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코언형제
에드 크레인/ 빌리 밥 손튼
도리스/ 프란시스 맥도먼드
빅 데이브 블루스터/ 제임스 갠돌피니
화면은 우유빛이 은근히 번지는 투명한 흑백이다. 그 흑백 명암 가득한 스크린에 이발소 싸인볼 하나 가득히 잡힌다. 싸인볼은 끝없이 돌아간다. 덧없는 삶의 길고 지리한 시간처럼. 그 시간을 뚫고 베토벤의 장중한 선율이 화면을 압도한다. 이윽고 중절모를 쓴 정장차림의 한 남자(에드)가 이발소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는 이발사다. 그는 밀랍으로 빚은 것처럼 무표정하다. 그는 말한다. <결혼 때문에 이발사가 됐다. 이발소에서 일하지만 이발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모든 상황의 아이러니를 모아놓는다. 베토벤이 흐르는 이발소, 이발사지만 이발사임을 부정하는 이발사, 망각의 지층을 뚫고 올라오는 흑백화면. 관객은 당혹스럽다. 마주치지 말아야 할 상황을 마주친 것처럼, 있지 말아야 할 장소에 있는 것처럼 불안이 고개를 처든다. 관객은 주인공과 동일시를 거부한다. 그가 마치 우리들의 무의식의 심연을 가차없이 파고 들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그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친구와의 더블데이트에서 만난 여자가, 첫날부터 술에 만취한 그 여자가 2주후 결혼하자고 해서 결혼을 했다. <날 숙맥으로 봤고 난 개의치 않았다> 그는 결혼과 함께, 장인이 일궜고 이젠 처남이 운영하는 이발소의 차석 이발사로 일하고 있다. <이발소에서 일하지만 이발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의 아내는 너드링그 백화점 경리다. 그녀는 물건을 10%할인한 가격에 살 수 있다. <아내는 나일론스타킹이나 화장품, 향수 같은 걸 산다(물론 아내의 쇼핑목록에 내 것은 없다)> 그의 이름은 에드 크레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를 이발사라고 부른다> 그는 타자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거부당했다. 그는 세계 속에 등록되지 않은 존재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욕망하는지 조차 모른다. 그의 아내는 백화점 사장(빅 데이브 블루스터) 부부를 집으로 초청한다. <나는 접대 엔터테이닝이 싫다. 아내와 백화점 사장과는 가까운 징표가 있다. 하지만 내가 난리칠 마음은 없다. 여기는 자유국가이니까> 그는 자유국가를 핑계대며 자신의 무력함을 감춘다.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분열하는 한 인간을 통해 실존과 소외의 문제를 파헤친다. 에드 크레인은 이름이 없는 존재다. 이름은 있지만 누구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그는 많고 많은 이발사중 한 명일뿐이다.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면서 이름을 부여받으며 그 이름을 통해 세계속에 위치가 정해진다. 이름이 없는 인간은 존재할 수없다. 이름을 통해 위치가 정해지지 않으면 욕망 또한 불가능하다. 한 개인의 위치는 그에게 해야할 것과 하지말아야 할 것을 말해준다. 다시말해 위치는 금지의 경계선을 긋는다. 욕망은 금지에서 비롯된다. 금지가 없으면 욕망도 없다. 욕망은 하지말아야 할 것(금지)이 전제될 때 비로소 잉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드는 아무 것도 욕망할 수 없다. 욕망이 불가능한 존재, 에드는 그런 의미에서 비정상정이다. 그는 신경증자다. 그는 오직 타자의 욕망안에서만 존재한다.
