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나든 나무 이야기-8-예산 추사 백송
“그럴싸 그러한지 솔잎 벌써 더 푸르다--(정인보 시조 조춘)” 내가 주말마다 드나드는 창경궁 춘당지 옆에 젊은 백송들도 잎도 프로고 들어난 줄기도 더 하얗게 보인다. 매스컴들은 벌써 남녘 제주도 산담의 곰보돌 아래 추사가 그리도 좋아하시던 수선화가 벙그는 중이라고 연일 꽃소식 수선 떨고 있다.
어떤 이는 이 글로벌 시대에 뚱딴지같은 “국경을 넘나드는……” 운운이냐 비아냥거리는 이도 있었다. 나는 이에 답한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한 파스퇴르의 말은 인용하여-
“총성 없는 전쟁” “종자전생” 시대에 핵보안 못지않은 국익이 걸린 현실에서는 그냥 넘어갈 수만은 없어서 생각해본다고.
하긴 나무나 풀 등 식물 입장에 있어선 국경이 전혀 무의미 할 것이다. 국경은 순전히 사람들이 저들 이해에 따라 그어놓은 금에 지나지 않는다. 식물은 어디나 제 사는 땅이 제나라 일 것이니까.
그러나 인간이 만든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단순히 식물 생육 장소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금을 넘게 되는 사연과 역사. 사람의 생각등 문화가 뒤따라 넘게 되는 그냥 두고만 볼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충청도 예산 땅 추사고택 가까운 곳, 추사의 고조부 김흥경 묘소 앞의 백송은 추사의 삶과 예술 속에 남긴 그 많은 일중에 너무나도 넓이 알려진 <세한도>와 <수선화>그리고 <예산 백송>으로 추사를 표상하는 아이콘으로 남아 있다. 추사는 이른바 명문거족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지금 표현이라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은 선조의 부마이고 생부와 양자로 간 아버지는 모두 높은 벼슬을 하는 빛나는 쟁쟁한 집안이었다. 즉 생부 김노경도 대과 급제자이고 자신도 급제한 수제이다. 추사는 1809년 24살 때 연경 즉 북경에 동지사로 가는 아버지 김노경의 군관자제 자격으로 아무런 의무나 부담 없이 순전히 이국의 견문을 넓히려 연경에 다녀오는 기회가 온다. 가는 데 약 한달, 북경에 거의 두 달 동안 머물면서 당시 청나라 최고의 지성인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 등 당대에 최고의 지성, 유명 인사를 만나고 배우며 느낀다. 여북했으면 추사의 호 중 완당(阮堂)을 이분을 닮으려는 마음에서 따왔을까? 몰런 북경에 가기 전에 그의 스승인 박제가로부터 그곳의 풍경과 문화와 인물에 대한 소상한 예비지식을 가지고 갔다. 우리 조선이 떠받들던 명나라가 망하고 그렇게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그 청나라의 선진 문화와 사상을 몸소 확인한 추사는 심한 문화충격을 받는다. 돌아오는 길 한 달여- 그의 여행 봇짐 속에는 이국의 전적, 글씨 그림들이 가득 했고 그중에 북경 근교에 무리지어 있던 특이한 소나무 백송의 씨앗도 들어있었다. 하긴 묘목 몇 그루를 가지고 왔으면 좋으련만 한 달이나 걸리는 거리와 시간상 그 어린 나무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적어 백송 솔방울이나 백송 솔 씨를 가지고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묘목이거나 씨앗이라고 단정한 것은 어느 기록에도 명확한 언급이 없다.
그는 이 솔 씨를 고향 예산 땅 용궁리 고조할아버지인 김흥경 묘소 앞을 비롯하여 선산 역내 여러 곳에 씨를 심었으나 백송의 생육 특성상 초기생육의 까다로움 때문에 끝내 오늘까지 200여년을 살아남은 것은 단 한그루가 있다.
왜 추사가 연경 갔다 오는 길에 백송 씨를 가지고 왔을까? 어린 날의 추억은 그 사람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영향을 미치는 법. 추사 증조할아버지가 영조의 사위가 되어 작위인 월성위(月城尉)로서 하사받은 집이 지금의 경복궁 서쪽 통의동에 있었는데, 그 저택을 월성위궁(月城尉宮)이라 이름 하였다, 그 집 마당에 고고한 백송 한그루가 있었다. 추사는 어린 날에 양자로 가서 이집에서 양부 김한영과 살았는데, 추사가 12살 무렵 여기서 조모님. 양부, 조부 김이주, 종형 김관희 등등 친족 여러 명의 죽음을 연달아 당하게 되는데 어린 추사로선 상상할 수없는 큰 충격에 빠진다. 그 때 마당에 굳게 버티고 선 백송은 그 누구보다 더 없는 위로와 의지가 됐으리라는 추축이 가능해 진다. 이런 사연으로 그는 연경에서 고국으로 돌아올 때 북경에서 만난 그 백송의 씨를 옛날 생각하며 가지고 왔을 것이다.
