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祠堂)과 사원(寺院)이 함께 있는 호국성지(護國聖地) 표충사(表忠寺) 탐방후기
2015. 6. 16
밀양시 표충사 위치도
밀양 관광 안내도
영남알프스로 불리는 명산들이 겹겹이 에워싸인 명당중의 명당자리, 밀양의 주산인 재약산(載藥山)아래 자리 잡은 표충사(表忠寺)는 사명대사(四溟大師)의 호국정신이 깃들여있는 곳이다. 표충사는 대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이지만 오늘에야 처음 찾게 되었다.
표충사 전경 항공사진 : 출처 경남일보
표충사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혼(忠魂)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명명(命名)한 사찰(寺刹)이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신라시대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삼국을 통일하고자 창건하였고, 신라 흥덕왕 4년에 왕의 셋째 왕자가 몹쓸 병을 얻어 전국의 명산과 명의를 찾든 중 이곳의 약수를 마시고 황면선사(黃面禪師)의 법력(法力)으로 쾌유되었다. 이에 왕이 친히 찾아와 크게 칭송하고, 왕이 크게 기뻐하고 절 이름을 재약산 영정사(載藥山 靈井寺)라 명명하고 절을 크게 부흥시켰다. 헌종 5년(1839)에 밀양군 무안면에 있었던 표충사(表忠祠)를 영정사로 옮기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表忠寺)로 개칭하였고 가람배치도 크게 변하였다고 한다.
표충사 서원 영역
표충사 유물관
표충서원(表忠書院)설법전(說法殿) 동영상
표충사는 호국사찰답게 사명대사의 영정(影幀)과 위패(位牌)를 모신 표충사(表忠祠)와 표충서원(表忠書院)이 사찰 경내(境內)에 위치한 특수한 예이다. 이곳 표충사(表忠祠)에서는 매년 3월과 9월에 밀양지역의 유생(儒生)들과 함께 전통적인 예를 다하여 향사(享祀;제사)를 올리며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고 한다.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임진왜란당시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의 충혼을 우리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표충사 전각배치도 : 표충사 홈페이지서 전재
①대광전 ②영정약수 ③팔상전 ④응진전 ⑤독성전·산령각 ⑥관음전 ⑦명부전 ⑧우화루 ⑨범종각 ⑩삼층석탑 ⑪석등 ⑫영각 ⑬칠성각 ⑭서래각 ⑮표충사당 ⑯표충서원 ⑰수충루 ⑳일주문 ㉑유물관 ㉒사천왕문 ㉓종무소 ㉔전시관 ㉕설법전
표충사 일주문
모든 사찰은 정문격인 일주문(一柱門)이 있다. 그런데 막바로 <표충사(表忠寺) >현판이 큰 글씨로 가운데 걸려 있고 오른편에 수충루(酬忠樓), 왼편엔 천황제일루(天皇第一樓)란 작은 현판이 걸려있는 루로 들어왔다. 들어오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찰의 경내로 들어가자면 사찰의 출입문 격인 일주문(一柱門)을 통과한 후 사천왕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것이 없으니 말이다. 수충루를 통과하여 진행방향으로 앞을 바라보니 언덕위에 사천왕문이 보인다. 비로서 사천왕문 안쪽이 사찰의 경내인 것을 감지했다.
<표충사(表忠寺) >수충루(酬忠樓):사찰과 서원의 출입문을 겸하고 있다
천황산 표충사 안내문
뒷면에서 바라본 수충루
수충루를 통과여 왼쪽을 바라보니 저 멀리 가운데에 표충사(表忠祠) 현판이 붙은 사당(祠堂), 왼쪽에 표충서원(表忠書院), 오른쪽엔 유물관(遺物館)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한마디로 유교의 영역으로 사명대사의 애국충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먼저 표충사(表忠祠)를 찾았다. 표충사는 헌종(憲宗) 5년에 표충사 대광전(大光殿) 옆 팔상전(八相殿)이 위치해 있는 곳에 표충서원 이란 이름으로 있었으나. 1971년 팔상전과 자리를 바꾸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표충사(表忠祠)로 편액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정면3칸, 측면3칸 다포식(多包式) 팔작지붕 건물로 다른 전각들과 달리 한 칸 퇴를 물려 방을 들인것이 특이하다. 사당 안에는 사명대사(四溟大師), 서산대사(西山大師), 기허대사(騎虛大師) 영정(影幀)이 봉안되어 있다. 이곳에서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祭享)을 올린다고 한다.
