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신혼 때 역곡에 살았습니다. 제가 어영부영 직업이 없던 때라 단칸 방에서 갓 시집온 집사람이 고생이 컸습니다.
어쩌노라니 직장이 구해집니다.
직장에 더해 성남시 모란의 근사한 27평 형 빌라까지 덤으로 따라왔습니다.
그 집은 사장님 소유였던 바 당시 시가 3천 5백만원 짜리였습니다.
천만 원만 내가 내고 나머지는 근무하면서 월급에서 조금씩 공제하자는 거여서 공짜나 다름없이 내 집이 생긴 겁니다.
이 집은 딱 10년 살고 팔 때 1억을 받았습니다.
그 걸 씨드 머니로 해서 분당 야탑에 50평 형 아파트를 사서 이사 합니다.
3억 3천에 사서 25년 살고 1년 전 매도 후 지금의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모란으로 이사 했을 때 딸이 초 2였고 아들은 취학 전입니다.
전학서류를 갖고 집사람이 집 턱 밑에 있는 성수초등학교에 갑니다.
프론트의 한 여자 선생님이 집사람과 마주합니다.
선생님이 서류를 뒤적거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 어머! 어머! 이거 전남 고흥군 풍양면 풍남리 김순빈 맞습니까? ”
“ 예, 애 아빠입니다. ”
“ 어라!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군요, 저도 풍남리 사람이고 김순빈은 저와 초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
그 선생님 실명은 김형옥! 이름이 빛나는 옥구슬을 연상케 해 아주 예쁩니다.
김 선생이 다음 날 저를 찾아 집으로 왔습니다.
학교와 집은 불과 100미터 거리도 안 됩니다.
우린 부둥켜안고 실로 20년 만의 고향 친구끼리 감격의 해후를 했습니다.
솔직히 코 찍찍 흘리고 땟국물 반질거리던 어린 날을 함께 한 우리끼리
달리 허물이 있을 리 없습니다.
예네 집과 우리 집은 담장 하나 사이였습니다.
어렸을 적 늘 같이 숙제도 하고 놀기도 하는 그냥 더 볼 것도 말 것도 없는 친하고 가까운 동무 사이입니다.
애 집이 우리 집보다 형편이 훨씬 좋았습니다. 아버님께서 소형 동력선 (기곗배 )을 갖고 연근해 저인망 어업을 해서 돈을 아주 잘 벌었습니다. 풍력선이 대부분이었던 시대라 동력선은 그 자체로 큰 재산입니다.
애는 나이 불과 스물 넘자마자 초등학교 교사가 됐고 교사 되자마자 동료 남자 선생님과 결혼 합니다.
뭔 재주를 부렸는지 전라도 지방에 머물지 않고 수도권까지 와서 일하게 됐는지?
그때만도 지방 교사가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전근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던 걸로 압니다.
몇 달 지나 아들 녀석까지 입학합니다.
두 아이의 초등학교 교육에 김 선생의 도움이 지대했습니다. 동료인 애들 담임선생님께 잘 부탁함은 물론, 여러 가지 교재나 좋은 책들을 수시로 애들에게 들려 보냈습니다. 딸은 전학 온 처지였고, 아들은 갓 입학한 새내기였지만 선생님 덕분에 무난히 새 학교에 소포트 랜딩이 이루어집니다.
덩달아 집사람은 그 학교 자모회장까지 맡게 되어 나름 작은 치맛바람을 날렸습니다.
어려서 그 선생님하고 저의 관계는 다만 평범한 동무 사이에서 그쳤을까요?
찍어 먹어 보면 된장 맛인지? 고추장 맛인지? 안다고 합니다만 담장 넘어 이웃집 소녀인 그 애와 서로 간에 약간이라도 마음이 끌렸음이 사실입니다. 소위 짜꿍처럼 가까운 사이였다고나 할까요? 코 흘리개 어릴 적 일이니 말해 뭐하겠습니까만 어렴풋이 기억컨데 제가 더 동경했음이 분명합니다.
