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에 한정판으로 발매된 아카데미 과학의 "프라하 1945" 헷저 키트)
본격적으로 겨울이 오기 전에 벌지 전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에 앞서서 아주 이상한 나치 독일의 헷저 탱크 키트 한정품을 보고 연상된 이야기를 한토막 해보려고 합니다.
금년 5월 MMZ 사이트에서 우연히 보왔던 낮익은 하지만 아주 이상한 도색의 탱크 키트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탱크 차체는 38(t) 탱크를 사용하여 개발된 나치 독일의 탱크 중에 하나인 "헷저"였습니다. 그런데 이 탱크는 우리가 기존에 봐온 나치 독일의 익숙한 도색(아래 참조)이 아니라 위에 아카데미 키트의 박스 아트처럼 븕은 색의 도장이 특이한 모습이었습니다. 도대체 아카데미 과학의 어느 누가 이런 독특한 키트를 개발하여 발매하자고 제안했는지 몰라도 참 기발한 아이디어의 키트였습니다.
(흔한 타미야 1/35 헷저 키트)
자! 그럼 위에 아카데미 키트 헷저의 실제 모습을 보시면,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레자니 군사 박물관에 전시, 1945년 5월 5일 체코 스코다 탱크 공장에서 나치에 저항했던
시민군에 의해서 탈취되어 실제 전투에 사용된 3대의 헷저 중에 한대입니다. 재도장하면서 아카데미 키트에 도장
예와 조금 다른 부분이 있지만 어쨌든 놀라울 정도로 멀쩡하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위에 전차를 보면서 문득 2차대전 중에 독일 나치 침략군에게 굴복하여 점령되었던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 패망이 임박했던 1944년과 1945년에 발생했던 봉기 사건들에 대해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 당시에 일본에 의해서 식민지가 되어 끔찍한 고난을 36년간이나 겪어야 했던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교했을 때 연합군과 주축군들의 틈바구니에서 자주 독립을 외쳤던 약소국들의 몸부림도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할 사건들이라 생각합니다.
1.1943년 바르샤바 유태인 게토 봉기
(유태인 학살의 대표적인 사진 - 바로 이 사진의 배경이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입니다.)
4월 19일이라는 날짜는 우리에게는 민주 학생 운동으로 기억되는 날짜지만 유태인들에게는 끔찍한 학살의 날로 기억됩니다. 때는 1943년, 나치 독일에게 이미 점령된 폴란드에 "게토"라는 유태인 거주지역이 만들어졌습니다. 목적은 나치 독일의 유태인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곳곳에 설치된 강제수용소에서 유태인들을 대량 학살하기 앞서서 임시로 폴란드와 인접 국가에 살던 유태인들을 모아놓은 지역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가시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거주 지역에 유태인들을 몰아넣었는데 나중에는 높이 3m, 길이 18km가 되는 벽돌담으로 둘러싸게 됩니다.
(바르샤바 게토에 굶주린 유태인 아이들)
1942년 여름에는 약 50만 명의 유태인들이 3,399㎡의 지역 안에서 살았는데 대부분은 주택이 전혀 없었고, 있다고 해도 한 방에 평균 13명이 빽빽이 채워져 살게 됩니다. 기아와 질병(특히 장티푸스)이 매월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1942년 7월 22일을 시작으로 하루 평균 5,000구의 시체가 트레블링카의 사망자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1943년 1월 나치는 평온한 시골에 있는 '노동수용소'로 옮긴다고 유대인을 속여 대부분의 게토를 비웠습니다. 그러나 소수 유대인은 트레블링카를 탈출했으며 유태인 수송은 사실살 가스실로의 일방통행적인 이동이었다는 말이 바르샤바 게토 지하조직에 전달되었습니다.1월 18일 독일군은 유태인을 수송하기 위해 게토에 들어갔으나 지하조직인 유대인 전투조직(Zydowska Organizacja Bojowa/ZOB)의 무장 기습공격을 받고 타격을 입게 됩니다.
(게토 봉기 기간 중에 나치 독일군은 건물들을 화염 방사기를 동원하여 불태워버리면서 유태인 저항군들을 소탕하고 있습니다.)
