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高賢은 고현高賢을 만난다
- 계당 최흥림崔興霖과 도의道義로 사귄 인물들
조영임
조선의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붕어하고 12세의 어린 명종(1545∼1567)이
즉위하였다. 이때 그의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정치를 하게 되면서 윤임이
축출되고 실각했던 윤원형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명종의 보위를 굳히기
위해 윤임 등의 반대파를 몰아내고 일대 피바람을 일으켰으니, 이를 ‘을사사화’라
부른다. 양재역 벽서사건을 일으키거나 각종 음모와 농간을 부려 을사사화에
숙청되거나 비명횡사한 인물만도 백여 명이 넘었다. 앞서 일어난 무오(1498),
갑자(1504), 기묘(1519) 사화에 이은 을사사화 역시 사림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수많은 선비들이 사화의 참극을 보고 아예 정계를 떠나 은거하거나
세상을 등지기도 했다. 이 가운데 한양을 떠나 충청도 보은 금적산金積山에 은거하여
한평생을 살았던 처사가 있었으니, 바로 최흥림(崔興霖, 1506~1581)이다.
그가 은거했던 금적산은 보은군 삼승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속리산, 구병산과 더불어 보은의
대표적인 산 중의 하나이다. 금적산 기슭에 계곡을 끼고 마을이 하나 있으니 바로 계당이 살았던
서니촌西尼村이다. 그가 이곳에 모옥을 짓고 ‘계당溪堂’이라 칭하자 당시 사람들은 그를
‘계당처사’라고 불렀고 후인들 역시 ‘계당선생’이라 하였다. 마을 뒤편에서 조금 올라가면
오목한 골짜기가 하나 있고, 골짜기가 끝나는 곳에 벼랑을 등진 폭포가 하나 있다. 폭포
아래에는 그윽한 동굴이 있어서 감상할 만하였다. 그는 날마다 그 사이를 거닐기도 하고
경전에 침잠하고 도의를 함양하였다. 또 종종 거문고를 연주하거나 시를 읊어 소회를
드러내었다. 현재 그의 문집인『계당유고溪堂遺稿』에는 12수의 한시와 약간의 산문이
실려 있을 뿐이다. 시문의 편수가 많지 않아 문집은 소략하다. 그러나 옛사람이 말한
‘상정일련嘗鼎一臠’을 상기한다면 한 시대를 살았던 인물을 조망하기에 굳이 편수가
많아야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계당은 금적산에 들어온 이후 산 밖을 나가지 않고 평생을 그렇게 자락自樂하면서 살았던
은자이자 처사였다. 따라서 그의 행적과 이력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많지 않다.
다만 교유한 인물들을 통해 그의 인품과 취향을 짐작할 수 있으니, 그는 대곡大谷 성운
(成運, 1497~1579),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 1504~1559),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등과
교유하였다. 이들은 모두 당대에 이름 있는 대학자였고 고현高賢이었다. 성운은 그의 중형인 성우成遇가
을사사화에 희생되자 보은현으로 돌아와 천석 사이에 집을 짓고 ‘대곡大谷’이라 이름하고 그 역시
은거하였던 인물이다. 속리산의 맑은 경치를 좋아하여 홀로 가서 노닐다 오기도 하였으며,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었는데 그 격조가 매우 고아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노수신이
“하나의 행실도 흠결이 없었다”고 칭찬하였으니 그의 인물 됨됨이를 미루어 알 수 있겠다. 동주 성제원
역시 잦은 사화로 선비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였다가, 뒤늦게 유일(遺逸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는 초야의 선비를 과거시험 없이 발탁하는 인재등용 방법)로 천거되어 보은현감에
제수되었던 인물이다. 남명 조식은 혼탁한 세상과 자신의 뜻이 맞지 않음을 알고 여러 벼슬자리를
마다하고 지리산 산청에 은거하여 일생을 학문에 정진하고 강학하며 보냈던, 16세기를 대표하는 대학자였다.
한때 이들 고현들은 보은의‘계당’에서 회합을 하며 친목을 도모하였다. 대곡이 마침 보은 종산에 은거하고
있었고 성제원은 보은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기에 이들은 도의道義로 교의를 맺었으며, 남명 역시
멀리 지리산에서 보은까지 왕림하여 함께 머물면서 밤새워 학문을 강론하였다. 이때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다음의 시를 소개해 본다.