항상 여자관계에 들면 저는 천하의 찌질이이자 못난이입니다. 맨날 수박 겉만 핥을 뿐 속의 빨갛고 달콤한 과육엔 관심을 안 둡니다.
이 역시 좋다 만 케이스입니다. 좋아하면 좋다고 솔직하게 들이댔으면 관계가 심화되어 연인으로 발전할 소지가 아주 없진 않았을 것입니다.
요즘도 그녀와 재경 초등학교 동기동창 모임에서 자주 만납니다.
내가 묻습니다.
“ 내가 어렸을 적 널 좋아했던 거 알아? ”
“ 맞다. 니가 내 꽁무닐 졸졸 따라다니긴 했지! ”
“ 옳지, 그럼 너도 날 좋아했겠구나! ”
“ 피~! 좋아하긴 개뿔! 어디 너 하나 뿐이었어야 말이지! ”
“ 야! 어릴 적 일인데 뭐 어때? 좋았으면 그랬다 하면 되지! ”
“ 그래, 그래. 나도 니 좋아했다. 인자 됐냐? ”
“ 와~! 너도 가슴이 콩닥 콩닥 했겠구나, 그치? ”
“ 호호호, 그넘의 사랑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곤 했다. 이루어지지 않아서 목이 타고, 애가 타고, 너무 슬퍼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아야. 이참에 아예 우리 신파 하나 쓰자. ”
어릴 적 동무끼리니까 대화도 어릴 적 수준 그대로입니다.
우린 77세 된 얼라들입니다.
저번에 고향 친구 중 김 건조공장을 해서 대박난 애가 있다고 고향방문 글에 써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 녀석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야! 내가 형옥일 좋아해서 연애 편지를 보내려고 아무개 형한테 대서를 부탁 했지 뭐냐? 그런데 그 형도 형옥일 좋아한다면서 절대로 못 써준다 해서 깜작 놀랐다니까. 그래 그만 마음을 접게 되었지! ”
전들 편지 보낼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형옥일 두고 경쟁하는그 형이나 다른 동무들 여럿 중에서
저는 순위가 뒤로 많이 밀렸음이 확실합니다.
어떻든 실제로 펜을 들어 일자상서도 못 올리고 말았습니다. ㅎㅎㅎ
첫댓글 ㅎㅎ 재미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곡즉전 선배님께서는 재 테크도 잘하시네요.
성실하게 지혜롭게 일구신 가정과 자산이 풍성하십니다.
존경스러운 가장이십니다.
재 테크를 한 건 없고 그저 사노라니 더 넓고 더 좋은 집을 찾아 댕긴 것 뿐입니다.
분당에 집을 마련할 때 평수를 조금 줄이면 강남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랬으면 최소한 집값만도 3십억이 넘었을 것입니다.
지금 후회되지만 다 지난 일입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하루 하루 소박하게 사는 것만도 무지 감사한 일입니다.
주변에서 경쟁하듯 형옥 씨를 좋아했다니,
객관적으로도 형옥 씨의 미모는 충분히 증명된 셈.
그런데
곡즉적 님은 이성을 연모하는 마음까지는 잘 표현하시지만,
정작 고백해야 할 단계에 이르면
여성 쪽에서는 '먼저 고백해 주면 안 될까' 하고 바라보고 있는데도
그 속마음을 읽지 못해
관계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쵸? ㅎ
어릴 적 일이니 미모를 논하긴 뭐합니다.
그냥 참했던 동무라고나 할까요?
지적하신대로 제가 포석, 정석은 제법 알았으나 끝내기는 아주 형편 없었습니다.
늘 좋다 말고, 흐지부지, 용두사미였습지요.
돌이겨 고찰해보면 청년 때 작으나마 자만감도 약간 있었습니다.
