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정서변화와 노인자살문제
한국 사회의 노인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다. 대체로 빈곤 때문이란다.
노인 빈곤은 곧 자살로 이어지기 쉽다. 빈곤율과 노인자살률이 이를 말해준다. 빈곤율의 의미는 중위소득을 기준으로 50% 이하인 사람들의 비율을 말한다.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들만 한정하여 한국 사회의 중위소득 기준 50% 이하인 빈곤비율은 절반에 가까운 48.6%이다. 호주 35.5%, 일본 19.4%, 미국 14.6%, 독일 10.5%, 영국 8.6%, 프랑스 5.4%에 비교하면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 노인들의 상대적 빈곤 율이 가장 높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빈곤이 삶을 유지할 수 없는 절대적 빈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한국 사회가 점차 노인복지를 강화해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노인 빈곤의 문제는 점차 개선될 것이다. 문제는 노인자살률이다. 물론,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자살률도 세계 최악이다. 2009년 OECD 자살률 발표 자료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인구 전체 자살률도 28.4명으로 가장 높다. 연령대별 자살률을 비교하면 한국사회의 노인자살률은 더욱 심각하다(중앙일보, 2005/05/18). 인구 10만 명당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은 71명인데 비해 나머지 연령대의 평균은 24명이다. 이런 현상은 노인 연령층을 세분화 할 경우 더 심각하다. 75에 이상의 노인 자살률은 103명이고 65-74세노인 자살률은 58명이다. 어느 기준으로 보더라도 한국 노인들의 자살률은 단연코 세계 최고이다. 왜? 그럼 한국 노인들의 자살률이 이렇게 최악인가? 그 이유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는 비율이 35%정도이다. 신체적 질환을 호소하는 비율도 약 35% 외로움은 11%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자료는 몇 가지 문제점이 보인다. 경제적 빈곤이 원인이라면, 경제상황이 우리보다 더 힘든 개발 후진국들에서 노인자살률이 우리보다 더 높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정확한 해석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또한 실제로 자살한 노인들에게 질문한 것이 아니다. 아직(?)자살하지 않은 살아있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하였기 때문에 측정오차가 매우 심하다. 따라서 ‘경제적 빈곤’이나 ‘신체적 질병’ ‘외로움’은 노인자살율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기보다 아직 자살하지 않은 노인들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자살이론의 대표적인 연구자는 에밀 뒤리켐 (1858~1917)이다. 그는 '자살의 유형'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을 제안했다는 점에서 그 유형의 타당성은 논외로 하고 '사회현상의 규칙성' 발굴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과학자들에게 좋은 모델로 인정받는다.
뒤리켐이 주장하는 자살의 이유는 크게 4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1,이기적 자살(질병이나 사회적 소외 등으로 사회 적응을 못해 하는 자살) 이타적 자살(개인이 집단에 너무 밀착된 나머지 집단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하는 자살) 아노미적 자살(전쟁, 쿠데타, 무정부 상태와 같은 사회적 공황 등으로 사회의 규범이 파괴되고 이로 인해 자신의 가치관까지 위기에 처할 때 선택하는 자살) 숙명적 자살(아노미적 자살과 반대로 사회의 규범이나 규제가 너무 심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상실하여 선택하는 자살)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중 한국노인들의 자살은 이기적 자살에 가장 가깝다고 판단된다. 이기적 자살은 질병 걸린 노인들이 가족들에게 피해주는 것도 싫고, 외롭고 소외된 삶이 너무 힘들어 자살하는 경우이다. 왜 노인들이 치매 등과 같은 정신질병을 포함하여 신체적 질병에 걸리고 소외감을 느낄까? 하는 문제는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 소외감과 신체의 질병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즉, 소외감을 심하게 겪는 노인들이 신체활동을 줄여나가면서 신체적 질병이 유발될 수 있다. 동시에 신체활동을 안하는 사람들은 고립되어 살기 때문에 소외감이 증가하는 일종의 쌍방향적 관계이다. 왜 그럼 우리사회의 노인들이 소외감과 질병에 노출되어 있을까? 우리한국사회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다. 세계화에 매몰되어 서양의 개인주의 문화를 아무른 여과 없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우리민족의 전통가치관이 무너지고 전통정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전통종교의 정서들이 잠식되고 점차 회석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논문 칼럼] 시골 노인 자살률이 낮은 이유(일부인용)