그는 아내의 욕망에 따라 결혼했다. 그는 처가식구들의 욕망에 따라 이발사가 됐다. 그는 급기야 머리를 깎으러온 사이비 벤처사업가의 욕망을 위해 아내의 정부이자 백화점 사장인 데이브를 협박한다. 그가 아내의 부정을 미끼로 데이브로부터 1만달러를 뜯어 벤처사업가에게 돈을 대는 행동은 그의 욕망이 아니다. 벤처사업가에게 1만달러를 건네며 에드는 말한다. <내가 제 정신인가 아닌가> 물론 제 정신이 아니다. 제 정신이 아니니까 데이브를 죽인다. <데이브에겐 측은하지만 (나는) 도리스(아내)에게 상처입은 것 같다> 그는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의 상실은 컸다. 그의 소외는 끝이 없다. 그러나 그는 너무 멀리 나아갔다. 살인은 이름없이 떠도는 그의 육체마저 거둬 갈 것이다. 물론 그는 두렵지 않다. 여기서부터 기막힌 반전이 시작된다. 경찰은 그의 아내를 살인 사건 용의자로 체포한다. 처남은 이발소를 담보로 돈을 빌려 변호사를 대지만 그의 아내는 자살한다. 사람들은 그녀가 죄책감에 못이겨 자살했다고 믿는다. 물론 그 말은 맞다. 그러나 그녀가 죽은 것은 정부인 데이브를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데이브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이다. 같은 죄책감이지만 종류는 다르다. 어쨌든 그의 삶은 뒤바뀐다. 누나의 죽음으로 알콜릭이 된 처남 덕에 그는 수석이발사가 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타인일 뿐이다. 그는 아내가 없는 집에서 독백한다. <난 유령이었다. 아무도 못보고 아무도 날 못본다. 난 이발사일 뿐이다>
그의 충동은 다른 돌파구를 찾는다. 이번엔 이웃집 변호사의 딸인 여고생(레이철 어번더스)이다. 그는 처음 음악을 접한 사람처럼 레이철의 피아노연주에 매혹된다. 레이철은 베토벤 교향곡 8번을 연주하고 있다. 그는 묻는다. <네가 작곡했니?> 레이철이 대답한다. <아뇨, 베토벤이 작곡했죠> 어이없는 우문현답속에서 그는 그녀의 매니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그녀가 피아니스트를 꿈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건 피아니스트가 아니다. 그는 단지 그녀의 욕망을 오인했을 뿐이다. 게다가 매니저가 되겠다는 그의 꿈은 무참히 깨진다. 레이철의 연주를 본 레슨프로는 그의 연주가 형편없다고 그에게 면박을 준다. 돌아오는 자동차안, 레이철의 성적 유혹을 뿌리치다 그는 사고를 내고 만다.
병원. 의사 한 명과 형사 두 명이 그를 흔들어 깨운다. 그는 혼미한 상태에서 살인죄로 체포된다. 그에게는 사이비 벤처사업가를 죽였다는 혐의가 적용된다. 그러나 벤처사업가는 백화점 사장 데이브가 죽였다. 살인은 했지만 대상이 다르다. 두 번의 살인을 놓고 진실은 계속해서 오인된다. 그와 세계는 끝없이 걷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진실의 오인이 아니다. 불확정성 원리를 들먹이는 변호사의 말처럼 <보이는 사실엔 의미가 없다>. 이것이 코헨 형제가 변호사를 통해 전하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누구를 죽였느냐가 아니라 그가 왜 사람을 죽였느냐이다.
재판정. 그의 마지막 변론에서 변호사는 말한다. <이 사람의 딜레마는… 그는 바로 현대인입니다>. 이것이 코헨 형제의 결론이다.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하고 유령처럼 떠도는 존재, 욕망의 부재속에 방황하는 존재, 세계속에 존재하며 세계로부터 소외된 존재, 에드 그는 바로 현대인이었다. 그가 신경증자라면 프로이트의 말처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모두 (그와 같은) 신경증자이다.
<그 남자…>는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의 속편의 성격을 띤다. 코헨 형제는 이 두 작품을 통해 삶의 여정을 나름의 방식으로 그리고 있다. <오, 형제여…>가 영웅신화를 터전으로 욕망의 오디세이를 따라 삶을 성취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그 남자…>는 영웅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성취했을 때 그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성공-그것이 성공이라면-을 막 거머쥐었거나, 성공을 목전에 둔 영웅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에드는 결혼을 했고 직업을 가졌으며 경제적으로 넉넉하며 남부러울 것 없지만 그의 상실은 그 때부터 시작된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결국 유령이었다. 주체가 상실된 타인의 유령 말이다. <오, 형제여…>가 영웅신화의 전반부라면, <그 남자…>는 후반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영웅의 종말을 지켜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코헨 형제의 영상언어가 진실이라면, 이렇게 가혹한 진실을 꼭 우리와 대면시켜야 하는 건지. 그것도 유머를 섞어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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