내가 몇 번이나 보아온 <예산 백송>은 1980 년대까지는 지상부에서 세 갈래 가지가 나와있어 균형 잡힌 모습 이였으나. 어느 해 폭설로 두 가지는 여지없이 찢어지는 사고를 당한 후 수술도 별 소용없이 두 줄기는 사라지고 나머지 한 가지만 외로이 그 것도 백송의 당당함 보다는 쇠약함과 쓸쓸한 외양을 하고 있어 안타깝게 섰을 뿐이다. 근래에 와서 그 근처에 <백송공원>이란 이름으로 어리고 젊은 백송들이 푸른 줄기를 드러내고 싱싱한 모습으로 자라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나무도 세월에 장사가 없다는 말 어김없다는 생각이 든다.
유홍준 교수는 그가 쓴 <완당평전> 첫줄에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고 했다. 추사의 시, 서 화, 그리고 금석학, 등등 그 무수한 작품세계에 대해 나는 할 말이 없다. 다만 생태적 측면에 내가 주목하는 극미한 일면만 읽어보면 남다른 <수선화> 사랑이다. 그는 연경에서 여러번 수선화를 봤을 것이다. 그리고 평양 출장 근무 시 연경 갔다 오는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수선화 한포기를 고려자기 화분에 심어 존경하는 스승 정다산에게 보낸 일. 그리고 제주도 귀양살이 할 때 본 그 수선화, 중국에서는 그리 귀하게 여긴 수선화가 논두렁 밭두렁. 산담, 길모퉁이, 바닷가. 보리밭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데. 제주도 사람들은 그 저 소먹이 풀로나 퇴비 또는 보리밭에 잡초로만 봐서 뽑는 데 힘드니 “원수같이 생각하는 풀”이라 하는 데 놀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다. 그는 수선화란 시를 다섯 편이나 읊었다. 그가 이토록 수선화에 집착한 이유는 아마도 수선화가 매화 못지않게 새봄을 가장 먼저 전해주는 해배(解配)의 전령이라도 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사가 어린 날 놀고 자랐을 통의동 월성위궁은 지금 사방이 주택으로 둘러싸여 안내판은 있으나 골목길 안쪽 뒤주칸 같은 움푹 파묻힌 좁은 공간에 있다. 그것도 옛날의 우람했던 자취는 어딜 가고 분해 되가는 백송 밑둥치만이 그 옛날의 위용을 짐작하게 할 뿐 주위엔 세 그루의 어린 백송이 이곳의 옛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추사가 어린 날 보고 자랐던 통의동 백송은 1990년 7.17일 노쇠한 몸이 돌풍에 넘어지고 노태우 대통령의 특명으로 “백송회생대책위원회”까지 만들어 되살려보려 했으나 끝내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이제까지 천연기념물로 국가가 관리해오고 있는 백송은 모두 11그루이나 그중 노쇠해서 자연사하거나 가치 자격 상실 등 사유로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된 것이 6그루(통의동 백송-천연기념물 제4호, 내자동 백송-제 5호, 원효로 백송 -6호, 회현동 백송- 제 7호, 보은 백송-제 104호, 북한 개성리 백송- 제 81호)나 된다. 남은 것은 천연기념물 제 8호인 서울 재동 백송(헌법제판소 안), 제 9호인 수성동 백송(조계사 내), 제 60호인 경기 일산 송포, 제 106호인 예산 백송 그리고 253호인 경기 이천 백송이 있다.
위의 기록을 가만히 보면 천연기념물 제 1호부터 10호 사이에 백송이 서울과 그 가까운 곳에 7군데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포는 환경적 이유 보다는 이 백송을 중국에서 가져다 심을 수 있는 명문거족들이 거의 서울 수도권에 살았다는 뜻일 게다. 백송은 한 때 외제차가 그 집의 부와 권위를 나타내고, 또는 티브이 안테나가 “우리는 있다”는 경제력을 과시하는 자랑거리가 되었듯이. 자기 집안사람이 중국을 드나들 정도의 거족 이다 라는 과시전용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소나무집안의 나무들의 특징인 바늘잎이 백송은 3개가 한 묶음으로 됐으나 잎의 단면을 현미경으로 보면 그 안에 관다발이 1개로, 일반소나무는 2개, 잣나무는 1개 인고로 아마도 백송은 잣나무집안에 가까운 혈연이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또한 백송은 어릴 때는 그늘을 좋아하나 자람이 커 갈수록 빛을 좋아하는 양수가 되어 속히 자란다. 백송이란 말도 어릴 때에는 그 줄기가 청록색 이였다가 나이가 들수록 백색으로 되기 때문이며 줄기 껍질의 무늬가 옛날 고등학생 교련복 무늬와 같거나 군 장갑차 위장 색과 흡사하다. 그래서 백송의 별명이 백골송(白骨松) 이라 하기도 한다. 북한에서 흰소나무 라하고 그렇다고 영어로 White pine하면 안 된다. 서양 사람들은 줄기의 색보다 얼룩무늬를 먼저 봐서 영명으로는 Lace-bark Pine(얼룩무늬솔)이라 한다. 옛날부터 백송줄기 색이 진하게 핳애지면 만사유의(萬事如意), 이르고자 한 바데로 된다는 전설이 있어 대원위이 대감이 경복궁에 출근하는 길 재동 백송 줄기가 유난히 흰빛을 내는 걸 보고 그날부터 안동김씨 척결에 시동을 걸었다는 비사가 전한다.