이웃과 더불어 상부상조(相扶相助)하고 부모를 봉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경로효친(敬老孝親)사상이 상실되고 붕괴되어 전통가치관이 사라져가기 때문이다. 우리민족의 전통가치관인 상부상조는 불교의 대자대비의 가르침을 근원으로 한다. 경로효친사상은 유교의 가르침이 출발점이다. 그런데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손색없는 우리민족의 자부심인 미풍양속(美風良俗)이 세계화에 매몰되어 말살(抹殺)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든 보릿고개 어려운 시절에도 담장너머로 쑥 털털이(쑥 범벅)오고 갔는데 이제는 이웃집에 누가 죽어도 모르는 고독사(孤獨死)가 다반사로 발생하는 각박한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서양인들의 선망의 대상인 대가족제도가 이제는 1인(28.6%)~2인(26.7%)가구가 50%가 넘게 차지하는 초미니 가족제도로 변화한 것이다. 우리의 미풍양속은 인생을 마감하는 임종(臨終)도 같은 집안이라도 다른 방에서 임종하면 객사(客死)주검이라 해서 사랑방에 기거하다가도 임종시(時)에는 안방으로 모셨다. 그런데 지금은 무조건하고 임종은 병원에서 다 한다. 심지어는 집에서 임종했는데도 병원에서 장례를 모신다. 뿐만 아니다. 노인이 병들고 기력이 쇄약해지면 가정에서 가족들이 돌보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하고 요양병원을 간다. 요양병원의 실태도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다. 돈 없고 힘(권력)없으면 요양원 요양병원도 가기도 힘든 각박한 세상이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외치며 물밀듯이 몰려온 서양종교가 불러온 냉정한 현실이다. 세계화를 표방한 무분별한 서양문화유입에 앞에 그렇게도 도도하든 유교(儒敎)문화도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선진문화도입이란 명분을 타고 물질을 앞세운 서양 종교문화 앞에 대자대비의 가르침으로 온갖 신앙들을 수용해온 찬란한 불교문화도 서서히 변절되고 회석되어 갔다. 불교문화는 한마디로 남을 위해 베푸는 상부상조의 회향(回向)문화이다. 그 회향정신이 자기를 우선으로 하는 아상(我想)의 이기적 불교로 변절된 것이다. 한국불교하면 출가불교가 전부이다. 출가 승려들이 불교를 독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재가불교가 있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재가불교는 출가불교의 외호(外護)세력에 불가하다. 아니 외호세력도 못된다. 출가 승려들의 눈에 나거나 찍히면 재가불자들은 맥없이 쫓겨나고 힘없이 사라져야한다. 출가와 재가는 새의 양 날개와 같다. 재가와 출가는 수레의 양쪽 두 바퀴와 같다. 새의 양쪽날개가 한쪽(출가)은 거대(巨大)하고 다른 한쪽(재가)은 왜소(矮小)하다면 새는 균형을 잃고 날지를 못한다. 수레의 바퀴가 한쪽은 거대하고 한쪽은 왜소하다면 수레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작금의 한국불교가 그 모양 그 꼴의 암담한 수렁에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불교는 숭유배불의 조선 500년 불교이후로는 단 한 번도 자력으로 독립하거나 벗어나질 못했다. 일제(日帝)에 의해서 조선 억불(抑佛)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어서나 또 다른 이상야릇한(?)변절불교 일제의 왜색(倭色)불교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왜색불교로부터 독립도 자력이 아니다.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한 불교계의 독립 운동가는 백용성, 만해한용운, 만공스님 등 생각보다 미미(微微)한 숫자이다. 대다수의 승려들은 일제에 부역하거나 순종하고 심지어는 추종까지 했다. 그러나 어찌했든 간에 왜색불교로부터 독립을 하기는 했다. 이번에는 미국에 의해서 독립을 한 것이다. 미국에 의한 독립은 기독교라는 새로운 이웃종교를 맞이해야 하는 부담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대한민국 초대(初代)정부 이승만대통령은 장로대통령이다. 이승만정권의 불교 관(觀)은 청정불교관이였다. 왜색불교로부터 힘겹게 겨우 벗어나 추스를 여유도 없이 비구대처 갈등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혼란와중에 설상가상으로 6.25라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고 전쟁난민구호라는 미명(美名)으로 기독교원조단체들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와 이 땅의 민족정서들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갔다. 그런데도 불교계는 비구대처싸움질로 날을 새우고 있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다고’ 사찰 뺏기 놀음에 불교계가 썩어가고 있었다. 