표충사(表忠祠)
사명대사(四溟大師) 영정(影幀)
서산대사(西山大師) 영정(影幀)
기허대사(騎虛大師) 영정(影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된 표충서원은 영조 20년(1744년) 왕명으로 건립되었으며 고종 8년(1871년)에 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령이 내렸으나 표충서원은 휘철(毁撤)을 면했다고 한다. 표충사가 유교와 불교의 통합된 한국사찰의 유연성을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표충서원(表忠書院) 전경
표충서원(表忠書院) 현판
이 유물관(遺物館)에는 국보75호인 청동은입사향완(靑銅銀入絲香垸)을 비롯하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유물 및 사명대사의 유품(遺品) 300여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중요민속자료 제29호로 지정된 금란가사(金襴袈裟)와 장삼(長衫), 선조임금이 하사하였다는 패도(佩刀)와 여러 종류의 사령문서(辭令文書)들, 일본에서 포로의 송환문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비명(碑銘)을 새긴 목판(木板) 등 많은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승병의 활약과 강화사절로서의 역할을 고찰 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매주 <화>요일과 유물 보존 관리를 위하여 <우천 시>에는 휴관한다고 한다.
유물관(遺物館)
등잔대(조선후기)와 옥등잔
방형 인장함
표충사석조지장보살반가상과 표충사석조보살좌상
국보75호인 청동은입사향완(靑銅銀入絲香垸)
대홍원전 현판(조선시대, 위당 신헌 씀)
표충사 제영록 : 표충사의 위치와 건립배경 취지등 여러글을 모은 책
삼현사 충훈대략
교지
교지 표충사 삼층석탑출토 금동불상 : 통일신라시대 ~ 고려시대, 금동 청동
표충사당의 맞은편에 위치한 설법전(說法殿)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사명대사의 호국사상을 선양하기 휘한 법회(法會)나 그 정신을 전승(傳承)하는데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 설법전에는 무설전(無說殿), 의중당(義重堂), 대흥불법도량(大興佛法道場)의 편액이 함께 걸려있다.
설법전(說法殿)의 무설전(無說殿), 의중당(義重堂), 대흥불법도량(大興佛法道場)의 편액
표충사내 기념품관
사천왕문(四天王門)은 표충사의 사당(祠堂) 영역과 사원(寺院)영역을 구분 짓는 역할을 한다. 정면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원래는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雨花樓) 앞쪽에 사천왕문이 있었으나 근래에 와서 사당영역을 새롭게 조성하고 사찰의 진입로를 옮기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다고 한다.
사천왕문
표충사의 주불전(主佛殿)은 대광전(大光殿)이다. 대광전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의 준말이다. 이 표충사 대적광전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정해져있다. 대적광전에는 일반적으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로 모시고 있다. 그러나 이곳 대광전에는 대웅전(大雄殿)의 주불과 같이 주불을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여래의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뭐인가 조금은 이상하다. 대광전의 현판대로라면 비로자나불이, 주불전의 불단불상을 기준으로 라면 현판을 대웅보전 또는 대웅전으로 바꿔야 한다. 그러나 법당에 어느 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든, 신자의 입장에서는 상관없다. 이 건물은 앞면 5칸, 내3포 외3포의 다포식 팔작 건물이며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인 1929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앞면 돌계단 소맷돌(돌계단의 난간)의 조각, 잘 다듬은 주초석(柱礎石)이 돋보인다.
사천왕문 쪽을 바라본 사원경내
표충사의 주불전(主佛殿)인 대광전(大光殿)
석가여래불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여래의 목조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대광전 바로 옆에 자리 잡은 팔상전(八相殿)은 원래의 위치는 현 종무소가 있는 자리였다고 한다. 지금의 위치에는 표충서원이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부 승려들이 사원 내에, 그것도 주불전인 대광전과 나란히 있다는 것은 부처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지적이 있어 1971년에 자리를 맞바꾼 것이다. 이 건물은 대광전과 마찬가지로 잘 다듬어진 장대석(長臺石)의 기단(基壇)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식(柱心包式) 건물이며 내부에는 소조석가여래좌상(塑造釋迦如來坐像)만이 봉안되어 있다. 팔상전은 현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팔상전(八相殿)
표충사 3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만들어졌고 석등도 같은 시대의 작품이다. 표충사 내 석등은 경상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4호 이다. 방형(方形)으로 된 지대석(地臺石), 원형(圓形)으로 된 하대석(下臺石), 하대석의 연꽃잎 모양, 화사석(火舍石)의 장방형(長方形)의 화창구(火窓口), 간주석(幹柱石), 석등 정상의 보주(寶珠)등이 아름답다.