추억하노니, 지난날 남명과 한 이불 덮고 잤던 일이며
동주와 취해 냇가에 누운 일 있었지.
다시 만났던 그 사람 어디에 있나
흐르는 물, 한가로운 구름은 그 옛날과 같건만.
憶昨南冥共被眠, 東洲同醉臥溪邊.
重來攜手人誰在, 流水閑雲似昔年.
―「금적계당(金積溪堂)」 『溪堂遺稿』
대곡 성운이 지난날 남명과 동주를 보은의 계당에서 만났던 일을 회상하면서 쓴 시이다.
이들 가운데 성운이 가장 연장자로 최흥림보다 9살이 많았다. 기승구에서 이들의 친밀도를
읽을 수 있다. 특히‘共被眠’의 어구가 그러하다. 예나 지금이나‘한 이불을 덮고 잘’수 있는
일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일치하고 지향하는 바가
같아서 조금의 거리낌도 없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들 고현들은 모두 유정幽靜의 절조節操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도학에 뜻을 둔 선비였다. 게다가 시금주(詩·琴·酒)의 풍류를 아는 인사들이니
어찌 ‘한 이불을 덮고 함께 취하지’않을 수 있었으랴.
울창한 송백 산머리에 가득하고
빛나는 지란 어딜 가나 그윽하여라
십년을 바라보다 이제야 만나니
흰 구름 흐르는 물 모두 눈앞이 탁 트이누나.
蒼蒼松柏滿山頭, 曄曄芝蘭到處幽.
相望十年今始會, 白雲流水摠開眸.
-「성대곡운 건숙에게 화답하다(和成大谷運 健叔)」 『溪堂遺稿』
성운의 시에 대한 최흥림의 화답시이다. 기승구의 ‘송백松柏’, ‘지초芝蘭’는 대곡 성운의 인품과
덕성을 빗댄 표현임은 물론이다. 전결구에서 시인은, 대곡의 명성을 오래도록 듣고만 있다가 마침내
이날을 계기로 만나 보니 과연 듣던 대로 큰 인물임을 알게 되어 자신의 시야가 탁 트일 정도로
기뻤음을 드러내고 있다.
맑은 물 한 움큼 마시니
흉금이 얼음처럼 차가워라
평생의 세상 티끌
씻겨 한결 맑아진 듯.
手掬淸波飮, 胸襟冷似冰.
平生塵垢累, 洗得十分澄.
-「조남명, 성동주 제원과 함께 읊다(與曺南冥成東洲悌元共吟)」 『溪堂遺稿』
위는 계당 최흥림이 남명, 동주와 함께 읊은 시이다. 이들과 함께 있으니 마치 가슴속이 탁 트여
얼음처럼 시원하며 세상의 티끌 먼지가 씻긴 듯 맑아진다고 술회하였다. ‘흰 모래가 진흙 속에
있으면 물들이지 않아도 검게 된다’는 속언이 있듯이, 청아淸雅한 벗을 가까이 하면 애쓰지
않아도 벗의 품격을 닮는 법이다. 미적 수식이나 조탁이 없이 간결하고 직설적인 어투로 벗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을 드러내었다.
우리 그대 만났을 땐 이미 백발
초당이 유심한 곳에 있단 말 들었다오.
유인은 패물을 풀 인연 없음이 부끄러워
그저 돌아가는 구름에 기대어 멀리 눈길만 보낸다오.
之子相逢已白頭, 草堂聞說在深幽.
遊人解珮慚無分, 只依歸雲送遠眸.
