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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장길산
▷ 황석영(黃晳暎: 1943년-)
만주 장춘(長春) 출생. 1962년 경복고등학교 재학 중
<입석부근>이 《사상계》의 신인상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단. 동국대 철학과 졸업.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탑>과 희곡 <환영 (幻影) 의 돛>이
각각 당선. 1966∼67년 베트남 전쟁참전. 황석영은
1974년 첫 창작집『객지』를 펴내면서 단숨에 70년
대 리얼리즘의 대표작가로 떠올랐다. 이 소설집에
포함된 <객지> <한씨 연대기> <삼포 가는 길> 등은
지금도 리얼리즘 미학의 정점에 이른 걸작품들로 인
정 받는다.
같은 해 신진작가로서는 파격적으로 '한국일보'에
<장길산> 연재를 시작했다. 장장 10년간 연재가 이
어지면서 해방 이후 최고의 역사소설로 평가 받았다.
1976∼85년 해남·광주로 이주, 소설집 『가객(歌客)』
(1978), 희곡집 『장산곶매』(1980), 광주민중항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1985) 등
간행. 중국에서 『장길산』(1985), 일본에서 『객지』
(1986), 『무기의 그늘』(1989), 대만에서『황석영 소설선집』 (1988)이 번역·간
행됨
황석영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74년), 민중문화운동연합(84년), 민족문학작가회
의(87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88년)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고, 1989년 통일운
동 차원에서 평양 방문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독일 예술원 초청 작가로 독일에서
체류하다 1990년 독일에서 장편소설 『흐르지 않는 강』을 집필, 한겨레 신문에
연재. 1991년 11월, 미국으로 이주, 롱 아일랜드 대학의 예술가 교환 프로그램으
로 초청받아 뉴욕에 체류. 1993년 4월 귀국, 방북 사건으로 7년형 받고 1998년 사
면됐다.
방북시에 김일성 주석과 수 차례 면담했으며,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제목의
방북기를 발표하여 그 편집자가 구속되는 사건도 있었다. 2000년『오래된 정원』
출간. 2002년 4월엔 중편 <한씨 연대기>와 단편집 <삼포가는 길>이 프랑스어로
번역돼 프랑스에서 출간되기도 했다. 제4회 만해 문학상 수상.
▷ 장길산(張吉山)
조선조 효종 때, 계집종의 몸에서 태어난 길산은 광대 장충의 구원으로 재인(才人) 마
을에서 성장한다. 그는 같은 마을의 역사(力士) 이갑송, 송도 상단(商團)의 행수 박대
근, 구월산 화적인 마감동 등과 사귄다.
창기(娼技)였다가 버려진 묘옥과 정분을 맺은 길산은 해주 간상배(評商輩) 신복동을
징벌하려다 붙잡혀 사형수가 되지만, 박대근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한다. 그는 양
부모의 뜻을 어길 수 없어 누이 동생인 봉순과 결혼한다. 그러나 뜻한 바 있어 금강
산에 들어가 운부 대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차층 '백성'에 대한 의식을 새롭게 한다.
숙종 10년, 대기근이 발생하자 길산은 관아와 부호를 털어 기민 구출에 힘쓰고, 그
의 이름이 백성의 입에 오르내린다. 조정에서는 토포(討掃)를 명하나 길산의 활약
은더욱 빛날 뿐이다.
정묘년 4월, 입국(立國)의 뜻을 가진 사람들이 구월산에 모인다. 길산의 활빈도, 운
부 대사의 승병, 해서의 무계(巫系), 근기 지방의 미륵교도 등이 결속한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왕조가 망한다는 괴서가 나돌고, 미륵이 도래하여 용화(龍華) 세계를
이룩한다는 믿음이 번져 나간다.
길산은 언진산에 터를 잡고 관군과 맞설 자금을 조달한다. 이때 고달근이 큰 이익
을 꾀하다 관가에 검거되자 길산 일당을 밀고한다. 토포관 최형기가 급습하지만
길산은 이미 달아난 뒤이다. 길산은 고달근을 찾아 징치하고 최형기를 처단한다.