표충사 내 삼층석탑과 석등
응진전(應眞殿)은 정면 3칸, 측면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중앙 불단에 석가여래,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提華褐羅菩薩)을 모시고 있으며, 대광전 팔상전 뒤에 위치한 독성전(獨聖殿)과 산령각(山靈閣)은 정면 2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으로 전면 각각 1칸씩 독성전과 산령각으로 편액(扁額)되었다. 내부에는 석조로 된 나반존자상(那般尊者像)과 독성탱과 산신탱을 봉안하고 있다.
응진전(應眞殿)
독성전(獨聖殿)과 산령각(山靈閣)
명부전(冥府殿)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주존(主尊)으로 명부시왕(冥府十王)을 함께 모신 곳이다.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며, 죽은 자의 삶을 평가하고 형벌을 정하며 새로 태어날 세계를 결정하는 유명계(幽冥界)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염라대왕(閻羅大王)은 이 가운데 다섯 번째 왕이다. 바로 명부전 옆에 관음보살(觀音菩薩)을 모신 관음전(觀音殿)도 있다.
명부전(冥府殿)과 관음전(觀音殿)
명부전(冥府殿)
관음전(觀音殿)
대광전을 바라보며 마주한 우화루(雨花樓)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이곳은 야외 참선(參禪)장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우화루 바로 옆에 위치한 표충사 범종루는 대광전을 마주하고 2층 누각(樓閣)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범종루에는 불음(佛音)을 전하는 사물(四物)을 배치하고 조석(朝夕) 예불(禮佛)과 사찰의 크고 작은 행사에 크게 울려 퍼지게 한다. 범종루에는 범종(梵鐘)을 비롯해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이 설치되어 있다. 이 사물은 중생(衆生)을 교화를 상징하는 불구(佛具)로 예불의식(禮佛儀式) 때 쓰인다. 이 범종루의 특징은 범종이 종루 1층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외 영각(影閣), 칠성전(七星殿), 서래각(西來閣)은 시간 부족으로 보지 못했다
대광전을 바라보며 마주한 우화루(雨花樓)
표충사(表忠寺)사원(寺院)영역 동영상
칠성전(七星殿)
서래각(西來閣)
영각(影閣)
호국성지 표충사를 탐방하고 사명대사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그의 호국정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사명대사에 대해서 알아보면 사명대사는 풍천(豊川) 임씨(任氏)로 밀양시 무안면에 태어났다. 그는 과거의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승려생활을 하던 중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건봉사(乾鳳寺)에서 의승병(義僧兵)을 모아 승군(僧軍)의 총사령관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하였으며, 그 후 한양근처의 삼각산과 노원평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또 국방에 힘을 기울려 많은 산성을 개축하였는데, 팔공산성(八空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 부산성(釜山城), 남한산성(南漢山城) 등이 그것이다.
경남 밀양시 무안면 동부동안길에 위치한 표충비각
표충비각 현판
그 후 선조의 부름을 받고 일본과의 강화(講和)를 위한 사신(使臣)으로 임명받아 1604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담판을 하는 등 8개월 동안 노력 끝에 전란 때 인질로 잡혀간 3000여명의 조선인을 데리고 귀국한 사명대사의 우국충정은 역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사명대사는 승려이면서 학자, 전술전략가, 뛰어난 외교관으로 꺼져가는 국운을 일으켰다. 표충사에는 그의 빛나는 충혼이 국민들에게 많은 감화를 주고 있다.
표충비의 땀흘린 역사 안내판
표충비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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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Abnormal 선생.
'표충사' 공부 잘 하고,편히
앉아서 관광을 하였네.!!
*밀양 3대 神秘중의 하나인
'표충비각'의 진실도 알고...!!
*楊平의 '龍門寺 은행나무'도
국가의 重大事時 소리를 내며 울었다네...(이 비각과 은행나무를 관련지워 보면~)
매월 자네의 踏査記에 우리들은 感動하네...
덕택에 잘 보았네 동영상까지 곁들여서 더욱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네...
윤중선생! 매 산행때마다 이렇게 훌륭한 답사기를
써 줘서 너무 고맙고 두번 답사하는 듯하고
많은 공부가 되었네.
수고하셨네. 진짜 산행후기가 기가 막히네.
역시 에브노말 김기현로세. 그 머리에 그 실력이야. 나도 함께 갔지만
모두가 새롭게 자세히 볼 수 있어서 고마와하네. 에브노말 김기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