내 팔을 잡고 앞뒤로 흔드는 차담이의 ‘징징’에 자연스레 익숙해 진 나는 거울을 들고 무던히도 애를 쓰
는 듯한 젬마를 힐끗 쳐다보았다.
“뭐해?”
“...가면 쓰기.”
“응?”
“마녀 좀 만나야 돼서...공격은 못할망정 수비는 제대로 준비해야지.”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젬마의 말에 나는 물론, 차담이 까지 멍해졌다. 어이없게도 이럴 때마다 돈독해
지는 나와 차담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항상 그래왔다.
“내가...도와줄까?”
머뭇거리며 말한 나를 바라보는 젬마는 잠시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매번 하는 거지만 할 때마다 곤욕이야. 제대로 되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줄까?”
“검게 칠해줘.”
“어?”
“최대한 못 생겨 보이고 까매 보이게 해 줘. 네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이상한 애라는 생각을 했지만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젬마의 절박한 표정에 나까지 진지해졌다.
넌 뭐가 그렇게도 불안한 거니..? 젬마가 슬그머니 내미는 리퀴드 파운데이션 하나. 그러나 이걸로는 불
가능했다. 애초에 이건 자신의 피부색과 가장 가까운 색채니까.
“이걸로는 안 돼.”
단호한 내 말에 젬마는 ‘네가 어떻게 알아?’ 라는 무언의 표정을 보이다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
는지 초조하게 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휴...따라와.”
어쩔 수 없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한 번 쯤은 쓰고 돌려줘도 뭐 상관은 없겠지.
\청소도구함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당연한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난 밤잠을 설쳐가며 고민해야만 했다.
그래..그 기분은 뭐였을까?
딸 까진 아니 여도 여동생을 뺏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유모를 두려움에 한 번도 열어보지는 못했지만
매일 밤 먼지를 털어주며 아껴줬었는데...
체육선생만 아니었다면 아마 평생 그렇게 품고 살았을 지도 모르는 박스였다. 내 눈을 거슬리게 만드는
구겨진 포스트잇을 볼 때마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지만, 이래저래 아무리 놓고 싶지 않은 박스여도
결론은 하나였다.
“노아미 너 뭐해?”
“기다려봐...숨겨놓은 게 있거든.”
읏챠..
“짠! 메이크업 박스야.”
오늘 난, 이 박스를 돌려주며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려 한다.
..................
..
두근두근. 두근두근.
단지 박스를 여는 것 뿐 인데 왜 이렇게 손이 덜덜 떨리는지 모르겠다. 주제할 수 없을 만큼 심장이 뛴
다. 이윽고 박스를 열자, 나는 다른 세계에 온 것만 같은 착각에 허우적댈 수밖에 없었다.
메이크업 베이스를 시작으로 리퀴드 파운데이션, 파우더, 섀도우 팔레트 36종류, 립 팔레트 24종류,
페이스 브러쉬, 파우더 브러쉬, 치크 브러쉬, 섀도 브러쉬, 아이브로우 립 브러쉬, 리퀴드 아이라이너,
콤비 펜슬, 스타파우더, 퍼프, 스펀지 등등.
셀 수도 없이 많은 화장품과 난생 처음 보는 것들이 뒤섞여 내 마음을 마비시켰다.
“..그걸로 뭘 어떻게 하게?”
“태닝 피부로 만들어 주는 젤이야. 눈 뜨지 마!”
잔뜩 흥분된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려 짐짓 차분한 척 말을 했다.(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눈 감으랬지! 부담스럽단 말야...”
나는 블러셔를 이용해 젬마의 얼굴에 골고루 발랐다. 처음엔 펄 감이 있는 파운데이션을 얼굴 전체에
펴 발라 전체적으로 샤이닝한 느낌을 주었는데...정말이지 최고조를 향해 달려가는 흥분에는 대뇌님도
두 손 두발 다 드신 것 같았다. 제어할 수 없이 흘러나오는 아드레날린이 느껴졌기 때문이랄까?
못생기게 해달라는 젬마의 부탁이 있었지만 본판이 훌륭하니 그건 참 힘든 작업이었다. 그 다음엔 크림
타입의 살구 색 블러셔로 볼 중앙에 둥글리듯 발라 칙칙한 젬마의 얼굴을 생기 있게 표현했다. 투명 인
간 같았던 젬마가 건강 미인으로 다시 태어난 순간.
“다른 부위는 아무것도 손 안댔어. 어때? 입술도 발라줄까?”
거울을 보며 아무런 미동 없는 젬마를 향해 말을 했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마녀를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아....”
“응?”
“아미야! 역시...너에게 흙을 먹여야겠어. 빨리 융합 날짜를 정해야겠는 걸?”
보조개가 쏙 들어가게 예쁜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살포시 잡는다. 그러더니 곧 빛의 속도로 나가는 젬
마. 나는 그냥 어색한 웃음만 내보였다.
젬마가 나가자 이 모든 게 꿈은 아니구나,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려워졌다.
어쩌면 이래서 내가 이 박스를 열고 싶지 않아했던 것인데...
마치 마약과도 같다.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세계. 내가 남 몰래 동경하던 그 곳이자 애써 부
인했던 그 곳. 어쩌면 나에게 있어서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은, 바로 이 메이크업 박스는 그렇게 열리고
야 말았다.
\
차담은 토할 것만 같았다. 아미가 박스를 여는 순간, 낯익은 향기가 그의 신경을 마구 찔렀다.
어지러웠다. 급작스럽게 밀려오는 추억덩어리들이 그의 심장을 막아버려 피가 제대로 돌지 않았다.
꽤 능숙해 보이는 아미의 손놀림에 차담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만 가고...
맨 얼굴이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얼굴로 나가는 젬마를 보던 아미는 몇 분간 가만히 앉아만 있다.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얼굴.
그리고 다시 박스를 깔끔히 닫은 아미는 차담이 뒤에 있었는지도 몰랐다는 표정이다. 뭔가가 창피한 듯
수줍게 웃는 아미는 경직되어 있는 차담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말을 했다.
“순대...먹으러 갈래?”
차담은 정신없이 밀려오는 과거들을 다시 꾹꾹 눌러 담았다. 자신의 판도라 상자 속에.
다시는 열릴 일이 없을 거라 굳게 다짐하며...
“떡볶이 국물에 요로코롬 찍어 먹어야 돼. 꼭.!”
힙 겹게 웃는다.
-6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