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들의 글을 읽노라면 나의 글을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건 회원들의 글이 나를 자극하기 때문이요
공감이 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오님의 글을 읽으니 이제하가 또 떠올랐다.
나보다 일곱살 위이신데 건재하신지 모르겠다.
또 마음자리 님이 떠올랐는데
마음자리 님의 글을 읽고 써본 나의 글을 아래에 붙여본다.
시인이요 소설가요 음악가요 화가인
이제하 님을 회상해보는 뜻이다.
밤과 말의 기억과 모란동백
김 난 석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는 17세 소년 알런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 한다. 피터 쉐프의 연극 <에쿠우스>의 대화 한 토막이다. 일곱 마리 말의 눈을 찌른 끔찍한 사건을 일으킨 소년을 감옥에 데려가는 대신 정신과 의사를 통해 문제를 탐구해 들어가지만 소년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독실하기만 한 기독교 신자 어머니와 독서만 권하는 엄한 아버지 사이에서 무언가를 억제당하며 성장해 왔는데,, 이성 친구 질로부터는 마구간에서 성적 체험까지 하게 되었으니 말(馬)이 무서웠을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다이사트는 알런 대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아내가 고아를 돌보고 있는 자애롭고 교양 있는 여성이지만 그로부터 스킨십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건조함을 깨닫게 되면서 다이사트는 알런과 묘한 공감성을 갖게 된다. 욕망을 펼쳐보지 못한 채 억압된 감정에서 거짓 균형을 이루고 있는 왜곡된 자화상을 본 것이다.
화가요 문인이요 음악가인 이제하의 유화작품전이 인사동 아트 갤러리에서 열렸다(2016. 6.). 이름하여 <밤과 말의 기억> 전(展)이다. 그래선지 작품 대부분 밤과 말과 사람이 등장하고 있다.
밤은 흑암의 궁창을 떠올린다. 거기엔 생명도 없고 역사도 없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고 낮이 되었으며, 그것이 천지창조의 첫날이라 했으니 그런 것이다. 말은 로고스(Logos)다. 말은 말씀이요 인류 최초의 이성이다. 말은 야성(野性)의 상징이기도 하다. 커다란 눈을 끔적이며 밤에도 주저앉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뛸 듯이 갈기를 흔들어 채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런 것이다.
기억은 무언가? 과거로 추적해 들어가는 정신작용이 아니던가. 생명도 역사도 없던 과거로, 단지 말씀과 더불어 인류 최초의 이성과 야성만이 깃들어 분화되지 아니한 채 가만히 잠자고 있던 그 시절로 들어가 보는 게 <밤과 말의 기억>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제 그림을 보고 리비도를 말하지만 저는 야성과 여성 사이의 긴장관계를 그려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누구는 제 얼굴을 보고 말(馬)을 닮았다고 하데요.” 작가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물론 그 말은 우스갯소리겠지만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얼굴을 그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어느 소설가와 함께 그런 작품을 둘러보았다. 점심 자리에서 어느 여류 시인이 합류해 한 번 더 전시실에 들려 둘러보게 되었다. 나의 발길은 <말과 여인> 앞에 멈춰 섰는데 그네는 <말과 소년> 앞에 머무르고 있었다. 전시 관계자와 한참 대화가 오가더니 그네는 <말과 소년>을 소장하기로 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계속 <말과 여인> 앞에서 서성거리다 물러나고 말았다.
남성은 양이요 여성은 음이라 한다. 또 밤이 음이요 낮은 양이라 한다. 12간지 중에서도 말(午, 馬)은 양이요 음력 5월 5일(端午)이 양기가 가장 센 때라 하는데, 그중에서도 오시(午時, 낮 12시)에 양기가 가장 세다 한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을 찾고 밤이 오면 낮을 기다리며, 단오엔 창포물에 열 오른 머리를 식혔던가. 좌우간 조화로운 상태를 찾아야 한다.
주머니 사정이 허락지 않아 그랬던지 나는 말을 데려오지도 않았고, 말과 여인이 어우러진 <말과 여인> 앞에서 그냥 서성거리다 돌아왔을 뿐이다. 하지만 앉아있는 여자보다 서있는 여자가 더 아름답고, 서있는 여자보다 달리는 여자가 더 아름답다는 작가의 글(이제하의 산문집 ‘모란 동백’ 중)을 떠올리니 눈에만 담아 온 말과 여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과 여인은 캔버스에 가만히 담겨 있지만 나의 그것은 눈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다리로 마구 뛰는 것이었다.(2016. 5.)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 이제하 글
노래 <모란 동백>은 이제하가 직접 쓰고 작곡하고 또 직접 불렀다. 밀양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성장한 그의 경상도 억양으로 인해 “뜨돌다 떠돌다 어너 나무 거널에...”로 이어지는 그의 육성을 듣노라면 황토물에 젖어 흐르는 향토 향이 짙게 풍겨 꾸밈없는 면모도 느끼게 된다.