부처님 법(法)에도 없는 피를 튀기는 싸움질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와중에 출가 승려사회는 사찰을 빼앗기는 연약한 이판(수행)승보다 사찰을 빼앗을 힘이 강한 사판(행정)승이 절대적으로 우세했고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필요에 따라 절간에 시중의 폭력배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실제로 사찰 빼앗기에 돌멩이가 날아들고 각목부대가 등장했다. 이때부터 출가 본연의 목적인 성불을 목표로 수행하는 근기(根器)가 수승한 수행승보다 성불을 다음 생(生)으로 미루고 금생에서는 수행승을 보좌하는 소임(所任)을 자처한 하(下)근기(?)의 행정승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행정(사판)승들이 주지 등 중요소임을 독식하고 있다. 정작 출가불교의 본연의 목적이자 권리와 의무를 수행하는 수행(이판)승들은 행정(사판)승에 밀려나서 떠돌이 신세를 못 면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출가불교의 본질인 수행불교가 왜곡(歪曲)되고 전도(顚倒)된 것이다. 본질이 훼손된 출가불교는 재가불교에도 막대한 영향을 가져왔다. 재가불교를 위한 제대로 된 교육지침서 하나 없이 중구난망으로 가르치려고 달려들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불교교양대학은 재가불자의 교육보다는 사찰운영에 필요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불교교양대학들이 제대로 된 강사진 한명 없이 그 사찰주지가 강의를 하다 보니 강의를 빼먹기가 다반사이고 강의내용도 빈약했다. 초창기 재가불자를 위한 불교교양대학이 개설 되었을 때는 교양대학에 대한 재가불자들의 호응도가 가히 폭발적 이였다. 재가불자들에게도 제대로 된 불교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었다. 초창기의 불교대학들은 비교적 수준도 높았다. 대학에서 불교를 전공으로 가르치는 교수들이 강의를 맡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때 그 시절이 한국불교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그때는 왜곡되고 전도된 출가불교에 관계없이 불법(佛法)의 가르침에 목말라하는 재가불자들이 불교교양대학에 모여들었다. 불교신앙 여부(與否)에 관계없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에 도취된 출가불교 벼슬 승(僧)들은 불교행사장에서 2천만 불자(佛者)를 운운 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국민의 전반이 불교신도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착각이다. 정확한 표현은 불교를 신앙하고자하는 불교정서를 가진 국민이 2천만이라는 말이다. 정작불교를 걱정하고 불교를 제대로 알고 신앙하는 불자는 1천만도 안 되었을 것이다. 아니 5백만도 안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때 그 시절이 한국불교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이였다. 국민의 절반이 불교정서를 가지고 불교에 귀의하고자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출가불교계는 이 열화 같은 국민정서를 철저히 외면하고 벼슬싸움에 축재(蓄財)에 도박에 심지어는 게집질 등 입에 담기도 힘든 온갖 범계(犯戒)로 국민정서를 내팽개쳐 버렸다. 민심은 천심(天心)이다. 아니 민심은 불심(佛心)이다. 한때 2천만 운운하든 불자들이 서서히 줄어들 드니 어느 날 국가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1천만이 무너지고 7백만이 조금 넘는다고 한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불교와 반대로 이웃종교 개신교가 1천2백만명이 훨씬 초과하는 교세로 크게 성장하였고 천주교가 6백만명을 초월하는 교세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종교 개신교에 추월당하고 같은 서양종교 천주교가 발밑까지 추월해오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이는 상부상조의 민족의 미풍양속이 무너지는 것이다. 경로효친의 민족 전통가치관이 사라져가는 것이다. 이는 대자대비에 바탕을 둔 이웃과 더블어함께 살아가는 국민들의 불교정서가 변질되는 것이다. 오직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외치는 서양종교정서에 물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전통종교와 서양종교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문화와 서양문화가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화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황당해 하는 세대가 오늘날 노인세대 들이다. 상부상조 경로효친 대가족의 미풍양속 문화에 길들이진 정서들이 하루아침에 개인주의 이기주의 미니(소小)가정의 실리(實利)우선문화로 바뀌어 버리자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당황한 주검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노인자살률이 OECD국가 중 최고 높은 것은 문화갈등 정서변화 등이 중요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자살은 정착사회권보다 유목사회권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 정착민족권인 동양보다 유목민족권인 서양에서 더 높게 나타난다.