나는 전자복사기가 잘 없던 시절 어느 학생 아버지에게 추사의 저 명작 <세한도> 한 장을 선물로 받은 바 있다. 물론 복사 품이었다. 명성을 들은 바 있어 표구해서 집 거실에 걸었다. 또 내가 신혼시절 지인으로부터 추사 글씨 복사본 병풍을 한틀 하자는 권에 좀 “고상하고 유식해 보이려고” 또는 내가 고등학교 시절 국어선생님께 들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는 <추사체>라고 하는데 너희가 아느냐? 바로 그 대<추까시체> 말이다” 하는 그 말씀 기억으로 거금 드려 한 틀 작만 했다. 그러나 그 병풍 아직도 보관만 하고 있지 한번밖에 펴놓고 보지 못했다. 당시로선 가보로 정하고 작만했는 데 복사기술이 이렇게 발달할거란 상상을 못했다. 물려줄 주인도 가고 없다. 일전에 가본 과천 추사박물관 앞 추사가 말년에 기거하던 추사 아버지 김노경의 별서인 소박한 과지초당(瓜地草堂) 뒤뜰에 자라고 있는 백송 세 그루에게 후계목으로 이름값 잘하라는 기원만 하고 돌아왔다. 한 가지만 터 보탠다. 내 고향 가까운 동네에 <헹소리>라는 마을이 있다. 도대체 어원이 무엇일까 궁금했었다. 나는 백송 공부 하면서 그 말 뿌리를 밝혀냈다. 이 마을은 진성 이씨 집성촌으로 내성천 금모래와 오래된 소나무와 퇴계선생도 드나드신 선몽대(仙夢臺)라는 멋진 정자가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이 마을 한쪽에 하얀 소나무가 있었데. 그 하얀 소나무 즉 흰솔이 경상도 말로 행솔이로 발음 되고 급기야 <행소리>로 -그 어원은 줄기가 하얀소나무 즉 백송마을 이란 뜻이었다. 지금 그 흰소나무 사라진지 오래고 터 이름만 전하고 <헹솔이>란 마을이름 <행소리>로 구전되어오는 곳이다. 그곳에도 소위 양반 명문거족이 살았다는 간접 증거이다.
예산 땅, 추사선생이 손수 심으셨다는 저 백송, 오래도록 생존하사 추사고택 찾는 이 마다 선생의 삶과 예술을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시길 기원한다.
(TIP) 추사의 <세한도>에는 우선시상(藕船是賞)이란 글귀가 나온다. 제주도 귀양살이 중 제자 우선 이상적이 그 귀한 책을 구해준 데 대한 고마움의 뜻으로 그려준 그림의 화제에 붙인 글 “상적군 감상해보시게”의 뜻이다. 한데 이 우(藕)자을 찾아보면 연꽃 우 자라 했다. 연(蓮)을 나타내는 한자가 여럿 있음에 공유하려 적어본다. 몰런 중국최고의 사전, 제자백가의 나침반이라 칭하는 “이아(爾雅)”라는 책에 근거한 것이다. 연 (蓮)이라는 식물 전체를 말할 때는 연(蓮) 또는 부거(芙渠)
蓮줄기는 가(苛), 잎은 가(葭), 몸체 밑동은 밀(蔤), 연꽃은 함담(菡萏), 연밥 속은 적(的), 씨앗 속은 억(艹아래 意),추사의 제자 우선 이상적 할 때의 우(藕)는 연뿌리를 칭하는 글자 임. 우선(藕船)=연뿌리 배, 오!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이아에는 없었지만 부용(芙蓉)과 하(荷)도 蓮을 뜻한다.
첫댓글 백송에대한 모든것이 다 있습니다...^^
서울근교에 많은 이유도 이제야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