-「대곡의 운을 써서 현좌에게 드리다(用大谷韻呈賢佐)」
남명 조식의 시이다. 시제에 보이는 현좌賢佐는 최흥림의 자字이다. 남명이 대곡과 더불어
보은의 계당에서 만난 때가 정확하게 언제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오래도록 이름만 듣다가 처음
만났을 때는 이미 백발이 된 것으로 보인다. 전구의 ‘해패解珮’에는 이백과 관련된 고사가 전하고
있다. 초당의 시인인 하지장이 장안에서 이백을 만나자 반가운 마음에 차고 있던 금귀金龜를
팔아서 술을 샀다고 한다. 금귀는 당시 관리들이 차던 장식물의 일종이다. 하지장이 한눈에
이백을 알아보고 극진하게 대우했다는 의미인 동시에 하지장이 풍류남아임을 입증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남명은 하지장이 이백을 대우했던 그때처럼 최흥림을 성대하게 대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각각 성품이 다르고 처한 처지가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결구에 최흥림에
대한 시인의 마음이 집약되어 있다. 당시 고현들은 아쉽고 허전을 어떻게 전달했을까. 과장된 언사와
행동은 그들이 취했던 행동양식이 아니다. 간결한 한두 마디를 통해 마음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지만,
딱히 무어라 말할 정황이 아닐 경우 그들의 시선은 늘 먼 곳을 향했다. 그윽한 눈길로 유유히 흘러가는
흰 구름을 응시하는 것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계당, 자네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기쁘기 한량없구려. 계당에서 그대와 보낸 며칠은 참으로 꿈만 같았다오. 내 오래도록 기억하리다. 다만
내가 그대에게 해줄 것이 없음이 미안하기만 하구려!’ 아마도 남명의 이런 심정을 최흥림 역시 잘 이해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최흥림은 이들 고현 외에도 재종질 최영경(崔永慶, 1529~1590)과 함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밤낮으로 학문에 잠심하고 강론하기도 하였다. 최영경은 남명의 문인으로. 행실이 독실하여 여러 차례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불행히도 정여립의 모반 사건인 기축옥사에
관련되었다는 참소를 입고 국문을 당하던 중에 옥사하였던 인물이다. 최영경이 1575년 선대의
전장田庄이 있는 진주의 도동道洞으로 들어가 대숲 속에 집을 짓고 당의 편액을 ‘수우守愚’라
명명하고, ‘수우당守愚堂’이라 자호하였다. 이에 최흥림이 수우당에 대한 명문을 지어 그 뜻을 찬미한 바 있다.
선생은 인의를 행하고 언사는 예의 아님이 없으니 자포自暴의 우愚가 아니며, 은거하여 뜻을
구하면서 세상을 피해 살면서도 근심이 없으니 세상에 분노하는 자의 우愚가 아니다. 일찍이
조정에 서지 않아 근심을 면할 일 없으니, 그렇다면 또한 영무자의 우愚도 아니다. 생각건대
선생이 지키는 바는 안씨의 우愚에 가까울 것이다.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지만 남들처럼
고량진미를 원하는 것이 아니니, 필시 일단사 일표음一簞食 一瓢飮의 생활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는 네 종류의‘우愚’가 있다고 한다. 자포자기自暴自棄하여 자신을 헤치는 자의 어리석음이
그 하나이며, 세상에 울분을 토하는 자가 행하는 어리석음이 그 두 번째이다. 일찍이 공자가 영무자를
일컬어“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어리석으니, 그 지혜로움은
따라갈 수 있지만 그 어리석음은 따라갈 수 없다.”고 한 바 있으니 영무자의 어리석음이 그
세 번째이다. 마지막으로 안회의 어리석음을 들었다. 공자가 안회를 두고“내가 회와 함께 온종일
이야기하였으나 내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어리석은 것 같더니, 물러간 뒤에 그 사생활을
살펴보았는데 그대로 행하니, 회는 어리석지 아니하구나!”라고 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최흥림은
수우당이 일단사일표음의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도 도를 변치 않는 것이 안회의‘우愚’에 가깝다고 칭탄한 것이다.
비록 이 글이‘수우당’에 대한 명문銘文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최흥림의 삶의 지표가 무엇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최흥림은 자포자기한 자도 아니요, 세상에 비분강개한 자도 아니다. 더욱이 영무자처럼
조정에 서서 처세를 고민한 자도 아니다. 그는 안회처럼 은자이지만 안분낙도安分樂道하는 사람이기를
원했다. 안회처럼 ‘어리석은 듯如愚’하지만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그런 사람이고자 했다.
동기상응同氣相應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의 주변에는 같은 인품을 지닌 고현들이 늘 함께 했다.
비록 최흥림에 대한 자세한 행적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와 함께 한 이들을 통해 최흥림에 대한 삶을
재고할 수 있어 다행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