국가별 자살률을 살펴보면 더욱 확실해 진다. 국가별 자살순위는 2018년 7월 현재①리투아니아 ②한국 ③슬로베니아 ④라트비아 ⑤헝가리로 나타난다. 2위인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10위까지를 다 유목종교를 신앙하는 서양 국가들이 상위랭킹을 차지하고 있다. 정착종교를 신앙하는 동양국가 중에서는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2위에 랭크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한때1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전체인구 자살률에서는 2위를 기록하고 있어나 통계(2016)에 의하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81.9명으로 당연 1위이다. 이는 미국 14.5명의 5.6배이며 같은 동양권인 이웃나라 일본의 17.9명보다 4.7배를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현재는 더 많은 격차를 벌였을 것이다. 자살은 유목종교를 신앙하는 서양사회의 병폐 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과거 우리역사 속에서는 자살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간혹 자결(自決)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는 가문중심의 유교문화에서 열녀(烈女)나 효자(孝子)효부(孝婦)로 가문의 영광 때문에 자결했다는 기록은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초근목피로 연명하든 5천년 민족가난 속에서도 생활고나 소외감 때문에 자살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유목종교를 신앙하는 영국도 한때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를 고심하든 영국정부는 늘어나는 자살자를 줄이기 위해 ‘0000년 00월00일부터 자살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는 새로운 법령을 제정하여 공포하였다고 한다. 자살하는 사람은 죽여(사형)버린다고 하니까 자살자가 줄었다는 웃지 못 할 난센스 법률을 공포한 것이다. 이를 보면 자살은 심리적 불안에서 순간 발생하는 작용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심리적 불안을 안정시키는 역할은 신앙생활이 으뜸이다. 자연을 다스리고 극복하자하는 서양종교보다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을 즐기는 동양종교가 최적합이다. 그중에서도 대자대비 무소유 비폭력 대자대비의 무한 베풂의 불교가 최적합이다. 불교가 우리나라 노인 자살방지를 위하여 앞장서야 한다. 헌데 우리나라의 불교는 그 최적합의 기능을 잃어버리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의 서양종교에서나 볼 수 있을 벼슬싸움에 날 새는 줄 모른다. 아니 이제는 서양종교에서도 벼슬싸움 같은 짓은 하지도 안는다. 세계에서 최고, 동양에서 최대, 한국에서 최고 최대 최고......... 등등 불사(佛事)경쟁으로 도끼자루 썩는 줄을 모른다. 벼슬싸움에 눈이 멀어 중생구제는 뒷전이다. 불사경쟁으로 불자 감소되고 있는 줄도 모른다. 황금(돈)모우기에 현혹되어 불교 망하는 줄 모른다. 작금의 현상들을 두고 불교학자들은 이대로 가면 국민의 불교정서는 점점 소멸되다가 2040년에는 이 땅에서 아주 사라진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한다. 이래가지고서는 불교가 망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해서는 국민들이 개인주의, 이기주의 도탄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민족의 전통정서가 송두리째 사라진다는 결론이다. 우리 불자들은 이 시점에서 불교발생지인 인도에서 불교가 왜? 소멸되고 사라져갔는지를 살펴보고 두고두고 역사의 교훈으로 새겨봐야 한다.