해서와 관북 일대에도 장길산을 자처하는 무리들이 출몰해 조정을 괴롭히지만, 이
후 길산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1974년부터 10년간에 걸쳐 《한국일보》에 연재된 장편 소설. 이 작품은 조선 숙
종 때 유명한 의적부대였던 장길산부대의 활약을 그린 작품이다. 노비 ·광대 ·농민
·창기 ·광부 등 그 사회 민중들을 작중인물로 삼아 그들의 참담한 생활, 그리고 상
공인 세력의 부상과 중인층의 성장, 기층민의 신분해방 운동과 미륵신앙 등을 폭
넓게 상호 연관지어 신분체계가 문란해지고 봉건체제가 해체기로 접어들 무렵의
민중사를 복원해 주고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는 군사 독재 권력에 의해 수많은
지식인과 민중들이 억압을 받았던 시대이다. 작가는 이와 유사한 역사적 배경으
로 18세기 숙종조를 설정하고, 여기에 실존 인물인 장길산을 등장시켜 결코 좌절
하지 않는 민중들의 생명력을 표현함으로써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민중들의 모습
을 그리고 있다.
특히 민중들 사이에 은밀히 내려오던 미륵신앙을 바탕에 깔고서 검계(劍契)와 살
주계(殺主契) 사건, 녹림당 이야기를 통해 미륵보살의 용화세계(龍華世界)를 꿈꾸
는 의적집단의 형상이 탁월하여 홍명희(洪命熹)의 《임꺽정》 이후 최대의 역사
소설로 손꼽힌다.
이 소설은 역사 속에 묻혀 있던 장길산이라는 인물을 찾아내어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시대적 변화를 함께 엮어 놓고 있다. 천노(賤奴)의 소생인 그가 사회의 모순
을 극복하고 자 의지를 키워 나가는 과정, 그 의지를 실천하기 위해 녹림당(綠林
黨)을 조직, 지배 계층에 대항하는 모습, 그러한 개인적 실천력이 민중에게로 확
대되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전개된다.
이 소설의 뛰어난 점은 우선 작가의 역사적 상상력에서 발견된다. 등장 인물 중 묘
옥과 이경순을 제외한 대부분이 숙종 때의 공안(供案)에 기록된 실존 인물이지만,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인물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고 아예 무시
되기도 한다. 기존의 역사 소설류가 대체로 실제의 사건과 인물의 행적이나 따르던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이 소설은 단순한 영웅 소설이 아니다. 당대 사회 현실을 광범위하고 다채롭
게 그리고 있으며, 민중 세력이 확고한 미래의 전망을 가지고 반봉건적 변혁을 시
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봉건 지배충의 관점에서 씌어진 사료(史料)들을 철저
히 민중적인 시각에서 재해석한 작가의 역사관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더하여 조선
시대 민중들의 언어와 관습을 풍부하게 재현함으로써 풍속사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당대 사회의 경제 수준을 지나치게 근대적인 것으로 미화시키고 있다거나, 변혁 운
동을 주도하는 민중 출신 지도자들을 너무 영웅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민중 의식의 역사적 재인식을 높은 수
준에서 성취한 걸작이다. 특히, 장길산 자신의 개인적 의지와 포부는 좌절되었지만,
그의 정신이 면면히 계승된다는 결말 처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길산이 종적
을 감추자 관가에서는 가짜 길산을 잡아죽이고 그에 대한 소문을 근절시키려 하지
만, 오히려 그의 이야기가 하층민 사이에 널리 퍼지고 그의 애환을 담은 탈춤이 생
겨나 오래도록 지속되었다는 마지막 대목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민중의 희구와 갈
망이 얼마나 뿌리깊은지를 암시해 주고 있다.
▷ 작가의 말
지난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은 이래로 나의 문필 생활은 올해로 어언 40
년이 되었고 이제 곧 환갑인 나이에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는 전후의 어려운 시절임에도 내게 책을 사다 주셨고 나에
게 일기를 쓰도록 권하셨다. 영등포의 야시장 골목에 나가면 난리 중에 생계가 어
려워진 집이나 빈 집에서 쏟아져 나온 개인 서가의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헌 책을 팔기도 했지만 대개는 노천에 책꽂이를 늘어놓고 대서점을 하는 데가 많
았다. 나는 누나들과 함께 책꽂이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날마다 닥치는대로 책을
빌려다 보곤 했다.