시가전이 4일 동안 계속되면서 약 50명의 독일군과 이보다 더 많은 유대인이 죽었으나 이 사건으로 ZOB는 독일군의 무기를 포획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철수하고 수송작전은 같은 해 4월 19일까지 일시 중단되었으나 나치 친위대(SS) 대장 하인리히 히믈러는 히틀러 생일인 4월 20일을 기념해 무력으로 게토를 소탕하는 특별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독일군에게 항복한 유태인 저항군, 그들의 거의 대부분은 처형되거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또한 4월 19일은 유태인들이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의 첫날이었는데 먼동이 트기 전 2,000명의 SS대원과 무장군대가 탱크, 속사포, 탄약 트레일러 등을 앞세우고 게토에 진입하게 됩니다. 게토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유태인은 미리 만들어놓은 벙커 속에 숨어 있는 동안 ZOB와 일부 유태인 게릴라 독립부대 약 1,500명은 권총, 소총 몇 개, 기관총 1정, 손으로 만든 폭탄 등으로 사격을 가하면서 많은 탱크를 파괴하고 독일군을 죽이면서 게토로 침입하려는 증강군을 물리쳤습니다.
독일군은 저녁에 철수했으나 다음날 전투는 재개되었고 사상자 수도 늘어나게 됩니다. 독일군들이 유태인을 벙커에서 쫓아내기 위해 독가스,경찰견, 화염방사기 등을 사용했고 도시 전체는 며칠 동안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같은 해 5월 8일이 지나서야 비로서나치는 ZOB 본부 벙커를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 숨어 있던 민간인은 모두 항복했지만 카리스마적인 젊은 지휘관 모르데차이 아비엘레비치를 비롯해 살아 남은 ZOB 전사 대부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게토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SS 사령관 히믈러는 위르겐스트로프 소장(가운데 야전모)을 보냈습니다. 그는 잔인한 소탕
작전으로 무수한 유태인들을 학살하게 됩니다. 전후에 그는 폴란드에서 체포되어 총살되었습니다.)
5월 16일까지 일방적인 전투가 계속되다가 유태인의 탄약이 떨어지면서 전투는 점차 산발적으로 되었습니다. 봉기의 전체 희생자수는 확실하지 않으나 28일 동안의 전투에서 수백 명의 독일군이 죽었고 5만 6,000명이 넘는 유대인이 살해되거나 압송되었다고 합니다. SS의 위르겐 스트로프 소장은 바르샤바의 대회당을 폭파해 최후의 일격을 가했으며 뒤에 "바르샤바 게토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했습니다.
다음에는 1944년 바르샤바 시민군 봉기 사건으로 이어지겠습니다.
첫댓글 진짜 이 게시판 글 다모이면 어지간한 이차대전 기록사보다 더 나은 자료가 되지 않을까요? 기가 막힙니다.
끝없이 연재되는 형님의 열정도 대단 대단!!!!
과찬의 말씀! 끝없이 연재해 볼 생각입니다만.....여러분들께서 관심만 가져주신다면 말이죠.....
가끔 2차 대전 이야기를 검색해서 궁금 한 이야기들을 찾아 읽곤하는데, 준만형님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고 이야기 거리가 풍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o^
무엇보다 킷트와 그킷트의 배경을 설명해 주셔서 좋습니다.
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니다~!^^
키트와 연결된 설명이 뜻밖에 약소국의 비극적인 역사일 때 더 가슴 아프게 될 수 있지요. 예전에 디트로이트 출장 중에 호텔방에서 무심코 TV를 틀었는데 유태인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에 대한 적나라한 영상들을 보여주는 기록 영화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끔찍한 만행은 현대에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거기에 쓰여진 탱크나 전투기들을 아무런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만들고 있다면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입니다. 저의 글들이 이런 끔찍한 역사들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모델을 만들면서도 역사적 사실을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이번에도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다음편도 엄청 기대됩니다.
아 참 부담되네요....ㅡ허접한 글을......최선을 다 하겠습니다!