인도의 불교와 자이나교는 동시대(同時代)에 생겨난 종교들인데 불교는 사라지고 자이나교는 지금까지 건재하고 왕성한 교세를 자랑한다. 인도의 부호(富豪)들은 자이나교도들이 많다. 자이나교에서는 깨달은 자를 ‘지나’라고 부른다. 승리자라는 뜻이다. 자이나교의 교주 ‘마하비라’는 위대한 승리자라는 뜻이며 대웅(大雄)의 원어이기도 하다. 오늘날 불교에서 사용하는 대웅전(大雄殿)의 기원(基源)이기도 하다. 같은 무소유(無所有) 불살생(不殺生)의 유사한 교리를 가진 두 종교가 왜? 유(有) 멸(滅)을 달리 했을까? 인류최고의 수승한 교리를 가진 불교가 왜 인도에서 소멸되어갔을까? 왜 불교는 소멸되었는데 자이나교는 어떻게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도의 전통종교로 주목받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이유를 오늘날 대한민국 불교계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살펴봐야 할 것이다. 불교가 발생지 인도에서 소멸된 것은 대승불교로 발전되는 과정에서 주머니(돈)가 생겨났기 때문이란다. 반면 자이나교는 주머니가 없었단다. 불교는 주머니가 생기면서 인도에서 소멸되어 갔든 것이다. 재물은 탐욕(貪慾)심을 불러온다. 오욕(五慾)을 불러들인다. 돈이 생기면 종족번식(異姓)이 생각나고 명예가 생각나고 벼슬(權力)을 맛보기 시작하면 온갖 악행들이 자라난다. 이들 오욕 낙(樂)은 중생 삶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범부중생들에게 이를 멀리(警戒)하라고 가르친다. 출가의 궁극적 목적은 성불(成佛)에 있다. 성불은 수행을 통해서 오욕 낙을 완전히 벗어버리는데 있다. 출가자들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오욕 낙을 끊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머리를 깎는 것이다. 무소유의 삶을 서원(誓願)맹세하고 목숨도 부모도 처자식도 재물도 버리고 명예도 버리고 육신(肉身)을 버리고 나중에 영혼마저 버리고 남음이 없는 무여열반을 증득하여 성불함에 위대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망한 것은 재물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도불교의 소멸을 교훈으로 다른 불교국가에서 특단의 새로운 제도가 생겨났다고 한다. 성불목적의 출가 승려들은 수행에만 전념하고 출가 승려들의 수행을 돕기 위해서 재가불자들이 사찰살림을 책임지고 살아가는 제도가 생겨난 것이다. 이 제도는 불교국가라면 소승과 대승을 가리지 않고 행하고 있다. 유일하게 우리나라불교계만이 수행과 사찰살림을 출가 승려들이 독식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고려 때 까지는 분리(分離)운영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출가 승려들이 사찰운영을 독식하는 계기는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승려들이 도성(都城)밖으로 쫓겨나 산중불교로 전략하게 되면서라고 한다. 산중불교로 재가불자들의 출입이 줄어들고 공양물이 점점 사라지면서 사찰살림이 궁핍하게 되면서가 원인이란다. 그때부터 출가 승려들에 의해 근근이 힘들게 유지되어왔다고 한다. 스님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없었더라면 한국불교는 이 땅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좀 달라져야한다. 숭유억불의 조선불교에서 벗어나고 왜색불교(대처불교)로부터 해방되었다면 당연이 출가 본연의 목적인 수행불교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국민신앙자유화와 국민소득향상 등으로 출가 수행여건이 호전되고 확보되었는데도 아직도 수행환경조성이란 핑계로 금전유혹 명예유혹 벼슬유혹 등등 오욕 낙에 빠져들어 세속의 온갖 지탄을 다 받고 있다. 종교는 투명해야 한다. 불교는 청정해야 한다. 불교는 비움의 종교이다. 투명 청정 비움 속에서 대자대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자대비는 우리민족의 미풍양속인 상부상조의 원천이자 뿌리 깊은 가치관이다.
상부상조를 상실한 사회는 이기주의 개인주의 판치는 각박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각박한 사회는 노약자(老弱者)들이 살기 힘든 사회이다. 그래서 기독교중심의 서구선진국에서는 일찍이 기독교중심의 사회복지제도가 생겨난 것이다. 우리나라도 경제가 발달되면서 사회복지제도가 날로 발전하고 있다. 다만 종교가 다양화되면서 종교보다는 국가가 주도하는 사회복지제도가 정착화 되어간다. 그러나 일찍이 상부상조 경로효친 등 전통문화에 익숙해온 노인들은 외로움과 소외감을 수용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정서와 민족의 가치관은 하루아침에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민족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문화는 계승발전 되어야 한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문화가 일조일석(一朝一夕)소멸되고 사라져가는 데는 유구한 세월동안 우리문화를 이끌고 온 문화주체세력인 불교와 유교의 모순이 크다. 소위전쟁난민 구호라는 미명아래 원조물자를 앞세워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 이웃종교에 맥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세계화란 명분을 앞세워 파죽지세(破竹之勢)의 개방 앞에 속수무책으로 밀러나고 만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민족의 가치관이다.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변해서는 안 되는 것이 민족의 전통이다. 우리의 전통문화를 되살려서 국민정서를 회복시켜야 한다. 그리고 힘없고 가난하고 외로움과 소외감으로 힘들어 하는 노인들의 보살피고 보호해야 한다. 대자대비의 부처님의 이름으로! 불보살님의 가피력으로!
나무석아모니불! 나무석아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아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