해방 공간에 나온 갖가지의 세계명작 번역서로부터 대중소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몇개의 책꽂이를 모두 훑었다. 다락과 마루방에 엎드려서 읽다가 유리창 너머로
변하고 사라지는 풍경들을 눈에 익혔다. 여의도 비행장의 프로펠러 소리며, 공장
의 회색 담벽이며, 샛강의 푸른 들판이며, 그 속에 피어나던 꽃다지, 자운영과,
까마중과, 뱀딸기가 책 속의 다른 세상들과 어우러졌다.
글짓기 행사에서 몇 차례 상을 받고 나서, 칭찬을 받은 어린 것이 언제나 그렇듯이
이담에 크면 뭐가 될거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작가가 되겠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곤 했다. 당시에는 작가나 소설가라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
는지 뚜렷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글 쓰는 일이 학과 공부에 비해서는 그다지 대수
로운 짓이 아니라는 점은 학부모와 선생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확실하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미 내 눈과 가슴에 그 어떤 기관이 생
겨나 있었던 것을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건 ‘인문적’이라고 표현을 해야할지, 아무
튼 ‘사람 살이’에 대한 따스한 온기와 물기 같은 것이 스며든 무슨 투명한 렌즈 같
은 것이었다.
빛을 투과해서 여러 색깔을 나누어 보여주는 것이 프리즘이라면 그 비슷한 감성의
기관이 생겨났을 거라는 얘기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일차적으로
는 세계와 인간의 경험을 반영한 갖가지의 책을 읽음으로써 형성되었을 것이다.
이 갈피 갈피마다, 저 여름날 도로의 움푹 패인 물웅덩이에 번진 기름이 오색 빛으
로 빛나던 순간이나, 아침에 깜짝 놀라게 몰래 오신 손님처럼 내린 첫눈이라든가,
인천상륙작전이 계속되던 캄캄한 밤 하늘의 야광탄의 불꽃이나 먼 우레 같던 포
소리들, 어린 거지 남매의 때 묻은 손 위에 걸린 더러운 밥 찌끼가 담긴 깡통이나,
무릎이 앙상하고 눈이 빛나던 검정치마 입은 단발머리 소녀가 내밀어준 짭짤한 누
룽지라든가, 하는 생생한 삶의 편린들이 이 프리즘을 통과해서 나를 성장시켰다.
그리고 미지의 세상과 새로운 체험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은 바로 이러한 기관이
내 몸과 마음을 부추긴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학이 좋기는 하지만 그렇게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는 일은 아니라는 점은 이미
청소년기에 눈치를 챘던 모양이다. 그것은 숱한 난리를 겪으며 어렵게 생존을 이
어온 어른들의 영향도 컸으리라. ‘글 쓰는 일’은 ‘직업’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낚
시, 등산, 독서처럼 취미란에나 적을 수 있는 일거리였다. 하지만 이렇게 ‘글 쓰는
일’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삶에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느낌 때문에 도중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늘 하는 얘기지만 ‘문학’은 마치 사랑하는 상대처럼 너무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전체적인 형상이 보이질 않았다. 나는 곁눈질도 하지않고 그냥 ‘놓아’ 버렸다.
갈테면 가라지… 하고 중얼거렸겠지. 그는 아마도 내가 ‘거리를 두고’ 놓아버린 뒤
에도 늘 내 주변을 맴돌았을 터이다. 베트남 전쟁터에서 돌아온 뒤에 나는 ‘자아’라
는 꾸며진 가상의 껍질을 벗고 사회와 만난다. 그때에 내 등 뒤에서 작은 속삭임 소
리가 들려왔다.
“이봐, 나 아직 당신 등 뒤에 있어.”