문제작을 많이 냈음에도 문학상 수상을 거절하기도 한 그 특유의 저항성과 자유분방한 기질 때문이었던지 이제하에겐 아직 그 어느 것도 제도권에서 호사를 누리기보다 변방에 더 많이 머물고 있다. 그런데도 이제하의 노래 <모란 동백>을 다른 가수가 불러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으니 예술이란 게 잘 꾸며져 태어나야겠지만 바람을 잘 타고 가야 하는 모양이다.
이제하의 예술적 재능은 어릴 적부터 빛났다고 한다. 이를 알아차린 서울의 학생 (유경환, 뒤에 조선일보 논설위원, 시인)의 눈에 띄어 그가 친구 하자고 보내온 편지를 받고 써 내려간 열일곱 시골 소년의 시가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 서울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 보랏빛 ...” 으로 이어지는데, 이게 잡지 <학원>에 뽑히고, 국어 교과서에 게재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요즘 노래 <모란 동백>을 이제하의 음성으로 듣노라면 뻐꾸기의 구슬프나 서정 어린 정경도 떠오르지만 제 집을 짓지 않고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심술도 떠오른다. 그건, 왠지 모르겠다. 뻐꾸기는 지빠귀나 때까치, 종다리 등 참새류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한다. 참새류의 알보다 일찍 부화해서 미쳐 부화하지 않은 알들을 밖으로 밀어내 혼자만 살게 된다니 그런 뻐꾸기는 얼마나 얄미운가.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데 들녘에 눈이 내리면
상냥한 얼굴 동백 아가씨 꿈속에 웃고 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덧없어라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모래 뻘에 외로이 외로이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 이제하 글
하지만 그러는 사이 <모란 동백>은 다른 가수가 불러 흥행하고 있으니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가져간다고나 할까 보다..
*포스팅은 좌로부터
강민시인(작고), 이제하시인, 서정춘시인, 서정란시인
그리고 필자다
첫댓글 이제하 개인전 관람기 의미있게 잘 읽었습니다.고맙습니다.
선배께서 요즘은 제주도에 계시나본데
작년에 고향에서 전시회가 있었는데
연로하셔서 오시지도 않았는데 고향에서의 전시회는 그게 첨이자 마지막일듯,,,
그런분을 전혀 몰랐습니다. 화가 음악 문인이라니 대단한 분이군요.
모란동백이란 노래의 원작자를 알게되니 새삼 그노래가 졍겹게 다가 옵니다.
노래방가면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젊은시절 석촌선배님은 대단한 마당발이셨군요..
이제하님이 화백인 줄은 몰랐지요.
문예에 능하다는 정도,
모란동백의 원작자인 줄은 알았지만...
남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
봄이면 산속 뻐꾸기의 울음소리는
아름답지만, 못된 버르장머리입니다.
조영남이 모란동백을 불러서
대중에게 모란동백이 알려지고,
이제하님의 것이었다는 것도 밝혀지고...
뻐꾸기의 나쁜 버르장머리는,
어떤 사람과 같습니다.ㅎ
이래서, 선과 악이 공존 공생하며,
모란 아가씨, 동백 아가씨를
또 한번 기다려 봅니다.ㅎ
모란동백 노래를 처음으로 접한 것은
조영남을 통해서 입니다.
그 노래가 좋아 자주 부르다보니
애창곡이 되었고 관심이 깊어지니
이제하 그분의 원곡인 줄도 알게
되었지요.
석촌님과 지오님을 통해 오늘 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좋아한 노래인데
제가 먼 타국으로 와서 떠돌며 살 줄
예감했었던가 싶기도 합니다. ㅎ
물론 대중적인 인기는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요사이는 저작권이라는게 있어서 원작곡자에게도 혜택이 있긴 할 것같은데요.
모란동백 노래도 좋지만 시가 더 예뻐요.
상냥한 얼굴의 동백아가씨^^
노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조영남 가수가 불러 관심이 없었습니다 .
최근 수필방 글을 통해서 또 석촌님 글을
읽고 나니 이제하 예술가에 대해 잘 알게
되었습니다.
다녀가신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