여자는 정 필요하면 아무 때나 하나 꿰차면 된다는 얼빠진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ㅎㅎㅎ
지금은 목하 엄처시하입니다.
정말로 우연치곤 놀랍군요 어릴적 동무를 만나시다니 그것도 인기 많은 인싸 소녀를 말예요 ㅎㅎ 오늘도 재미있는 글 잘읽었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인싸를 첨 들어 네이버에 물어보고서야 무슨 말인지 알았습니다.
운선님 세대만 해도 저와 비하면 신세대에 드십니다.
저는 캐캐묵어 대부분의 신조어에 대해 까막눈입니다.ㅎㅎㅎ
그래서 시쳇말이 나오면 검색을 해서 꼭 그게 뭔지 알아봅니다.
그 선생님이 군계일학이거나 소위 인기모노 ( 모노는 물건이란 뜻의 일본어지만 우리끼린 이 말을 일상어로 썼습니다.)까진 아니였습니다.
비슷 비슷한 도토리 중에 약간 더 탐스러웠기에 조금 달랐다고나 할까요.
어제도 한참 통화를 했습니다만 그냥 어릴 적 친구라 스스럼이 없습니다.
위쪽에서 내려오는 친구와
남쪽에서 올라오는 친구와의 중간지점이고
멀리서는 기차타고 오고
가까이는 전철타고 오니
전철과 기차역이 있다보니
토요일 17시경 영등포역 롯데백화점 앞은
저마다의 사투리로 반기는 소리로 가득찹니다.
"이게 누구?", "넌 하나도 안변했네" ......
64세인 저의 소꿉친구들은 이미 시들해졌는데
77세임에도 열정적인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옛 사람의 시에
고향 사람을 만나 고향 소식을 묻는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고향 사람은 무조건 가깝고 친하고 믿음이 두텁습니다.
저는 오늘 실로 50년 만에 고향 선배님 내외를 만나고 막 집에 돌아왔습니다.
소찬을 함께 하면서도 이야기 꽃이 한도 끝도 없이 피어났습니다.
64세에 소꿉친구들이 시들하다니요?
저는 말만 들어도 반가워 버선 발로 뛰어나갑니다.
고향 사람 말고는 어디 정붙일 데가 있어야 말이죠. ㅎㅎㅎ
곡즉전 선배님 어린 고향시절 고흥이라함은
나름의 유서깊은 지역이어선지 가수 남진이
부른 내사랑 고흥이라는 노래도 있더군요.
예전 청소년 시절 여수 푸른 밤바다에 갔던
옛추억이 덩달아 생각나기도 하는군요.
선배님의 어린 고향시절 이야기 잼나게 보았습니다.
추억서린 고향친구 이야기에 추천(推薦)드립니다., ^&^
늘 추천을 해주셔거 감사합니다.
글 써 올리는 입장에선 추천이 있으면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ㅎㅎㅎ
전남 고흥은 육지지만 둥그렇게 생긴 섬이나 같아서 4면이 바다입니다.
농업과 수산업을 겸하는 대표적 고장입니다.
여수는 저의 제 2의 고향입니다.
거기서 학교에 다녔고 입대전 직장도 여수였습니다.
젊은 날 뼈가 굳은 곳이 여수입니다.
그때의 여수와 지금의 여수는 상전벽해,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도시의 발전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은퇴후 여수로 하향 할 꿈을 꾸었으나 집사람의 완강한 반대 때문에
여태 수도권을 떠나지 못합니다.
곡즉전님 글 읽으며 저의 지난 생활을 되돌아볼 수 있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어린 시절 깨복숭이 친구들 칠십년이 지나도 그 때 그 시절은 제게 상록수인양 푸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
어린 시절이 푸르름으로 남아있다는 말씀이 무척 감동적입니다.
과거가 아름다우면 현재도 아름답고 미래 역시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피님의 평소 삶이 어떠하신지 몇 마디 말씀 중에 함축 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늘 제 글을 읽어주시고 관심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