나는 그것과 새삼스럽게 재회한다. 그로부터 그것과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
서 동행을 계속했다. 우리는 죽음도 이별도 함께 겪었다. 나는 무명 작가 시절의 가
난을 견디면서 ‘글 쓰는 일’은 모든 다른 사람들의 삶이 그렇듯이 시장 가운데서 하
나의 생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무엇보다도 ‘직업 작가’이
며 프로 글쟁이다. 하늘로부터 천형의 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글줄 좀 쓰다가 늙은
글쟁이들이 고민하는 쌍통을 하고, 무슨 특별하고 월등한 생산을 해낸 것처럼 엄살
을 부리는 꼴은 정말 차마 못보아 주겠더라. 스패어 운전수를 하다 정식 운전수가
되고, 개인택시 허가를 얻어 육십이 넘어서야 사남매를 대학 졸업시키고, 마나님과
임대 아파트에서 산다던 어느 고참 택시 운전사의 너털웃음은 겸허하고 당당하다.
나는 이러한 직업의식과 더불어 ‘글 쓰기’가 사람의 삶과 관계되어 있음을 뼈저리게
생각하고 있다. 이건 일종의 직업 윤리 같은 것이다. 사람의 삶에 깊숙이 관계된 일
을 하는 비슷한 처지의 의사라든가 교사라든가 종교인이라든가 더욱 넓게는 남보다
더 많이 배운 지식인이라든가 하는 부류들에게 그러한 직업 윤리는 각자의 선택이
지만 원칙적인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 이러한 최소한의 원칙을 지
키려고 할뿐이다. 나는 잃어버린 것도 많지만 마음을 비우고 놓아버린 탓에 얻은 것
들도 많았다.
나는 원래가 왼손잡이였다. 교육열이 대단한 모친에게서 왼손의 사용은 잘못이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왼손을 사용할 때마다 호되게 얻어 맞았다. 그래서 오늘날 글씨 쓰
는 것과 밥 먹는 것만은 오른손으로 익숙하게 해낸다. 하지만 공 던지기며 싸울 때
주먹이 나가는 것이며 뜀박질을 하려면 왼쪽이 본능적으로 익숙하다. 교육은 받았
으나 그것은 일종의 억압이었다. 나는 천성적으로 억압과 제한에는 저항한다. 그리
고 그것을 뛰어 넘어가 버린다. 그리고 나의 이런 행위가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져서
모두 자유로워지기를 기대한다.
글쎄, 나는 왜 문학을 할까?
세상을 돌아보면 지금 나를 둘러싼 온 세상의 사람들은 아마도 틀림없이 백 년 뒤
에는 지상에 한 사람도 살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저들은 모두 사라지고 후세의
전혀 모르는 새로운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겠지. 세상은 좀 더 나아져 있을까. 그들
은 나를 조금은 기억이나 할까. 우리가 꿈꾸었던 가치들은 여전히 귀한 것으로 남
아 있을까. 어디선가 보았던 모자이크 벽화처럼 사람마다 자신의 사금파리 파편들
을 붙여 나가면서 형상은 차츰 구체화할 것이리라. 우리가 기획했던 그림은 어느만
큼 완성에 가까워질 것인가. 그 벽의 한 모퉁이에 나의 손짓이 또한 자취를 남겼으
면 한다.
세계는 지금 지난 세기에서 넘어온 미완의 숙제들이 고통이 되어 우리를 옥죄고
있다. 우리는 아마도 문명의 변화하는 이행기에서 살다가 죽게 될 것이다. 길고
고통스런 이행기를 말하는 이들이 많다. 나는 내 독자들이 있어 운이 좋은 축에
든다고 생각한다. 나는 강력하게 그들의 편을 들게 될 것이다. 나는 편들기가 글
쟁이의 업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는 사람들의 삶이 보다 넉넉하고 자유로워지기
를 바라고 서로를 존중하며 사랑이 마르지 않기를 바란다.
뒤늦게도 나는 오늘 문학청년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나를 새삼스럽게 가슴이
뛰게 만든다. 글 쓰는 일은 아직도 나에게는 사랑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사랑은
나를 죽을 때까지 지치지 않게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나의 실천이 미치지 못
하는 곳에 언제나 앞서가고 있잖은가. - 한국일보/2002/05/23
▷ 장길산의 배경 운주사
전남 화순군 도암면(道岩面) 대초리(大草里) 천불산(千佛山) 기슭에 있는 운주사는
천불천탑이 있었다고 한다. 칠성바위와 와불 등 미륵사상과 관련이 있는 유적들이
있다. 소설 장길산의 배경 무대이기도 하다.
<운주사와 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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